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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혈 구직 할머니와 귀농 할머니 이야기.

by 무한 2012. 6. 21.
열혈 구직 할머니와 귀농 할머니에 대한 이야기.
전에 한 독자 분께서 이런 댓글을 남겨주신 적이 있다.

"전 병원에서 간호사로 일하고 있는데요,
서른이 넘어서도 엄마랑 같이 병원에 오는 남자들 정말 어이없더군요.
멀뚱멀뚱 따라와서 대기 의자에 앉아 있다가,
이름을 부르면 대답도 안 해요. 옆에 있는 엄마가 대신 대답하고,
진료실에 같이 들어가고, 처방전 타고 계산 하는 것도 다 엄마가 하더군요.
소개팅에 이런 남자가 나올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끔찍하네요.
이 부분에 대해 따끔하게 지적하는 글도 한 번 써 주세요."



미안하지만 그럴 수 없다. 고백하자면 사실, 나도 그런 남자 중 하나다. 엄마나 공쥬님(여자친구)과 함께 병원에 갔을 때 느껴지는 그 안정감. 나 혼자 갔더라면 의사와 서먹서먹하고, 낯설고, 불편한 시간만 갖다가 돌아올 가능성이 높지만, 엄마나 공쥬님(여자친구)과 함께 병원에 가면 그렇지 않다. 

엄마의 경우 가족력을 모두 소개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해, TV나 잡지, 각종 입소문을 통해 알게 된 병명들을 나열하며 나에 대한 '엄마 소견서'를 제출한다. 공쥬님의 경우 내 아픔을 증폭시켜 의사에게 전달해 준다. 훗날 아이를 낳으면 '엄마 소견서'를 써야 할 입장이어서 그런지, 내 아픔과 관련해 의심되는 다양한 질병들에 대해 의사에게 자문을 구하며 의학적 지식을 축적하기도 한다. 

이렇게 써 놓으니까 내가 무슨 기생충이 된 듯 보이는데, '기생'은 아니고 '공생'이다. 엄마나 공쥬님이 아플 경우엔 내가 보호자가 된다. "아프면 병원 가 봐."라는 딱딱한 말만 오가지 않는다는 게, 때로는 참 감사한 일이다.(물론 매번 빠짐없이 병원에 함께 가는 건 아니다. 서로 시간이 맞지 않거나, 증세가 가벼운 질환일 경우엔 각자 병원을 찾는다.)
 
며칠 전부터 손에 좁쌀만 한 붉은 뾰루지들이 보이더니, 시간이 지나며 녀석들이 옆으로 점점 옮기는 것 같아 병원을 찾았다. 의사에게 손을 보여주며 옆으로 옮기는 것 같다고 했더니, 잠깐 보기만 해도 알 정도로 흔한 증상인지, 별 설명 없이 연고를 처방해 준다고 했다. 48초 정도 대화를 나눈 것 같다. 

병원에서 처방전을 받아 약국을 향해 걸어가며 생각했다. 엄마나 공쥬님과 함께 왔으면 적어도 4분은 대화했을 거라고. 왜 이런 증상이 나타나는지, 이 증상의 이름은 무엇인지, 혹시 다른 사람에게 옮기는 건 아닌지, 수건을 같이 써도 되는지, 일반적으로 며칠 정도 연고를 바르면 증상이 사라지는지 등을 빠짐없이 물었을 것이다. 


1. 열혈 구직 할머니


약국엔 약을 지으러 오신 할머니들이 많이 계셨다. 난 처방전을 내곤 순서를 기다리기 위해 의자에 앉았다. 내 옆의 할머니께서 신문을 열심히 읽고 계시길래, 무슨 신문인가 보려고 고개를 돌렸다. 구인구직과 생활용품 매매 정보 등이 있는 생활정보지였다. 70이 훌쩍 넘으신 듯한 할머니께서 생활정보지를 보고 계신 게 좀 의외였다. 그것도 굉장히 몰입해서 읽고 계셨다. 난 할머니의 심각한 표정을 곁눈질로 힐끔 쳐다봤는데, 그러다가 할머니와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할머니 - 왜?
나 - 아, 아뇨.

 

몰래 쳐다보려던 것이 민망해 난 폰을 꺼내 뭔갈 하는 척 했다. 할머니가 다시 말을 걸어왔다. 

할머니 - 나 취직할라고. 
나 - 예? 아, 네. 
할머니 - 왜? 난 취직하면 안 되나?
나 - 아뇨. 하셔도 되죠.
할머니 - 왜 이렇게 취직하기가 힘들어?
나 - ......



난 지금 할머니께서 보고 계신 면이, '중고 자동차' 면이라는 걸 알려드릴까 하다가 그냥 가만히 있었다. 할머니 친구이신 듯한 다른 할머니께서 약을 타 오시며,  앉아 계신 할머니께 가자고 말했다. 

약탄 할머니 - 얼른 가. 갔다가 우리 수요일 날 또 와야 돼.
취업 할머니 - 수요일? 수요일 날 왜?
약탄 할머니 - 그때 피 조사 한 거 나온다잖어. 
취업 할머니 - 조사가 한참 걸리네.

 

'조사'가 아니라 '검사'라고 말씀드릴까 하다가, 그냥 또 가만히 있었다. 사실 난 당시 할머니께서 "왜 이렇게 취직하기가 힘들어?"라고 하실 때부터 웃음을 참고 있었는데, '피 조사'에서 빵 터지고 말았다. 실례가 될까봐 기침하는 척 하며 웃음을 참느라 얼마나 힘들었는지 모른다. 그런데 나만 웃음을 참고 있던 건 아니었는지, 할머니 두 분이 약국을 나가자, 내 옆에서 우리 대화를 듣고 있던 약사 아주머니도 눈물을 흘리며 웃었다. 내가 약국에 오기 전 할머니 두 분께서 아이폰 얘기를 했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주셨다. 열혈 취업 할머니께서 조만간 좋은 회사에 취직하시길 바라본다. 


