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만에 만난 동창생, 호감이 생겼는데

10년 만에 만난 동창생, 호감이 생겼는데

런던에서 올림픽을 할 때의 일이다. 내 친구 중 하나가 해외에 다녀오는 길에 비행기에서 중학교 여자 동창생을 만났다. 친구의 말에 의하면 그녀는 중학교 때까지만 해도 별 존재감이 없었으며, 고등학교에 들어가 중학교 반창회를 한다고 꼬꼬마들이 모일 때에도 모임에 나오지 않았던 아웃사이더라고 했다. 하지만 비행기에 만난 그녀는, 예전의 모습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완벽하게 환골탈태하여 스튜어디스가 되어 있었다.

 

난 그 친구와 고등학교 동창이라 그녀에 대해 알지 못했다. 친구가 열을 내며 설명을 해도 내가 심드렁한 태도를 보이자, 그는 상대의 SNS에 들어가 프로필사진까지 보여주며 장황한 설명을 늘어놓았다. 그러면서 그녀와 같은 반인 적이 있었다는 이야기, 친구 따라 교회간 적 있었는데 그 교회에 그녀도 다니고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는 이야기 등을 했다. 난 둘에게 예전에 뭔가 흥미진진한 에피소드 같은 게 있었다는 얘긴 줄 알고 열심히 들었는데, 그런 건 없었고 같은 학교 같은 반 학생이었다면 상대가 누구든 생길 수 있을 법한 이야기들이 전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녀에게 빠져들었다. 그녀는 외국 항공사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타국에서 대부분의 생활을 하느라 적적함을 느끼고 있었고, 한국에 들어오면 자주 오래 만나온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방에서 뒹굴다 다시 비행하러 떠나는 식의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런 그녀였기에 그의 들이댐이 싫진 않았고, 한국에 들어왔을 때 그가 '같이 밥 먹자'는 이야기를 하자, 그녀는 망설임 없이 승낙했다.

 

 

1. "나 곧 사귈 것 같다."

 

내 친구가 그녀와 처음으로 만나고 와서 한 얘기는,

 

"나 곧 사귈 것 같다."

 

였다. 난 친구에게 그 설레발이 위험한 다섯 가지 이유에 대해 말해줄까 말까 고민을 하다가, 말았다. 당시 내 인생의 목표가 '나나 잘 하자'였던 까닭에, 그의 말에는 그저 적당한 리액션과 추임새만 넣어 주었다. 아마 내가 그에게 말해주기로 마음을 먹었더라면, 아래와 같은 이야기를 했을 것이다.

 

"동창이라는 건,

힘들이지 않고 추억의 먼지를 조금만 털어내도 금방 공감대를 찾을 수 있는 사이.

그렇기 때문에 생각지도 못한 장소나 상황에서 동창생을 갑자기 만나게 되면,

학교 다닐 때 그저 얼굴과 이름만 알 뿐인 사이였음에도 불구하고 반가운 얼굴을 하지.

게다가 서로에 대해 전혀 모르는 사이가 아니므로, 무리한 요청을 해도 벽을 치지 않아.

모르는 사이였다면 밥 한 번 먹자고 청했다가

"제가 그쪽이랑 왜요?"라는 말을 들을 수 있는 사이라 해도,

동창이라면 큰 부담 없이 승낙하지. 반가운 감정이 경계를 해제시켜 주니까.

그래서 그걸 허락이나 관심, 호감 등으로 착각한 사람들이 시원하게 김칫국을 원샷하곤,

'여기 떡 언제 나와요? 김칫국 다 마셨는데!'라고 외치는 경우가 있는데,

그러다 결국 상대에게

'떡 줄 생각 없는데 왜 김칫국 혼자 원샷하고 난리냐'고 귓방망이를 맞곤 하지."

 

하지만 앞설 말한 대로 난 나나 잘 하자고 생각했고, 친구에겐 "사진 보니까 김수미씨 좀 닮은 것 같네. 간장게장 좋아하나 한 번 물어봐."라는 이야기만 하고 말았다.

 

여하튼 그 '곧 사귀게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던 첫 만남'이후, 친구는 그녀에게 매달리기 시작했다. 그는 오로지

 

'그녀와 언제 사귈 수 있는가, 그녀도 나에게 마음이 있는 게 맞는가?'

