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남친에게 다시 사귀자는 말을 듣고 싶은 여자
안 힘들어요? 그렇게 살면 엄청 외롭고 힘들 텐데, 안 그래요? 나보고 지영씨처럼 살라고 하면 당장 교회나 절에라도 나가야 살 수 있을 것 같아요. 잠깐이라도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서 쉴 곳은 있어야 하잖아요. 지영씨처럼 아무에게도 기댈 수 없다고 생각하며, 동시에 '괜찮아. 난 서 있는 것에 익숙하니까.'라고 자기 최면을 걸어 계속 서 있으면, 내 남은 삶이 모두 산 위로 바위를 굴려 올려야 하는 시지프스의 형벌처럼 느껴질 것 같은데, 정말 괜찮아요?
<컬투쇼>에 이런 사연이 나온 적이 있어요. 어느 고등학교에 야간자율학습 조퇴를 잘 시켜주는 선생님이 있었어요. 어느 날 그 선생님 반 학생 셋이 야구를 보러 가기 위해 야간자율학습 조퇴를 계획했어요. 조퇴를 잘 시켜주는 선생님이었지만, 아무래도 거짓말로 아프다고 해야 하니까 그 셋은 긴장했죠. 첫 번째 학생이 선생님께 가서 목이 아프다고 말했어요. 선생님은 조퇴를 허락했죠. 그 다음으로 두 번째 학생이 들어갔는데, 너무 떨려서 말이 잘 나오질 않는 거예요. 그래서
까지만 했는데도, 선생님은 조퇴를 허락했어요. "어, 가."하시면서요. 끝으로 세 번째 학생이 들어갔는데, 핑계를 댈 게 없어서 뭐라고 말하나 고민하다가, 손가락이 저리니까 조퇴 좀 하겠다고 했어요. 역시 선생님은 쿨하게 조퇴를 허락했죠.
셋은 재미있게 야구를 보고 나서 다음 날 학교에 갔어요. 마침 교탁 위에 출석부가 있기에, 그들은 자신들의 조퇴사유가 뭐라고 적혀 있나 궁금해서 펼쳐 보았죠. 첫 번째 학생의 사유는 '호흡장애', 두 번째 학생의 사유는 '언어장애', 세 번째 학생의 사유는 '풍'이라고 적혀 있었어요.
이거 실시간으로 라디오에서 들었을 땐 빵 터졌는데, 이렇게 다시 옮겨 적으니까 재미없는 것 같네요. 이미 알고 있는 얘기라 그런가. 여하튼 저는 지영씨의 사연을 읽으며 저 선생님이 떠올랐어요. 지영씨도 구남친에게 여러 병명으로 확진을 내렸거든요. 아, 그리고 서른 중반을 향해가는 제 지인도 떠올랐어요. 그 지인은 남잔데, 지영씨처럼 자신이 사귀는 사람들에 대해 분석을 하거든요. 미드 <멘탈리스트>와 <크리미널 마인드>에 열광하는 지인이에요.
그 지인이 만나는 여자들은 모두 정신적인 장애를 가지고 있어요. 물론 정말로 가지고 있는 게 아니라, 지인의 말에 의하면 그렇다는 거예요. 부모님과 관련된 이야기가 나오면 이상증세를 보이는 여자도 있었고, 동생에게 이상한 피해의식을 가지고 있는 여자도 있었으며, 현실감각이 떨어지는 여자, 남자를 조종하려는 여자, 갈등의 순간이 찾아오면 바로 패닉에 빠져버리는 여자 등이 있었죠. 지인이 정신과 전문의냐고요? 아뇨. 그림 그리는 지인이에요. 꼬꼬마 시절부터 <카이지>같은 만화 좋아하고, <맨워칭>같은 거 읽으면서 나름 연구를 많이 했다고 해요.
근데 제가 그 지인의 분석을 들으면서 의문을 가졌던 게, 어떤 증상이 나타났다면 그것에 대한 원인이 있을 거잖아요. 쌀밥에 고깃국 잘 먹고 누워서 좀 쉬다가 갑자기 유기불안을 느끼는 사람 없는 것처럼 말이에요. 그래서 얘기를 듣다 보면, 그녀들이 보이는 증상의 발화점이 된 건 지인의 행동인 경우가 많거든요. 예컨대 보통의 여자가 남자친구로부터 "나 사실 구여친이랑 연락한다. 이걸 너에게 숨기고 싶지 않아서 이렇게 솔직히 얘기하는 거다."라는 말을 들으면, 예상도 못했던 그 일 때문에 패닉에 빠질 수 있는 거잖아요. 그럼 이후 여자의 모든 행동을 '유기불안으로 인한 히스테리'로 볼 게 아니라, 원인을 제공한 지인의 행동이 잘못된 것이라는 걸 먼저 봐야죠. 그런데 지인은 안 그런단 말이에요. 자신이 알고 있는 그녀의 가족사를 꺼내 놓으며, 그녀의 불행했던 유년기가 지금 저 증상을 유발했다고 마음대로 진단내리고 말아요.
지영씨가 구남친에 대해 이야기 했던 것 중에, 하나만 가져와 볼게요.
