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과 감성 사이에서 방황하다 이별통보 받은 여자
어제도 어느 독자 분께서 심남이와 썸을 타시던 중 이성과 감성 사이에서 방황하시기에, 저는
"주말에 그와 만나서 데이트 하고 싶은 마음이 있으면, 만나셔도 됩니다."
라는 대답을 해드렸습니다.
그 독자 분은 자신이 이 심남이와 사귀게 되면 더 괜찮은 남자가 나타났을 때 흔들릴 수 있을 것 같고, 더불어 지금 이 심남이에게 자신의 마음이 어느 정도 가 있는지 모르기에 사귀어도 되는지 아닌지를 모르겠다고 하셨습니다. 이런 분들이 생각보다 꽤 많습니다. 특히 '여중-여고-여대'를 나온 솔로부대 여성 엘리트 대원들에게서 이런 '앞선 걱정 및 노파심'이 보이는데, 전 일단 뭐라도 좀 해보고 걱정은 그 다음에 하자는 이야기를 해드리고 싶습니다. 제가 지겹도록 인용한, 소설가 양귀자의
"인생은 탐구하며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며 탐구하는 것이다."
라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그거, 제가 중요한 일 앞두고 과민성 대장염과 신경성 불면증으로 잠 못 이루다, 결국 다음 날 그 중요한 일을 망쳐버리고 마는 것과 비슷한 겁니다. 이미지 트레이닝을 수십 번 하다가 새벽 네 시에 잠이 들어, 아홉 시 약속을 망치고 마는 것과 같다고 할까요. 그렇게 걱정을 미리 대출 받아 버리면, 나중에 피로에 지친 몽롱한 상태로 이자를 갚아나가야 합니다.
1. 귀를 아십니까?
혹시 귀를 유심히 보신 적 있으십니까? 거기에 달려있는 게 당연하다 생각하고 살면 이상할 것 전혀 없지만, 귀에 신경을 쓰며 바라보기 시작하면 이게 너무나 이상하고 징그러우며 대체 왜 이런 모양을 하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귀를 계속 들여다보면, 귓바퀴의 튀어나온 모양들이 괴상한 형태를 하고 있으며 사람마다 그 -아무렇게나 접혀져서 펴지다 만 듯한- 거죽을 달고 다닌 것에 낯설어지게 됩니다. 지금 누구의 사진이든 옆모습을 검색해 그 사람의 귀만 한 번 들여다보시기 바랍니다. 그 사람이 그런 귀를 달고 다녔다는 것을 이제야 발견하게 된 듯한, 낯선 느낌이 들지 않으십니까?
그게 함정입니다. 사실, 낯설게 보기 시작하면 모든 것이 낯설어 집니다. 당장 왼손을 펴셔 그 손에 새겨진 지문과 손금들을 유심히 보시기 바랍니다. 신기하고 낯선 무늬들이 내 손에 그렇게 새겨져 있다는 게 새삼 신기하게 느껴지지 않으십니까? 그것뿐만 아니라 별로 볼 일 없었던 발가락 모양, 어금니 모양, 배꼽 모양 등을 보면 '나'라는 사람에 속해 있는 그 부분들에 대해서도 내가 잘 모르고 있었다는 걸 발견하게 됩니다. 그런데 잠깐. 반대로 그 모양들을 살피고 분석한다고 해서 '나'라는 사람에 대해 알게 되는 걸까요?
L양은 친구를 만날 때 친구의 귀 모양, 지문이나 손금 모양, 발가락 모양, 어금니 모양, 배꼽 모양 등을 보십니까? 이상한 관계가 아니라면, 친구와 만나서 그런 것들만 관찰하진 않으리라 저는 생각합니다. 때문에 당장 친구의 귀 모양을 그려보라고 하면,
'걔 귀가 어떻게 생겼더라?'
하며 나지 않는 기억을 자꾸 끄집어내려 시도해야 할 것입니다. 친구와 만날 때 그런 작은 부분들에 집착하며 관찰하듯 만난 게 아니라, 그냥 '친구로서' 만난 것이니 말입니다.
이성도 그렇게 만나면 되는 겁니다. 상대의 일거수일투족 모두에 의미를 부여하며 관찰하고 분석할 게 아니라, 그냥 나랑 크게 다르지 않은 '한 사람'으로 보고 만나면 됩니다. 이게 안 되면 연애하기가 힘듭니다. 관찰하고 분석하기 시작하면, 제가 택배기사를 기다릴 때와 같은 마음이 되어서
'왜 아직도 안 오지? 원래 3시면 오는데?'
