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하지만 더 가까워지지는 않는 관계 외 1편
내가 스물 둘의 대학생이라고 해보자. 이런 상상만 해도 캠퍼스의 잔디를 다 씹어 먹을 수 있을 정도로 기분이 좋아지는데, 여하튼 지금 나는 스물 둘의 대학생이고, 한 학번 아래의 여자 후배 중 가장 주목 받고 있는 여학생이 내게
"오빠, 어제는 잘 들어가셨어요?
담에는 튀긴 닭 말고 꼭 구운 닭으로 같이 먹어요. ㅋㅋ"
라는 카톡을 보내온 상황이다.
이러면 본능적으로 성실해 질 수밖에 없다. 그녀가 내 어떤 부분인가에 반해 나와 친밀한 관계를 맺고 싶어 한다고 확신하게 될 것이니 말이다. 특히 내가 그녀에게
"다음번엔 굽네 마네 하는 치킨으로!"
하는 개드립을 던져도 그녀가 "ㅋㅋㅋㅋㅋㅋㅋㅋ"하는 답장을 보내온다면, 내 개그에 대한 자신감은 하늘을 찌를 것이며, 속으로
'나도 어디서 꿀리진 않어.
아직 쓸 만한 걸, 죽지 않었으.'
하는 노래를 부를 것이다. 그러면서 '얘가 나 좋아하나?'하는 생각에 대한 답을 구하기 위해 -아직 어릴 때이므로- 소개팅을 할까 생각중이라는 말을 던져 떠보기도 할 것인데, 거기에 그녀가 "제 친구 소개시켜 드려요?"라는 이야기를 하면,
'뭐지? 쟤가 지금 내게 완전 반한 건 아니고, 나에게 호감이 있긴 한데,
내가 다른 사람과 사귀려 한다는 이야기를 하면 포기하겠다는 생각인가?
그게 아니면 내가 소개팅 얘기를 꺼내니까
자존심 때문에 아무렇지 않은 척 친구를 소개시켜주겠다는 얘기를 하는 건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될 수 있다. 이게, S양이 궁금해 하는 그의 속마음에 가까운 얘기라고 말해주고 싶다.
1. 친하지만 더 가까워지지 않는 관계.
그냥 그렇게 서로 간을 보다가, 하도 간을 많이 봐서 이젠 좀 배불러진 상황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지금까지 S양이 만났던 남자들은 저렇게 '선톡떡밥'을 던지기만 해도
"다 비켜! 지금 난 S양에게 선톡을 받은 가능성 1위의 남자야!"
하며 몸과 마음을 다해 충성했겠지만, 상대는 보통의 남자들과 좀 다르다. 그렇게 여자가 선톡 보내는 경우가 낯설지 않은 남자라고 할까. 난 이걸 "어장관리자 VS 어장관리자"라고 표현하고 싶은데, 그러면 S양이 기분 나빠할 수 있으니
'인기 많은 여자 VS 인기 많은 남자'
라고 해둘까 한다. S양은 그의 태도에 대해
"저를 싫어하는 것 같지는 않은데, 딱히 애정이 느껴지진 않아요.
둘이서 보려고 열심히 노력하는 것 같지도 않고요."
라고 말했는데, S양의 태도 역시 마찬가지다. S양 역시 그를 싫어하는 것 같지는 않은데 딱히 애정이 느껴지진 않고, 둘이서 보려고 열심히 노력하지도 않는다.
개인적으로는 이 관계를 그냥 이쯤 유지하며 '카톡친구'로 친하게 지내길 권해주고 싶다. S양은 그의 현란한 리액션에 흥미를 느껴 떡밥을 뿌리고 있는 거고, 그는 그 모습을 보며 S양이 좀 더 들뜨도록 여지를 남기고 있을 뿐이니 말이다. 두 사람 다 적극적으로 상대에게 빠질 생각이 없는 연애는, 시작을 하게 되더라도 머지않아 그 끝을 보게 되리라 생각한다. S양은 이전에 과에서 CC를 한 경험 때문에 이번에 같은 과 선배인 그와 연애를 시작해도 부담이 될 것 같다고 했는데, 이것저것 다 따지며 상황 봐서 뭘 하겠다는 식의 마음이라면 차라리 연애를 하지 않는 게 낫다고 나는 생각한다.
