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결혼할 예정인데 남친이랑 안 친한 여자
이렇게 서로 안 친한 커플의 사연은, 2011년쯤에 한 번 본 이후 오랜만에 보는 것 같다. 사연의 주인공인 선희씨에겐, 분명 연인인 두 사람이 서로의 동선도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는 게 난 참 놀라웠다는 얘기를 해주고 싶다.
"뭐해? 살아있어?"
"요즘 왜 이렇게 바빠?"
라는 대화를 나누는 게-장난을 치려고 저러는 게 아니라, 진짜로 서로 연락이 뜸해져서 저런 대화를 나누는 게- 내 입장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서로 오늘 뭐 하는 지도 몰라서 만나자고 말 꺼냈다가 일 있어서 못 만난다는 대답을 듣고, 상대가 정기적으로 참가하게 된 모임이 무슨 모임인지도 모르고 있다는 게 내겐 정말 낯설다. 둘이 그냥 직장동료인 것도 아니고 결혼할 예정인 연인인데 딱 이 정도의 친밀함 밖에 없다는 게 난 참….
선희씨는 "부끄럽게도 이 결혼을 해도 될지 고민될 때가 많습니다."라고 말했는데, 이런 상황에선 고민되는 게 당연한 거다. 4년을 사귀는 동안엔 잘 몰랐지만, 결혼이 구체화 되어가는 지금 그에 대해 새롭게 알게 되는 것이 많지 않은가. 그의 가부장적인 결혼관이나 남아선호의 모습, "결혼을 하더라도 너는 너, 나는 나. 알아서 잘 하자."라는 식의 선을 긋는 모습들 말이다. 물론 그게 그의 한계는 아니다. 두 사람이 어쩌다 이런 지경까지 이르렀는지, 선희씨도 몰랐던 얘기들을 함께 살펴보도록 하자.
1. 갑의 연애.
선희씨의 연애를 가까이서 지켜본 선희씨의 친한 언니는, 선희씨에게 아래와 같은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너희 연애에선 항상 네가 '갑'이었기에 남친에게 관심을 많이 기울이지 않았고,
남친의 성격이나 성향, 그가 처한 상황에 대해 공감하는 게 적었을 수도 있다."
난 저 말이, 선희씨 커플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를 잘 짚어낸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당장 '만남'에 대한 선희씨의 태도만 봐도 문제를 알 수 있다. 둘의 만남은 주로 남친이 선희씨의 집 앞으로 찾아와 이루어졌는데, 선희씨는 남친이 약속시간에 늦자
"오빠 시간이 소중하듯이 내 시간도 소중하다. 시간약속을 지켜라."
라는 이야기를 했다. 그 말에 남자친구는
"넌 집에서 편하게 기다리는 거고,
나야말로 여기까지 차 몰고 오는 건데
뭐가 그렇게 불만인 거냐."
라고 답했다. 남친이 참 미움 받을 말만 골라서 하는 까닭에 괴짜처럼 보이기는 하는데, 난 선희씨가 저 말에 어이만 없어 할 게 아니라 다음부터는 중간지점에서라도 만나기로 했으면 어땠을까 싶다. 여기서 보기에 선희씨의 남친은, 이 불공평한 관계에 대해 계속 염증을 느꼈던 것 같다.
여행에 대해 이야기를 하다 둘이 다툰 부분 역시 마찬가지다. 선희씨가 밝히지 말아달라고 했으니, 예전 사연 중 일본여행을 다녀 온 한 커플의 이야기를 보자. 그 사연에선 일본여행 계획을 짠 것도, 경비를 대부분 부담한 것도, 현지에서 문제가 생기면 해결한 것도 모두 남자였다. 여자는 남친이 마련한 계획대로 편안하게 여행을 즐기다가 마지막 행선지에서 일정이 꼬이자 화를 냈다. 그러고는 다투다가 혼자 한국에 가 버리겠다며 숙소로 향했다. 남자는 그 모습을 보며 이별을 결심했는데, 여자는 그때도 '쟨 지금 날 적극적으로 잡으며 돌려 세우지 않았어. 나 지금 화났어.'라는 생각만 했을 뿐이다. 이 사연의 커플은 이렇게 헤어졌지만, 선희씨 남자친구는 저런 지점에서 참을 인자를 새기며
"그럼 다음 번 여행계획은 네가 짜라."
라며 자신의 몫을 선희씨에게 미뤄버렸다.