 

라는 것을 알아내기 위해 쉼 없이 혼자 작전을 짰다. 다행히 이때까지는 대놓고 부담을 주기 전이라 그녀가 비행하러 가기 전까지 한 번 더 만날 수 있었는데, 그 만남 이후로는 친구도 아예 작정하고 들이대기 시작했다. 소개팅 안 하냐, 같이 휴가 가자, 내가 그쪽으로 가면 놀아 줄 거냐, 다음에 한국 들어오면 어디 같이 가자 등의 이야기를 하며 그녀를 떠보기도 했고, 그녀에게 답장이 오는 시간이나 그녀의 대답을 보며 기대와 실망의 롤러코스터를 타기도 했다.

 

그렇게 친구는, 4주 만에 그녀에게서 차단당했다. 그녀는 오랜만에 만난 동창이 반가웠기에 살아온 이야기나 살고 있는 이야기들을 그와 나누고 싶어 했던 것이었는데, 그는 오로지 '그녀가 나에게 관심이 있나, 없나'를 알아내기 위해 떠보려 하거나, 술 마시고 그녀에게 전화를 걸어 톤 단위의 부담을 줬기 때문이다. 그녀에게 제발 봐 달라고 애원하듯 써 놓은 그의 카톡 남김말을 보며, 난 그에게 "왜 그래? 수미씨한테 퇴짜 맞았어? 간장게장 안 좋아한대?"라는 이야기를 했다.

 

 

2. L군은 내 친구의 도플갱어?

 

위에서 소개한 내 친구의 사연과 L군의 사연은, 8할 이상의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동창생과 관련된 일이라는 것도 그렇고, 첫 만남 이후 김칫국을 마신 것, 상대를 떠보기 위해 찌가 달린 말들을 던진 것, 혼자 기대하고 실망하며 조울증 증세를 보인 것, 상대가 어떤 사람인지도 모른 채 무작정 좋아한다는 말부터 한 것, 지금까지 서로 만나거나 대화 한 시간을 합쳐도 몇 시간 되지 않는데 혼자 오랫동안 상대를 짝사랑해 온 것처럼 말하는 것이 닮았다.

 

L군이 내 지인이라면, 난 그에게 이런 말을 해줄 것 같다.

 

"난 솔직히 L군이 그녀에게 '널 좋아했었다'고 고백한 게 이해가 안 가.

그녀도 아마 나와 똑같이 생각할 거야. 아무래도 이게 좀 많이 이상하거든.

만나서 밥 두 번 먹었는데, L군이 계속 좋아했었다고 고백을 해.

L군은 지금까지 연락을 하려 노력한 적은 당연히 없고, 그녀의 존재도 아예 잊고 있었어.

만나지 않았으면 둘은 영영 남으로 살았을 사이야.

그런데 같이 밥 두 번 먹었다고 갑자기 짝사랑 한다고 고백하는 게,

L군이 봐도 이상하지 않아?

L군 스스로도 본인 입으로 그녀를 좋아하는 게 아니라

그냥 이 상황에 집착하는 게 아닌지 분간을 못 하겠다고 말하잖아.

그걸 L군도 알고, 나도 알고, 그녀도 알아.

이걸 두고 무슨 '내가 왜 그녀를 좋아하게 되었는지는 나도 모르겠다'라고 말하면 곤란해.

그리고 거의 모든 연애에 환상이 포함되어 있긴 한데, 

이건 100% L군의 환상만으로 이루어져 있잖아. 그래서 문제야.

상대에 대해 어떤 판타지를 갖든 그건 L군 자유인데,

그걸로 인해 상대를 나쁜 사람 만든다면 그건 L군 잘못이야.

뭘 원하기에 고백을 하는 거야? 사귀고 싶어서?

그저 얼른 연애하고 싶다는 이유만으로 고백을 하는 건 잘못된 것 아닐까?

그래놓고는 상대가 받아주지 않으면 상대를 나쁜 사람 만드는 건 더 잘못된 거고 말야.

따지고 보면 그 고백은, L군이 얼른 승낙을 받고 싶어서 한 고백일 뿐이잖아.

그저 그게 전부인 까닭에 일이 이렇게 되고 만 거야.

실제로는 상대를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L군이 마음대로 만들어 낸 상대의 이미지만 가지고 좋아한다는 고백을 했으니까 말이야.

L군은 그녀에 대해 잘 모르고, 어떻게 살아왔는지, 어떻게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며.

