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하의 <포스트 잇>이라는 산문집에 '자전거'를 주제로 한 글이 있다.
그러니까, 자전거를 열심히 탄 다음 날 '흐어어헝' 거리며 계단을 잘 못 내려가거나 변기에 앉기 힘들어 하는 근육통을 마지막 문장으로 표현한 것이 참 좋다.
낭만적으로 보자면 한 없이 낭만적일 수 있는 것이 '자전거'지만, 자전거를 타다 쇄골이 부러져 벌써 4주째 집에서 요양생활을 하고 있는 J군을 보면, 역시 개천이 어디로 뻗어 있는가를 살피기 전에 먼저 차가 오나 안 오나, 앞에 턱이 있나 없나를 먼저 살펴야 할 것 같다.
사람이라는 게 참 간사하다. 작년 까지만 해도 차를 몰고 다니며 도로로 불쑥 튀어나오는 자전거를 보며 "자전거, 저거 진짜 위험하다니까."라는 이야기를 하고, 자전거를 탄 쫄바지의 라이더들을 보며 "어휴, 저 바지는 보기만 해도 부담스럽네."라는 이야기를 했는데, 요즘은 내가 "자전거도 차야."라며 도로로 달리고, '입으면 민망할까?'라는 고민을 하며 자전거 바지를 검색하고 있다.
자전거 동호회 사람들이 이야기 하는 '자전거 뽕'을 맞은 모양이다. 어제는 비가 쏟아지는데도 혼자 실실 웃으며 일산 한 바퀴를 돌고 들어왔다.
'이게 자유야.'
라며 헬멧을 때리는 빗소리를 음미하다, 이 빠진 보도블럭에 걸려 자빠질 뻔 했지만, 뭐, 그래도 좋다. 무언가에 대한 '관심'은 수감생활 중인 영혼을 잠시 꿈꿀 수 있게 해 주는 진통제 아닌가. 이게 다 부질없는 짓이라는 생각이 들게 되겠지만, 당장은 교체한 자전거 벨소리가 예쁘다며 좋아하고 있으니, 그걸로 만족한다.
그런 의미에서, 내 곁을 스쳐간 자전거들과 그 자전거들에 얽힌 이야기를 풀어 볼까 한다.
▲ 내 인생의 첫 자전거, 내리려는 걸로 오해할 수 있으나 드리프트 연습 중.
톨스토이는 엄마 뱃속에서 나올 당시 자신을 받은 산파의 얼굴이 기억난다는 이야기를 했는데, 난 아직 그만한 뻥을 칠 내공이 없으니 한 살 때의 사진이 있다는 것으로 만족한다. 독립문 바다약국 길 오르막을 올라가면 노란집이 있었는데, 그 집에 살 때 찍은 사진으로 보인다.
▲ 킨더가든 입학을 앞두고 벌인 우중(雨中)라이딩. 파란 타이어가 인상적.
다리만 보면 초등학생으로 오해할 수 있지만, 다섯 살 때의 모습이다. 벨을 제외하면 지금 출시되어도 뒤쳐지지 않을 정도의 자전거를 소유하고 있었다는 것이 인상깊다. 파란색 타이어라니! 곧 엄마의 하얀 옷걸이가 내 몸을 빨갛게 물들일 것을 예상하곤 겁을 잔뜩 먹은 얼굴부분은 삭제했다.
저 노란 장화 보니까 생각나는데, 난 저 노란 장화를 많이 아꼈다. 걸을 때 마다 붙어있는 눈이 흔들흔들 움직여 마치 두 마리의 애완동물과 함께 다니는 느낌이 들었다. 비가 온 다음 날에도 "진흙탕이라 신어야해."라는 핑계를 대며 신고 다녔는데,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나고 있는 잿더미를 발견하고 불을 끈다며 장화신은 발로 밟아 대다가 나무에 꽂혀있던 못에 찔려 장화는 운명을 달리했다. 그 때 처음 들은 '파상풍'이라는 말이 여전히 내게는 공포로 남아있다.
▲ 공릉의 잔디밭을 누비는 모습. 오프로드를 걸친 것 없이(응?) 누비고 있다.