그런 식으로 진단을 내리면, 사람 셋이 걸어갈 때 세 개의 병명이 나오게 되는 것 아닐까요? 며칠 전에 저희 옆집 아주머니께서 음식을 가져다 주셨는데, 그럼 그건 어떤 정신적 장애 때문에 그런 건가요? 그리고 전 오늘 아파트 장이 서는 날이라 나가서 와플을 사 먹을 예정인데, 몇 주 전부터 와플에 꽂힌 저는 어떤 정신적 장애를 가지고 있는 건가요? 아, 그리고 위에서 말한 분석적인 제 지인은 어떤 정신적 장애를 가지고 있는 건가요? 그에 대한 지영씨의 진단이 나오면, 그 진단을 지영씨에게 똑같이 적용해도 괜찮은 건가요?
제가 종종 놀라는 게 뭐냐면, 지영씨처럼 사람들에 대해서 분석하는 독자 분들이 종종 있거든요. 그런데 그 분석을 보면 거기엔 제게 해당되는 부분도 상당부분 포함되어 있어요. 제가 그 분석들에서 저와의 유사성을 찾아내는 것도 누군가 이미 어떤 현상으로 정의해 두었을 걸요. 바넘 효과 같은 걸로 말예요.
글쎄요. 얼마 전에도 제 지인 하나가 '갑상선 암'인 것 같다는 판정을 받았거든요. 역시 의사에게 받은 건 아니고, 회사 동료에게 받았어요. TV에서 본 적 있는데, 갑상선 암 증상과 제 지인의 증상이 거의 같았다면서 말예요. 병원에 가서 정확한 진찰을 받았을 때, 지인은 '후두염'이라는 진단을 받았어요. 증세는 비슷할지 모르지만, '갑상선 암'과 '후두염'은 분명 다르지 않나요? 그 치료법과 위험성도 다를 거고 말예요.
이미 아실 수도 있겠습니다만, '데이비드 로젠한'의 실험 얘기도 한 번 살펴보세요. 제정신으로 정신병원 들어가는 실험, 그리고 그에게 정신과 의사가 제안한 실험에서의 결과가 흥미로우니까요. '하스토프와 캔트릴의 실험'도 같이 살펴보세요. 지영씨의 사연과 꼭 맞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명확한 사실'을 두고도 목격자의 주관이 개입되면 정반대의 결과가 나올 수 있다는 걸 증명해 낸 실험이니까요.
혹시 '데카르트'의 생애에 대해 아시나요? 저도 어느 다큐에서 잠깐 본 건데, 데카르트는 지금의 기준에서 보자면 게으르고 나약한 사람이거든요. 일찍 일어나는 새가 벌레를 잡는다고들 하는데, 일단 데카르트는 오후가 되어서야 일어났어요. 이걸 두고 그의 전기를 쓴 사람 중 하나는 '그가 천성적으로 사색하게 되어 있는 정신을 타고 났기 때문'이라고 표현했는데, 그건 그의 삶에 대한 결론이 나고 나서 갖다 붙였으니까 그럴듯한 거지, 아직 아무 결실이 없었을 때에는 병약하고 게으른 걸로 여겨졌을 가능성이 높잖아요.
지영씨가 아마 널리 알려지기 전의 데카르트를 만났다면, 그에게 비전이 없다고 생각하며 여려 병명들을 갖다 붙였을 수도 있어요. 그가 늦게까지 침대에 누워 있다가 천장에 있는 파리를 보며 X축과 Y축을 이용해 좌표를 만드는 방법을 창안해 낼 거라는 건, 전혀 상상도 못한 채 말이에요. 그에게 대인관계의 중요성에 대해 강하게 역설하며 혼자 생각만 하지 말고 어서 사회에 융화되라고 떠밀었다면, 그의 인생은 어떤 모습이었을지에 대해서도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저는 많은 사람들이 공들여 조사하고 연구해 이끌어낸 결론들에 대한 무용론을 말하고 싶은 게 아니에요. 전 오히려 그런 부분들에 흥미를 가지고 있고, 그들이 낸 결론들을 존중해요. 특히 그들이 그런 분류를 더욱 정밀하게 나누고 반복해서 연구하는 것이, 균형이 맞지 않아 피로가 축적되고 있는 부분들이 안정을 찾을 수 있도록 조율해 주는 것과 같다는 점에서, 높은 가치가 있다고 생각해요.
바로 이 부분이 가장 중요하다고 저는 생각하거든요. 현재 자신의 마음상태 때문에 불편을 느끼는 사람을 돕기 위해 분류와 연구를 반복하고 있다는 점. 그리고 그것과 관련된 공부를 하다 보면, 별을 바라볼 때와 비슷하게 제 자신의 위치를 돌아보게 되기도 해요. 내 평생을 걸고 지켜나갈 신념이, 또는 내가 살아온 지금까지의 여정이, 정신의학의 용어로 쓰여진 아주 짧은 문장 하나, 혹은 단어 하나로 설명될 수 있으니 말이에요. 그때 느껴지는 그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란….
말이 잠시 샜는데, 왜 그런 얘기 있잖아요. 같은 칼이라도 어머니의 손에 들린 칼은 사람을 이롭게 하지만, 강도의 손안에 있는 칼은 사람을 무섭게 하거나 심하면 죽이기까지 한다는 얘기. 지영씨가 공들여 배워온, 또는 연구해온 것들을 어떻게 사용해야 이로운지도 한 번 생각해 보세요. 누군가에게 실망했을 때, 또는 누군가의 단점을 보았을 때 오로지 그들을 '이상한 사람'으로 분류하기 위해 사용하는 건, 분명 이로운 사용이 아니라고 저는 생각해요.