더불어 앞서 말한 것처럼 L군은 자기 자신의 마음도 모르고 있잖아.

지금 정말 상대를 좋아해서 그러는 건지, 아니면 연애가 하고 싶어서 집착하는 건지.

내 생각이 궁금한 거라면, 난 후자가 맞을 거라는 데 올인 한다고 대답할게.

이건 정말 아니야. 이건, 남남으로 지내다 출퇴근 길 버스에서 두 번 만난 동창생에게

'네가 나의 베스트 프렌드라고 생각한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은 거니까.

L군이 그간 외로웠던 거야. 그걸 먼저 인정하고 다시 답을 구해봐."

 

더불어 매뉴얼을 통해 여러 번 소개한 적 있는 '아는 여자 카테고리'에 대한 이야기도 해주고 싶다. L군은 대화하고 지내는 이성이 가족이나 친척밖에 없다고 했는데, 그렇기 때문에 '좋은 감정'이 생기는 이성이 나타나면 어떻게든 '연인'의 자리에 앉게 하려 애쓰는 것처럼 보인다. 이성이 친절을 베풀거나, 미소를 짓거나, 관심을 보이면, L군은 그녀와 '아는 사이'로 지내는 게 아니라 '여자친구'가 되어 달라며 부탁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듯 누군가가 눈에 띄면 '내 사람의 유일한 여인'이 되어 버릴 수 있는 위험한 상황에 처하는 걸 막기 위해서라도, 오늘부터는 '아는 후배', '아는 선배', '여자 동창', '여자 직장동료' 등의 카테고리를 만들어 두도록 하자.

 

 

3. 날 비웃어, 날 가지고 놀아, 날 골 탕먹이려고 해…. 

 

만약 '창의적인 생각'이 아니라 '부정적인 생각'을 겨루는 대회가 있다면, 난 L군이 대한민국 상위 0.1% 이내에 드는 성적을 거둘 것이라고 조심스레 예상해본다. 난 L군이 신청서에

 

"그녀가 저에게 소위 '너는 꺼져, 나는 다른 남자가 있으니까.'라는 말을

저렇게 돌려서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라고 적은 것을 보고 '이거 분명 뭔가 이상한데?'라는 생각을 했고, 그 다음으로

 

"지금 그녀가 저를 가지고 노는 것은 아닌가 하는 말도 안 되는 생각까지도…."

 

라고 적은 것을 보고는 '확실히 이상해.'라는 생각을 했다.

 

"저는 그녀가 자신이 계산한다고 한 모습에서

아무래도 그녀가 저를 오늘 마지막으로 보고 더는 보지 않으려고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거나 먹고 떨어져라.'라는 생각으로 그러는 거라고요."

 

라고 적은 것을 봤을 땐, 뭘 먹으면 사람이 이렇게 부정적으로만 생각할 수 있는지 궁금하기까지 했다. 약속을 잡아 만났고 그녀는 오늘 자신이 살 테니 많이 먹으라며 이것저것 주문한 건데, 이걸 '이거나 먹고 떨어져라.'라는 의미가 담긴 표현으로 해석했다는 게 좀 놀랍기도 하다. 또, L군은 함께 밥을 먹고 나와서 그녀가 자신의 스케줄대로 돌아가려 한 행동을 두고

 

"그 모습에서 전, 그녀가 저에겐 정말 눈곱만큼도 관심이 없다는 걸….

그리고 그녀가 그렇게 주문해서 자기가 계산하겠다고 한 건,

나와의 마지막 만남이라고 생각한 채 정리하려 한 것이라는 걸…."

 

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상대와 밥 잘 먹고, 대화도 많이 하고 나와 겨우 저 정도의 결론 밖에는 못 내는 것이다. 바람만 불어도 깨질 위험이 있는 L군의 이 유리멘탈을 어쩌면 좋을까, 하는 걱정이 든다.

 

"저는 그녀의 그 대답이, 마치 저에게 '나는 이렇게 남자들과 잘 논다.

그러니 너는 나에 대해 괜히 허튼 생각 갖지 마.'라는 말을 하는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라는 이야기는 살짝 무섭기까지 하다. 이거 엄청 위험한 거다. 여기서 한 발짝만 더 나가면 "네가 말은 안 했지만 나에게 신호를 보냈잖아. 난 그 신호를 받았는데 넌 왜 아니라고 해?"라고 말하는 상황이 벌어질 수 있다. 농담인 것 같은가? 이미 사연에서도 몇 번 분노가 폭발할 듯 보이는 위험한 순간이 있었다. 날 골탕 먹이려 한다, 날 무안하게 만들려 한다, 날 비웃고 있다, 날 가지고 논다, 라며 L군이 그녀에게 유죄판결을 내리는 순간이 말이다.

