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걸 다 주니까 떠난다는 그 썸남 외 2편
얼마 전 매뉴얼에서 소개한 적 있는 내 공인중개사 지인을 기억하는가? 그에게 들은 놀라운 이야기가 하나 있다. 계약금만 걸어 놓고는 집 청소를 하겠다며 열쇠나 도어락 비밀번호를 받은 뒤 이사를 들어와 버리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들은 잔금도 치르지 않은 채 그렇게 들어와서는, 잔금은 당장 형편이 안 되어 나중에 줄 테니 일단 좀 살자는 이야기를 한다고 한다.
저렇게 임차인이 그냥 들어와서 살아버리면 소송을 걸어 따져야 하는데, 판결이 하루아침에 나는 것이 아닌 까닭에 임대인은 그 기간 동안 속이 까맣게 타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때문에 지인이 있는 부동산에서는 임차인에게 절대 함부로 열쇠나 도어락 비밀번호를 주지 않는데, 근처 부동산에서는 임차인이 그저 사람 좋아 보이고 점잖게 생겨 절대 그럴 일 없다고 굳게 믿은 채 주었다가 발등을 찍힌 적이 있다고 한다.
연애에서도 위와 같은 일이 벌어지곤 한다. 누가 봐도 썸을 타는 게 분명해 보이는 사이에서 사귀자는 말없이 연인처럼 지내게 되는 것이라든지, 상대에게 연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쪽과 연인처럼 지내게 되는 경우가 그렇다. 물론 전자의 경우 "꼭 사귀자는 이야기를 하고 둘 다 동의해야 사귀는 건가? 난 우리가 이미 사귀는 거라고 생각했는데."라며 훈훈한 결말로 이어지는 경우가 있긴 하다. 후자의 경우 역시 실제로 마음이 변해 여자친구를 정리한 뒤 이쪽과 사귀게 되는 경우가 있고 말이다. 하지만 전부 그렇게 상식이 통하고 말과 행동이 일치한다면 저 위에서 말한 '임차인의 무단이사'같은 일은 발생하지 않을 것 아닌가. 양심이 말소된 사람이나 애초에 흑심을 품고 접근한 사람, 또는 '그냥 이렇게도 만날 수 있는데 내가 뭐하러 수고를 해?'라고 생각하는 사람을 만나는 경우엔 발등을 찍히고 만다.
1. 모든 걸 다 주니까 떠난다는 그 썸남.
K양의 사연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건 아니지만, 위에서 이야기 한 경우들엔 대개 아래와 같은 대화들이 이어지곤 한다.
여자 - 넌 여자친구도 있으면서 나랑 왜 그랬어?
남자 - 넌 나 여자친구 있는 거 알면서 왜 그랬는데?
여자 - ….
여자 - 나야…, 난 널 좋아하니까 그랬던 거지.
남자 - 나도 널 좋아하니까 그랬던 거야.
여자 - ….
저 대화를 이렇게 밖에서, 멀쩡한 정신을 가진 채 보면 소가 웃을 이야기라는 걸 알 수 있지만, 완전히 마음을 빼앗긴 저 상황에서 듣게 되면 없는 신이라도 만들어 믿고 싶어진다. 그래서 상대가
"지금 내가 여자친구에게 이별을 말하면 여자친구가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
그러니 날 재촉해 널 포기하게 만들지 말고, 내게 시간을 좀 줘라."
라는 이야기만 해도, 그 이야기를 벽에 걸어 놓고는 밤낮으로 그 앞에 무릎 꿇고 기도하게 된다. 매뉴얼을 발행하는 나는 저 여성대원이 사연을 보내면
"거기서 뭐해요? 왜 그러고 있어요?"
라며 얼른 일어나서 세수부터 좀 하라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고 말이다.
K양의 그 절절한 사연도 여기서 보면,
'오는 여자 안 막는 남자에게 다가가 달라고 하지도 않은 거 다 주고선,
결국 빈털터리가 되어 혼란에 빠진 채 '내가 다 줘서 쉬워 보이냐'고 묻는 여자'
의 이야기처럼 보이기도 한다. 물론 그가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데 K양이 성큼성큼 그에게 다갔던 건 아니고, '애교 많고 싹싹한 남자'였던 그는 K양이 충분히 오해할 수 있는 함축적인 말들을 던지기도 했다.