서두에서 물었던 걸 다시 한 번 물을게요. 안 힘들어요? 남이 무슨 말을 할지, 어떤 생각을 할지까지 모두 파악하면서 살려면 인생의 재미도 반감될 것 같은데, 안 그래요? 지영씨가 신청서에 적은 글을 보면, 어떻게든 마술의 트릭을 알아내기 위해 매의 눈으로 마술사의 손만 응시하고 있는 사람 같거든요. 남자친구에 대해서도 그렇고, 또 저에 대해서도 그래요.
라면서 계속 제가 지영씨와 같은 생각을 하도록 유도하시잖아요. 이왕 말이 나왔으니 좀 더 솔직하게 말해도 될까요? 전 지영씨가 염려하며 원천봉쇄하려고 애쓴 이야기들을 할 생각이 전혀 없어요. 오히려 전 지영씨의 연애에 대해
라고 생각해요. 지영씨가 신청서에 적은 말 중에 경악스러운 말 세 가지를 함께 보자고요.
매뉴얼을 마쳐야 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으니 짧게 요점만 말할게요. 첫째, 저는 지영씨가 '갑'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둘을 '갑'과 '을'의 관계로 본다면 지영씨는 '을'이에요. 이건 처음부터 그랬어요. 제가 보기엔 단 한 번도 지영씨는 '갑'인 적이 없어요. 그래서 전 지영씨가, 상대를 환자 취급하며 혼자 '갑'이라고 정신승리를 하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요. 아무리 봐도 지영씨의 행동은 '그렇게 하지 않으면 상대가 떠나갈까 봐'한 행동으로 보이는데, 지영씨는 그걸 '내가 상대를 봐준 것'이라고 말해요. 지영씨 속으로야 '이건 그냥 그런 척 하면서 넘어가 주는 거다. 원래의 나라면 이런 꼴 못 봐준다.'라고 생각할 수 있겠죠. 그런데 '원래의 지영씨'의 모습으로 상대를 대한다고 해서 이 상황과 별반 다를 게 없거든요. 전 이게 "내가 제대로 마음만 먹으면 이것쯤은 일도 아니다. 마음을 안 먹어서 그렇지."라고 착각하거나 허세를 부리는 것과 뭐가 다른지 모르겠어요.
둘째, 사람은 딱 간략하게 정의된 만큼의 의미만을 가지는 게 아니거든요. 저와 친하게 지내는 김순옥할머니(83세, 무직)만 해도, 객관적으로 따지면 할머니가 모든 면에서 저보다 약자에요. 김할머니는 말상대가 되어 줄 누군가가 필요하고, 또 어디를 가시려고 할 때 모시고 갈 누군가가 필요하죠. 저와 김할머니의 관계를 보면, 늘 제가 도움이 될 일밖에 없는 거잖아요. 할머니께서 절 대신해 어떤 일을 해주시거나, 제 부탁을 받고 절 도와주실 수는 없는 입장이시니까요. 그런데 아니에요. 제가 한 모든 수고보다, 할머니께서 제게 주시려고 힘들게 슈퍼까지 가서 사오셔선, 가지고 계시다 주시는 크림빵 하나의 밀도가 더 높아요. 천만 원 있는 사람이 내놓는 백만 원과 이백만 원 있는 사람이 내놓는 백만 원의 밀도가 다른 것처럼 말이에요. 지영씨 설마 이것도, "자기 상태가 너무 초라하니까 그걸 어떻게든 탈피해 보려고 내미는 크림빵."이라고 분석하실 건가요?
셋째, 지영씨는 진실하지 못해요. 거의 모든 감정을 다 숨기고 '좋은 여자친구'를 연기했잖아요. 이해하는 척, 배려하는 척, 응원하는 척, 사랑하는 척만 했어요. 지영씨가 그를 전부 읽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말이에요. 지영씨가 쓴 문장을 하나 가져다 볼까요.
저게 그를 대하는 지영씨의 태도였거든요. 헤어진 이후 구남친이 연락을 해오는 지금 상황에서도, 지영씨는 그 연락에 대해 '이게 구남친들 특유의 행동 같지만, 그가 나에게 헌신한 적 있으니 그를 위해 잠시 참아주는 거라 생각하며 받아주자.'라는 마음을 가지고 있거든요. 단 한 번이라도 머리로 계산하지 않고 솔직한 마음을 그에게 보여준 적 있나요? 예상되는 반응을 고려한 뒤 '모범답안'이라고 생각되는 말을 한 거 말고, 지영씨의 진심을 그에게 털어 놓은 적 있나요? 없잖아요. 착각하지 마세요. 그건 배려나 인내가 아니에요. 상대를 기만한 것일 뿐이지. "오빠가 그런 말 할 때마다 속상해."라고 말한 적 없잖아요. '속상하지 않은 척'만 했을 뿐이지.
