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일을 며칠 앞두고 헤어진 커플, 왜 헤어졌을까?
저는 몇 년 전에 지인과 한창 자전거를 탄 적이 있습니다. 한여름이었는데, 그와 자전거를 탈 때면 그가 편의점 아이스커피도 사고, 중간 중간 밥을 먹을 때도 그가 먼저 계산을 하는 등 여러 호의를 베풀었습니다. 제가 자전거 정비를 하러 샵에 갈 때도 지인은 같이 가 주었고, 나아가 자전거를 함께 타는 일 외에 여러 일에도 그 지인은 함께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저는 그 지인과 자전거를 타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의 의존적 성향이 너무 부담스러웠기 때문입니다. 저도 제 생활이 있는 까닭에 매일 그 지인과 어울려 자전거만 탈 수는 없는 노릇이었는데, 그 지인은 제가 친구들과 낚시를 간다고 해도 실망은 잔뜩 바른 말들을 늘어놓았습니다. 아래의 대화에서처럼 말입니다.
지인 - 오늘 저녁에 한강 갔다 올까?
무한 - 아, 저 오늘 친구들이랑 밤낚시 가기로 했어요.
지인 - 그래? 갔다가 언제 와?
무한 - 모레 올 것 같아요. 못 잡으면 안 오고요. ㅎㅎㅎ
지인 - 그래…. 그럼 자전거 못 타겠네.
무한 - 모레 저녁에 같이 타요~
지인 - 그래…. 내일 올 확률은 없는 건가?
무한 - 갔다가 강원도 투어도 할 거라 모레 올 것 같아요.
지인 - 그래…. 그러면 모레는 탈 수 있는 거지?
무한 - 네~
지인 - 그래…. 모레 타자. 일찍 오면 나한테 연락해줘….
그 지인이 저와 자전거를 타려 할 때 제가 시간을 낼 수 없으면, 지인은 급격히 실망해선 자신이 그 날 자전거를 못 타는 게 제 탓인 것처럼 이야기하기도 했습니다. 나중엔 그의 그 증세가 심해져 제가 명절에 친척집을 가거나, 공쥬님(여자친구)과 데이트를 하는 것에까지 서운해 하고 섭섭해 하는 듯한 뉘앙스의 말까지 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삶이라고는 전혀 없으며 오직 저와 자전거를 타는 것이 유일한 낙인 듯한 모습까지 보였습니다. 그럴수록 저는 그가 더욱 부담스러워져
'이건 내 탓이 아니잖아? 그는 왜 내가 잘못한 것처럼 말하는 거지?'
'그는 왜 자신의 외로움과 심심함을 내가 책임져야 하는 것처럼 굴까?'
'내 몫도 아닌 숙제를 하라고 강요당하는 느낌이야. 버거워.'
라는 생각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1. 본말전도
위에서 말한 지인과는 훗날 제가 그의 연락을 피하며 멀어지게 되었습니다만, 그렇게 완전히 사이가 멀어지기 전까지는 그래도 종종 라이딩을 함께하곤 했습니다. 물론 라이딩을 할 때에도 저는 점점 스트레스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가 만나자 마자
"몇 시에 들어가야 해? 오늘 몇 시까지 탈 수 있어?"
라는 이야기를 하며 자꾸 부담스럽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저와 라이딩하는 게 즐거워서 저를 만나는 게 아닌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오히려 만나서 라이딩을 해야만 마음이 편해지기 때문에 라이딩을 하려는 사람 같았습니다. 같이 라이딩을 하면서도, 언제 이 라이딩이 끝날까 계속 불안해하는 사람처럼 보이기도 했습니다.
지인은 착한 사람입니다. 앞서 말했듯 신세를 져도 제가 그에게 신세를 진 게 많고, 스케줄을 배려해 약속을 잡는 부분에서도 그가 훨씬 더 많은 양보를 했습니다. 그가 제게 손해를 끼치거나 절 나쁘게 대한 적도 없습니다. 다만 너무 부담스러웠기에 저는 그를 피하게 되었습니다. 분리불안 증상 같은 걸 보이는 그의 태도가 부담스러웠고, 제게 잔뜩 기대를 하고 있다가 쉽게 실망하는 그의 태도가 또 부담스러웠습니다. 그의 이름으로 된 발신자 표시가 제 전화에 뜨면, 또 축 늘어질 그의 대답을 감당해야 할 것이 뻔하기에 전 받기가 싫었고 말입니다.