왜 이렇게 발육이 빠른 건지 모르겠지만, 역시 초등학교 입학 전의 모습이다. 유치원 기념사진들을 찾아보면, 나 혼자 유치원복이 아닌 사복을 입고, 유치원 모자를 안 쓴 모습을 볼 수 있다. 여섯 살 때, 진달래반 선생님에게 "선생님, 우리 집 가서 커피 한 잔 하실래요?"라는 이야기를 했다.
▲ 뒷쪽의 구동계와 뒷바퀴 휠셋의 상태를 살펴보고 있다.
자꾸 팬티만 입은 사진이 올라와 '노출증'에 대한 오해를 할 수 있으나, 기획사의 강요로 인해 어쩔 수 없었다는 건 훼이크고, 당시 저 동네 대부분의 아이들이 마치 '아마존'에서 처럼 팬티만 입거나 아예 벗고 노는 원시적인 모습을 보였다. 저 정도면 그나마 많이 챙겨 입은 거다. 사진 좌측 상단에 살짝 나온 다른 꼬꼬마의 모습을 보자. 걘 다 벗고 있다.
안타깝게도 이 사진 이후 '자전거'와 함께 찍은 사진이 없다. 여기까지는 대부분의 꼬꼬마가 그러하듯 그냥 자전거 타며 놀았던 이야기지만, 이 이후는 '자전거 잔혹사'라고 할 수 있을만한 일들이 벌어지기 때문이다.
독일의 한 의학팀에서 자전거를 타는 '남자사람'을 대상으로 실험을 했는데, 남자의사가 지켜볼 때보다 여자의사가 지켜봤을 때 대상 라이더들은 12% 이상 힘의 증가를 보였으며, 고통을 호소하는 것도 덜하다는 결과가 있었다.
그래서 였을까, 별로 신기한 것도 아닌데 화단 경계석을 자전거로 떨어지지 않고 타는 것에 대해 동네 여자아이들이 호들갑을 떨며 지켜보던 때가 있었다. 난 열 살쯤이었는데, 초등학교 고학년 형들과 겨루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자전거를 잘 탈 때라,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화단 경계석을 마음껏 질주했다. 모두 그 연습만 하는 까닭에 별다르게 보여줄 것이 없어졌을 때, 나에겐
'그래! 경계석에서 손을 놓고 타는 걸 보여주는 거야!'
라는 기막힌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평지에서도 하기 힘든 고난이도의 기술을 화단 경계석에서 보여줬기에, 손을 놓자마자 여자아이들의 호들갑이 시작되었다.
'후후, 뭐 이런 걸 가지고.'
라며 허리를 펴 여유로움을 강조하려는 찰나, 쓰레기 분리수거가 시행되기 전이라 화단 옆으로 만들어 놓은 쓰레기장 앞에서 핸들이 90도로 돌아갔다. 나름 빠르게 대처한다며 손을 뻗어 봤지만, 옆 경계석을 들이받은 자전거는 어른 가슴 깊이의 쓰레기장으로 내 몸을 던져 버렸다. 넋이라도 있고 없는 상황도 잠시, 몰려오는 아이들의 소리가 들렸고, 난
'아무 일도 아닌 것 처럼 행동 하는 거야.'
라며 쿨하게 쓰레기장에서 걸어 올라왔다. 온갖 오물이 뭍은 옷을 툭툭 털며 자전거를 집어 들 때, "괜찮아? 괜찮아?"라며 물어오는 아이들의 질문에 "응, 괜찮아."라고 대답했지만, 코는 피를 흘리며 안 괜찮다는 대답을 대신 해주고 있었다. 집에 돌아와 현관문이 닫히는 순간부터 아파서 울었다.
경기도 파주의 '운정'이란 마을로 이사 왔을 때, 동네에 차 있는 집이 별로 없었다. 그런 까닭에 동네 공터와 도로에선 마음 놓고 자전거를 탈 수 있었다. 그러다 일산신도시를 건설하며 도로로 레미콘이 많이 다니게 되고, 하나 둘 집집마다 자가용을 구입하기 시작하자, 도로에 '과속방지턱'이 생기게 되었다.
그간 '과속방지턱'과 '자전거속도'에 대한 개념이 없던 동네 아이들은 늘 달리던 속도로 '과속방지턱'을 넘어 다녔는데, 내리막을 전속력으로 내려가다 과속방지턱에 걸려 몸에 스크레치가 난 녀석들이 한 둘이 아니었다. 특히 여름날엔 짧은 옷을 입고 바람을 가르다 대부분의 녀석들이 손바닥만한상처를 팔뚝이나 종아리 등에 새겼다.