지영씨, 세상에 나에 대해서 정말 잘 알고 있는 한 사람은 있어야 하지 않겠어요? 그래야 내가 너무 속상할 때 기대서 울 수도 있는 거고, 힘들다는 걸 구구절절 다 말하지 않아도 그가 내 어깨 두드려 주는 거고, 혼자 꽁해 있을 때 다가와선 기분 풀라며 내 손을 잡을 수도 있는 거잖아요. 그럴 수 있는 친구가 이미 있다면 좋은 일이지만, 내 남은 평생을 함께 할 사람이 그럴 수 있는 사람이라면 더 좋은 거고 말이에요.
제가 지영씨에게 자신있게 이야기 할 수 있는 한 가지가 있어요. 지영씨가 누군가를 읽고 있을 때, 그 누군가 역시 지영씨를 읽을 수 있어요. 물론, 간단한 거짓말 정도로 상대를 잠깐 속일 수는 있죠. 상대가 좀 둔한 편이라거나 이쪽을 신뢰하고 있는 상황이라면 꽤 오래 속일 수도 있고 말이에요. 그런데 결국엔 그 속임수를 상대도 눈치 채요. 아무리 잘 숨겨도 마음은 조금씩 행동으로 드러나고 말거든요. 성실도의 변화나 영혼 없는 리액션 같은 행동의 축적, 그리고 점점 드러나고 마는 본색 등으로 상대도 알게 돼요. 지영씨는 상대가 눈치 채지 못하도록 잘 감춰왔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 둘의 연애는 작년 12월에도 산소호흡기를 끼고 있었어요. 미안하지만 그때부터 두 사람 모두 이별을 회피해 오고 있었던 거지, 사랑하고 있었던 건 아니라고 저는 생각해요.
화해는 속마음까지를 다 털어 놓은 다음에야 가능하다는 거, 혹시 아세요? "네가 이러이러한 이유로 이러이러한 행동을 했었다고 생각했다."라고 말해야, 상대도 거기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스스로도 대책을 세우거든요. 그런 과정이 없이 단순히 미안하다고 말하며 하는 사과는 일시적으로 봉합해 두는 것과 같아요. 해결되지 않은 불씨들은, 다시 똑같은 문제를 발생시키죠. 이게 당장은 껄끄럽지만, 이후 서로 더 조심하며 서로를 존중하게 된다는 점에서 훌륭한 화해 방법이에요.
제 친구가 목에 힘을 준 이후 그 친구와의 사이가 멀어지면, 저는 그 친구에게 "네가 목에 힘을 주는 게 나는 불편하다."라고 말하거든요. 모두와 이런 방식의 화해를 할 필요는 없겠지만, 한두 해 보고 말 사람이 아니라면 내 솔직한 심정을 말하고 그에게 협조를 요청하는 게 좋아요. 안 그러면 겉으론 웃으며 안부를 묻지만, 속으로는 '저 오만한 자식'이라고 욕만 하게 되거든요. 또 그렇게 말함으로 인해서 "나도 너만큼 상황을 파악하고 있다. 네가 보고 있는 걸 나도 똑같이 본다."라는 걸 전달할 수도 있고 말예요. 상대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듣기 위해 다른 연기를 시작하시기 보다는, 먼저 화해를 하시길 권해드리고 싶네요. 행운을 빌어요.
▲ 타인의 기분을 적당히 맞춰 주면서 살면, 내 주변에도 역시 그러는 타인들 밖에 남지 않는 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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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힘들어요? 그렇게 살면 엄청 외롭고 힘들 텐데, 안 그래요? 나보고 지영씨처럼 살라고 하면 당장 교회나 절에라도 나가야 살 수 있을 것 같아요. 잠깐이라도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서 쉴 곳은 있어야 하잖아요. 지영씨처럼 아무에게도 기댈 수 없다고 생각하며, 동시에 '괜찮아. 난 서 있는 것에 익숙하니까.'라고 자기 최면을 걸어 계속 서 있으면, 내 남은 삶이 모두 산 위로 바위를 굴려 올려야 하는 시지프스의 형벌처럼 느껴질 것 같은데, 정말 괜찮아요?
1. 라디오 사연과 내 지인 이야기.
<컬투쇼>에 이런 사연이 나온 적이 있어요. 어느 고등학교에 야간자율학습 조퇴를 잘 시켜주는 선생님이 있었어요. 어느 날 그 선생님 반 학생 셋이 야구를 보러 가기 위해 야간자율학습 조퇴를 계획했어요. 조퇴를 잘 시켜주는 선생님이었지만, 아무래도 거짓말로 아프다고 해야 하니까 그 셋은 긴장했죠. 첫 번째 학생이 선생님께 가서 목이 아프다고 말했어요. 선생님은 조퇴를 허락했죠. 그 다음으로 두 번째 학생이 들어갔는데, 너무 떨려서 말이 잘 나오질 않는 거예요. 그래서
"서…선생님, 저…, 저…."
까지만 했는데도, 선생님은 조퇴를 허락했어요. "어, 가."하시면서요. 끝으로 세 번째 학생이 들어갔는데, 핑계를 댈 게 없어서 뭐라고 말하나 고민하다가, 손가락이 저리니까 조퇴 좀 하겠다고 했어요. 역시 선생님은 쿨하게 조퇴를 허락했죠.
