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 나 고백 하나 하자. 김형이 지금 3주째 비슷한 사연을 하루도 빼놓지 않고 보내는데, 나 무서워. 남자인 나도 이렇게 무서운데 그녀는 얼마나 무섭겠어? 특히 김형이,
이라고 쓴 부분이 제일 무서워. 뭔 말인질 모르겠어. 김형 혹시 교포야? 번역기 돌렸어? 혹시 앞 글자나 대각선에 뭔가 메시지를 담은 것이 아닌가 곰곰이 살펴봐도 그런 거 없는 것 같아. 그나마 알아들을 수 있는,
이 부분. 이건 무섭지는 않은데 어려워. 김형 다가갈 수 있는 방법은 다 동원한 거 아니야? 회사에 찾아가고, 집 앞에 찾아가고, 여기서 더 다가가려면 가택침입 하는 수밖에 없지 뭐. 가택침입으로 일산 경찰서 가게 되면, 박형사님한테 내 안경 거기 있나 좀 물어봐줘.(응?)
농담이고, 김형의 연애가 어디서부터 꼬이기 시작 했나 오늘 같이 한 번 보자.
소개팅 후, 애프터로 영화를 봤다는 것 까진 좋았어. 영화를 보고 나서 다음 약속을 잡은 걸로 봐선, 이 때까지만 해도 김형과 그녀 사이에 별 문제가 없었다고 생각해. 다시 만나기로 둘이 약속한 날, 그녀에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녀가 약속을 취소한 게 집안사정 때문이라고 했지? 김형, 우리 집하고 김형네 집이 다르듯이, 다른 사람의 집은 또 다른 거잖아. 친척들과 데면데면하게 지내는 집이 있는 반면, 친척모임이 우선인 집이 있고, 가족끼리 모르는 사람처럼 지내는 집이 있는 반면, 아버지의 "내일은 가족외식하자. 다들 시간 비워놔."라는 말 한마디에 모든 스케줄을 취소해야 하는 집도 있는 거 아냐.
김형은 여기서 첫 번째 실수를 한 거야. 아무리 김형이 다음 만남을 고대하고 있었다고 해도, 미안하다며 사과하는 상대에게 무리한 요구를 계속 들이밀면 안 되는 거지. 김형, 불만은 불만 있다는 말로만 전달되는 것이 아냐. 실망을 덕지덕지 바른 목소리라든지, 한 박자 쉬고 들어가는 대답이라든지 그런 걸로도 충분히 전달될 수 있는 거야. 그리고 사연에,
라고 썼지? 상대에게 저런 이야기를 들었으면, 나중에라도 조심스럽게 물어가며 상대가 처한 상황이 어떤지, 요즘 상대에게 '집'이란 어떤 의미인지, 지금 가지고 있는 불만들은 뭔지, 그런 것들을 하나씩 알아갈 생각을 해야지. 심통 났다고 입술 내미는 건 꼬꼬마들이나 하는 짓이잖아. 난 저 부분을 읽으며 김형이 그녀에게 반했기 때문에 그녀와 가까워지고 싶은 건지, 아니면 누구라도 좋으니 가까워지고 싶은데 당장 그녀가 제일 가능성 있어서 그러는지 갈피가 잡히지 않는다.
앞으로도 '기대'는 절대 하지마. 영화도 기대하고 보면 재미 없잖아. 1981년 10월 7일에 중학생이 졸도로 죽었는데, 왜 졸도했는 줄 알아? 소풍 준비를 위해 김밥을 싸고 이것 저것 먹거리를 챙기는 도중에 일기예보가 나온 거야. 근데 그 일기예보에서 "내일 전국적으로 흐리고 비가 오겠다."는 얘기가 나온 거지. 김형이 데이트가 취소되었다고 졸도 할까봐 이런 얘길 하는 게 아니야. 김형이 느낀 그 '실망'을 어떻게든 상대에게 전달하려 할까봐 그러는 거야.
두 번 정도 전화를 했는데 상대가 받지 않으면, 전화 거는 것을 멈추고 상대의 연락을 기다리거나, 급한 일일 경우 메시지를 남기는 것 정도만 해 두라고 이 년 째 얘기하는데, 참 말 안 들어. 평소엔 멀쩡하다가도 상대와 연락이 안 되면 '연락신'이 빙의되어 집요하게 전화를 하는 사람들이 왜 이리 많은지.
