메일로 도착하는 사연들을 읽으며 놀라는 것중 하나는, 대부분의 여성대원들이 존 그레이의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를 '진리'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더 놀라운 것은 그 책이 SF소설인 줄 알고 있는 분도 계시다는 거지만) 그리고 그 책에서 말한 "남자는 갈등이 생기거나 고민거리가 있으면 자신만의 동굴에 들어가 생각한다."라는 얘길 암기위주의 학습법으로 외우며 방바닥에 동그라미를 그린다.
연애와는 별 관련 없지만 신채호 선생의 말이라며 웹에 떠도는 글이 생각난다.
한국의 부처가 되지 못하고 부처의 한국이 된다.
우리나라에 공자가 들어오면
한국을 위한 공자가 되지 못하고 공자를 위한 한국이 된다.
우리나라에 기독교가 들어오면
한국을 위한 예수가 아니고 예수를 위한 한국이 되니
이것이 어쩐일이냐.
이것도 정신이라면 정신인데
이것은 노예정신이다.
......
-단재 신채호
종교 얘기를 하고 싶은 게 아니니 "무한님, 하지만 이 세계를 창조하신분은.... 블라블라.." 이런 얘기는 [스팸]이라는 말머리를 달아 메일로 보내주시길 바란다.
물론, 나도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를 읽으며 꼭 읽어 볼 필요가 있는 책이라고 생각했다. 그래 잘 쓴 책이다. 그리고 뭐? 그게 다다. 세상에 잘 쓴 책은 많다. 잘 쓴 글과는 거리가 먼, 노멀로그의 글도 마찬가지다. 공감이 가는 내용이 있으면 공감하면 되는 거고 공감이 안 가면 공감 안하면 되는 거다. 음악가 신모씨가 한 말처럼 '세트메뉴'로 무작정 나와 같을 거라고 생각하거나 '팬 이에요.' 같은 말을 할 필요도 없다.
매뉴얼을 작성하며 '스스로 서는 법'에 대해 여러 번 이야기 했는데, 그건 연애 뿐만이 아니라 생활에도 적용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디가서 주눅 들거나, 유명인의 의견에 동조하며 '우리편'이라고 생각할 필요도 없다. 당신은 당신 자체로 존재하는 인격체다. '더럽게 재미없는 얘기는 그만 하고, 기다려야 할 지 말 지 얘기나 해달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말이다.
사랑은 결국 뇌에서 도파민이 분비되는 것에 달려있다는 얘기나, 허리와 엉덩이의 비율이 7:10인 여자가 '번식과 진화'에 유리하기 때문에 남자가 본능적으로 끌린다는 생물학적인 얘기엔 내가 문과라(응?) 뭐라 할 말이 없지만, '동굴이론'에 대한 부분은 '솔로부대탈출매뉴얼식'의 정리가 가능할 것 같다. 일단, 달려보자.
별 관심 없겠지만, 이번 이상문학상 대상수상자인 박민규 작가의 '문학적 자서전' 제목을 좀 따왔다. (제목이 '자서전은 얼어 죽을'이다.) 아무튼, 남자가 동굴로 들어가는 것에 대해 지극히 자연스러운 증상이며, 그것을 이해해야 한다고 널리 알려져 있지만, 노력해도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있을 것이다. 도착한 사연들을 읽으며 남자인 나도 이해하기 힘들었던 이야기들을 옮겨본다.
B. 언제라고 말할 순 없지만 해결되면 돌아오겠다고 말하는 남친
C. 서로 사랑하는 마음이 있으니 연락은 안해도 된다는 남친
체호프의 <베짱이>라는 단편이 있다. '동굴에 들어가는 남자'가 주제는 아니지만, 이야기 중 여자에게 영감을 얻은 미술가가 그녀와 연인으로 지내다가 더이상 그림이 그려지지 않자 그 탓을 여인으로 돌리는 부분이 나온다. (이 이야기는 '여자친구가 있으면서 사랑한다고 말하는 남자'라는 매뉴얼에 더 어울리지만) 사귀다 보면 연애가 매달 갚아 나가는 할부금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는 거다.
'할부금만 갚아나가지 않으면, 내가 돈을 모을 수 있을텐데'
이런 생각에서 출발한 동굴행이라고 해도, 한 달은 사람을 피폐하게 만들 수 있는 기간이라 생각한다. 군대같은 제한사항이 있는 것도 아니고 눈 앞에 핸드폰과 컴퓨터가 있는데 철조망을 쳐야 한다는 사실은 '고문'에 가깝다. 벅의 노래처럼 "니가 없는 자유로움에 지금 나는 너무나 행복해."라는 상태가 아니라면 말이다.
