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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 하자보수 신청하러 갔다가 생긴 일

by 무한 2012. 3. 2.

아파트 하자보수 신청하러 갔다가 생긴 일
개미들의 도시 일산을 떠난 지 오늘로 딱 한 달이 되었다. 일산을 '개미들의 도시'라고 표현했더니, 어느 독자 분께서,

"개미들의 도시라니. 신선한 표현입니다.
주식시장에서 말하는 개미를 주거생활에 빗대셨군요.
서울로 출퇴근하는 회사원들이 많은 도시 일산,
정말 개미들의 도시인 것 같습니다."



라고 댓글을 달아주셨다. 미안하지만, 혼자 너무 앞장서서 나가버리신 것 같다. 내가 살던 집마다 개미가 너무 많아서 '개미들의 도시'라고 했을 뿐이다. 다음 날 먹으려고 아껴둔 피자를 개미들이 먹어버렸을 때의 허탈감. 지금 다시 생각해도 심장이 내려앉는 것 같다.

아 그리고, 개미가 있는 집엔 바퀴벌레가 없다는 말이 있던데, 그렇지 않다. 우리 집에 살던 녀석들은 서로 형님, 아우 해가며 사이좋게 지냈다. 거기다 사슴벌레와 장수풍뎅이를 키우던 통에 번식하던 톱밥파리, 젤리냄새를 맡고 찾아 온 초파리. 창문을 열어 놓으면 들어오던 비둘기와 윤기가 흐르던 친구 꼽등이 얘기까지 하면 너무 길어지니, 접어두도록 하자.

여하튼 이사 온 곳은 새 아파트고, 아직 겨울이 다 가지 않은 까닭에 곤충이나 새들이 보이지 않는다. 대신 다른 문제가 좀 있다. 얼른 짓고 빨리 분양하려고 그랬는지, 마감이 덜 된 곳이나 제대로 설치되지 않는 부분들이 보인다. 우리 집은 가스렌지 후드가, 친절하게 아랫집에서 해 먹은 요리 목록을 알려주길래 '렌지 후드 냄새역류'문제로 하자보수 사무실을 찾았다.


1. 좀 이상한 상담원.

 

하자보수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어림잡아 열 명은 될 듯한 직원들이 있었다. 무슨 일로 왔냐고 묻길래 하자보수 신청하러 왔다고 했더니, 대기 의자에 앉아 잠시 기다리라고 했다. 그 직원들 가운데 하자보수 상담을 받는 직원은 단 한 명. 내 앞에는 상담을 받는 여자1과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 여자2가 있었다. 여자1은 집에 발생한 결로 문제로 찾아온 듯했다.

여자1 - 환기를 하라고 해서 열심히 하고 있는데, 그래도 결로가 계속 생겨요.
상담원 - 결로 문제는 환기한다고 없어지지 않습니다.
            환기만 열심히 할 게 아니라, 집안에서 발생하는 수증기를 잡아야죠.
            왜, 목욕탕이나 그런 데 가보면, 김 서려있고 그렇잖아요.
            그게 집에서 발생하면 결로가 되는 겁니다.
            샤워 할 때 발생하는 수증기, 요리할 때 발생하는 수증기,
            그런 수증기 들이 집안에 떠돌다가,
            바깥과 실내의 온도차로 인해 벽이나 유리창에 맺히게 됩니다.

여자1 - 아...



상담원은 '강한 인상을 남기는 대화법'같은 책을 읽었는지, 과장된 손짓과 높은 톤을 사용해가며 상담을 하고 있었다. 상담 중인 상대뿐만 아니라 같은 사무실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자신의 능력을 보여주려는 듯 필요 이상의 큰 소리로 이야기를 했다.