셋은 재미있게 야구를 보고 나서 다음 날 학교에 갔어요. 마침 교탁 위에 출석부가 있기에, 그들은 자신들의 조퇴사유가 뭐라고 적혀 있나 궁금해서 펼쳐 보았죠. 첫 번째 학생의 사유는 '호흡장애', 두 번째 학생의 사유는 '언어장애', 세 번째 학생의 사유는 '풍'이라고 적혀 있었어요.
이거 실시간으로 라디오에서 들었을 땐 빵 터졌는데, 이렇게 다시 옮겨 적으니까 재미없는 것 같네요. 이미 알고 있는 얘기라 그런가. 여하튼 저는 지영씨의 사연을 읽으며 저 선생님이 떠올랐어요. 지영씨도 구남친에게 여러 병명으로 확진을 내렸거든요. 아, 그리고 서른 중반을 향해가는 제 지인도 떠올랐어요. 그 지인은 남잔데, 지영씨처럼 자신이 사귀는 사람들에 대해 분석을 하거든요. 미드 <멘탈리스트>와 <크리미널 마인드>에 열광하는 지인이에요.
그 지인이 만나는 여자들은 모두 정신적인 장애를 가지고 있어요. 물론 정말로 가지고 있는 게 아니라, 지인의 말에 의하면 그렇다는 거예요. 부모님과 관련된 이야기가 나오면 이상증세를 보이는 여자도 있었고, 동생에게 이상한 피해의식을 가지고 있는 여자도 있었으며, 현실감각이 떨어지는 여자, 남자를 조종하려는 여자, 갈등의 순간이 찾아오면 바로 패닉에 빠져버리는 여자 등이 있었죠. 지인이 정신과 전문의냐고요? 아뇨. 그림 그리는 지인이에요. 꼬꼬마 시절부터 <카이지>같은 만화 좋아하고, <맨워칭>같은 거 읽으면서 나름 연구를 많이 했다고 해요.
근데 제가 그 지인의 분석을 들으면서 의문을 가졌던 게, 어떤 증상이 나타났다면 그것에 대한 원인이 있을 거잖아요. 쌀밥에 고깃국 잘 먹고 누워서 좀 쉬다가 갑자기 유기불안을 느끼는 사람 없는 것처럼 말이에요. 그래서 얘기를 듣다 보면, 그녀들이 보이는 증상의 발화점이 된 건 지인의 행동인 경우가 많거든요. 예컨대 보통의 여자가 남자친구로부터 "나 사실 구여친이랑 연락한다. 이걸 너에게 숨기고 싶지 않아서 이렇게 솔직히 얘기하는 거다."라는 말을 들으면, 예상도 못했던 그 일 때문에 패닉에 빠질 수 있는 거잖아요. 그럼 이후 여자의 모든 행동을 '유기불안으로 인한 히스테리'로 볼 게 아니라, 원인을 제공한 지인의 행동이 잘못된 것이라는 걸 먼저 봐야죠. 그런데 지인은 안 그런단 말이에요. 자신이 알고 있는 그녀의 가족사를 꺼내 놓으며, 그녀의 불행했던 유년기가 지금 저 증상을 유발했다고 마음대로 진단내리고 말아요.
지영씨가 구남친에 대해 이야기 했던 것 중에, 하나만 가져와 볼게요.
"내 작업에 대해 그가 헌신적으로 도움을 주었음.
자신의 일을 제치고 도와주는 것이 한편으로는 고마웠지만,
이것이 그의 회피성 인격장애의 일부인 것을 알고 있음."
자신의 일을 제치고 도와주는 것이 한편으로는 고마웠지만,
이것이 그의 회피성 인격장애의 일부인 것을 알고 있음."
그런 식으로 진단을 내리면, 사람 셋이 걸어갈 때 세 개의 병명이 나오게 되는 것 아닐까요? 며칠 전에 저희 옆집 아주머니께서 음식을 가져다 주셨는데, 그럼 그건 어떤 정신적 장애 때문에 그런 건가요? 그리고 전 오늘 아파트 장이 서는 날이라 나가서 와플을 사 먹을 예정인데, 몇 주 전부터 와플에 꽂힌 저는 어떤 정신적 장애를 가지고 있는 건가요? 아, 그리고 위에서 말한 분석적인 제 지인은 어떤 정신적 장애를 가지고 있는 건가요? 그에 대한 지영씨의 진단이 나오면, 그 진단을 지영씨에게 똑같이 적용해도 괜찮은 건가요?
2. 백 번 양보해 지영씨가 맞다 해도….
제가 종종 놀라는 게 뭐냐면, 지영씨처럼 사람들에 대해서 분석하는 독자 분들이 종종 있거든요. 그런데 그 분석을 보면 거기엔 제게 해당되는 부분도 상당부분 포함되어 있어요. 제가 그 분석들에서 저와의 유사성을 찾아내는 것도 누군가 이미 어떤 현상으로 정의해 두었을 걸요. 바넘 효과 같은 걸로 말예요.
글쎄요. 얼마 전에도 제 지인 하나가 '갑상선 암'인 것 같다는 판정을 받았거든요. 역시 의사에게 받은 건 아니고, 회사 동료에게 받았어요. TV에서 본 적 있는데, 갑상선 암 증상과 제 지인의 증상이 거의 같았다면서 말예요. 병원에 가서 정확한 진찰을 받았을 때, 지인은 '후두염'이라는 진단을 받았어요. 증세는 비슷할지 모르지만, '갑상선 암'과 '후두염'은 분명 다르지 않나요? 그 치료법과 위험성도 다를 거고 말예요.