'혹시 분류과정 중 내 물건만 빠진 건 아닐까?'
'전화해서 언제 오는 거냐고 물어볼까? 내가 가서 받는다고 할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L양 역시, 만약 L양 어머니께서 마트에 장 보러 다녀오신다고 하면, 당연히 갔다가 오실 게 분명하기에 "네, 다녀오세요~"정도의 인사만 하지 않으십니까? 그런데 이걸 관찰하고 분석하기 시작하면, 어머니는 언제 오시는 걸까, 정말 마트에 가신 걸까, 마트에서 나오신 뒤 다른 곳도 들르시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신경을 온통 거기에 집중하고 있던 까닭에, 어머니는 마트에 다녀오셨을 뿐인데 L양은 "엄마 왜 이제 오는 거야? 마트만 다녀온 거 맞아?"라는 이야기를 하게 될 수 있는 것이고 말입니다.
2. 여린마음.
제가 저를 '여린마음동호회 회장'이라고 소개하는 건, 웃자고 하는 이유도 있긴 하지만 실제로 정말 여린마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게 어느 정도냐면, 어느 강의 영상을 보다가 강연자가 조수에게 문서를 달라고 하는 부분에서, 조수가 내민 문서를 뺏듯이 확 낚아채는 걸 보며
'저 조수는 강연자의 저 태도에 기분이 나빴을 텐데….'
라는 생각을 할 정도입니다. 강연자의 그 행위에는 빨리 가져오지 않아서 짜증이 났다는 의미, 그리고 얼른 문서나 주고 화면 밖으로 나가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그 조수는, 당시 제 예상과 같은 느낌을 받았을까요? 물론 그에게 물어보지 않은 이상 알 순 없는 일입니다. 제 예상과 달리 조수는 강연자의 성격이 원래 그러니 그 행동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을 수도 있고, 강연의 흐름 상 강연자가 얼른 그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재빨리 문서를 건네받은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여린마음동호회 회원들은, 자신이 늘 '오버센스' 할 수 있다는 걸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실제로는 상대가 아무 의미 없이 한 행동을 가지곤, 그걸 자신이 날 서도록 갈아 스스로에게 상처를 낼 수 있습니다. 저 역시 여린마음동호회(이하 여동)에 속해있지만, 같은 여동 회원인 친구와 차를 타고 가다가 하품을 해다는 이유로 그 친구와 절교할 뻔 한 적이 있습니다. 저는 제가 운전을 하다 보니 피곤하기도 하고 차 안의 산소가 희박해지는 느낌이 들어 하품을 했던 것인데, 그 친구는 자신이 얘기를 하는 중에 제가 하품을 하니 자신의 이야기가 지겹다는 신호로 받아들이고 만 것입니다. 때문에 그는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어색하고 불편한 분위기만을 만들었습니다.
오버센스는 자신이 해 놓고 그것에 대한 해명도 상대보고 하라며 추궁하면, 상대는 짜증이 나고 맙니다. 그 해명요구를 밝은 톤으로 이야기 하든, 차분한 톤으로 이야기 하든 짜증이 나는 건 마찬가지 입니다. 그게 어떤 청문회든 청문회의 당사자가 된다는 건 유쾌한 일이 아니니 말입니다. L양은 이번 연애에서도 이런 모습을 보였는데, 다행히 지금은 그걸 깨닫곤
"미안할 일 없는 사람한테 미안해하라고 강요한 거나 마찬가지여서,
상대가 많이 어이없고 황당했을 수 있다는 깨달았습니다."
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더 길게 적지는 않도록 하겠습니다.
3. 자신이 누군지 모르는 여자.
만약 제가 누군가의 보증을 서주고는, 보증을 서준 일로 피해를 봤다고 해보겠습니다. 그런 와중에 저는
"누군가의 보증을 서선 안 된다는 걸 잘 알고 있었어요.
제 친구가 보증 문제로 고민을 털어 놓았을 때 제가 반대하기도 했고요.
하아, 그런데 제가 보증을 서서 이렇게 될 줄 몰랐네요."
