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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매뉴얼(연재완료)/솔로부대탈출매뉴얼(시즌3)

착한 성격 때문에 연애하기 힘들다는 남자, 정말일까?

by 무한 2012. 4. 27.
착한 성격 때문에 연애하기 힘들다는 남자, 정말일까?
소원을 들어 준다는 램프의 요정 지니. 그 지니는 사람들의 소원을 들어주고 과연 몇 번이나 감사의 인사를 받았을까? 다들

"세 가지 소원을 들어준다고 했지?
하나 빌었으니까 두 개 남은 거야. 맞지?"



라며 다음에 빌 소원만 생각하지 않았을까?

H씨는 지니다. 그는 자신이 반한 상대의 소원을 들어준다. 상대가 아침에 일어나기 힘들다고 투정을 부리면 모닝콜을 해 주고, 영화 얘기를 꺼내면 즉시 영화를 예매한다. 한 발 더 나아가 H씨는 '상대가 소원으로 빌 것 같은 것들'도 먼저 준비한다. 상대가 피곤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면 커피 기프트콘을 보내고, 주말엔 심심해 할 수 있으니 연극도 예매한다.

"이제 고백을 해도 될 정도로 친해졌다고 생각합니다.
그녀와 저는 이제 카톡도 매일 주고받는 사이고,
그녀가 절 만난 후로 재미있는 일이 많이 생긴다는 얘기도 한 적 있습니다.
혹시라도 제가 서툴러서 그녀를 놓치게 될까봐 걱정인데,
어떻게 고백하면 좋을까요? 전에도 이런 상황까지 갔다가
사귀는 건 부담스럽다며 거절을 당한 적이 꽤 있어서요..."



난 H씨의 이번 고백이 실패할 거라는 것에 내 뉴발란스 운동화를 걸 수 있다. 사용감 좀 있고 갑보(뒤꿈치)부분이 해지려고 하는 운동화지만 갖고 싶다면 가져도 좋다.(응?) 농담이고. 지금 H씨와 상대의 관계는 '좋은 오빠동생' 사이에서도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다. 그리고 우리끼리니까 하는 얘기지만, 사연 어디에서도 상대가 이쪽을 이성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증거는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H씨는 상대의 '동성친구'들에게도 우선순위에서 밀리는 판국이다.

램프의 요정 지니 보다 더 열심히 상대를 위해 헌신했는데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일까? 오늘은 그 이유와 해결책에 대해 함께 생각해 보도록 하자.


1. 함께하기 VS 대신하기


H씨는 상대에게 고민거리가 생기면 '함께' 고민하기 보다는 '대신' 해결해 주려 한다. '착한 행동'을

'내가 손해를 보더라도 상대를 위해 무언가를 하는 것.'


이라고 착각하는 것이다. 그건 그냥 맹목적인 헌신일 뿐인데 말이다. 

사연에 첨부된 카톡 대화에서 난 H씨를 볼 수 없었다. 그 대화엔 문제가 생기면 해결해 주고, 영화가 보고 싶다고 하면 알아서 척척 예매까지 하는 남자만 있었다. 무슨 음식 좋아하냐고 묻는 남자, 주말에 비온다고 말하는 남자, 커피 기프트콘 보내니 교환해서 마시라는 남자, 문제가 생기면 언제든 편하게 연락하라는 남자.

"뭐 해요?"
"밥 먹었어요?"
"뭐 먹었어요?"
"아, 이건 아까 물어 봤지."
"도너츠 좋아 해요?"
[H씨께서 던진도너츠 기프트콘을 보내셨습니다.]




상대의 기호만 묻는 건 과거 시종들이 하던 일이다. "뭘 준비할까요? 어디로 모실까요? 차를 좀 타 올까요?" 따위의 질문만 하는 것 말이다. 상대와 자신을 동등하게 놓지 않으면 자신을 알리는 것이 불가능하다. "주말에 사진도 찍을 겸 강화도 갈 생각인데, 벚꽃놀이 어때요?"라는 얘기는 못하고 "주말에 뭐 하세요?"만 묻게 된다. 훗날 심부름센터를 차릴 생각으로 연습하는 게 아니라면, 그 맹목적인 헌신을 즉시 그만두기 바란다.