이미 아실 수도 있겠습니다만, '데이비드 로젠한'의 실험 얘기도 한 번 살펴보세요. 제정신으로 정신병원 들어가는 실험, 그리고 그에게 정신과 의사가 제안한 실험에서의 결과가 흥미로우니까요. '하스토프와 캔트릴의 실험'도 같이 살펴보세요. 지영씨의 사연과 꼭 맞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명확한 사실'을 두고도 목격자의 주관이 개입되면 정반대의 결과가 나올 수 있다는 걸 증명해 낸 실험이니까요.
혹시 '데카르트'의 생애에 대해 아시나요? 저도 어느 다큐에서 잠깐 본 건데, 데카르트는 지금의 기준에서 보자면 게으르고 나약한 사람이거든요. 일찍 일어나는 새가 벌레를 잡는다고들 하는데, 일단 데카르트는 오후가 되어서야 일어났어요. 이걸 두고 그의 전기를 쓴 사람 중 하나는 '그가 천성적으로 사색하게 되어 있는 정신을 타고 났기 때문'이라고 표현했는데, 그건 그의 삶에 대한 결론이 나고 나서 갖다 붙였으니까 그럴듯한 거지, 아직 아무 결실이 없었을 때에는 병약하고 게으른 걸로 여겨졌을 가능성이 높잖아요.
지영씨가 아마 널리 알려지기 전의 데카르트를 만났다면, 그에게 비전이 없다고 생각하며 여려 병명들을 갖다 붙였을 수도 있어요. 그가 늦게까지 침대에 누워 있다가 천장에 있는 파리를 보며 X축과 Y축을 이용해 좌표를 만드는 방법을 창안해 낼 거라는 건, 전혀 상상도 못한 채 말이에요. 그에게 대인관계의 중요성에 대해 강하게 역설하며 혼자 생각만 하지 말고 어서 사회에 융화되라고 떠밀었다면, 그의 인생은 어떤 모습이었을지에 대해서도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저는 많은 사람들이 공들여 조사하고 연구해 이끌어낸 결론들에 대한 무용론을 말하고 싶은 게 아니에요. 전 오히려 그런 부분들에 흥미를 가지고 있고, 그들이 낸 결론들을 존중해요. 특히 그들이 그런 분류를 더욱 정밀하게 나누고 반복해서 연구하는 것이, 균형이 맞지 않아 피로가 축적되고 있는 부분들이 안정을 찾을 수 있도록 조율해 주는 것과 같다는 점에서, 높은 가치가 있다고 생각해요.
바로 이 부분이 가장 중요하다고 저는 생각하거든요. 현재 자신의 마음상태 때문에 불편을 느끼는 사람을 돕기 위해 분류와 연구를 반복하고 있다는 점. 그리고 그것과 관련된 공부를 하다 보면, 별을 바라볼 때와 비슷하게 제 자신의 위치를 돌아보게 되기도 해요. 내 평생을 걸고 지켜나갈 신념이, 또는 내가 살아온 지금까지의 여정이, 정신의학의 용어로 쓰여진 아주 짧은 문장 하나, 혹은 단어 하나로 설명될 수 있으니 말이에요. 그때 느껴지는 그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란….
말이 잠시 샜는데, 왜 그런 얘기 있잖아요. 같은 칼이라도 어머니의 손에 들린 칼은 사람을 이롭게 하지만, 강도의 손안에 있는 칼은 사람을 무섭게 하거나 심하면 죽이기까지 한다는 얘기. 지영씨가 공들여 배워온, 또는 연구해온 것들을 어떻게 사용해야 이로운지도 한 번 생각해 보세요. 누군가에게 실망했을 때, 또는 누군가의 단점을 보았을 때 오로지 그들을 '이상한 사람'으로 분류하기 위해 사용하는 건, 분명 이로운 사용이 아니라고 저는 생각해요.
3. 제가 할 말도 다 아세요?
서두에서 물었던 걸 다시 한 번 물을게요. 안 힘들어요? 남이 무슨 말을 할지, 어떤 생각을 할지까지 모두 파악하면서 살려면 인생의 재미도 반감될 것 같은데, 안 그래요? 지영씨가 신청서에 적은 글을 보면, 어떻게든 마술의 트릭을 알아내기 위해 매의 눈으로 마술사의 손만 응시하고 있는 사람 같거든요. 남자친구에 대해서도 그렇고, 또 저에 대해서도 그래요.
"무한님은 아마 ~라고 하실 텐데요."
라면서 계속 제가 지영씨와 같은 생각을 하도록 유도하시잖아요. 이왕 말이 나왔으니 좀 더 솔직하게 말해도 될까요? 전 지영씨가 염려하며 원천봉쇄하려고 애쓴 이야기들을 할 생각이 전혀 없어요. 오히려 전 지영씨의 연애에 대해
"선무당 여친이 남친을 손바닥 위에 올려둔 채 사육하려다 끝난 연애."
"속으로는 남친을 환자 취급하면서, 아닌 척 연기하다 끝난 연애."