난 미리 그 점을 간파해 과속방지턱의 제일 가장자리로 별 무리 없이 다녔으나, 괸돌(고인돌이 있는 옆 마을)을 다녀오다가 과속방지턱의 훼이크에 논으로 빠진 적이 있다. 갓 포장한 농로를 전속력으로 달리다 안전방지턱을 발견하고 옆쪽으로 지나치려는 찰나,
'여..옆길이 어..없어!'
그랬다. 그 방지턱을 누가 만들었는지 몰라도, 가장자리를 낮게 만든 다른 방지턱과 달리 같은 높이로 도로 끝까지 만들어 놓았던 것이다. 옆쪽의 논으로 날아가던 그 순간이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초록색 풀들이 '빨리 감기'를 한 것처럼 눈앞에서 사사삭, 지나가고 숨을 멈춘 채 부웅, 하는 느낌으로 날았다가 논에 철퍽, 꽂혔다. 다친 곳도 없고 아픈 곳도 없었지만, 집에 돌아가 혼날 생각에 기분은 말이 아니었다.
내 유년기에서 '자전거'를 금지 당하게 된 결정적인 사건이다. 동네 아이들이 대부분 고만고만한 자전거를 타고 다닐 때, '기어 자전거'라는 신제품이 등장했다. 손잡이에 붙어 있는 레버를 돌리면 '드르륵' 소리를 내며 체인이 '차자작' 움직이는 자전거였다. 이미 '기어 자전거'를 구입해 타고 다니는 동네 형들도 있었지만, 우리와는 놀지 않는 중학생, 고등학생 형들 이었다.
모두들 동경의 눈빛으로 '기어 자전거'를 바라보고 있을 때, 난 또래 중 가장 먼저 '기어 자전거'를 가질 수 있었다. 그 자전거를 가지게 된 첫 날, 애들이 몰려와 기어를 만지작거리고 서로 한 번 타보면 안 되냐고 난리를 치는 가운데, 난 경주를 해서 제일 빠른 사람에게 태워주겠노라고 약속하고 레이싱을 벌였다.
동네를 몇 바퀴 도는 경주였는데, 내가 제일 빠를 거란 예상과 달리 '기어 자전거'를 타보고자 하는 몇몇 녀석들이 초인적인 힘으로 침까지 흘려가며 내 앞쪽으로 달려 나왔다. 녀석들은 엉덩이를 안장에 붙이지도 않고 일어서서 페달질을 하고 있었다. 질 수 없다고 생각한 나도 일어서서 힘껏 페달을 밟아가며 좀 더 빨리 가고자 가랏, 하는 느낌으로 기어를 변속했다. 그 순간,
투두둑 타닥
눈을 떠 보니 집이었다. 왼쪽 엄지발가락에 엄청난 고통이 느껴졌고, 남의 머리를 대신 달고 있는 듯 머리가 무거웠다. 옆에서 부모님이 날 바라보고 있었고, 난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싶어 엄마에게 물었다.
"엄마, 여기 어디야?"
내 말을 들은 엄마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고, 이어 우리 집에 온 동네 아줌마가 우황청심환을 나에게 먹이며 내 손가락과 발가락을 바늘로 모두 찔렀다.
"머리에 피가 안 나서 손가락 발가락으로 피를 빼야해. 토할 것 같진 않아?"
머리를 만져보니 왼쪽에 주먹 만한 혹이 나 있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론, 자전거의 기어를 바꾸다 체인이 빠졌고, 그 결과 엄청난 힘을 주며 페달을 돌리던 발은 헛발질을 하며 땅으로 곤두박질 친 거였다. 발이 땅에 쓸리며 슬리퍼를 신고 있던 왼쪽 발은 엄지발톱이 뽑혀 나갔고, 그대로 머리가 착지를 도운 까닭에 의식을 잃었다. 그 와중에도 손에 쥐고 있던 생라면 봉지는 놓지 않았다고 한다. 지켜줄게 생라면.
내가 의식을 잃자 동네 녀석들이 우리 집에 알렸고, 부모님은 나를 업고 일단 집으로 데려온 것이다. 기절까지 한 상황, 혹시 머리에 이상이 생긴 건 아닌지 걱정하는 엄마에게 내가 깨어나자마자 "엄마, 여기 어디야?"라고 했으니, 엄마는 집도 못 알아보는 아들에게 분명히 이상이 생겼다고 생각하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던 것이다. 뭐, 나중에 병원에 가서 이런 저런 검사를 했지만 이상은 없었다.