2. 흠좀무(흠, 좀 무섭군요.)


상대와 나눈 대화를 기억하는 건 훌륭한 일이다. 어느 여성대원은 수요일마다 운동을 간다는 자신의 말을 기억해 준 남자에게 감동했다는 사연을 보낸 적도 있다. 하지만 H씨의 기억력은 뭐랄까, 좀 무서운 경향이 있을 정도로 뛰어나다. 게다가 그렇게 기억해 낸 것을 시도 때도 없이 상대에게 전달하는 부분은 살짝 공포스러울 정도다.

"수요일이라 운동가겠네요?"
"전철 타러 가고 있겠네요. 4분 지났으니, 아직 타진 않았죠?"
"운동 끝났으니 친구랑 얘기하면서 걸어 오는 중이겠네요."
"다이어트 한다고 또 저녁 안 먹었죠? 배 안 고파요?"
"씻고 나왔으려나? 저녁엔 얼굴에 뭐 발라요?"



꽃을 좋아한다는 말에 가끔 꽃다발을 선물하는 것은 좋지만, 시도 때도 없이 꽃다발을 선물하는 건 상대를 부담스럽게 만들 뿐이다. H씨가 저런 행동을 하는 이유는 자신의 일과표가 없기 때문이다. 그는 상대의 일과표에 맞춰 살고 있다.

08:30 - J양 출근할 시간
13:00 - J양 점심식사 할 시간
18:30 - J양 퇴근 할 시간
18:40 - J양 전철 탔을 시간
19:00 - J양 집에 도착했을 시간
19:30 - J양 저녁 먹고 씻을 시간
20:30 - J양 컴퓨터 할 시간
23:00 - J양 졸릴 시간
23:30 - J양 잠들었거나 자려고 누웠을 시간



나도 공쥬님(여자친구)의 스케줄을 꿰고 있지만, 그건 곱셈 문제를 풀기 위해 구구단 외우듯 외우고 있는 거다. 하나하나 꺼내 "8 곱하기 9는 72 맞지?"라며 확인하진 않는다. 저녁시간 즈음해서 "연포탕 먹으러 왔어요. J씨도 저녁 드셔야죠?"라고 물으면 될 걸, H씨는 "이제 저녁 드실 시간이네요?"라고 묻는다. 그러다 뜬금없이 어느 날 저녁, 

"자장가 불러줄까요?"


라는 얘기를 하기도 한다. 솔직히 저 부분 읽다가 난 소름이 좀 돋았다. 묻지 말고 전화통화해서 그냥 불러 줄 수도 있는 것 아닌가. 저건 배려가 아니다. 그냥 하나하나 다 확인받으려 하는 모습일 뿐이다. 군대에서도 급박한 상황에선 '선 조치 후 보고'를 하라고 권하지 않는가. 적이 나타나서 아군 진지로 들어오면 일단 막은 후에 보고를 해야지, "적이 나타났는데, 쏠까요? 쏴도 된다고 말씀하실 것 같은데, 그렇죠?" 따위의 얘기를 하고 있으면 어쩌자는 건가. 이상한 배려는 그만 하고, 책임 질 수 있는 일은 용기 내 행동에 옮기기 바란다.


3. 실수해도 좋으니 시도하자.


미안하지만 H씨는 '착한 남자'라기 보다는 '소심한 남자'에 가깝다. 상대에게 전화 거는 것이 폐를 끼치는 일이 아닐까 걱정하는 건 전형적인 소심한 남자의 모습이다.

상대에게 전화를 거는 것도 어려워하면서 고백하려고 하는 H씨. 그는 사귀기만 하면 모든 것이 변할 거라는 착각을 하고 있다. 고백에 승낙만 받으면 오늘 당장이라도 10년 지기 친구보다 더 가까운 사이가 될 거라 생각하는 것이다. 이에 관한 해결책은 이미 매뉴얼을 통해 이야기 한 적 있다.