그래도 김형은 좀 나은 편이야. 여덟 번 전화하고 문자 세 개 밖에 안 보냈잖아. 그냥 이 상황을 즐기는 건지 뭔지 주구장창 받을 때까지 계속해서 거는 사람들이 있다니까? 상대방 전화기에 남겨지는 '부재중 00통화'라는 스코어를 올리려고 하는 건지, 몇몇 사람들은 신호음 다섯 번 울리면 끊고 다시 걸고, 다시 신호음 다섯 번 울리면 끊고 이런 식으로 기네스에 도전하더라고.
아예 '일인극'하는 사람들도 있어. "전화 받아봐 할 말이 있으니까."라고 문자를 보내고 부재중 전화 다섯 통 남기고, "혹시 내 연락이 불편해?"라며 혼자 묻고 혼자 답해. 상대가 샤워하는 중이라 전화를 못 받았을 뿐인데, 그 짧은 시간에 혼자 기-승-전-병(응?)의 시나리오로 '문자 일인극'을 한다니까. 샤워를 마치고 나와서 그 일인극의 현장을 목격한 상대는 얼마나 황당하겠어? 지킬박사와 하이드가 따로 없는 거지.
여기까진 그래도 괜찮아. 유머감각이 있다면, 영화 속 명대사들을 몇 개 끄집어 와 일인극을 장난처럼 커버할 수 있고, "부재중 몇 통이야? 그게 이번 주 로또 당첨 번호야. 내일 또 찍어줘?" 라며 가볍게 넘길 수 있으니 말야. 근데, 김형처럼 과감하게 찾아가기 시작하면 문제가 복잡해져. 그것도 남들 다 잘 시간에 집까지 찾아가는 건, 뭐랄까, 앞차를 들이받아 앞차 범퍼에 금이 가 버린 상황과 비슷해. 차에서 내리지 않고는 해결될 수 없는 상황이란 얘기지.
지금 남 걱정 할 때가 아니잖아, 김형. 난 김형이 더 걱정돼. 우선, 그 시간이면 화장 다 지우고, 씻고, 편한 옷을 입고 있을 시간인데, 집으로 갈 테니 나올 수 있냐고 묻는 것도 아니고 집 앞이라고 하면 부담되는 게 당연하잖아. 동성친구처럼 츄리닝 입고 나와서 캔커피 하나 마시고 들어갈 수 있는 그런 게 아니라니까. 상대는 피곤해서 넋이라도 있고 없는 상태일 수 있는데, 그런 상황에서 카페를 찾아간 것도 현명한 선택은 아니라고 생각해. 우리끼리니까 하는 얘기지만, 별 거 아닌 얘기를 꼭 그 시간에 거기서 해야 해? 김형에게 '얼굴 보고 커피까지 함께 마셨다.'라는 위안이 된 거 말고 뭔 의미가 있어?
이런 얘기 했다고 또 슬픈 표정 짓고 있진 마. 사연으로 미루어 이미 김형의 자신감은 바닥을 보이고 있는 것 같으니, 헛발질에 대해 살펴보는 것은 이쯤 하자. 딱 이 말만 하고, 아래에선 '해결책'에 대해 함께 고민해 보자.
그 늦은 시간에 그녀를 찾아갈 정도로 과감하던 사람이, 고백은 왜 전화로 한 거야? 그녀가 보지 않을 때에는 과감해지고 용감해지면서, 정작 과감함과 용기가 필요한 순간엔 왜 전화기 뒤로 숨어? 그리고 뭐가 그렇게 급해? 잘 생각해봐. 지금까지 둘이 만나 대화를 한 시간을 다 합쳐도 반나절이 안 돼. 이 부분들에 대해선 진지하게 생각해 보길 권할게.
김형은 이 상황에서 그녀가 마음을 열어 김형을 받아주길 바라겠지만, 난 솔직히 이 상태에서 김형이 '정말 좋아하는 여자'와 만나길 권해주고 싶다. 김형과 같은 처지에 놓인 많은 사람들이 상대의 마음을 열게 할 '방법'만을 찾는데, 그건 상대를 갖고 싶은 거지 상대를 좋아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해.
뭐, 김형처럼 '먼저 사귀고 나서 알아가도 된다.'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 거지만, 김형은 그녀에게 한 번의 거절을 당한 뒤 자기 마음이 어떤지도 확실히 정하지 못한 상태잖아. 김형의 주변 사람들은 다른 사람 찾으라는 얘길 한다고 했지? 난 김형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녀를 위해서 다른 사람 찾으라고 권해주고 싶어.