아무튼 이 사고로 인해 내 유년기에서 자전거는 '금지물품'이 되어 버렸다. 이후 종종 친구들의 자전거를 타보긴 했지만 기어를 바꿀 때 체인이 빠지거나 덜컹, 거리며 페달에서 중심을 잃게 될지 모른다는 공포감에 속도를 내진 않았다.
뭐, 자전거 관련 커뮤니티를 돌아다녀보면 이 정도의 사고는 명함도 내밀지 못할 정도로 큰 사고를 경험한 분들의 사연을 보기도 한다. 내리막길에 신발 끈이 풀어져 고개를 숙이고 만지작거리다 앞에 정차되어 있는 차에 그대로 꽂힌 사연도 보이고, 야맹증이 심한데 밤에 자전거를 타다 전봇대를 껴안게 된 사연도 보인다. 누가 더 많이 다쳤나 배틀이 붙다가 "다들 대단하시긴 하지만, 저한테는 안 될걸요.ㅋㅋ 전 자전거 사고로 한쪽 다리를 못 써요.ㅋㅋㅋ"라는 댓글엔 숙연해진다.
이 글은 '다친 게 자랑'이라는 뉘앙스 보다는, 자전거 생활을 돌아보며 적는 에피소드 정도로 읽어 주었으면 한다. 다시 '자전거 생활'을 시작하게 된 '빨간 자전거' 사연과 '눈 뜨고 자전거 도난당하는 도시 일산', 그리고 최근에 내 곁으로 찾아온 자전거이야기는 다음 편에서 계속 풀어보자.
오늘도 무사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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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전거를 타면 자전거의 앵글로 도시를 다시 파악하게 된다. 예전엔 지름길이 어디인가를 고민했지만 자전거를 타게 되면서는 개천이 어디로 뻗어 있는가를 먼저 살피게 된다... 자전거의 눈으로 보면 도시는 무표정한 콘크리트 괴물이 아니라는 걸 깨닫게 된다. 도시의 경사, 도시의 고도, 도시의 굴곡은 그대로 근육이 되어 육체 속에 새겨진다."
- 김영하, <포스트 잇> 중에서
- 김영하, <포스트 잇> 중에서
그러니까, 자전거를 열심히 탄 다음 날 '흐어어헝' 거리며 계단을 잘 못 내려가거나 변기에 앉기 힘들어 하는 근육통을 마지막 문장으로 표현한 것이 참 좋다.
낭만적으로 보자면 한 없이 낭만적일 수 있는 것이 '자전거'지만, 자전거를 타다 쇄골이 부러져 벌써 4주째 집에서 요양생활을 하고 있는 J군을 보면, 역시 개천이 어디로 뻗어 있는가를 살피기 전에 먼저 차가 오나 안 오나, 앞에 턱이 있나 없나를 먼저 살펴야 할 것 같다.
사람이라는 게 참 간사하다. 작년 까지만 해도 차를 몰고 다니며 도로로 불쑥 튀어나오는 자전거를 보며 "자전거, 저거 진짜 위험하다니까."라는 이야기를 하고, 자전거를 탄 쫄바지의 라이더들을 보며 "어휴, 저 바지는 보기만 해도 부담스럽네."라는 이야기를 했는데, 요즘은 내가 "자전거도 차야."라며 도로로 달리고, '입으면 민망할까?'라는 고민을 하며 자전거 바지를 검색하고 있다.
자전거 동호회 사람들이 이야기 하는 '자전거 뽕'을 맞은 모양이다. 어제는 비가 쏟아지는데도 혼자 실실 웃으며 일산 한 바퀴를 돌고 들어왔다.
'이게 자유야.'
라며 헬멧을 때리는 빗소리를 음미하다, 이 빠진 보도블럭에 걸려 자빠질 뻔 했지만, 뭐, 그래도 좋다. 무언가에 대한 '관심'은 수감생활 중인 영혼을 잠시 꿈꿀 수 있게 해 주는 진통제 아닌가. 이게 다 부질없는 짓이라는 생각이 들게 되겠지만, 당장은 교체한 자전거 벨소리가 예쁘다며 좋아하고 있으니, 그걸로 만족한다.