상담원 - 그 집 안의 수증기를 잡아야 결로도 잡을 수 있습니다.
            현재 결로 문제로 상담을 하러 오신 분들이 많아요.
            요 근래에 날이 많이 추워서, 결로가 더 심했거든요.
            그 수증기, 발생하는 수증기를 빨리 배출해야 결로가 안 생깁니다.
            발생한 수증기를 잡는 방법.
            렌지 후드 작동할 줄 아시죠?
여자1 - 네.
상담원 - 그걸 하루에 몇 시간 정도 돌려주세요. 
            그리고 화장실에 보면 실내 환기 시키는 버튼 있죠?
여자1 - 네. 
상담원 - 그것도 하루에 몇 시간 정도 돌려주세요.
             수증기를 빼 내야 하니까요. 
             가장 중요한 건, 창문이랑 현관문을 열어서
             수증기를 내보내 주세요. 하루에 한두 번 정도.
             그럼 결로현상이 눈에 띄게 줄 겁니다.

 

좀 이상했다. 처음엔 환기 한다고 결로가 없어지는 건 아니라고 하더니, 나중엔 실내의 수증기를 없애려면 환기를 해야 한다니. 상담을 받던 여자도 상담원의 모순을 눈치 챘는지 "그렇게 하고 있는데도 결로현상이 여전해요."라고 말했다. 상담원은 당황한 듯 보였다. 서둘러 수증기 측정을 하러 방문하겠다고 약속을 잡곤 여자를 돌려보냈다. 여자2가 상담을 하러 상담원을 마주보고 앉았다.

여자2 - 그 후황, 이라고 하죠? 가스렌지 위에 있는 거.
상담원 - 아, 렌지 후드요.
여자2 - 네. 거기서 소리도 나고, 음식냄새가 올라와요.
상담원 - 소리가 나고, 냄새가 올라온다는 거죠?
여자2 - 네.
상담원 - 그런 증상이 나타나는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우선, 아파트 환기구의 구조를 아셔야 하는데, 
             종이가... 자, 이렇게 아파트가 있죠?



상담원은 종이를 가져다 아파트의 단면도를 그리기 시작했다. 대충 그려서 설명해 줘도 될 것 같은데, 쓸데없이 고퀄리티의 그림을 그렸다. 그는 아래의 선과 정확히 평행이 되도록 그으려 노력했고, 두 집 정도만 그려도 설명하기 충분할 텐데 다섯 집이나 그렸다.

상담원 - 여기, 요 부분, 슥삭슥삭(환기구 최상층 그리는 소리)
            요 부분으로 환기가 이루어지게 됩니다.
            그럼, 저 아래서부터 올라오던 공기가,
            잠시만요. 빨간펜이...


        
그는 검정색으로 그린 아파트 단면도와 차이를 두기 위해 빨간펜으로 공기의 흐름을 표시했다. 이어서 아파트 꼭대기에 있는 환기구가 돌아가는 모습도 그렸다. 명암까지 넣어가며.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전혀 없을 텐데 말이다.

상담원 - 바람이 세게 부는 날에는 환기구가 역으로 돌기도 합니다. 
            그럼 자연히 이렇게, 나가려던 공기들이, 자, 
            이렇게 거꾸로 들어가겠죠? 그럼 그게 각 가정으로 유입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또, 여기 보시면 환기구가 연결되어 있는 것 보이시죠?
            이게 또 100% 차단이 되지 않을 수 있는데,
            그럼 환기구에 있던 냄새들이 밀려들어올 수 있습니다.
여자2 - 그럼 어떻게 해야 하죠?
상담원 - 한 번 방문해서 확인을 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제가 가는 건 아니고, 후드 설치 업체의 기사가 갈 겁니다.
             저는 건축 전공인데, 그건 기계적인 문제거든요.
             지금 보면, 목요일에 기사 분이 단지에 오실 겁니다.
             목요일에 집에 계세요? 연락처 남겨주시면 기사 분 연락이 갈 겁니다.

