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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글모음/웹유적지성지순례

겁 많은 소심남의 세상 여행 <그냥 걷기>

by 무한 2013. 3. 11.
겁 많은 소심남의 세상 여행 <그냥 걷기>
헤밍웨이의 말로 기억한다.(아닐 수도 있다. 확실하게 찾아서 옮겨 적고 싶은데, 그 책을 빌려 준 까닭에 생각나는 정도로만 옮겨둔다. 아마 <헤밍웨이의 글쓰기>라는 책에 나온 이야기일 것이다.)

Q. 좋은 글이란 어떤 글이죠?
A. 작가의 재미있는 이야기를 기대하고 펼쳤는데,
    그 안에서 한 사람을 발견하게 되는 글이지.



'웹유적지성지순례' 코너에서 처음으로 소개할 <그냥 걷기>가, 바로 그 '한 사람을 발견하게 되는 글'이라고 생각한다. 2009년에 처음 디씨인사이드 '여행-국내 갤러리'에 소개된 이 글은, 군대를 갓 전역한 스물세 살 청년의 전국일주 이야기를 담고 있다.

전국일주를 했다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검색만 해 봐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하지만 그런 글은 개인적인 즐거움의 토로, 또는 자랑의 나열이거나, 누군가가 소개한 곳의 이야기를 소개 받은 대로 옮겨 적은 것이 대부분이다. 백과사전처럼 잔뜩 적어두었기에 뭔가 있어 보이긴 하는데, 재미는 없다.

그러나 <그냥 걷기>는 다르다. 마지막 편에 적힌 이야기를 잠시 보자.

"우와, 두 달이 넘으셨으면 정말 안 가본 데가 없겠군요.
그럼 전국 유명한 곳은 다 보고 오셨겠군요!"

나는 가본 곳이 없었다. 
본 것도 없었다. 
유명한 곳? 알지도 못한다. 
내게 아주 기대하고 있는 듯한 사람들의 표정에 
나는 자신이 없어졌고 밝았던 목소리는 조금씩 가라앉았다. 
어디를 걸어왔냐는 질문에 어느 지역이라고 대답을 하면 
"거기는 00가 유명하죠. 그걸 보고 오셨겠군요.
오! 거기가서는 XX에 다녀오셨겠군요.
아, 거기라면…."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나는 그냥 걷기만 했으니….

- <그냥 걷기 20-2> 중에서
 

포장이 없다. 구경 한 번 하고 나선 전부 다 아는 것처럼 떠드는 그런 글이 아니다. 사실은 별 감흥 없었으면서 대단히 감탄 한 듯 요란을 떨지도 않는다. 글쓴이는, 남들처럼 유적지 사진을 찍어 그 아래 역사적인 사실들을 복사해서 붙여넣기 하는 대신, 물티슈 사진을 찍어서 올렸다. 손 더러워지면 닦고, 라면국물 흘리면 닦고, 참 잘 쓴 물티슈라며 마지막 한 장을 뽑아 쓰기 전에 기념사진을 찍었다. 걸어가는 길에 죽어 있는 참새들이 많이 보인다며 참새 사진을 찍고, 로드킬 당한 야생동물들을 보며 '죽은 야생동물의 삶과 나의 삶'에 대해 고찰하기도 한다. 


머리와 가슴, 그리고 다리


아래는 <그냥 걷기> 1편의 도입부다.

더 이상 미룰 수 없다
나는 오늘 꼭 출발해야한다 미룰만큼 미뤘다 오늘은 꼭 가야한다
언젠가부터 해보고 싶어진 일이다
내 발로 우리나라를 한바퀴 걸어보고 싶다
꼭 해보고 싶었다
뭐 하나 제대로 해본 거 없이 살아왔다
이 역시 혼자 속으로 계획만 세워놓고 속에서 끝낼까봐 걱정됐다
어디 누구한테 말도 안했다. 또 말만 하고 안할까봐..

- <그냥 걷기 1> 중에서
 

신문에서 본 내용인데, 머리는 안정을 추구한다고 한다. 머리를 연구한 사람들에 따르면 '작심삼일'도 '안정된 상태'를 벗어나지 않으려는 머리의 속성 때문이라고 한다. 새로운 것을 시도하는 것 대신 평소의 상태로 있는 것이 가장 효율적이라고 '머리'는 생각하는 것이다.

그에 반해 가슴은 자꾸 새로운 것을 갈망한다. 굶주림에 시달리는 사람처럼 그 시선이 향한 것을 손에 쥐고 싶어 하고, 더 들여다보고 싶어 하고, 맛보고 싶어 한다. 때문에 '안정'을 추구하는 머리와는 사이가 좋지 않다.

다리는 아무 것도 주장하지 않지만, 가슴과 더 친하다. 때문에 가슴으로 사는 사람의 다리는, 머리로 사는 사람의 다리보다 바쁘다.

정상적으로 세상을 살기 위해선 머리로 사는 삶과 가슴으로 사는 삶의 비율이 최소한 5 : 5는 되어야 한다. 부모의 보살핌을 받고 있을 때야 10 : 0이 되어도 크게 문제는 생기지 않는다. 그 나머지 부분을 모두 부모가 감당할 테니 말이다. 노멀로그 연애 매뉴얼에서 '정신적 독립, 경제적 독립'을 자주 이야기 하는데, 그 부분도 바로 저 '삶의 방식'과 관련이 있다. 5 : 5의 비율을 맞추지 못한 사람은 필연적으로 상대에게 나머지 부분을 바라게 된다.

"하고픈 것도 없고, 되고픈 것도 없는데 그래도 5 : 5를 맞춰서 살아야 하나요?"


라고 묻는 사람이 있다면, "그 5라는 비율은, 살아있기 위해 다리를 움직이는 것을 의미합니다."라고 대답하겠다.