저는 "만남이나 여행, 데이트는 수단일 뿐입니다. 그걸 목적으로 삼지 마세요."라는 이야기를 그간 매뉴얼을 통해 꾸준히 말해왔습니다. 그건 바로 이처럼 '본말전도'가 되어 버리는 현상을 막기 위해서였고, 상대에게 몇 그람의 서운함을 표시하려다 톤 단위의 정이 떨어져 버리게 만드는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재혁씨의 연애를 쭉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서운함과 섭섭함, 그리고 실망과 요구로 가득 차 있는 남자가 한 명 보이지 않습니까?
2. 오버센스
재혁씨처럼 연애를 하면 그 누구를 만나든 헤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재혁씨는 자신이 언젠가 상대로부터 버림을 받을 사람이라고 설정해 둔 채, 상대의 행동에서 부정적인 의미만을 찾으려 들기 때문입니다.
"그녀의 그 행동에서, 저는 이별을 직감했습니다."
재혁씨는 여자친구의 답장이 짧으면 이별을 직감하고, 여자친구가 잘 웃지 않으면 이별을 직감하며, 여자친구가 재혁씨의 제안에 큰 관심을 안 보이면 이별을 직감하고, 여자친구에게서 연락이 없으면 이별을 직감합니다.
'직감병'
이라고도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재혁씨는 그녀의 말이나 행동, 침묵, 좀 과장하자면 날씨, 온도, 습도, 풍향에서까지 이별을 직감해 버립니다.
연애를 하다 보면 이런 날도 있고, 또 저런 날도 있는 법입니다. 서로 다투다가 화가 나서 당장은 대화를 하고 싶지 않을 수도 있고, 외부의 요인으로 짜증이 난 까닭에 그냥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을 때도 있을 수 있습니다. 말을 꺼내면 내가 속 좁은 사람이 되는 것 같아서 말은 못 꺼내고 속으로만 생각하다, 결국 그 태도가 상대에게는 만남에 비협조적인 것으로 여겨져 갈등이 생길 때도 있습니다. 상대의 단점이 계속 보여 만남에 회의를 느낄 때도 있고, '나라면 저러지 않을 텐데'라는 생각으로 상대에게 실망을 하게 될 때도 있습니다. 여기다 다 적을 순 없지만, 정말 사소한 문제 하나 때문에도 방금 사랑스런 눈빛으로 서로를 바라보던 것과 달리 차가운 표정을 지을 수도 있습니다.
그녀가 일찍 들어간다고 할 때 -> 버려진 듯한 기분을 느낌.
그녀에게 아침카톡 안 올 때 -> 헤어질 것을 직감함.
그녀가 애정표현을 충분히 안 할 때 -> 마음이 변한 것을 직감함.
그녀의 폰 달력에 만난 날 표시가 안 된 것을 볼 때 -> 이별을 직감함.
그녀와 진실게임 비슷한 걸 하며 차가운 답을 들었을 때 -> 헤어질 것을 직감함.
그녀가 발 다친 재혁씨 걱정하며 여행을 미루자고 했을 때 -> 가기 싫어하는 것을 직감함.
그녀가 같이 걸으며 손을 잡지 않을 때 -> 헤어질 것을 직감함.
매 순간마다 이렇게 혼자 이별이나 배신, 마음의 변화를 직감했다며 피해자 코스프레를 해 버리면, 둘의 연애는 재혁씨에게는 고문이 되는 거고, 상대에게는 시도 때도 없이 우는 아이를 달래야 하는 노동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오늘은 집에 들어가야 한다는 그녀의 말에
전 왠지 버려진 듯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왜 그러냐고 계속 추궁했고,
그녀는 집에서 걱정해서 그렇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날 왜 그녀가 평소와 달리 집에 들어간다고 말했는지는, 재혁씨도 나중에 확인하지 않았습니까? 재혁씨와 노느라 집에 잘 들어가지 않던 그녀에게 부모님이 카톡을 남기셨고, 그걸 본 여자친구는 죄송한 마음에 집에 들어간다고 했던 걸 말입니다.