내가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S양이 내게 사연을 보낸 게 벌써 세 번째 인데, S양의 그간 사연들에서 '인기 많은 여자'가 빠지기 쉬운 함정을 여러 번 보았기 때문이다. 호감을 표현해오는 남자가 많기에 S양에겐 연애가 그닥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있다. 게다가 S양 역시 '여우짓'을 할 줄 아는 까닭에 남자의 고백을 이끌어내는 것에도 문제가 없을 수 있다. 이번엔 만만찮은 상대를 만나 시간이 지나도 간격이 좁혀지지 않고 있지만, 상대가 그냥 본능적으로 행동하는 평범한 남자였다면 그는 이전 남자들처럼 선물을 들고 와 벌써 고백했을 것이다.
그런 연애는, 줄 서 있는 S양 팬클럽 회원들과 차례로 만나는 것과 같다. S양은 썸을 탈 때 까지는 그 상황을 즐기다가 사귀고 난 이후엔 '갑'의 입장이 되어 연애를 자신의 시나리오대로만 끌고 가려는 버릇이 있는데, 늘 팬클럽 회원들과 연애를 하면
"4번 분은 집착해서 탈락입니다. 5번 분 들어오세요."
하는 일의 반복이 될 수 있다. 그러니 "나는 적당히, 너는 열렬히!"의 관계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내가 좋아하는 남자'와 만나보길 권해주고 싶다. S양에게 예쁘다고 해주고 S양에게 잘 해줘서 좋은 남자 말고, S양이 먼저 연락을 해서라도 만나고 싶은 남자. 그런 남자와 만나보자. 그렇지 않으면 또, 하반기에도
"전에 말한 그 오빠랑은 끝났어요.
그 오빠 말고 새로운 오빠가 생겼는데, 이 오빠는 그 오빠 친구예요.
이 오빠가 제게 관심을 표해오는데 고백은 하지 않아요.
아무래도 자기 친구랑 제가 썸을 탄 적 있어서 조심스러워 하는 걸까요?
아, 그리고 저는 CC를 또 하긴 정말 싫은데 자꾸 학교에서만 얽히네요."
하는 사연을 보낼 수 있다. 그렇게 청춘을 보내면 나중엔 팬클럽의 줄이 점점 줄어 없어질 수 있고, 그러면 그땐 "저 진짜 이십대 초반에는 인기 많았는데…."하며 '과거의 영광'이야기만 하는 상황이 벌어질 수 있다. 그걸 막기 위해서라도 지금부터 들이대는 남자 말고, S양이 좋아하며 평등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남자와 만나보자.
2. 뒤늦게 확인한 그린라이트.
만제씨가 제 지인이라면, 저는 만제씨의 마음에 납덩이를 몇 개 매달아 두고 싶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너무 가볍거든요. 각오도 너무 쉽게 하고, 진심이라는 말도 너무 가볍게 사용합니다. 금사빠인 만제씨는
"제가 진심이 아닌 적은 없었습니다."
라고 말할지 모르겠는데, 진심이라는 건 저도 인정합니다. 그런데 가볍다는 건 그게 진심이냐 아니냐를 말하는 게 아니라, 진심이 너무 휙휙 바뀐다는 걸 얘기하는 거거든요. 어제까진 분명 미영이를 짝사랑한다고 말하던 사람이 오늘은 진희에게 올인하겠다, 뭐 이런 얘기를 하면 그걸 가볍다고 하는 겁니다.
"제 지인들에게 이야기를 하니까, 어떻게 그걸 몰랐냐고 하더라고요.
진희가 저를 좋아했던 게 분명하다고 말입니다. 강한 그린라이트였다고.
제가 미영이에게 들이대느라 진희의 그린라이트를 못 봤던 것 같습니다.
물론 한 명은 회의적이긴 했습니다.
그가 보기엔 그녀의 행동이 친한 오빠한테 충분히 할 수 있는 행동들이고,
남들 추측 맹신 말고 직접 물어보든가 하라고요.
직접 듣기 전에는 누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아무도 모른다고…."
전 회의적인 그 지인 분의 의견에 120% 동의합니다. 진희씨한테는 현재 남자친구가 있거든요. 진희씨는 남친과 잘 지내고 있고, 게다가 만제씨가 톡을 보내도 단답을 보내는데, 이런 상황에서
"지인 중 99%가 그린라이트라고 했어요.
제가 왜 진희의 그린라이트를 못 봤던 걸까요.
지금에서라도 잡고 싶습니다.
욕먹을 짓이라는 거 알지만, 꼭 좀 도와주세요."
라는 이야기를 해봐야 아무 소용이 없는 것 같습니다. 이건 마치 제가 운전을 하다가 교차로에서,
"기어 옆에 있는 영수증 잠깐 보다가 제가 좌회전 신호 못 본 거거든요.
제가 잠깐 정신이 나가서 영수증만 보고 있었습니다.
제가 실수한 거 전부 인정할 테니, 지금 빨간불이지만 가도 될까요?