해결이 되면 돌아오겠다, 라는 것도 사실 막막하다. 신조협려에서 양과를 보내고 진짜 동굴로 들어간 소용녀도 16년 이라는 기한을 정해줬다. 입장을 바꿔서 여자친구가 "언제라도 말할 순 없지만 해결되면 돌아올게." 라고 한다면 어떨까?
서로 사랑하는 마음이 있으니 연락은 안해도 된다는 남친, 이거 전에 한 번 매뉴얼에서 이야기 한 적 있었다. 기다리던 중 남자분이 아프다는 소식을 듣고 집에 찾아갔더니 왜 왔냐고, 나는 아플 때 혼자 있어야 낫는 스타일이라고, 했다는 사연. 그래도 그러는 거 아니다. 이 사연에 남자를 이해할 수 있다며, 자신도 엄마에게 비슷한 이유로 짜증낸다고 적어주신 분이 있는데, 엄마도 상처 받는다. 말을 안하셔서 그렇지. 엄마한테 짜증내는 게 자랑이 아니란 얘기다.
한 쪽이 의존적인 모습으로 변해있다면 상대방은 동굴로 들어가고 싶을 것이다. 오늘 매뉴얼의 제목에 '동굴로 들어가는 남자'라고 썼으니, 남자입장에서, 동굴로 들어가고 싶어지는 상황 하나를 옮겨 보겠다. 잘잘못을 따지자는 게 아니라 엉켜버린 상황에 마주했다는 거니 판사의 입장에서 읽을 필요는 없다.
남자 - 미안해. 사장실 들어갔다 나왔어. 토요일 출근 때문에.
여자 - 토요일? 토요일 날 우리 남이섬 가기로 했잖아.
남자 - 아 나도 지금 짜증나. 토욜날 출근해서 분당이랑 수원 거래처 다녀오라는 거야.
여자 - 그래서? 못 간다고 말했어?
남자 - 약속 있다고 얘긴 했는데, 이거 정말 중요한 거라고 해서...
여자 - 그럼? 우리 남이섬 못 가는 거야?
남자 - 대신 다음 주 평일에 하루 쉬게 해 준데.
여자 - 평일에 쉬면 뭐해! 나 출근 하는데!
남자 - 아휴. 나도 짜증나.
여자 - 그럼 미리 말해주지 왜 이제 말해? 한 시간이나 얘기한 건 아니잖아.
남자 - 바로 전화 하려다가 혹시 근무 바꿀 수 있나 해서 물어 보느라고.
여자 - 됐어. 매번 그러잖아. 왜 나랑은 상의 안하고 혼자만 결정해?
남자 - 그게 아니라... 암튼 미안해. 저녁에 내가 코끼리 코 하고 사과 할게.
여자 - 지금 장난이 치고 싶어? 그게 더 화나는 거 몰라?
남자 - 난 화 풀어주려고 그런 거잖아.
여자 - 장난쳐서 화가 풀리냐고. 난 더 화나. 왜 말 돌려?
남자 - 그래 다 내 잘못이다. 다 내가 잘못했고. 미안하다.
여자 - 또 그러지?
어휴, 그냥 쓰고 있는 내가 다 동굴로 들어가 버리고 싶은 생각이 드는 지문이다. 아주 그냥. 둘 다 동굴에 넣어버리고 싶다. (아, 이러면 안 되는데.) 어쨌거나 대략 이런 상황이 왔을 때 성별을 불문하고 동굴로 들어가고 싶은 생각이 들 것이다. 이럴 때는 집요하게 파고 드는 것 보다 쉼표하나 찍은 뒤, 진심을 담아 메일이나 문자를 보내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단, 절대 추궁하지는 말아야 한다.
추궁하는게 뭐냐고 묻는다면 또 친절하게 예를 하나 들어 드리겠다.
그 부분은 나도 미안하게 생각해. 근데 정말 일찍 말해주었다면
나도 자기가 바쁜 거 아니까 이해하고 넘어갔을 거야. 내가 화 났던 이유는,
자기 혼자 그 상황을 해결하곤 나에게 통보하려고 했다는 거였어. 대체 왜 그래?
놀러갈 때도 내 시간은 묻지도 않고 자기가 혼자 계획을 짜잖아.
그런 건 물어보고 함께 할 수 있는 일인데도 말이야.
또, 자기가 나 화 풀어주려고 장난친 것도 이해해. 그런데
심각한 순간에 정말 그렇게 하면 화가 풀어질 거라 생각해? 그리고
......
이 메일을 읽고 "저건 차분히 설명하는 거잖아요. 뭐가 문제죠?" 라고 하시는 분도 있겠지만, 얼핏 읽고도 숨막혀 하는 분들이, 분명, 있다.