그런 의미에서, 내 곁을 스쳐간 자전거들과 그 자전거들에 얽힌 이야기를 풀어 볼까 한다.
▲ 내 인생의 첫 자전거, 내리려는 걸로 오해할 수 있으나 드리프트 연습 중.
톨스토이는 엄마 뱃속에서 나올 당시 자신을 받은 산파의 얼굴이 기억난다는 이야기를 했는데, 난 아직 그만한 뻥을 칠 내공이 없으니 한 살 때의 사진이 있다는 것으로 만족한다. 독립문 바다약국 길 오르막을 올라가면 노란집이 있었는데, 그 집에 살 때 찍은 사진으로 보인다.
▲ 킨더가든 입학을 앞두고 벌인 우중(雨中)라이딩. 파란 타이어가 인상적.
다리만 보면 초등학생으로 오해할 수 있지만, 다섯 살 때의 모습이다. 벨을 제외하면 지금 출시되어도 뒤쳐지지 않을 정도의 자전거를 소유하고 있었다는 것이 인상깊다. 파란색 타이어라니! 곧 엄마의 하얀 옷걸이가 내 몸을 빨갛게 물들일 것을 예상하곤 겁을 잔뜩 먹은 얼굴부분은 삭제했다.
저 노란 장화 보니까 생각나는데, 난 저 노란 장화를 많이 아꼈다. 걸을 때 마다 붙어있는 눈이 흔들흔들 움직여 마치 두 마리의 애완동물과 함께 다니는 느낌이 들었다. 비가 온 다음 날에도 "진흙탕이라 신어야해."라는 핑계를 대며 신고 다녔는데,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나고 있는 잿더미를 발견하고 불을 끈다며 장화신은 발로 밟아 대다가 나무에 꽂혀있던 못에 찔려 장화는 운명을 달리했다. 그 때 처음 들은 '파상풍'이라는 말이 여전히 내게는 공포로 남아있다.
▲ 공릉의 잔디밭을 누비는 모습. 오프로드를 걸친 것 없이(응?) 누비고 있다.
왜 이렇게 발육이 빠른 건지 모르겠지만, 역시 초등학교 입학 전의 모습이다. 유치원 기념사진들을 찾아보면, 나 혼자 유치원복이 아닌 사복을 입고, 유치원 모자를 안 쓴 모습을 볼 수 있다. 여섯 살 때, 진달래반 선생님에게 "선생님, 우리 집 가서 커피 한 잔 하실래요?"라는 이야기를 했다.
▲ 뒷쪽의 구동계와 뒷바퀴 휠셋의 상태를 살펴보고 있다.
자꾸 팬티만 입은 사진이 올라와 '노출증'에 대한 오해를 할 수 있으나, 기획사의 강요로 인해 어쩔 수 없었다는 건 훼이크고, 당시 저 동네 대부분의 아이들이 마치 '아마존'에서 처럼 팬티만 입거나 아예 벗고 노는 원시적인 모습을 보였다. 저 정도면 그나마 많이 챙겨 입은 거다. 사진 좌측 상단에 살짝 나온 다른 꼬꼬마의 모습을 보자. 걘 다 벗고 있다.
안타깝게도 이 사진 이후 '자전거'와 함께 찍은 사진이 없다. 여기까지는 대부분의 꼬꼬마가 그러하듯 그냥 자전거 타며 놀았던 이야기지만, 이 이후는 '자전거 잔혹사'라고 할 수 있을만한 일들이 벌어지기 때문이다.
A. 여자 앞에선 왜 더 빨라지는가?
독일의 한 의학팀에서 자전거를 타는 '남자사람'을 대상으로 실험을 했는데, 남자의사가 지켜볼 때보다 여자의사가 지켜봤을 때 대상 라이더들은 12% 이상 힘의 증가를 보였으며, 고통을 호소하는 것도 덜하다는 결과가 있었다.
그래서 였을까, 별로 신기한 것도 아닌데 화단 경계석을 자전거로 떨어지지 않고 타는 것에 대해 동네 여자아이들이 호들갑을 떨며 지켜보던 때가 있었다. 난 열 살쯤이었는데, 초등학교 고학년 형들과 겨루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자전거를 잘 탈 때라,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화단 경계석을 마음껏 질주했다. 모두 그 연습만 하는 까닭에 별다르게 보여줄 것이 없어졌을 때, 나에겐
'그래! 경계석에서 손을 놓고 타는 걸 보여주는 거야!'