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으면, 뭐가 어떻게 되는 걸까요? 저건 그냥 하소연일 뿐, 선택에 대한 책임은 제가 져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L양의 사연엔
"제 생각과 달리…."
"~일줄 몰랐어요."
"~라서 당황했어요."
라는 말들이 많이 등장하는데, 그래서 저도 참 당황스럽습니다. 이건 분명 L양이 보낸 사연인데, L양은 자신이 원래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식의 이야기를 하거나, 그럴 의도로 그런 게 아니라는 이야기를 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L양과 상대의 연애와 이별은 벌어진 일이고, 둘의 말과 행동들 모두 관계에 영향을 끼친 게 분명한데, L양은 그걸 관찰자 시점에서 남의 이야기처럼 말하기 때문입니다.
별로 좋지 않은 인물을 예로 들어서 죄송합니다만, 이건 마치 히틀러가 모든 일을 다 저질러 놓곤
"난 원래 화가가 되고 싶었다. 정치에 몸담을 생각은 아니었다."
라고 말하는 것과 비슷한 겁니다. 분명 행위와 결과는 모두 존재하는데, 그럴 의도는 없었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과 같다고 할까요.
더불어 이게 자신의 연애와 이별임에도 불구하고, 자꾸 그 정의와 요약을 남에게 부탁하는 문제도 있습니다. 일단 창업할 돈은 있으니 가게는 오픈하는데, 오픈부터 폐업까지 주변인들에게
"뭘 팔아야 할까?"
"인테리어는 어떻게 할까?"
"사람 두고 쓰는 게 나을까?"
"장사가 잘 안 되면 어떻게 하지?"
"내가 뭘 잘못해서 폐업하게 되는 걸까?"
라고 묻는 것과 같다고 할까요. 그래 놓고는
'아…, 그 조언을 따르는 게 아니었어.
나도 원래는 그럴 생각이 아니었는데….'
라는 후회를 하는 겁니다. 이런 부분들에 대해 L양은 제게
"제가 그런 짓을 한 건 맞지만,
그 이면도 좀 살펴주셨으면 하는 마음에서 드리는 말입니다."
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이것마저도 제가 다 감안해서 L양이 듣기에 좋은 소리들만 적어 놓을 거면, 제가 이 사연을 다룰 이유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상황은 이렇게 되었지만 실수나 잘못은 이쪽이 의도한 게 아니었다고 말한다면, 저도 할 말이 없지 않겠습니까? L양은 L양에게 호의적인 친구나 지인들에게 이야기를 한 후 위로나 격려를 받고 있는데, 그건 '우리끼리니까 답정너'의 형태일 뿐이라는 걸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4. 현실 따로, 이상 따로.
다 합하면 사연신청서만 A5용지 50장이 훌쩍 넘어가는 L양의 이 사연에서, L양은 상반되는 주장만을 계속 되풀이 하고 있다는 걸 알고 계십니까?
- 그 사람의 말을 100% 믿진 않았고, 지금도 그렇진 않습니다.
- 그 사람이 제게 있어서 정말 소중하고 의미가 큰 사람이기에….
L양의 이런 태도가 저를 힘들게 합니다. 이건 마치
"그 사람이 그 약속을 지킬 거라곤 저도 생각하지 않았어요."
"하지만 그 사람은 분명 그런 약속을 제게 했습니다."
"물론 전 그가 그 약속을 지킬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어요."
"그러나 그 사람은 분명 그런 약속을 제게 했습니다."
"어쨌든 저는 그 사람이 그 약속을 지킬 거라곤…."
이라는 말의 무한반복처럼 느껴집니다.
정리해드리겠습니다. 이 관계가 끝난 후에도 계속 L양의 마음이 널뛰고 있는 건, 이성적으로 봤을 땐 구남친이 신뢰할 수 없는 남자지만, 감성적으로 봤을 땐 L양에게 달달한 이야기들을 많이 해주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L양은 이 상황을 두고
"연애를 할 때에는 이성적인 태도와 감정적인 태도를
어떤 식으로 얼마나 섞어서 해야 하나요?"
"지금 제게 필요한 건, 하고 싶은 대로 감정에 맡겨보는
감정적이고 주관적인 모습일까요?"
라는 질문을 하고 있는데, 제가 보기엔 그건 할 필요가 없는 고민인 것 같습니다.