김형에게서 그녀의 감정을 살피려는 모습은 보이는데, 그녀의 감정을 이해하려 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아. 그리고 김형의 이야기 속에서 그녀는 김형과 친해지려 하는 모습이 보이는데, 김형은 그녀와 친해지기 보다는 사귀고 싶어 하는 마음이 앞서. 김형이 알고 싶다고 말하는 '그녀의 마음'도 결국 "내가 남자친구로 괜찮은가, 아닌가."에 대한 부분뿐이잖아.
상대가 친구들에게도 말하지 못하는 일들에 대해 알아? 아니면, 상대가 뭘 꿈꾸는 지 알아? 상대가 뭘 좋아하는진 알아? 이건 업무에 대한 아무런 지식도 없이 그저 취직만을 바라고 지원하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잖아. 일단 취직하고 나면 자연히 다 배우게 될 거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 '시행착오'와 '실수'는 고스란히 둘의 몫이 되는 거야. 전부 철저히 준비하고 연애를 시작한다 해도 아무 마찰이 없을 순 없겠지만, 아무 준비도 없이 감정 하나에 의지해 시작한 연애보다는 분명 나아.
그녀와 진지하게 만나고 싶은 것이 김형의 진심이라면, 그녀의 마음을 바꿀 수 있냐, 없냐를 묻지 말고, 가능성이 있냐, 없냐도 묻지 마. 그녀의 마음이 어떤지를 알아야 바꾸든 말든 할 거 아냐. 마음을 알아가는 방법엔 만남, 대화, 메일, 메신저, 문자 등 여러 가지 방법이 있잖아. 일단 뭐든 그녀와 의사소통 할 수 있는 창구를 열어둬. 그렇게 그녀와 가까워지는 과정에서 '가능성'도 자라는 거야.
작은 가능성이라도 있으면 노력해보겠다느니, 뭐 그따위 소리도 절대 하지 마. 그런 애기 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꽃을 보내거나, 선물을 사주거나, 얼마짜리 밥을 사거나, 뭐 이런 것들을 '노력'이라고 생각 하더라고. 그건 노력이 아니라 그냥 구애지. 김형이 뭘 해줘야 상대가 기뻐한다면 그건 '봉사'야. 김형이 해야 할 일은 '봉사'가 아니라, 김형과 함께 있는 것이 기쁘기에 뭘 해도 즐거울 수 있는 관계를 만드는 거라는 걸 잊지 마.
끝으로, 그녀의 말이나 행동에 이리 저리 흔들리지 마. 얼마 전부터 서로 다시 연락하며 만나기도 했다며. 그녀가 김형을 그냥 아는 오빠로만 대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느니, 발전적인 관계로 보진 않는 것 같다느니, 아니, 사람이 왜 그래? 잘 될 거라 생각하며 열심히 해도 어려운 일을, 왜 아직 해 본 것도 없이 혼자 결과만 예측하고 있어? 김형 스스로도 갈피를 못 잡으면서 남의 마음은 얻어서 뭐하려고?
가까워지지 못할까봐 걱정하지 마. 가까워지지 못하면 봄날에 나랑 자전거 타며 놀면 되니까 긴장 풀어. 상대에게 아직 보여주지 못한 것들 많이 있잖아. 김형의 비전, 김형의 생각, 김형의 즐거움, 김형의 매력, 상대와 가까워지며 그런 것들을 보여주란 얘기야. 보여줘야 할 건 하나도 안 보여줘 놓고 왜 "난 아직도 너에게 그냥 좋은 오빠지?" 따위의 헛소리나 준비하고 있냔 말야. 말이 좋은 오빠지, 지금 상황은 그냥 '이상한 오빠'잖아.
제발 고백을 만회하기 위한 다른 고백을 준비하지 마. 타이밍을 놓칠까봐 불안해? 언제 고백해야 하는 지 지금 딱 정해줄게. 김형은 올해 크리스마스 이브에 고백할 거야. 됐지? 그때까지만 이라도 전력질주 하고 싶은 마음 꾹꾹 눌러놓고 여유롭게 다가가 보자. 나한테 매일매일 상황 전해줄 필요도 없어. 알았지? 김형 이제 사연 보내지 마. 그녀와 만나며 데이트 비용의 부담비율이 2:1을 넘어섰을 때만 살짝 말해줘. 요즘 세상이 흉흉해서 말야. 자, 그럼 이 매뉴얼을 읽는 김형들이 모두 '고백' 대신 '매력'이란 카드를 손에 쥐길 바라며!
▲ 아무 생각 없이 추천을 누르지 않고 지나가면, 인연도 그렇게 지나갈 수 있는 법입니다. 잡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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