그렇게 미룬 것들이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선희씨가 불만을 표시할 때마다 남친은 "그럼 네가 해."라고 말하듯 떠넘겼던 것이다. 그런데 미안하지만, 넘겨받은 선희씨도 제대로 하진 못 했다. 선희씨 역시 남친이 넘어졌던 부분에서 똑같이 넘어졌는데, 선희씨는 그럴 때마다 화를 냈다. 물론 선희씨 나름대로 화를 내는 타당한 이유는 있었다. 남친은 해야 할 일을 못했기에 그게 잘못이었지만, 선희씨는 잘 하려고 하다가 못 한 거니 잘못이 아니라는 이유였다.
선희씨의 말을 요약해 보면,
"보통 남자라면 이런 상황에서 이러이러한데,
남친은 그러지 않았다. 그래서 난 화가 났다."
라는 건데, 난 선희씨에게 받을 것만 그렇게 따질 게 아니라 선희씨가 남친에게 줄 건 줬는지 돌아보라고 말해주고 싶다. 내가 공쥬님(여자친구)에게 참 감사하게 생각하는 것 중 하나는, 돌발상황이 생겼을 때 문제를 같이 해결하려 도와주거나 내가 해결할 동안 함께 해야 할 일을 잠시 혼자 맡아 준다는 점이다. 우리가 제주도에 갔을 때 숙소 문제로 난처했던 적이 있었는데, 공쥬님은 그때 같이 검색을 해줬고, 내가 연락해보는 동안 짐 정리 등의 일을 맡아 주었다. 이게 함께 하는 연애이자 여행 아닐까? 남친이 제대로 일처리를 못 했다는 생각에 화가 나선 말도 안 하거나 "아직도야? 제대로 알아본 거 맞아?"라며 쏘아대고 한숨 쉬는 것보다 말이다.
위와 같은 상황에서 선희씨의 경우엔 남친에게 '내가 지금 화 난 이유'를 조목조목 설명해주었고, 남친은 "미안해. 네 말대로 내가 하면 늘 이러니까, 앞으로는 네가 해."라고 떠넘겼던 것 같다. 그런 뒤 선희씨는 함께 해야 할 몫을 떠맡아 부담을 느낀 데다 남친이 수동적으로 나오니 더 화가 나 또 다시 잔소리를 쏟아 부었던 것 같고 말이다. 이런 일이 잦아지자 선희씨의 남친은 함께 해야 하는 일이 생겼을 때 "난 운전하니까 알아보는 건 네가 해."라는 식으로 다급하게 책임의 선만 긋게 되었다.
2. 안다리걸기.
누구라도 다리를 걸고 밀면 넘어질 수밖에 없다. 선희씨가 사용하는 가장 무서운 무기가 바로 이 안다리걸기인데, 선희씨는 이 기술을 사용해 상대의 다리를 건 채 밀어 넘어뜨린다. 대화를 보자.
선희 - 오빠, 나 보고 싶어?
남친 - 응.
선희 - 진짜? 아닌 것 같은데….
남친 - 왜?
선희 - 그런 것 같아서.
남친 - 뜬금없이….
선희 - 끝까지 아니라곤 안 하네.
남친 - 뭐야. 싸우자는 거야….
선희 - 표현을 좀 해줘.
선희 - 오빠는 보고 싶다거나 하다못해 좋아한다는 말도 안 해.
남친 - 알았어.
위와 같은 대화를 한 뒤 남자가 '앞으로 표현을 좀 더 많이 해야겠다.'하는 생각을 할까, 아니면 '난 뭐라고 대답하든 오답인 거고, 결국은 혼나는 거네.'라고 생각을 할까? 선희씨의 이 안다리걸기가 등장하면, 결국 둘은 감정이 상하고 대화는 씁쓸하게 마무리 된다. 대화를 하나 더 보자.
선희 - 우리 이번 연휴에 드라이브하기로 한 거
선희 - 내 일정에 그렇게 맞추지 않아도 왜. 오빠 일정도 생각해서 가도 돼.
남친 - 알았어. 그럼 내일 가자.
선희 - 지금 가자.
남친 - 지금 차 많이 막힐 텐데. 연휴라서.
선희 - 그래. 내일도 막히겠네.
남친 - 낼 아침에 데리러 갈게.
선희 - 어디 갈래? 내일도 차 막힐 텐데.
남친 - 아침엔 좀 괜찮을 거야.