 

난 L군과 상대의 이야기를 '우정'의 이야기로 본다. 거래처를 돌아다니다 보니 거기에 10년 만에 만나는 동창이 있었다. 둘은 서로 충분히 서로를 도울 수 있는 위치에 있고, 게다가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 밥 먹으며 대화를 하는 게 전혀 이상할 것 없는 일이니, 그녀는 이런 생각으로 L군을 만난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녀는 L군을 헷갈리게 할 만한 행동이나 말을 단 한 번도 한 적 없으며, L군에게 기대려 하거나 신세만 진 것도 아니었다. L군이 밥을 사면 그녀 역시 밥을 사는 식으로 둘은 만났다.

 

L군 역시, 겉으로만 봐서는 고백 한 번 한 것과 술 마시고 전화해 부담을 준 것 빼놓고는 크게 문제가 없는 사람처럼 보였기에, 그녀도 이걸 '우정'의 이야기로 보았을 것이다. 그녀는 L군이 사연신청서에 적은 것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걸 꿈에도 모르고 것이라고 난 장담할 수 있다. 저 내용을 조금이라도 눈치 챘으면 그녀는 L군과의 모든 인연을 다 끊고 L군을 차단했을 것이니 말이다.

 

그런데 L군만 이걸 '사랑'의 이야기로 보는 것이다. 내가 아주 단호하게 말하는데, 이건 L군이 말하는 것처럼 '알쏭달쏭' 할 것이 전혀 없는 자연스러운 '우정'이야기다. 처음 서로 얼굴을 보게 된 지 10년 만에 다시 만나 이제야 직접 늦은 통성명을 하며 친해지는 그런 관계 말이다. 사랑과는 1g도 상관없는 일이다. 이걸 먼저 받아들이길 권한다. 그렇지 않으면 L군 마음대로 기대했다가 마음대로 실망하고, 또 마음대로 오해해 그녀에게 나쁜 사람 판정을 내리며 분노하는 일만 계속될 수 있다. 그 과정에서 L군 자신 역시 여러 번 멘탈이 부서지며 상처를 입을 수 있고 말이다.

 

 

L군을 내 동생이라 생각하며 몇 마디 더 적어둘까 한다. L군이 내 동생이라면 그녀와 더 연락하고 지내는 걸 난 반대했을 것이다. 그녀와 지금처럼 연락을 하고 지내는 건 L군이 그녀의 열렬한 후원자의 입장에서 방청객이 리액션을 하는 것 정도의 의미밖에 없으니 L군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 또, 고백까지 하고 나서는 포기한 듯 L군이 조용해져 버리니 그녀도 이제는 심심해 진 것 같은데, 그래서인지 '떡밥'으로 의심되는 이야기들을 꺼내곤 한다. L군은 그걸 '희망'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은데, 내가 보기엔 그게 '희망고문'으로 변할 가능성이 높으니 이번에도 김칫국부터 마시진 말길 권해주고 싶다.

 

그녀와의 관계를 아예 자를 순 없고 연락하며 지내는 사이가 되고 싶다면, 그녀에게 기대하지 않으면서 L군이 할 수 있는 것들을 하면 된다. 카톡, 전화, 만남 다 괜찮다. 단, 선물은 하지 말길 권한다. L군은 남자들이 주로 사용하는 '뭔가를 사주는 걸로 표현하기'이라는 가장 투박한 형태로만 마음을 전하려고 하는데, 뭘 줘야만 호감을 얻어낼 수 있는 관계는 더는 뭔가를 주지 않을 때 끝날 것이다. 그러니 선물을 해도 정말 가볍게 할 수 있는 선물만 하길 바란다. 또, L군이 세 번 선물을 했는데 단 한 번도 그녀에게선 선물이 없으면, 그땐 가벼운 선물도 하지 말길 권한다. 편지도 마찬가지다. 두 번 편지를 보내도 답이 없으면, 편지도 그만 하자. 가는 것만 있고 오는 게 없는 곳, 그곳이 바로 어장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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