 

고퀄리티의 아파트 단면도와 빨간펜으로 표시한 공기의 흐름 등은 대체 왜 그린 건지 혼란스러워졌다. 여자2가 주소와 연락처 등을 적은 뒤 자리를 떴다. 난 상담원 앞으로 가서 앉았다.

무한 - 렌지 후드에서 냄새가 역류해서요.
상담원 - 주소랑 연락처 적어 주세요. 목요일에 집에 계신가요?
무한 - 네.
상담원 - 기사분이 연락드릴 겁니다.
무한 - 네.

 

남자끼린 말 길게 하는 거 아니라는 걸 아는, 상담원이었다.


2. 더 이상한 AS기사

 

렌지 후드 하자보수를 신청하고 웹 검색을 했다. 비슷한 증상을 보이는 다른 집들의 경우 '후드 개폐기'가 문제였다는 글이 많았다. 며칠이 지나 AS기사에게 연락이 왔다.

AS기사 - 렌지 후드 AS 신청하셨죠?
무한 - 네.
AS기사 - 두 시에 방문 예정인데, 시간 괜찮으세요?
무한 - 네.
AS기사 - 음...렌지 후드에서 냄새가 역류하는 증상이죠?
무한 - 네.

 

시간이 괜찮다고 대답했을 때부터 AS기사의 목소리에 실망이 묻어나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 시간에 집에 없다고 하길 바란 것 같았다. 시간을 정했으니 방문해서 확인하면 될 텐데, AS기사는 전화를 끊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AS기사 - 냄새가 심하게 역류하나요?
무한 - 네.
AS기사 - 음, 고객님. 솔직히 아파트에서 어느 정도는
              냄새가 역류하는 증상이 나타나거든요.
무한 - 전에 살던 아파트에서는 이런 일이 없었는데요?
AS기사 - 그게...솔직히 아파트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어요. 
             아파트 옥상에 팬이 있는데, 그게 거꾸로 돌면
             냄새가 역류 할 수 있거든요.
무한 - 네.
AS기사 - 솔직히 제가 방문 드려도,
             이런 내용을 설명 드리고 그냥 오는 거거든요.
무한 - 네.
AS기사 - 솔직히 약간의 냄새 역류는 일어나기 마련인데,
             솔직히 AS할 수 있는 게 없거든요.
             제가 방문을 드려도...
             솔직히 이런 말씀들을 드리는 거라...



그는, 방문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말을 애타게 원하고 있었다. '솔직히'라는 말로 AS요청을 무력화 시킨 경험이 꽤 있는 듯, 내가 요청을 철회하지 않자 '솔직히 콤보'를 사용하며 애원했다. 하지만 냄새가 역류하는데 AS기사의 귀찮음까지 이해해 줄 순 없었다.

무한 - 이거, 후드 개폐기 불량 때문에 그런 걸로 알고 있는데요?
AS기사 - ......



체념의 시간을 갖는 듯 AS기사는 잠시 말을 하지 않았다. 대략 2.38초간의 침묵이 흐른 뒤, AS기사가 입을 열었다.

AS기사 - 두 시에 방문 드리겠습니다.
무한 - 네.

 

AS기사는 그 날 두 시에 우리 집에 와서, 렌지 후드 개폐기를 교체해 주고 갔다.


3. 많이 이상한 몇몇 동네 사람들



보너스로, 한 달간 알게 된 동네의 비밀 몇 가지를 풀어놓고자 한다.



▲ 쓰레기 및 가재도구를 집 밖으로 던지는 12층 꼬꼬마.



내 방 발코니에서 사진을 찍다가, 쓰레기 무단투기 현장을 목격하게 되었다. 앞 동 12층에 사는 꼬꼬마 인데, 위의 사진처럼 발코니에 서서 쓰레기 및 가재도구, 빨래 등을 집 밖으로 던진다. 관리아저씨들이 "대체 이런 물건들을 누가 이렇게 아무데나 버리는 것인가?"라며 토론을 하시던데, 난 범인을 알고 있다. 관리아저씨들은 누군가 지나다니다 몰래 버리는 걸로 생각하시는지 'CCTV 판독'을 할 예정이라고 방송까지 하시던데, 범인은 복도나 엘리베이터를 사용하지 않는다. 사진에서처럼 그냥 집 밖으로 던질 뿐이다.