저 진짜 지금 좌회전 해야 합니다. 엄청 다급한 상황이에요."
하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제가 이 사연에서 더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또 시간이 얼마나 걸리든지 간에 진희씨를 잡고 싶다는 이야기를 했던 만제씨가 소개팅을 했다는 부분입니다. 다급하고 절실한 듯 말하던 만제씨는, 소개팅녀와 만날 생각에 들 떠 있을 땐 "진희든 지희든 난 모르겠고 지금 나에겐 소개팅녀!"라며 금사빠의 모습을 보였습니다. 물론 만제씨도 이런 자신의 모습을 보며 제게 이런 말을 하기도 했습니다.
"제 모습을 스스로 쭉 지켜보면서,
저는 B를 꼭 잡고 싶은 게 아니라, 그냥 눈에 차는 여자가 있다면
얼른 연애를 하고 싶어서 안달이 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만제씨가 보낸 몇 통의 사연을 받고도 제가 발행하지 않았던 게, 바로 그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그때는 소개팅 이야기가 없었지만, 오로지 지인들이 말한 '가능성' 하나 때문에 대상을 바꿔 들이대는 모습에서 '연애가 급한 남자'의 모습이 보였습니다. 만제씨가 '미영이에게 들이대느라 진희의 그린라이트를 못 봤다'고 한 이야기에서의 미영씨가 다시 가능성을 열어주면, 그땐 만제씨가 아무 고민 없이 미영씨에게 갈 수 있을 것 같았고 말입니다.
카톡대화만 보면 만제씨 매력 있는 사람입니다. 남들이 뭔가를 부탁할 정도로 능력도 있고, 누군가의 고민도 들어줄 줄 알며, 남들이 잘 사용하지 않는 말들로 '낯선 개그'를 사용해 상대를 웃길 줄도 아는 사람입니다. 단점이 하나 있다면 이성관계에서 호감을 느낀 사람이 있다면 그녀를 삶의 목적인 양 생각하며 매달리고 들이댄다는 것인데, 그게 만제씨 나머지 모든 매력들의 빛을 바래게 만들고 있습니다. 매력적인 남자지만 가능성을 찾아 산기슭을 어슬렁 거리기에 '찝쩍이'로 분류될 수 있는 치명적 약점을 가지고 있다고 할까요. 게다가 사람이 사람을 좋아하면 순리대로 천천히 친해지면 되는 것인데, 만제씨는 타는 목마름을 느끼는 사람처럼 상대에게 확인받으려 하거나 고백하려하기에 문제가 발생하기도 합니다.
이런 '짝사랑 중독증'에서 먼저 벗어나시길 권합니다. 호감 가는 사람이 생기면 그녀를 종교로 삼아 매달리는 그런 모습 말입니다. 진희씨와의 관계만 하더라도, 만제씨가 미영씨에게 들이댈 때에는 진희씨와 만담도 주고받고 만나서 밥도 먹고 공연도 보며 잘 놀았습니다. 하지만 진희씨를 좋아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은 이후로는, 만제씨가 사연에도 적었듯
"살면서 이렇게 괜찮고 매력 있는 애한테 먼저 관심을 받은 일이 없습니다."
따위의 이상한 이야기를 하며 '그녀는 여신, 나는 패배자'의 자세로 애정을 구걸하려는 모습을 보이고 맙니다. 그러면서 갑자기
"네가 나 피하는 줄 알았다."
"연락 쌩까지 말고~"
"엄청나게 충격적이고 실망이 되는 소식이네…."
라는 패배자 특유의 멘트들도 꺼내놓고 말입니다. 조급해 하며 조금이라도 가능성이 생기면 무작정 엎드려 매달리려는 태도에서 먼저 벗어나야 할 것 같습니다. 만제씨는 자신이 '나쁜 놈'이라서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 아니냐고 하셨는데, 그런 건 아니고 연애를 시작하면 지금의 모든 생활이 전부 핑크빛으로 변하며 외로움도 모두 사라질 거라는 환상을 갖고 계셔서 그런 것 같습니다. 때문에 '상대와 연애를 시작할 수 있냐, 없냐'에 목숨을 걸며 제발 허락해 달라고 무릎부터 꿇고 빌게 되는 것이고 말입니다. 연애는 만제씨가 친구들과 친해졌듯이 그렇게 친해져 시작되는 것인데, 만제씨는 이성과의 관계에서 호감이 생기자마자
"나랑 친구해 줄 거지?"
"내 베프가 되어주겠다고 어서 말해줘. 내가 어떻게 하면 그 말을 해줄래?"