- 상대의 나이에서 10살을 뺀 뒤 상대가 그 나이라고 생각하며 대할 것.
- 상대가 한국에 대해 잘 모르는 외국인 소녀라고 생각하며 리드할 것.



상대를 '외국에서 살다 온 열 살 어린 사촌 여동생' 정도로 생각한 뒤 대하길 권한다. 지금처럼 상대를 메시아 모시듯 모시며 상대에게 '은혜로운 말씀' 같은 걸 들으려 해서는 곤란하다. 상황이 이런데,

"그녀가 절 이성으로 보는 건지 아닌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따위의 질문을 해서 뭐하겠는가. 또 고백할 타이밍에 대한 매뉴얼에서 '30분 이상 통화할 수 있을 때'를 기준으로 삼길 권했더니, H씨는

"전화하는 사이가 아니라서요.
통화는 길게 한 적 없고, 카톡은 매일 주고받는데
그런 걸로는 어떻게 안 되나요?
사실 전화를 걸고 싶어도, 전화를 걸 이유가 없어요..."



라는 얘기를 했다. 혼자 뭔가를 다 만들어 상대에게 평가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니 통화 버튼을 누르지 못하는 거다. 남들은 반반씩 서로가 만든 걸 공유하며 전화기가 뜨거워 질 때까지 통화하는데 말이다. 좋은 평가를 받냐 못받냐로 갈리는 발표나 웅변이 아니다. "집에 가는 중인데, 동네에 벚꽃이 다 지고 있길래 전화했어요." 라며 일단 시도하자. 실수해도 좋으니 제발 시도하자. 그 시도에 상대가 답하고, 그 답에 또 H씨가 답하고, 그럼 또 다시 상대가 H씨 말에 답하는 것. 그게 대화다. 


H씨는

"그녀도 저한테 마음이 있는 것 같아 보이시나요?"


라고 물었는데, "예/아니요"로만 대답해야 한다면 난 "아니요"라고 대답하겠다. H씨의 사연에 나온 대화에서 상대는 자유자재로 H씨를 리드한다. 만약 내 친구가 H씨와 같은 사연을 보내고 같은 질문을 했다면 난 이렇게 말할 것 같다.

"야, 저런 리드는 학습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거야.
사양하는 척 하면서 필요한 건 다 요구하고 있잖아.
밝고 긍정적이며 유쾌한 여자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결과적으로 남자 쪽에서 다 퍼주는 관계라서 나는 반대.
무엇보다, 여자가 먼저 연락한 적 있어? 없잖아."



그 유명한 '좋은 오빠동생'이라는 것에 난 한 표 던지겠다. 미안하지만, 아직 고백을 하거나 연애로 도약하려 하는 H씨의 움직임이 포착되지 않은 덕분에 관계가 유지 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아, 그리고 내 친구에게 하는 말이라면 이 말도 꼭 덧붙일 것 같다.

"근데, 만나서 영화 한 번 본 게 전부면서 너 왜 이렇게 들떴어?"


소설가 박민규의 글을 옮기며 매뉴얼을 마친다. 

얼마 전 열린 이종격투기 대회에서의 일이다. 
종이 울리자마자, KO로 승부가 난 경기가 있었다. 
복서 출신의 패자는 습관처럼 풋웍을 밟아보려다 불의의 기습을 당했다. 
선공을 하지 말란 법은 없었지만, 뭐랄까 그런 기분이었다. 
즉 삼가 한수를 배우겠, 에서의 <퍼벅>의 느낌.
정신을 차린 그의 표정에서 나는 그런 문장을 읽을 수 있었다. 
풋웍 좀 해보자, 개새끼야.
수건을 던지지마라 안젤로 던디여.
나 역시 풋웍 한 번 밟아보는게 꿈이다.

- 박민규, <조까라, 마이싱이다> 중에서
 

H씨가 수건 내려 놓고 마음껏 풋웍을 밟았으면 좋겠다.




▲ 사연을 쓴 H씨를 그대로 상대에게 보여주세요. 램프의 요정 지니가 아닌, 진짜 H씨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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