2. 귀농 할머니
 

올 3월, 이사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의 일이다. 난 거실 쪽 발코니에 나가 카메라를 들고 ts렌즈 효과를 내기 위한 사진을 찍고 있었다. 그러다가 아파트 단지 울타리 부근에서 열심히 땅을 일구고 계신 할머니를 보게 되었다. 할머니는 호미질을 하고 계셨는데, 큰 돌을 골라내 (울타리 내)배수로 바깥으로 던지셨다. 그러니까 배수로와 울타리 사이에 있는 일 미터 남짓한 땅을 길게 일구고 계셨던 것이다. 

난 흥미를 느껴 매일 그 시간에 그곳을 내다 봤다. 며칠 후엔 거실 쪽 발코니에서는 더 이상 보이지 않고, 내 방 쪽 발코니에 나가 고개를 내밀어야 보일 정도까지 할머니가 땅을 일구셨다. 며칠이 더 지났을 땐 할머니를 볼 수 없었다. 할머니가 일구신 그 땅 앞쪽에는 빨간색 글씨로 쓴 '농작물 경작금지'라는 현수막만 걸려 있었다. 

훗날 농작물로 인해 생길 수 있는 갈등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한 당연한 조치지만, 할머니께서 열심히 땅을 일구신 노력이 좀 안타깝긴 했다. 여하튼 할머니에 대해선 잊어가고 있던 어느 날, 새벽 두 시쯤 '서걱서걱'하는 소리가 들렸다. 밖을 내다 봤더니 그 할머니가 계셨다. 할머니는 주위를 살피며 화단과 계단 사이에 뭔가를 심고 계셨다. 서둘러 일을 마치신 할머니는 금방 자리를 뜨셨다. 난 눈으로 할머니를 쫓았다. 할머니께선 다른 동 부근으로 가 또 서걱서걱, 뭔가를 하나 심으시더니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기셨다. 

'저, 저건, 경비아저씨들이 모두 퇴근한 시간을 노린 거야...'


할머니는 며칠간 경비아저씨들의 동선을 파악하셨을 것이다. 발코니에서 내다보거나, 혹은 어딘가에 숨어 '마지막 순찰은 이 시간이군.', '다시 출근할 때 까진 4시간이 비어.', '카메라는 놀이터에 하나, 단지 입구에 하나닷!', '최대한 티가 나지 않도록, 우연히 자라난 것처럼 보이게 심는 거야.' 등의 생각을 하신 뒤, 행동에 옮기신 것이다. 그 즈음 나도 '아파트 화단 부근에 몰래 허브씨를 뿌리면 어떨까. 그럼 알아서 자랄 거고, 다 자라면 나는 잎만 좀 따면 되는데.'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기에 동지를 만난 듯 반가웠다. 

그 이후 아직까지는 별다른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이제 막 키를 키우고 있는 작물들이기에, 화단의 다른 식물들과 어울려 눈에 띄지 않게 자라고 있다. 할머니의 '뻐꾸기 작전'은 성공했다.(뻐꾸기는 지빠귀나 때까치의 둥지에 알을 낳는데, 지빠귀나 때까치는 그 알이 자기 알인 줄 알고 키운다.) 오늘 보니, 날이 가문 까닭에 조경업체에서 나와 화단에 물을 주고 있던데 인부 아저씨들도 눈치를 못 챘는지 차별 없이 할머니의 작물에도 물을 주고 있다. 

고비는 다음 달쯤 찾아올 것 같다. 고만고만한 화단의 식물들과 달리 할머니의 작물은 시간이 지나며 눈에 띄게 된다. 울타리에 호박이 매달려 있다거나, 조팝나무 군락 옆에 고구마 줄기가 보인다거나 하는 식으로 말이다. 가끔 찾아오는 '잡초제거반'도 문제다. 한 무리의 아주머니와 아저씨들이 화단에 들어가, 본래 있어야 할 식물들을 제외하곤 모조리 뽑아 버리니 말이다. 할머니께서 무사히 작물을 수확하시길 바라본다. 


이대로 이야기를 마무리 하면 뭔가 정이 없는 느낌이니, 보너스로 요즘 키우고 있는 허브와 미나리를 소개하는 것으로 이야기를 마칠까 한다. 




▲ 요즘 키우고 있는 허브와 미나리.


위로부터 세 번째까지는 '페퍼민트', 네 번째는 '카모마일', 다섯 번째는 '애플민트', 여섯 번째는 '레몬밤', 일곱 번째와 여덟 번째는 '돌미나리' 사진이다(돌미나리는 보름만에 저렇게 자랐다.). 각각의 용도는 아래와 같다.

페퍼민트 - 식용(차, 칵테일)
카모마일 - 꽃잎으로 베개 만들기. 실패하면 식용(차) 
애플민트 - 식용(차, 칵테일)
레몬밤 - 식용(차)
돌미나리 - 식용(녹즙)



지금 파종하면 가을 쯤 맛있게 먹을 수 있으니, 끌리시는 분은 허브 화분 하나 들여 놓으시길 권한다. 블링블링한 후라이데이가 하루 남은 오늘, 무사히 잘 버티시길 바라며. 



▲ 미나리는 보름간 저렇게나 자랐는데, 난 보름간 얼마나 자랐나. 나도 물 좀 주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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