"내가 진짜 잘 할게. 한 번만 내 친구가 되어줘."
라며 우정 및 애정 구걸을 하는 것입니다. 장담하는데, 만제씨가 이성과 진희씨와 놀듯 그렇게 반 년 이상 지내며 고백을 유예할 수 있다면-그 와중에 다른 여자에게도 고백하지 않는다는 것 포함해서-, 만제씨의 이 '짝사랑 중독증' 증세는 분명 고쳐질 것입니다. 진희씨와 지냈듯이 같이 밥 먹고, 공연 보고, 노래방 가고, 영화 보면 됩니다. 아, 제한 사항을 하나 더 추가해야 하는데, 그건 패배자처럼 "난 연애에 소질이 없는 것 같다."라거나 "내가 좋아한 여자랑은 다 잘 안 됐다."따위의 이야기를 하지 않는 겁니다. 남들은 자기PR하고 있는데 만제씨는 스스로 발급한 우울증 진단서 같은 얘기를 해서는 안 됩니다. 만제씨가 좋아하는 것, 만제씨가 즐기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하시길 권합니다.
만제씨는 노래방을 혼자 가서도 몇 시간씩 부를 정도로 노래방을 좋아한다고 하셨는데, 노래 부르는 것 자체가 즐거우면 노래 끝나고 나오는 점수가 어떻든 그걸로 일희일비 안 하지 않습니까? 저도 노래방 참 좋아하는데, 1절 끝나면 다음 노래 부르려 얼른 정지 버튼을 눌러 점수까지도 넘겨버리곤 합니다. 점수가 궁금해서 부르는 노래가 아니라 내가 좋아서 부르는 노래니 말입니다.
그런데 만제씨는 연애에서 '점수'에만 목숨을 걸고 있는 것과 같은 겁니다. 그래서 별로 안 땡겨도 점수 잘 나오는 노래, 똑 같은 노래 부르는 게 지겨워도 무조건 높은 점수 나오는 노래로 선곡을 하려는 것이고 말입니다. 그러니 그 사람이 나와 사귈 것인지에 대한 것 말고, 그 사람과 지금 대화를 하고 있다는 것, 그 사람과 만나고 있다는 것에 더 집중하며 즐거움을 만끽하시길 권합니다. 만남과 연락이 그저 고백의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점수 잘 나오는 노래 말고, 내가 부르고 싶은 노래 부릅시다.
오늘은 매뉴얼 서두에서부터 대학생이 되는 상상을 했더니 급 피곤해지고 말았다. 이런 것인가. 삼십대의 스테미너란. 새벽까지 술 마시곤 신촌에서 미디어시티 역까지 걸어갔다는 꼬꼬마 대원의 사연을 읽기만 했는데도 내 다리가 다 아픈 것 같다.
그간 개인적으로 만든다고 했던 것 중 두 번째 기계를 어제 완성했다. 첫 번째 기계는 몇 주 전에 완성했는데, 마땅한 기어를 찾을 수 없어 자동화 시키는 건 일단 보류 중이다. 수동으로 사용해 보긴 했는데, 일정한 간격으로 내가 돌릴 수 없어 실패했다. 1RPM을 만드는 게 생각보다 어렵다. 두 번째 기계는 낮에 사용할 수 있게 만들었는데 어제 밤에 완성한 까닭에 아직 테스트를 못 해봤다. 몇 번의 테스트를 거친 후 블로그에 결과물과 함께 공개할 예정이다. 별로 궁금하진 않으시겠지만, 몇몇 독자 분들이 관심을 보이신 까닭에 이렇게 공지해 둔다. 첫 번째 기계는 적도의, 두 번째 기계는 전동 스케이트 달리(Dolly)다.
이것저것 만들며 공대 출신 지인들의 엄청난 친절을 몸소 경험하고 있다. 난 문의만 했을 뿐인데 직접 부품을 사서 주신 분도 계시고, 손수 만들어 보내주시거나 pdf로 된 참고 서적을 보내주신 분도 계시다. 하나 둘 얻은 부품들이 쌓여, 지금은 철물점을 열어도 될 정도다. 그분들은 축구 얘기나 TV프로그램 얘기는 거의 하지 않지만, 기계 얘기가 나오면 갑자기 공식들을 꺼내며 수도꼭지와 물의 비유 등을 들어 세밀한 설명을 해주시곤 한다. 구상하고 있는 기계를 모두 만들면, 난 이 분들의 솔로부대 탈출을 열심히 도울 생각이다. 그땐 이성과 "V=IR"얘기는 하지 않는 걸로…. 스텝모터와 DC모터 얘기도 하지 않는 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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