조급증과 직감병에 걸리면, 하루에 상대가 아홉 번 연락해도 "왜 열 번 연락하지 않는 거지?"라며 초조해 하고 불안해하게 됩니다. 방금 굿나잇 키스를 하고 집에 들어가는 상대가 한 번 뒤돌아보지 않으면, 그 뒤돌아보지 않았다는 것으로도 이쪽에서는 금방 시무룩해져서는 '날 진심으로 사랑하는 게 아닌 것 같아.'라는 생각에 괴로워 할 수 있습니다. 하루 종일 함께 보낸 시간들이 둘이 분명한 연임임을 증명하더라도, 뒤돌아보지 않고 그냥 들어가 버린 그 모습에 결핍을 느끼며 상대에게 날 더 사랑하라는 채근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재혁씨는 이런 부분들에 대해선 생각하지 않고 '내가 멋지고 기댈만한 남자로 변하면 그녀가 돌아올까?'라며 헛다리를 짚고 있는 것 같은데, 이 부분에 대해서는 아래에서 더욱 자세히 이야기를 나눠보도록 하겠습니다.
3. 기댈만한 남자로 변화?
서두에서 이야기 한 제 지인과 저의 관계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재혁씨는 만약 제 지인이
"그간 내가 너무 너에게만 의존했던 것 같다.
이젠 너도 내게 의지할 수 있도록 나도 변하겠다.
내게 연락을 하거나, 부탁을 하거나, 뭘 해도 다 감당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도록 하겠다.
난 지금 변화하고 있는 중이고, 많은 부분 변화되었다.
난 점점 더 네가 무엇이든 함께 하고 싶은 사람이 되어 가고 있으니,
이런 나에게 기회를 줘라. 예전처럼 같이 어울리자."
라는 이야기를 하면, 저와 제 지인의 문제가 모두 해결되고 좋은 사이로 돌아갈 수 있을 거라고 예상하십니까?
문제를 정확히 알아야 맞는 답을 구할 수 있듯, 재혁씨 역시 재혁씨의 문제를 바로 알아야 합니다. 재혁씨의 문제는 '매달리는 남자라서'이지, '기댈만한 남자가 아니라서'가 아닙니다. 함께 차를 타고 가는 상황에 비유하자면, 재혁씨는 운전대를 잡고 있으면서 앞은 안 보고 옆에 앉은 상대의 얼굴만 바라봤던 것입니다. 그 모습이 불안했던 상대는 재혁씨 대신이라도 앞을 보려고 했는데, 그런 와중에 재혁씨는
"난 이렇게 너만 쳐다보고 있는데, 넌 왜 날 안 봐?"
라고 말했던 것이고 말입니다. 그래서 헤어졌는데, 지금 재혁씨는
"제가 그녀만 쳐다보고 있어도 좋은 것처럼,
그녀 역시 절 쳐다보기만 해도 좋은,
그런 사람이 되어 다시 그녀에게 기회를 달라고 말해 볼 생각입니다."
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또, 재혁씨는 자신이 죽을 만큼 노력하며 변화하는 중이라고 했는데, 그 노력이라는 게 혼자 극장가서 영화 보기, 혼자 카페가서 커피 마시기, 친구들 모임에 껴서 술 마시며 농담 따먹기 같은 것들입니다. 이게, 그녀에게로 향해 있는 마음을 다른 곳으로 돌리는 게 힘들어 '죽을 만큼 노력 중'이라고 하신 건 물론 알겠습니다. 그런데 미안하지만, 저건 그녀와의 관계와는 별 상관이 없는 일들이기도 합니다. 만약 위에서 말한 제 지인이 비데가 있는 자신의 집이 아니면 볼 일을 못 보는데, 저와 사이가 멀어진 후
"난 정말 많이 노력했어.
이제 난 어느 상가 건물 화장실에도 들어가서 볼 일을 볼 수 있어.
비데가 없을 뿐만 아니라, 푸세식인 화장실에서도 볼 일을 볼 수 있을 정도가 되었어."
라는 이야기를 한다고 해서, 그에 대한 제 부담감이 사르르 녹고 감동의 눈물을 흘리게 될 것이라 생각하십니까? 말이 나왔으니, 재혁씨가 이별 후 그녀에게 했던 말들을 저와 지인의 관계에 한 번 대입해 보겠습니다. 남이 한 말이라 생각하며 보시기 바랍니다.
"넌 할 줄 아는 게 많은 동생이라 멋있었어.
너도 성숙하고 할 줄 아는 게 많은 남자가 되고 싶은데,
그렇게 될 수 있을까?"
"난 그냥 네가 나랑 웃으며 어울리는 게 좋았는데,
언젠가부터 넌 잘 안 웃었던 것 같아.
그래서 나도 더 철없이 굴었던 것 같고 말이야."