라는 기막힌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평지에서도 하기 힘든 고난이도의 기술을 화단 경계석에서 보여줬기에, 손을 놓자마자 여자아이들의 호들갑이 시작되었다.
'후후, 뭐 이런 걸 가지고.'
라며 허리를 펴 여유로움을 강조하려는 찰나, 쓰레기 분리수거가 시행되기 전이라 화단 옆으로 만들어 놓은 쓰레기장 앞에서 핸들이 90도로 돌아갔다. 나름 빠르게 대처한다며 손을 뻗어 봤지만, 옆 경계석을 들이받은 자전거는 어른 가슴 깊이의 쓰레기장으로 내 몸을 던져 버렸다. 넋이라도 있고 없는 상황도 잠시, 몰려오는 아이들의 소리가 들렸고, 난
'아무 일도 아닌 것 처럼 행동 하는 거야.'
라며 쿨하게 쓰레기장에서 걸어 올라왔다. 온갖 오물이 뭍은 옷을 툭툭 털며 자전거를 집어 들 때, "괜찮아? 괜찮아?"라며 물어오는 아이들의 질문에 "응, 괜찮아."라고 대답했지만, 코는 피를 흘리며 안 괜찮다는 대답을 대신 해주고 있었다. 집에 돌아와 현관문이 닫히는 순간부터 아파서 울었다.
B. 과속방지턱은 안전하지 않다.
경기도 파주의 '운정'이란 마을로 이사 왔을 때, 동네에 차 있는 집이 별로 없었다. 그런 까닭에 동네 공터와 도로에선 마음 놓고 자전거를 탈 수 있었다. 그러다 일산신도시를 건설하며 도로로 레미콘이 많이 다니게 되고, 하나 둘 집집마다 자가용을 구입하기 시작하자, 도로에 '과속방지턱'이 생기게 되었다.
그간 '과속방지턱'과 '자전거속도'에 대한 개념이 없던 동네 아이들은 늘 달리던 속도로 '과속방지턱'을 넘어 다녔는데, 내리막을 전속력으로 내려가다 과속방지턱에 걸려 몸에 스크레치가 난 녀석들이 한 둘이 아니었다. 특히 여름날엔 짧은 옷을 입고 바람을 가르다 대부분의 녀석들이 손바닥만한상처를 팔뚝이나 종아리 등에 새겼다.
난 미리 그 점을 간파해 과속방지턱의 제일 가장자리로 별 무리 없이 다녔으나, 괸돌(고인돌이 있는 옆 마을)을 다녀오다가 과속방지턱의 훼이크에 논으로 빠진 적이 있다. 갓 포장한 농로를 전속력으로 달리다 안전방지턱을 발견하고 옆쪽으로 지나치려는 찰나,
'여..옆길이 어..없어!'
그랬다. 그 방지턱을 누가 만들었는지 몰라도, 가장자리를 낮게 만든 다른 방지턱과 달리 같은 높이로 도로 끝까지 만들어 놓았던 것이다. 옆쪽의 논으로 날아가던 그 순간이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초록색 풀들이 '빨리 감기'를 한 것처럼 눈앞에서 사사삭, 지나가고 숨을 멈춘 채 부웅, 하는 느낌으로 날았다가 논에 철퍽, 꽂혔다. 다친 곳도 없고 아픈 곳도 없었지만, 집에 돌아가 혼날 생각에 기분은 말이 아니었다.
C. 엄마, 여기 어디야?
내 유년기에서 '자전거'를 금지 당하게 된 결정적인 사건이다. 동네 아이들이 대부분 고만고만한 자전거를 타고 다닐 때, '기어 자전거'라는 신제품이 등장했다. 손잡이에 붙어 있는 레버를 돌리면 '드르륵' 소리를 내며 체인이 '차자작' 움직이는 자전거였다. 이미 '기어 자전거'를 구입해 타고 다니는 동네 형들도 있었지만, 우리와는 놀지 않는 중학생, 고등학생 형들 이었다.