"손잡고 놀러 가야 할 시간에 남자친구를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다 끝난 연애."
"속으로는 남친을 환자 취급하면서, 아닌 척 연기하다 끝난 연애."
"손잡고 놀러 가야 할 시간에 남자친구를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다 끝난 연애."
라고 생각해요. 지영씨가 신청서에 적은 말 중에 경악스러운 말 세 가지를 함께 보자고요.
ⓐ"무한님은 제가 너무 다 받아줬다고 하실 텐데,
제 나름대로는 이 사람이 유리멘탈인 것, 현재 스트레스 받고 있는 것,
유기불안에 시달리는 것을 파악했고,
이 사람의 욕구를 충족해 줘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내가 절대로 당신을 버리지 않을 거라는 확신을 주어야 한다고
전략적으로 판단했던 거예요."
ⓑ"저렇게 성격적으로 결함이 있는 남자라도,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어떻게든 데리고 같이 살아갈 궁리를 했던 거죠.
그렇게 해서 생기는 피곤함이, 이 사람 곁에 있다는 행복감보다 작았으니까."
ⓒ"사실 남자가 저에게 보인 헌신에 있어서도 좀 미심쩍은 데가 없진 않아요.
자기 상태가 너무 거지같으니까 그걸 어떻게든 탈피해보려고 저에게
'좋은 사람 되기'를 했던 건 아닌가, 하고 분석될 때가 있거든요."
제 나름대로는 이 사람이 유리멘탈인 것, 현재 스트레스 받고 있는 것,
유기불안에 시달리는 것을 파악했고,
이 사람의 욕구를 충족해 줘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내가 절대로 당신을 버리지 않을 거라는 확신을 주어야 한다고
전략적으로 판단했던 거예요."
ⓑ"저렇게 성격적으로 결함이 있는 남자라도,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어떻게든 데리고 같이 살아갈 궁리를 했던 거죠.
그렇게 해서 생기는 피곤함이, 이 사람 곁에 있다는 행복감보다 작았으니까."
ⓒ"사실 남자가 저에게 보인 헌신에 있어서도 좀 미심쩍은 데가 없진 않아요.
자기 상태가 너무 거지같으니까 그걸 어떻게든 탈피해보려고 저에게
'좋은 사람 되기'를 했던 건 아닌가, 하고 분석될 때가 있거든요."
매뉴얼을 마쳐야 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으니 짧게 요점만 말할게요. 첫째, 저는 지영씨가 '갑'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둘을 '갑'과 '을'의 관계로 본다면 지영씨는 '을'이에요. 이건 처음부터 그랬어요. 제가 보기엔 단 한 번도 지영씨는 '갑'인 적이 없어요. 그래서 전 지영씨가, 상대를 환자 취급하며 혼자 '갑'이라고 정신승리를 하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요. 아무리 봐도 지영씨의 행동은 '그렇게 하지 않으면 상대가 떠나갈까 봐'한 행동으로 보이는데, 지영씨는 그걸 '내가 상대를 봐준 것'이라고 말해요. 지영씨 속으로야 '이건 그냥 그런 척 하면서 넘어가 주는 거다. 원래의 나라면 이런 꼴 못 봐준다.'라고 생각할 수 있겠죠. 그런데 '원래의 지영씨'의 모습으로 상대를 대한다고 해서 이 상황과 별반 다를 게 없거든요. 전 이게 "내가 제대로 마음만 먹으면 이것쯤은 일도 아니다. 마음을 안 먹어서 그렇지."라고 착각하거나 허세를 부리는 것과 뭐가 다른지 모르겠어요.
둘째, 사람은 딱 간략하게 정의된 만큼의 의미만을 가지는 게 아니거든요. 저와 친하게 지내는 김순옥할머니(83세, 무직)만 해도, 객관적으로 따지면 할머니가 모든 면에서 저보다 약자에요. 김할머니는 말상대가 되어 줄 누군가가 필요하고, 또 어디를 가시려고 할 때 모시고 갈 누군가가 필요하죠. 저와 김할머니의 관계를 보면, 늘 제가 도움이 될 일밖에 없는 거잖아요. 할머니께서 절 대신해 어떤 일을 해주시거나, 제 부탁을 받고 절 도와주실 수는 없는 입장이시니까요. 그런데 아니에요. 제가 한 모든 수고보다, 할머니께서 제게 주시려고 힘들게 슈퍼까지 가서 사오셔선, 가지고 계시다 주시는 크림빵 하나의 밀도가 더 높아요. 천만 원 있는 사람이 내놓는 백만 원과 이백만 원 있는 사람이 내놓는 백만 원의 밀도가 다른 것처럼 말이에요. 지영씨 설마 이것도, "자기 상태가 너무 초라하니까 그걸 어떻게든 탈피해 보려고 내미는 크림빵."이라고 분석하실 건가요?
셋째, 지영씨는 진실하지 못해요. 거의 모든 감정을 다 숨기고 '좋은 여자친구'를 연기했잖아요. 이해하는 척, 배려하는 척, 응원하는 척, 사랑하는 척만 했어요. 지영씨가 그를 전부 읽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말이에요. 지영씨가 쓴 문장을 하나 가져다 볼까요.
"본인은 이것 역시 남자의 '유기불안'증세, 자존심 다툼의 일부라고 판단함.