선희씨의 대표적인 문제점 두 가지를 위의 대화에서 찾을 수 있다. 첫 번째 문제는 '안 되면 안 된다고 말하라고 했다가 상대가 진짜 안 된다고 하면 실망하는 것'이다. 실망할 구실을 미리 만들어 놓고 상대를 떠보다가 결국 실망하고 마는 모습. 자신이 원하는 바를 직접 말하면 되는 걸, 선희씨는 쿨한 척, 대인배인 척 하느라 그 반대의 것을 말했다가 결국 본전도 못 찾고 만다. 예를 들자면, 친구 결혼식에 같이 가는 것 때문에 말을 꺼내야 할 경우, 선희씨는 당연히 남친과 같이 가고 싶은 마음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빠, 민주 결혼식에 같이 갈 거야? 오빠 시간 안 되면 나 혼가 가도 돼.
멀기도 하고, 어차피 나는 갔다가 금방 올 거라서 식 끝나고 와서 오빠랑 만나도 돼."
라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그래놓고는 남친이 저 안다리걸기에 넘어가 "그럴까? 그럼 너 다녀와서 만나는 걸로 할까?"라고 답하면, 선희씨는 서서히 끓어오르다 결국
"오빠랑 난 연인이 맞는 건지 모르겠다. 다른 친구들은 다 커플로 와서 앉아 있는데,
나 혼자 덩그러니 앉아 있고. 친구들은 나보고 오빠 왜 안 왔냐고 묻고….
우리가 앞으로는 나가지 못하고 계속 제자리에만 있는 느낌이 든다.
우리 이제 서로 놓아주자. 확신 없는 약속, 실망뿐인 기대, 제자리인 연애, 그만 하자."
라는 말을 하고 만다. 난 사실 선희씨 남자친구에게도 답답한 게, 저런 안다리걸기에 몇 년 당했으면 이제 그걸 간파하고 안 넘어질 수도 있어야 하는 건데, 그도 나름대로는 자존심을 세우느라 그러는 건지 이젠 아예 단답으로 "그래. 그럼."하는 식의 답만 하고 만다. 말꼬리 잡힐까봐 무서워서 아예 '예/아니요'로만 답하게 된 것이다. 그럴수록 선희씨의 속은 더 타들어가고….
두 번째 문제는 '빈정거림으로 탓하기'이다. 내일 놀러 가기로 했으면 오늘 좀 서운해도 어느 정도 이해하고 넘어가야 하는 법인데, 선희씨는 순간적으로 든 서운함을 돌려 말하며 불만을 표시한다. "내일도 막히겠네."라는 식으로 말이다. 다른 대화를 할 때 나온 멘트도 보자.
"그럼 그냥 안 가는 걸로 해. 오빠가 그때 가서 못 간다고 그럴까봐 불안해."
만약 내가 선희씨의 남자친구인데, 선희씨가 오후 여섯 시에 만나자고 했을 때
"그럼 난 여섯 시 반에 만나는 걸로 알고 있을게.
어차피 너 또 늦을 것 같으니까.
그냥 이렇게 알고 있는 게,
내가 먼저 도착해서 삼십 분 기다리다 화나는 것보다 나을 것 같아."
라고 말한다면, 선희씨의 기분은 어떨 것 같은가? 만나기 전부터 재 뿌리는 이런 얘기를 듣고도, 웃으며 기분 좋게 만날 수 있을 것 같은가?
선희씨가 철두철미하게 계획을 세워서 움직이는 편이고, 남자친구는 계획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즉흥적으로 움직이는 편이라 계속 마찰이 생긴 건 알겠다. 그건 알겠는데, 그렇다 하더라도 이런 비아냥으로는 아무 것도 해결할 수 없다. 오히려 서로에게 돌려 말하며 상처를 주려는 증오심만 불태울 뿐, 습관을 고치는 데에는 아무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저런 화법이 부르는 결론은 "우리 그냥 오늘 만나지 말자. 담에 보자."라는 대답뿐이라는 걸 기억해 두길 바란다. 내가 원하는 걸 상대가 거절할까 두려워 돌려 말하지 말고, 오늘부터는 원하는 바를 직접 말하자.
3. 책임감과 부담감, 그리고 두려운 여자.
사실 책임감과 부담감은 동전의 양면 같은 거다. 애정이 사라지면 책임감은 부담감이 된다. 위에서 말한 선희씨의 문제점들이, 바로 상대로 하여금 애정이 사라지도록 만드는 태도라는 걸 말해주고 싶다. 친구 결혼식의 예를 다시 한 번 들어보자. 안다리걸기 기술을 사용한 후 선희씨는 남친에게
"갈 거야, 말 거야?"
라고 묻는다.