"내가 괜히 누나한테 연락했겠어?"
"나도 우리가 만나면 어떨지 생각을 안 해 본 건 아니야."
"쉽게 보다니. 무슨 그런 말을. 그런 걱정 하지 마."
등의 이야기들 말이다. 하지만 난 K양에게, "그가 저 말들을 언제 했는지 지금 명확히 살펴보세요."라는 이야기를 해주고 싶다. 저 이야기는 전부 K양이 불안해서 질문하거나, 아니면 그의 마음을 알아보기 위해 떠보는 물음들을 던졌을 때 그에게서 나온 것이다. 쉽게 말해, K양 물음에 대한 '답정너'에 불과하단 거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K양이 '적극적 타입의 금사빠'인 까닭에 상대가 K양을 밀어냈다는 것이다. 상대가 나처럼 나쁜 남자였다면, K양을 어장에 넣어둔 채 꿈과 희망이라는 떡밥을 주며 7년쯤 사육했을 것이다. 아, 내가 나쁜 남자라고 해서 너무 겁먹을 것 없다. 난 내가 나쁜 남자라는 걸 알고는 스스로를 집에 감금해둔 까닭에 아무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으니 말이다. 물론 농담이고.
난 사실 이 관계 보다는 K양이 '적극적 타입의 금사빠'라는 것이 더 마음에 걸린다. K양은 3년 째 잊힐만 할 때쯤이면 사연을 보내오는데, 그 레퍼토리가 전부 비슷하다. 일단 다 맞는 걸로 채점을 해 진도는 나가 놓고 나중에 상대에게 답을 구하는 레퍼토리. 계속해서 넘어지게 되는 이 레퍼토리를 바꾸기 위해서라도 K양의 연애사를 처음부터 세밀하게 살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그러니 초등학교에 들어간 이후부터 지금까지의 연애사를 전부 적어 한 번 사연으로 보내주시길 부탁드린다. K양의 연애관, 결혼관과 함께.
2. 어떻게 이런 남자를….
가연양이 전생에 대체 무슨 죄를 지었길래 이런 남자를 만났는지 궁금하다.
"너를 사랑하는 거라면 내가 널 좋아주는 게 맞지만,
지금은 사랑이 아니라 좋아하는 감정이라 놓아주기도,
그렇다고 붙잡기도 어렵다.
네가 오빠(자신)를 기다려 주지 않을 것 같기도 하고…."
솔직히 난 사연을 읽는 내내 좀 짜증이 났다.
"남자가 참을 수 없는 세 가지가 있어…."
따위의 이야기를 사연으로 내가 전해 듣고 있어야 한다는 게, 시간이 아깝기도 했다. 남자 나이가 어리면 '어려서 그런가 보다' 할 텐데, 그의 나이가 어린 것도 아니잖은가. 내가 가연양의 입장이었다면, 그의 저 말에
"여자가 싫어하는 것도 세 가지가 있어요.
척 하는 거, 발정난 거, 말로만 요란한 거."
라는 이야기를 해주고 싶었을 정도다. 가연양은 현재
'내가 너무 착하게 군 게 날 호구로 생각하게 만든 건가?'
'그런데 연락은 왜 했지? 이제 와서 미련이나 후회가 드는 건가?'
'날 만만하게 생각한 거 되갚아 주기 위해서라도 만나볼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복수 같은 건 접어두고 얼른 이 관계에서 로그아웃하길 권한다. 그는 그냥 과잉인 자신의 감정을 아무데나 칠하고 싶어서 다시 찔러보는 거지, 가연양이라는 사람에게 관심이 있어서 그러는 게 아니다. 또, 그가 드러낸 호의와 '특별하게 생각한다는 말'같은 것 역시, 그냥 자기 잘난 맛에 기분 내느라 그런 거지 가연양을 정말 특별하게 생각해서 그런 게 아니다.