"그동안 많이 생각해 봤는데, 안 맞는다는 건 서로 다른 건데
난 다른 게 아니라 틀린 부분이 있었던 것 같아.
내가 변할 수 있을까?"
상대에게 긍정적인 대답을 받지 않으면 스스로는 손톱만큼의 자신감도 갖지 못 하고, 여전히 상대에게 매달리고 부탁하며, 패배감에 젖어 상대가 일으켜 주기만을 바라는 한 남자가 보이지 않으십니까? 상대는 그게 싫어서 재혁씨를 떠난 것인데, 재혁씨는 죽을 만큼 노력해 변했고 또 변하는 중이라고 말하면서도 달라진 게 아무 것도 없습니다. 재혁씨가 말하는 그 '노력'에서 훨씬 더 나아가 자립심을 키우기 위해 혼자 걸어서 전국일주를 하거나 말도 통하지 않는 외국에 혼자 나갔다 왔다 해도, 돌아와서 "나 이러이러한 것들까지 혼자 해냈어. 나 달라졌으니까 받아줘."라고 여전히 상대에게 매달리고 있으면, 전과 다를 게 전혀 없는 겁니다.
여기까지 읽으셨다면, 재혁씨가 궁금해 하셨던
"시간이 지난 후에 내 변화에 대한 이야기를 언급하며 말을 거는 게 나은지,
아니면 그저 잘 지내냐는 안부로 대화를 시작해 만남까지 이어간 후
내 변화를 언급하는 게 나은지 판단이 안 섭니다."
라는 부분이 왜 별 의미 없고 그저 공허할 뿐인 고민인지를 알게 되셨을 거라 생각합니다.
애매하게 빙빙 돌지 않고 질러가겠습니다. 시간이 지나 현재 흙탕물처럼 되어버린 둘의 관계가 다시 투명해진다 해도, 또 휘저으면 다시 흙탕물 되는 건 시간문제입니다. 전과 다를 바 없이 여전히 상대가 재혁씨의 연락을 피할 것 같다는 불안함, 그리고 열심히 설득을 해도 그녀의 마음이 돌아서지 않을 것 같다는 두려움을 가진 채 다시 만나달라고 '요구'만 하다간 둘의 관계는 다시 뿌옇게 될 것입니다.
"솔직하게 말해줘. 나 그냥 여기에서 포기할까?"
따위의 질문을, 잊혀질만할 때 쯤 다시 한 번씩 꺼내 던져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연락은 재혁씨가 그녀에게 아무 것도 바라는 것이 없을 때, 그때 다시 한 번 해보시길 권합니다. 현재 재혁씨는 괜찮은 척, 변화하는 척 하지만, 여기서 보기엔 재혁씨는 그녀가 재혁씨와 왜 사귀었는지에 대해서까지 근본적으로 의심하고 있으며, 마음이 울퉁불퉁해져 이제 끝이라는 생각으로 그녀에게 정산을 요구했다가도 그녀가 재혁씨의 말대로 정말 정산을 하면 그것에 배신감을 느끼는 이상한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또 재혁씨는 제게 덤덤하게 그녀와의 연애를 돌아본 듯 이야기 하지만, 그렇게 복기하면서 재혁씨가 찾아내려 하는 건 '언제부터 그녀에게서 이별의 조짐이 보였는가?'가 거의 전부일 뿐입니다.
아무에게도, 그리고 아무 것에도 의지하지 말고 재혁씨의 두 다리로 서시기 바랍니다. 자신의 다리로 설 수 있어야 남이 기대도 기댈 수 있는 겁니다. 상대의 행동에 내 목숨이 달린 것처럼 전전긍긍하며 바라보고 있는 사람은, 자신의 품으로 아무도 안아줄 수 없는 사람입니다. 오래 전 제가 소개한 적 있는 <데미안>의 문장에서도 그 지점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만일 사람이 누군가를 두려워한다면
그건 그 사람이 자기를 지배하고 있는 힘을
누군한텐지 내준 데 원인이 있는 거야."
라고 말입니다. 그녀가 어떤 선택을 하든, 어떤 대답을 하든 그게 두렵지 않아질 때. 그때가 바로 다시 한 번 인연의 끈을 당겨볼 수 있는 순간이라고 생각하시길 바랍니다. 한 달이냐, 한 달 반이냐 하는 기간의 문제가 아닙니다. 재혁씨가 여전히 그녀를 두려워하냐, 그렇지 않냐의 문제입니다. 전 재혁씨가 어서 그 두려움에서 벗어나길 기원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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