그래서 이런 해프닝이 있을 때마다 조금 기분 나빠도 '우쭈쭈쭈~'하는 마음으로 만남.
남자의 속이 다 들여다보인다고 생각되었기 때문."
그래서 이런 해프닝이 있을 때마다 조금 기분 나빠도 '우쭈쭈쭈~'하는 마음으로 만남.
남자의 속이 다 들여다보인다고 생각되었기 때문."
저게 그를 대하는 지영씨의 태도였거든요. 헤어진 이후 구남친이 연락을 해오는 지금 상황에서도, 지영씨는 그 연락에 대해 '이게 구남친들 특유의 행동 같지만, 그가 나에게 헌신한 적 있으니 그를 위해 잠시 참아주는 거라 생각하며 받아주자.'라는 마음을 가지고 있거든요. 단 한 번이라도 머리로 계산하지 않고 솔직한 마음을 그에게 보여준 적 있나요? 예상되는 반응을 고려한 뒤 '모범답안'이라고 생각되는 말을 한 거 말고, 지영씨의 진심을 그에게 털어 놓은 적 있나요? 없잖아요. 착각하지 마세요. 그건 배려나 인내가 아니에요. 상대를 기만한 것일 뿐이지. "오빠가 그런 말 할 때마다 속상해."라고 말한 적 없잖아요. '속상하지 않은 척'만 했을 뿐이지.
지영씨, 세상에 나에 대해서 정말 잘 알고 있는 한 사람은 있어야 하지 않겠어요? 그래야 내가 너무 속상할 때 기대서 울 수도 있는 거고, 힘들다는 걸 구구절절 다 말하지 않아도 그가 내 어깨 두드려 주는 거고, 혼자 꽁해 있을 때 다가와선 기분 풀라며 내 손을 잡을 수도 있는 거잖아요. 그럴 수 있는 친구가 이미 있다면 좋은 일이지만, 내 남은 평생을 함께 할 사람이 그럴 수 있는 사람이라면 더 좋은 거고 말이에요.
제가 지영씨에게 자신있게 이야기 할 수 있는 한 가지가 있어요. 지영씨가 누군가를 읽고 있을 때, 그 누군가 역시 지영씨를 읽을 수 있어요. 물론, 간단한 거짓말 정도로 상대를 잠깐 속일 수는 있죠. 상대가 좀 둔한 편이라거나 이쪽을 신뢰하고 있는 상황이라면 꽤 오래 속일 수도 있고 말이에요. 그런데 결국엔 그 속임수를 상대도 눈치 채요. 아무리 잘 숨겨도 마음은 조금씩 행동으로 드러나고 말거든요. 성실도의 변화나 영혼 없는 리액션 같은 행동의 축적, 그리고 점점 드러나고 마는 본색 등으로 상대도 알게 돼요. 지영씨는 상대가 눈치 채지 못하도록 잘 감춰왔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 둘의 연애는 작년 12월에도 산소호흡기를 끼고 있었어요. 미안하지만 그때부터 두 사람 모두 이별을 회피해 오고 있었던 거지, 사랑하고 있었던 건 아니라고 저는 생각해요.
"어쨌든 저는 어떤 방식으로든 이 사람 곁에 있는 것을 원해요.
그러기 위해 남자가 제게 '사랑한다. 다시 시작하자.'고 재회를 청하게 할 수 있는,
그런 방법을 알려주셨으면 해요."
그러기 위해 남자가 제게 '사랑한다. 다시 시작하자.'고 재회를 청하게 할 수 있는,
그런 방법을 알려주셨으면 해요."
화해는 속마음까지를 다 털어 놓은 다음에야 가능하다는 거, 혹시 아세요? "네가 이러이러한 이유로 이러이러한 행동을 했었다고 생각했다."라고 말해야, 상대도 거기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스스로도 대책을 세우거든요. 그런 과정이 없이 단순히 미안하다고 말하며 하는 사과는 일시적으로 봉합해 두는 것과 같아요. 해결되지 않은 불씨들은, 다시 똑같은 문제를 발생시키죠. 이게 당장은 껄끄럽지만, 이후 서로 더 조심하며 서로를 존중하게 된다는 점에서 훌륭한 화해 방법이에요.
제 친구가 목에 힘을 준 이후 그 친구와의 사이가 멀어지면, 저는 그 친구에게 "네가 목에 힘을 주는 게 나는 불편하다."라고 말하거든요. 모두와 이런 방식의 화해를 할 필요는 없겠지만, 한두 해 보고 말 사람이 아니라면 내 솔직한 심정을 말하고 그에게 협조를 요청하는 게 좋아요. 안 그러면 겉으론 웃으며 안부를 묻지만, 속으로는 '저 오만한 자식'이라고 욕만 하게 되거든요. 또 그렇게 말함으로 인해서 "나도 너만큼 상황을 파악하고 있다. 네가 보고 있는 걸 나도 똑같이 본다."라는 걸 전달할 수도 있고 말예요. 상대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듣기 위해 다른 연기를 시작하시기 보다는, 먼저 화해를 하시길 권해드리고 싶네요. 행운을 빌어요.
▲ 타인의 기분을 적당히 맞춰 주면서 살면, 내 주변에도 역시 그러는 타인들 밖에 남지 않는 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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