분명 이건 '대화'아니면 '기다림'이라는 것 밖에는 방법이 없다. 여러 사람들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며 입을 모은 건, 둘 중 누군가 동굴로 들어가면, 밖에 남은 사람은 기다리는 동안 단 한 번도 연락을 취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럼 곁에 있어 소중함을 몰랐던 동굴 속 사람은 스스로 불을 피우고 연기에 질식하지 않으려 밖으로 나온다는 거다. 물론, '가장 좋은 방법' 이라고 말하는 만큼 가장 어렵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인데 철조망을 쳐야 하니 말이다.
뿐만 아니라 연애를 목적으로 들이대는 사람들 중에는 바람둥이가 포함되어 있고, 관심을 키워가는 중에 어장관리 당하는 사람도 있듯, 동굴로 들어가는 사람 중엔 다른 출구로 나가 버리는 사람이 있다. 밖에서 기다리는 사람이 지치거나 단념해 이별하지 않아도 뒤통수를 맞을 때가 있단 얘기다.
이 시기를 지나 결혼 10년차에 접어든 부부들은 '믿음'을 가장 큰 해결책이라고 말한다. 단순히 '믿음'이라고 써 놓으면 '믿고 기다린다'라고 오해할 지 모르지만, '믿는 다는 걸 상대에게 얘기해 주는 것'이 모범해답이었다. 동굴에서 나오길 믿는 다는 게 아니라, 그 고민이나 갈등을 당신이 충분히 해결할 수 있다는 걸 믿는다고 말하는 거다. 부부가 되어서 '동굴'에 들어가는 가장 큰 이유는, '회사문제'였는데, 현명한 대원들은 자신이 잘 모르는 회사 얘기라도 듣고 싶다고 말해 상대를 수다쟁이로 만들었다고 한다. 매일 있었던 일을 서로 묻고 답하며 사는 행복한 생활도 얘기해 줬다.
여기에 하나 추가하자면, 그런 이야기를 할 땐 손이라도 잡고 이야기 하는 것이 효과적이란 얘기다. 길 걸을 때만 손 잡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를 나눌 때에는 벽을 세우지 않도록 손을 잡길 권한다. 고민에 시달리고 있을 때 상대방이 괜찮다며 꼭 안고 등을 두드려주기만 해도 마음이 사르르 녹는, 비슷한 기분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동굴얘기는 여기까지고, 단 한 사람이라도 울다 지쳐 잠이 들지 않으면 그것으로 좋겠다.
사실, 노멀로그에 글을 쓰며 누가 뭐라고 하든 '너나 잘하세요'라는 마인드로 운영중이다. 조언이나 충고는 나보다 행복하게 살고 계시는 분들께 알아서 구하고 있다고 적어놔도 지적하고 싶어 안달이 난 사람도 있고, 꾸준히 닉네임을 바꿔가며 계속 비아냥을 거듭하는 사람도 있다. 이렇게까지 적극적으로는 아니어도 나 역시 악플을 달아본 적이 있기에 (고백하자면, 난 디씨인사이드에서 잔뼈가 굵었다.) 그런 행위를 할 때에는 마음의 기쁨도 없고 생활이 피폐해져 있었다는 걸 알 것 같다. 오로지 순간의 쾌락이나 상대의 심장까지 푹, 찔렀다는 착각 그 뿐이다.
솔직히 무섭다. 글이 무서운 게 아니라 사람이 무섭다. 닉과 문체까지 바꿔 비아냥 거리며 어제 발행글에만 4개의 댓글을 단 사람이 무섭다. 그 분이 몇 주 전에 노멀로그에 처음 댓글을 달기 시작했고, 그 첫 댓글의 시작이 "왜 꽃다운 나이엔 이걸 진작 몰랐을까요." 였다는 것이 더 무섭다.
책을 낸 것은 아무 것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견공도 우공도 책을 내는 시대에 나무늘보 한 마리가 나무에서 내려온 것 뿐, 다시 올라가서 나뭇잎을 뜯고 있다. 매뉴얼의 서두에서 말했지만, 팬이라는 것도 순간의 감정이라고 생각한다.(그냥 한 여름 밤이다.) 글을 읽어주는 사람이라면 고마운 것이고, 마음만 먹으면 이런 블로그 하나쯤은 누구나 운영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건 진짜 아무 것도 아니다. 무슨무슨 상을 받은 것도 다른 분들이 다른 일을 하시느라 정신없는 사이 얼치기 하나가 운이 좋았을 뿐.(책 내고 상 받은 걸로 뭐라고 하시는 분들께 드리는 얘기다.) 생활을 위해 찌라시 같은 제목으로 덧칠하여 기반 없이 명예를 추구할 것이 아니라, 집이 되고 싶다. 모델하우스는 지겹다.
닥치고, 써야겠지만. 총총.
▲ 토요일 일요일은 쉽니다. 나름, 주 5일제 거든요. 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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