모두들 동경의 눈빛으로 '기어 자전거'를 바라보고 있을 때, 난 또래 중 가장 먼저 '기어 자전거'를 가질 수 있었다. 그 자전거를 가지게 된 첫 날, 애들이 몰려와 기어를 만지작거리고 서로 한 번 타보면 안 되냐고 난리를 치는 가운데, 난 경주를 해서 제일 빠른 사람에게 태워주겠노라고 약속하고 레이싱을 벌였다.
동네를 몇 바퀴 도는 경주였는데, 내가 제일 빠를 거란 예상과 달리 '기어 자전거'를 타보고자 하는 몇몇 녀석들이 초인적인 힘으로 침까지 흘려가며 내 앞쪽으로 달려 나왔다. 녀석들은 엉덩이를 안장에 붙이지도 않고 일어서서 페달질을 하고 있었다. 질 수 없다고 생각한 나도 일어서서 힘껏 페달을 밟아가며 좀 더 빨리 가고자 가랏, 하는 느낌으로 기어를 변속했다. 그 순간,
투두둑 타닥
눈을 떠 보니 집이었다. 왼쪽 엄지발가락에 엄청난 고통이 느껴졌고, 남의 머리를 대신 달고 있는 듯 머리가 무거웠다. 옆에서 부모님이 날 바라보고 있었고, 난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싶어 엄마에게 물었다.
"엄마, 여기 어디야?"
내 말을 들은 엄마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고, 이어 우리 집에 온 동네 아줌마가 우황청심환을 나에게 먹이며 내 손가락과 발가락을 바늘로 모두 찔렀다.
"머리에 피가 안 나서 손가락 발가락으로 피를 빼야해. 토할 것 같진 않아?"
머리를 만져보니 왼쪽에 주먹 만한 혹이 나 있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론, 자전거의 기어를 바꾸다 체인이 빠졌고, 그 결과 엄청난 힘을 주며 페달을 돌리던 발은 헛발질을 하며 땅으로 곤두박질 친 거였다. 발이 땅에 쓸리며 슬리퍼를 신고 있던 왼쪽 발은 엄지발톱이 뽑혀 나갔고, 그대로 머리가 착지를 도운 까닭에 의식을 잃었다. 그 와중에도 손에 쥐고 있던 생라면 봉지는 놓지 않았다고 한다. 지켜줄게 생라면.
내가 의식을 잃자 동네 녀석들이 우리 집에 알렸고, 부모님은 나를 업고 일단 집으로 데려온 것이다. 기절까지 한 상황, 혹시 머리에 이상이 생긴 건 아닌지 걱정하는 엄마에게 내가 깨어나자마자 "엄마, 여기 어디야?"라고 했으니, 엄마는 집도 못 알아보는 아들에게 분명히 이상이 생겼다고 생각하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던 것이다. 뭐, 나중에 병원에 가서 이런 저런 검사를 했지만 이상은 없었다.
아무튼 이 사고로 인해 내 유년기에서 자전거는 '금지물품'이 되어 버렸다. 이후 종종 친구들의 자전거를 타보긴 했지만 기어를 바꿀 때 체인이 빠지거나 덜컹, 거리며 페달에서 중심을 잃게 될지 모른다는 공포감에 속도를 내진 않았다.
뭐, 자전거 관련 커뮤니티를 돌아다녀보면 이 정도의 사고는 명함도 내밀지 못할 정도로 큰 사고를 경험한 분들의 사연을 보기도 한다. 내리막길에 신발 끈이 풀어져 고개를 숙이고 만지작거리다 앞에 정차되어 있는 차에 그대로 꽂힌 사연도 보이고, 야맹증이 심한데 밤에 자전거를 타다 전봇대를 껴안게 된 사연도 보인다. 누가 더 많이 다쳤나 배틀이 붙다가 "다들 대단하시긴 하지만, 저한테는 안 될걸요.ㅋㅋ 전 자전거 사고로 한쪽 다리를 못 써요.ㅋㅋㅋ"라는 댓글엔 숙연해진다.
이 글은 '다친 게 자랑'이라는 뉘앙스 보다는, 자전거 생활을 돌아보며 적는 에피소드 정도로 읽어 주었으면 한다. 다시 '자전거 생활'을 시작하게 된 '빨간 자전거' 사연과 '눈 뜨고 자전거 도난당하는 도시 일산', 그리고 최근에 내 곁으로 찾아온 자전거이야기는 다음 편에서 계속 풀어보자.
오늘도 무사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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