가능하다면 난 선희씨에게 애교를 택배로 보내주고 싶다. 같은 질문이라도 좀 더 부드럽게 할 수 있는 것 아닌가. 만약 선희씨가 아닌 내 지인 J양이었다면,
"오빠, 그럼 그날 감색 셔츠 입을래? 오빠 그거 잘 어울리니까.
그리고 식 끝나고 우리 보석박물관 들렀다 올까? 그 근처에 있더라고."
하는 이야기를 했을 것이다. 그러고는 당일 장거리 운전하느라 힘들 남친을 위해 주전부리도 준비하고, 아침은 오랜만에 휴게소에서 우동을 먹는 등의 계획을 짰을 것이다.(이걸 선희씨와 J양을 비교하며 선희씨를 탓하려는 게 아니라, 이렇게도 부드럽게 넘어갈 수 있는 일이었다는 걸 설명하기 위한 예시로 받아들여 줬으면 좋겠다.)
남자 입장에서 선희씨를 보면 무섭게 느껴진다. 99점 받은 성적표를 가져가도, 선희씨는 칭찬이 아니라 "한 문제는 왜 틀린 거야? 내가 항상 문제는 끝까지 보고 풀라고 했잖아. 잘못된 걸 고르라고 했는데 넌 잘 된 걸 고른 거지?"라는 이야기를 할 것 같다. 때문에 그 얘기를 듣고 나면 의욕이 사라지고, 다음부터는 성적표가 나왔다고 들떠서 선희씨에게 알리고 싶지도 않을 것 같다.
또, 내가 선희씨의 남자친구라면, 선희씨에게
"내가 너 그럴 줄 알았다."
라는 말을 듣게 될까봐 두려울 것 같다. 그래서 말꼬리를 잡히지 않기 위해 최대한 짧게 대답하거나 대답을 보류하고, 선희씨가 실망하게 될 일이 생기지 않도록 아예 아무 일도 시도하지 않으려 할 것 같다. 선희씨의 남친은 이미 이런 상태에 접어든 것 같다. 그가 결혼 준비에 대한 거의 모든 것을 선희씨에게 위임하며 한 말들만 보더라도, 그는 자신이 보이는 노력과 헌신은 당연한 것이 되며, 그런 노력과 헌신을 하다가 실수를 하게 되면 추궁을 당하는 일 밖에 없다고 생각했기에 자꾸 빠져나가려 했던 것 같다.
이 '무서운 여자'에서 벗어나야 한다. 난 카톡대화만 읽었을 뿐인데도, 선희씨가
"내가 갈 때 뭐 사갈까?"
라는 이야기를 했을 때 오싹함을 느꼈다. 저건 저것만 놓고 보면 아무 문제없는 질문이지만, 그 이전에 선희씨가 "난 늘 뭐 사가냐고 물어보는데, 오빠는 사온다고 먼저 말한 적 있냐?"라는 뉘앙스로 말한 적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저 물음에 사오라고 대답을 하는 건, 훗날 벌어질 폭격의 빌미를 제공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난 이게 참 안타깝다. 서로를 사랑하기에도 모자란 시간에, 둘은 오랫동안 서로 견제하며 꼬투리를 잡히지 않기 위한 눈치게임을 해 왔다는 게….
아무리 두고 봐도 상대에 대한 확신이 안 든다면 헤어지는 게 맞다. 선희씨는
"그건 제가 그냥 안고 가야 할 문제라고 생각했습니다."
라는 이야기를 하는데, 결혼 전에 벌써 그렇게 포기해야 할 부분이 많아지는 사람과는 결혼을 안 해야 하는 거다. 우리끼리니까 하는 얘기지만, 난 선희씨가
"남친이 차라리 다른 여자랑 바람이라도 나서
그렇게 우리가 헤어질 수 있다면 좋겠다는 식으로도 생각했었어요."
라는 이야기를 했을 시점부터 둘은 인공호흡기를 단 연애를 해왔다고 생각한다. 내가 위에서 선희씨의 문제들만을 이야기 한 건, 이 사연을 선희씨가 보냈기 때문이지 남자친구의 잘못이 없기 때문이 아님을 밝혀두고 싶다. 방어와 복수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한 남자친구의 태도를 바꾸는 게 쉽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결혼준비까지 하고 있는 사이니 '어떻게 하면 우리는 함께 웃으며 살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을 같이 해보길 바란다. 선희씨가 진심을 꺼내 놓았을 때, 그도 선희씨에게 진심을 꺼내놓길 난 기원하겠다.
▲ 결혼은, 그 관계에서 발 뺄 생각 없을 때 해야 합니다. 결정하세요. 함께하든가, 헤어지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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