<그냥 걷기>의 글쓴이는 '머리로 사는 삶'을 살던 사람이다. 그런 그가 '다리로 사는 삶'을 경험하려 집을 나섰다. 보호 받던 삶에서 스스로 지켜가는 삶을 살게 된 모든 이들은 -다시 말해, 아이로 살다가 어른으로 살게 된 모든 이들은- 글쓴이의 글에서 자신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여린마음동호회 회원이네?


자의식이 풍부하기로 유명한데다가, 부딪혀 보기도 전에 일단 상상의 날개를 펼치는 상상꾸러기들. 우리 여린마음동호회원들을 설명하는 말이다. 키보드에 비유하자면 '백스페이스'같은 사람들이고, 마우스에 비유하자면 '뒤로가기 버튼' 같은 사람들이다. 

사회에선 여린마음동호회원들을 소극적이며 수동적인 사람이라고 정의하며 '활동가' 타입과는 정반대의 '개조되어야 할' 존재처럼 여긴다. 하지만 그런 사회의 냉대에 기죽지 말자. 여린마음동호회원들이 없으면 지구의 평화도 없다. 다른 시각에서 보자면 도무지 예의와 인내와 양보와 배려를 모르는 '활동가'들은 투우장의 황소 같을 뿐이다.('활동가'나 '황소'의 비유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지하생활자의 수기>에서 빌려왔음을 밝힌다. 도스토예프스키는 19세기를 살다 간 여린마음동호회 28대 회장이다.)

물론 여린마음동호회 회원들이 한 번 비뚤어져 버리기 시작하면 기형적으로 냉소만 짓는 이상한 상태에 빠질 수도 있긴 한데, 여기선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니 이 이야기는 생략하자. 

아래는 <그냥 걷기 2>에 나오는 문장들이다.


이런 곳에서 자면 어디선가 사람이 나타나서 내 짐을 훔쳐가고
훔쳐가는 김에 어디 굴러다니는 병이라도 깨서 찌르고 흔적없이 사라진다
라는 일이 언제라도 일어날 수 있다고 병신같이 믿고 있었다


물은 주유소에서 얻었다
물 안주면 어떡하지 걱정했는데 세상은 그리 삭막하지가 않았다
문제는 다 내 엉뚱한 편견 착각 겁많음 탓

- <그냥 걷기 2> 중에서
 

아직까지 냉소와 모욕이 스스로를 향하고 있는, 그러니까 '타인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안전한 상태'임을 잘 보여주는 부분이다. 저 행위에 염증을 느끼고 화살을 외부로 돌리는 순간, 여린마음동호회 회원들은 상대에게 치명상을 입힐 수 있는 '인간 흉기'가 되고 만다. 그간 스스로를 향한 냉소와 모욕으로 자신의 속살을 들여다봤던 회원들은, 방향을 바꿔 상대의 가장 은밀한 부분까지도 드러내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가장 민감한 부분의 피부를 꼬집으면 그 고통이 배로 커지는 것처럼, 회원들은 남의 어느 부분을 꼬집어야 가장 아픈지 알고 있다.

'자의식아 이거 아니잖아. 위에서 "이 이야기는 생략하자."라고 했는데 냉소와 모욕 얘기를 여기서 또 하면 어떡해. 사람들이 내가 삼천포로 빠졌다고 할 거 아냐. 이러지 마. 지금은 그냥 <그냥 걷기>의 글쓴이가 같은 여린마음동호회 회원이라 반갑다는 얘기만 하면 돼. 자꾸 나서지 마, 자의식아.'

우린 대개 이렇게 논다.


유적지 링크


링크를 걸려고 글을 찾다가, 안타까운 사실을 하나 알게 되었다. 파란 블로그 서비스 종료로 인해 <그냥 걷기>에 첨부되어 있던 사진이 모두 '엑박'처리 된 것이다. 이게 어느 정도로 아쉬운 일이냐면, 길거리에서 원빈을 만나 함께 인증샷을 찍고 싸인까지 받았는데, 저장버튼을 누르지 않아 인증샷이 허공으로 사라져 버린 것 정도의 레벨이다.

"어차피 원빈하고 같이 사진 찍었으면
본인 얼굴은 오징어처럼 나왔을 텐데, 잘 된 일 아닌가?"



듣고 보니 그러네? 그런데 자의식아, 가만히 있으랬잖아.

아래는 링크! (클릭하시면 새 창으로 글이 뜹니다.)

그냥 걷기 1부
그냥 걷기 2부
그냥 걷기 3부
그냥 걷기 4부
그냥 걷기 5,6부
그냥 걷기 7부
그냥 걷기 8부
그냥 걷기 9부
그냥 걷기 10부
그냥 걷기 11부
그냥 걷기 12부
그냥 걷기 13부
그냥 걷기 14부
그냥 걷기 15부
그냥 걷기 16부
그냥 걷기 17부
그냥 걷기 18부
그냥 걷기 19부
그냥 걷기 20-1부
그냥 걷기 20-2부

<그냥 걷기>의 마지막 편을 읽으며, 날 바라보며 우는 동생을 보는 것 같아 나도 울었다. <그냥 걷기>는 정말이지 전설이라기보다는 레전드다.(응?) 자신이 여린마음동호회 회원인지 아닌지를 알아보기 위해서라도 <그냥 걷기>를 일독하길 권한다. 1편부터 정주행 해 마지막 편에 도달했을 때, 목에 매운 깍두기 걸린 느낌이 들며 눈앞이 흐려지면, 그대도 여린마음동호회 회원이 맞다.



▲ 토요일 발행 예고하곤 늦어서 죄송합니다. 자의식 드립을 봐서라도 용서를 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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