가연양은 현재 '그가 느끼하고 재수 없게 굴긴 했지만, 그래도 이렇게 다시 연락한 걸 보면….'이라는 생각으로 약간의 희망을 가지려 하고 있는데, 절대 그러지 말길 권한다. 그가 내보이는 후회와 미련 역시 그의 판타지를 실현하기 위해 '아쉬운 척'을 하는 거지, 실제로 정말 가연양이 아쉬워서 그러는 게 아니다. 어쩔 수 없이 헤어질 수밖에 없는 남자의 독백같은 걸 해보고 싶은데, 마침 거기 자신이 아무렇게나 팽개친 가연양이 있기에 거기다 대고 마음대로 상황을 만들어서 미련이 남은 척 하는 거랄까. 그가 대체 무슨 목적으로 그러는 거냐고 내게 묻진 말길 바란다. 세상엔 우리가 이해하기 힘들며, 이해하려 노력해도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이 꽤 많이 살고 있으니까.
더 길게 이야기 하진 않겠다. 이건 돌아볼 가치도 없으며, 그의 헛소리에 대답해 주고 있는 것이 시간이 아까울 정도인 관계다.
"헤어진 날 제가 그 오빠에게 (업신여김)당한 거,
어떻게 하면 사과 받을 수 있을까요?"
상대는 그렇게 이별을 통보한 자신이, 꽤 멋있었다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 사과 같은 건 받을 수 없거니와, 가연양이 사과를 요구하면 아무렇게나 끊어주는 간이영수증처럼 대충 던져주고 말 것이다. 가연양을 손톱만큼도 존중하지 않으며 그저 들러리 정도로 생각하고 있는 그에게 아무 것도 바라지 말고, 더 말려들기 전에 여기서 얼른 차단하길 권한다. 가연양은 만약 친구가
"아~ 내가 너 좋은데 취직시켜주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네가 잘 할 것 같지 않아서 그냥 말았어.
네 능력으로는 거기서 일 못 할 거야. 너 영어도 잘 못 하잖아.
조건은 진짜 엄청 좋은 곳이었는데…."
라고 이야기 하면, 꺼지라며 가운데 손가락을 들어줄 것 아닌가. 거기다 대고 "조건이 어땠는데?"라고 묻고 있으면 완전 바보 되는 거다. 그러니 상대에게 "나 보고 싶긴 한가봐요?"라며 아쉬운 소리 하지 말고, 가연양 인생에서 그를 툭툭 털어버리길 권한다.
3. 썸남과 어색해지고 말았다는 그녀.
남을 너무 의식하면 인생이 피곤해진다. Y양은 오늘 아침 어떤 남자가 방한화를 신고 버스정류장에 서 있었다면, 그것을 지금까지 기억하며 '그 사람은 왜 방한화를 신고 있었을까? 산에라도 가는 걸까? 그냥 단화를 신었어도 될 텐데, 왜 오토바이 탈 때 신는 그런 신발을 신고 있었던 걸까?'하는 의문을 가질 것 같은가? 그가 바지라도 안 입고 있었다면 모르겠지만, 그 정도로 이상한 차림을 하고 있지 않았던 이상 그가 군화를 신고 있었든, 고무신을 신고 있었든, 슬리퍼를 신고 있었든 그냥 한 번 보고 말았을 거라 생각한다. 이상하다고 생각했어도 점심 먹은 이후엔 그것에 대한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을 것이고 말이다.
Y양은 현재 거의 모든 일에 대해 '썸남은 왜 그런걸까?'를 연결해 생각하고 있다. 이러면 필연적으로 시무룩해지거나 마음속으로 오해해 헛발질을 하게 된다. 얼마 전 다른 친구와 어울리며 썸남을 부르려 했을 때, 썸남이 거절한 걸 두고 Y양이 하는 말을 보자.
"절 피하고 싶어서 일부러 다른 모임 핑계를 댄 걸까요? 마음이 복잡하네요."