전 L양의 남친을 '말만 번지르르한 충동적인 남자'로 봅니다. 우리끼리니까 하는 얘기지만, L양도 분명 그에게서 저걸 느꼈으리라 생각합니다. 때문에 L양의 이성이 계속 경고신호를 보내기도 했고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L양은 연애를 시작한 것입니다. <재택 댓글알바로 월 500보장>이라는 게시물을 클릭해 들어가선, 거기에 계약까지 한 것과 같다고 할까요. 누가 봐도 이건 아닌데, L양은 '그래도 혹시나 어쩌면'이라는 마음으로 시작한 것입니다. 상대가 하는 달콤한 이야기들에 빠진 채로.
L양의 남친이 한 말과 행동들을 전부 옮겨 적진 않겠습니다. 그의 됨됨이는, 헤어진 이후 L양이 전화를 걸어 통화를 하게 되었을 때,
"남자가 옆에 있어야지 잠이 드나?"
라는 이야기를 한 것만 봐도 충분히 알 수 있으니 말입니다. 저런 인간을 이성적으로 봐야 하는지 감성적으로 봐야 하는지 고민하는 건, 밥 잘 먹고 할 만한 일이 아니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와 L양의 관계에 대해 저는 전혀 걱정하지 않습니다. 이별 후 그는 L양에게
"오빠랑 통화하고 싶어서 전화했는데 끊자고 하니까 가슴 아프지?
근데 안 되는 건 어쩔 수 없는 거야."
따위의 이야기를 하며 알아서 정 떨어지게 만들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이 매뉴얼을 발행하는 건, 소제목 1, 2, 3번의 문제는 L양이 새로운 사람을 만나도 관계의 걸림돌이 될 수 있는 부분이기 때문입니다.
더불어 저는, L양의 사연 속에서 L양이 자꾸 변명을 하려고 하는 듯한 모습을 많이 보았습니다. 내 연애를 누가 채점하는 거 아니고, 또 내가 내 연애 이렇게 한다고 해서 남들이 상을 주거나 비난하는 거 아닌데, L양은 자신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연애'를 위해 자기 자신까지를 부정하려 합니다. 때문에 그 태도가 '의도한 게 아니다, 내가 원래는 그렇지 않다'는 변명이나 핑계로 이어지기도 하고 말입니다. L양은
"솔직히 '문제', '잘못'이라는 말은 좀 내키지 않습니다.
저만 옹호하고자 하는 게 아니라
관계에 있어서 정말로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 이상
대부분 '미숙한 모습'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라는 말을 하기도 했는데, 연애가 무슨 논술시험은 아니잖습니까? 업어치나 메치나 넘어간 건 넘어간 겁니다. 이런 논술, 면접 준비생 같은 L양의 태도는 이별에 대해서도
"제가 재회를 위해 준비해야 하는 측면은 이러이러한 부분이 있고,
오빠가 재회를 위해 준비해야 하는 측면은 이러이러한 부분이 있습니다.
재회 후엔, 서로 관계에 대한 책임을 가지고 불만, 갈등, 문제들에 대해
서로 대화로 조율하며 나가야겠지요."
라고 말하는 문제를 발생시키고 맙니다. 아니, 지금 소가 외양간을 나간 건데 이 와중에
- 외양간의 구조적인 문제와 잠금장치에 대한 분석.
- 소의 생물학적 욕구 해소를 위한 방안.
- 소와의 감정적 교감을 위한 활동 연구.
라는 박사논문을 쓴다고 소가 도로 돌아오는 것은 아니잖습니까? 연애오답노트를 적으며 자신과 자신의 연애를 돌아보는 것은 좋지만, 헤어진 원인과 해결책을 찾았다고 해서 이별이 없던 일이 되는 건 아니라는 걸 잊지 마셨으면 합니다. 그러니 넘어진 그 자리에 주저앉아 이별을 부정하며 <이 상황을 긍정적 방향으로 이끌어 갈 방법 연구>만을 하진 마시고, 어서 오늘날 이 시점으로 오셔서 일단 삶을 살아가며 생각하시길 권합니다. 상대는 11월 22일을 살고 있는데, L양은 8월 언제쯤에 멈춰 이별에 대한 논문만 쓰고 있으면 더욱 곤란해 질 수 있습니다. 논문은 오늘부로 접고, 어서 현실로 복귀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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