음식물 쓰레기를 종량제 봉투에 넣지 않고, 검은 봉지에 넣어 그냥 버리는 사람도 알고 있다. 14층에 살고 있는 40대 중반의 아주머니다. 아주머니는 매우 치밀해서, 우리 동의 음식물 쓰레기통이 아닌 다른 동의 쓰레기통을 이용한다. 폰카로 아주머니의 범죄 장면을 찍어두었는데, 인쇄해서 우체통에 넣으면 아주머니의 심장은 얼어붙겠지.(응?) 농담이고, 당분간 아주머니의 유일한 즐거움을 빼앗진 않을 생각이다. 화이트 데이에 종량제 봉투를 한 묶음 사 우체통에 넣어 주면 해결될 것 같다. 작은 사탕 하나와 함께.

마지막으로, 난 단지 내 '개똥' 문제의 범인도 알고 있다. 범인은 바로 우리 동 4층에 살고 있는 강아지 B(애완견, 4살)의 주인. B의 주인과는 아파트에 이사 온 당일부터 인사를 하며 지내고 있다. 그녀는 B의 야생성을 충족시켜야 한다며 단지 내에 그냥 풀어 둔다. 그러면 B는 아파트 정문에서 후문까지를 자신의 영역으로 삼아 여기저기 탐색 및 배변 등을 한다. 그녀는 B가 똑똑해서 그렇게 돌아다니다가도 집에 잘 찾아온다고 자랑한다. 뭔가가 마려우면 B는 다가와 신호를 보내고, 그런 B를 밖에 풀어주면 알아서 해결하고 온다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B의 똥은 아파트 여기저기에 널려 있다는 얘기. 역시 화이트데이에, 배변봉투 수납이 가능한 강아지 가슴줄을 하나 선물해야 겠다. 간디(애프리푸들, 2살)것도 새로 사는 김에.

그런데 생각해 보니, 이런 것들을 비밀처럼 간직하고 있는 내가 제일 이상한 거 아닐까?(응?)


이 외에도 단지 맞은편에 대형마트가 생긴 후 "배신 안 할 거죠?"가 인사말이 된 단지 슈퍼마켓 아저씨가 있다. 아저씨는 계산대에 있는 시간보다 슈퍼 밖으로 나와 사람들을 지켜보는 시간이 많다. 누군가 대형마트에서 물건을 사서 단지로 들어오는 걸 발견하면, 아저씨는 뚫어져라 쳐다보신다. 며칠 전에 내가 피자 한 판 사서 들어올 때 아저씨가 눈치를 주시길래 왜 그런가 했더니, 세트로 받은 콜라를 보고 계신 거였다. 아저씨 이건 그냥 받은 거예요. 배신 안 해요. 걱정 마세요.

초인종을 눌러도 대답하지 않자 우리 집 번호키를 누르던 남자도 있는데, "누구세요?"라고 말하니 도망가 버렸다. 인터폰을 확인해보니 남자의 얼굴이 찍혀 있었다. 확실하진 않지만, 이사 오던 날 엘리베이터에서 온풍기 들고 탔던 아저씨 같다는 생각이 든다. 만약 빈집털이범이라면, 같은 아파트에 살며 각 가정의 상황을 파악한 뒤 골라서 터는, 섬뜩한 시나리오가 될 수 있겠다.

자, 여기까지. 블링블링한 후라이데이 보내시길 바라며!



▲ 아, 자기 집에 놀러오라는 아주머니도 있었는데, 설마 내 신장을 노리고?(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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