복잡할 것 없다. 그 사건만 두고 보자면, Y양이 다른 친구와 만날 약속을 잡고 나선 썸남을 부른 것 아닌가. 때문에 약속이 있던 썸남은 자연히 "몇 시에 보려고? 저녁? 저녁엔 나 약속 있는데. 난 담에 봐야겠다."라는 대답을 한 거다. 그런데 Y양은
"모임 때문에 저녁에 시간이 안 된다면,
점심에 만나면 안 되냐고 물어볼 수도 있었을 텐데요…."
라며 스스로 실망의 선을 그어 놓고 거기로 걸어 들어가고 있다. 그렇게 가정하기 시작하면 인생이 두 배는 더 피곤해진다. 상대가 온전히 나에게 집중하거나 나를 위한 삶을 사는 것처럼 보이지 않으면 그 순간에 무너질 수 있기 때문이다. 같이 친구들과 어울려 놀러갔다고 해보자. 그러면 그곳에서 썸남이 다른 사람과 대화를 나누거나 다른 사람과 있는 모든 순간에 Y양은 무너지고 말 것이다.
'내가 썸남이라면, 나랑 더 얘기하려고 할 것 같은데….'
라는 생각을 하며 말이다.
이처럼 Y양은 보통사람보다 1.7배 정도 예민하며, 2.3배 정도 생각을 많이 하는 편이다. 이런 경우 대개 겁이 많은 까닭에 스스로 뭔가를 결정하고 그것에 책임지는 것을 두려워하게 될 수 있는데, 역시나 Y양도 겁이 많다. 때문에 '남들의 의견'에 기대려고 하고, 그저 남들이 조언해주는 걸 따라 움직이려 한다.
"친구들이 부추겨서 고백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친구들이 얼굴 보고 못 말할 것 같으면 전화로라도 말하라고 해서…."
이래버리면 갈수록 답이 없어진다. Y양은 바다로 가고 싶어 하지만 사공이 많으니 배는 결국 산으로 가게 되고, 그럼 중간에 '이게 아닌데, 왜 산으로 가는 거지?'하면서도 역시 겁이 많고 자신이 없기에 계속 묻다가 이도저도 아닌 곳에서 난파되게 된다. 친구들이야 어차피 자신의 연애가 아니니 그저 "야, 걔가 마음이 없어서 이렇게 된 거지."라며 결과론적인 이야기를 하게 되고, 그럼 Y양은 가능성이 있던 관계마저도 갈팡질팡하다 밟아버려 결국 꺼뜨리게 된다.
아직 가능성은 충분하다. 그러니 오늘부터는 친구들에게 조언을 구해 지령을 받는 일을 그만두고, 상대에게도 Y양이 먼저 어색하게 대해 상대역시 어색하게 만들어 버리는 일을 그만 두길 권한다. 이전처럼 같이 놀면 되는 거다. 닭갈비도 먹으러 가고, 핫초코도 함께 마시면서. "날 여자로 생각하냐, 아니면 그냥 편한 친구로 생각하냐?"라는 걸 물어 답을 받으려 상대를 재촉하지 말고, 시나브로 서로에게 물들어갈 수 있도록 지내보자. 남들이 "마음이 있으면 사귀는 거 아니야? 좋으면 고백해버려."라는 이야기를 한다고 귀를 팔랑거리지 말고, Y양만의 연애를 만들어가 보길 권한다. 당장 불꽃이 튀어 사귀는 관계도 있는 반면, 점점 그 의미가 커져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존재가 되는 관계도 있는 것 아닌가. 원래 걷던 속도대로 걸으면 되는 것이니, 다시 한 번 상대와 발 맞춰 걸어보길 권한다.
어제 노멀로그의 로고에 대해 이야기를 한 후, 많은 독자 분들께서 로고를 보내주시고 있다. 그런데 내가 초안을 올린 것이 오히려 독이 되었는지, 자세한 설명 없이 부탁드리며 초안 하나만 덜렁 올린 까닭에 그것에서 살짝만 변형된 로고들이 내 메일함에 도착하고 있다. 그래서 이 매뉴얼을 올리고 난 후엔 내가 생각한 컨셉과 참고했던 것들을 올려둘까 한다. 얼른 마무리 하고 글을 올려야겠다. 잠시 후 다른 글에서 뵙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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