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간 매뉴얼을 발행해 오며 네 가지 결심을 한 것 있습니다. 첫째는, 다급하다며 보내는 사연을 다루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 사연을 다룰 경우, 그 '조바심'의 대상이 연애에서 저에게로 옮겨지는 일이 벌어지곤 했습니다. 상대에게 부재중 전화 50통을 남겼던 대원의 사연에 손을 댈 경우, 그 부재중 전화가 저에게로 옮겨오는 것입니다. 상대에 대한 집착이 "답을 달라."라는 요구로 바뀌어 저에게로 향하는 경우도 있고 말입니다.
둘째는, 연애나 썸에서 남들을 그저 들러리처럼 생각하는 대원의 사연을 다루지 않는 것입니다. 이건 사례가 너무 다양하니 다 적지는 않겠습니다. 다만 이런 사연을 보내는 대원들의 공통점을 말하자면, 그들은 고맙다고 말하는 걸 배운 적 없는 사람처럼 보입니다. 일례로, 상대의 헌신을 당연하게 생각하다 헤어지고 만 대원은, 제게 와서도 마치 자신이 뭔가 맡겨 놓은 걸 찾아가려는 듯 요구하곤 합니다. 남친에 대한 평가만을 하다 헤어진 대원은, 자신의 사연이 매뉴얼로 다뤄지면 그 매뉴얼을 평가만 하려 할 뿐이고 말입니다.
제가 너무 예민한 것 아니냐고 물으시는 독자 분이 계실지도 모르겠는데, "제 사연으로 글 쓰느라 수고는 하신 것 같네요. 댓글은 안 봤어요. 잘 알지도 못하고 떠들어 대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길래."정도의 반응을 직접 겪어 보시면, 제가 왜 담배를 못 끊고 있는지 알게 되실 거라 생각합니다.
셋째는, 이미 여러 차례 밝힌 대로 '병원이나 법원, 경찰서로 가야 할 사연'을 다루지 않는 것입니다. 2013년에 다뤘던 한 사연으로 인해 저는 지금까지도 원치 않게 마음을 쓰고 있습니다. 흔치는 않지만 증거자료로 사용할 예정이니 자신이 보냈던 사연과 카톡대화 캡쳐본을 다 보내달라는 경우도 있었고, 미행을 도와달라고 하거나 이왕 도와주는 김에 자기 대신 전화를 걸어 대화를 좀 해 달라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여기다 자세히 적었다간 또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 이 얘기는 이쯤만 하겠습니다.
넷째는, 사연 보내는 걸 취미로 여기는 듯한 대원의 사연을 다루지 않는 것입니다. 매뉴얼을 참고할 생각은 없이 그저 자신의 이야기가 하고 싶어서 사연을 보내는 경우가 꽤 많습니다. 더불어 '말리는 친구들'에 저를 하나 더 포함시키기만 하는 경우도 있고 말입니다. "그때 무한님도 말리셨지만 전 결국 저지르고 말았네요."라는 이야기로 또 사연을 보내고, 그럼 저는 또 말리고, 그래도 그 대원은 다시 저지르고, 뭐 그런 일의 연속이 되고 맙니다. 그래서 "계속 이러는 저, 참 답 없는 것 같죠?"라는 사연이 다시 오면, 저는 침묵으로 응대하고 있습니다.
이렇듯 예측되는 결과를 잘 알고 있고 그래서 위와 같은 결심들도 굳게 했지만, 저도 사람이다 보니 다시 또 손을 대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누굴 탓하겠습니까. 멍충이 같은 나를 탓해야지. 넋두리는 이쯤하고 불금을 하루 앞둔 목요일의 매뉴얼, 출발하겠습니다.
1. 이상한 남자 만나 4년 째 고생하고 있는 여자.
J양은 그를 스물넷에 만나 지금 스물여덟이 되었습니다. J양이 스물다섯일 때, 그리고 스물일곱일 때 제가 두 번 말렸는데, J양은 그 말을 듣지 않고 여전히 그 전쟁 같은 연애를 계속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젠 저도 더 할 말이 없습니다. 해봐야 앞서 했던 이야기를 다시 하는 것에 지나지 않을 것이고 말입니다.
'코끼리와 말뚝'의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서커스단의 코끼리는 가는 말뚝 하나에 밧줄로만 묶어 두어도 도망을 못 간다고 합니다. 그건 어렸을 적 굵은 말뚝과 쇠사슬에 묶인 채 자란 까닭에, '벗어나려는 마음'을 완전히 상실했기 때문이고 말입니다. 보통 3~5톤 정도 되는 어른 코끼리가 밧줄을 끊거나 말뚝을 뽑아버리는 건 일도 아니지만, 벗어날 수 없는 상황에 길들여지며 자라온 까닭에, 다 자라서도 밧줄 하나에 얌전해지는 것입니다.
남친과 4년을 만나오며 J양은, 그에게 완전히 길들여진 코끼리가 된 것 같습니다. 처음 그가 J양을 존중하지 않는 행동을 보였을 때 문제제기를 했어야 하는데, 그냥 그가 아쉽고 떠나갈까 두려워 가만히 있다 보니 J양은 가마니가 되었습니다. J양은 남친이
"내가 너에게 그랬던 건, 날 미워하라고 그랬던 거다."
라는 '소가 웃을 말'을 해도 고개를 끄덕였고, 그가 "어디서 기어오르려고 하냐." 따위의 정서적 학대를 해도 묵묵히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는 동안 J양은 그에게 '그래도 되는 여자'가 되었고, J양도 그의 학대에 면역이 되어 그가 자기 마음대로 이 관계를 내팽개쳤다가 "남자 생겼냐?"따위의 말로 찔러보기만 해도 다시 그의 앞에 바짝 엎드릴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도 이제 그만 이 사연을 놓을까 합니다. 이 상황에서 제가 말을 더 보태기 보다는, 그냥 J양이 그를 계속 만나며 완벽하게 실망을 해나가도록 두는 게 더 나은 결정인 것 같습니다. 시간은 좀 걸릴지 모르겠지만, 믿음과 실망을 거듭하다 보면 J양의 청춘을 그러느라 다 소비하고 말았다는 걸 어느 순간 J양이 온 몸으로 느끼게 되실 것 같습니다. 전 너무 늦게야 J양이 깨닫게 되지 않으시길 기원하고 있겠습니다.
2. 남친이 다른 여자랑 얘기하는 걸 보면 짜증나요.
L양의 사연을 다루는 것 역시 이번이 처음은 아닌데, 이 사연도 이제 전 놓을까 합니다. 이번 사연을 읽고 낸 제 결론도, 이전 결론과 같기 때문입니다.
L양은 제 이전 결론이 '이별권유'였음에도 불구하고 둘이 아직 사귀고 있고, 또 전에 말한 '썸의 의혹'을 확인한 결과 '양다리는 아님'이었다는 걸 말씀하시고 싶으신 것 같습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제 결론은 같습니다. 전 현재 둘의 관계가 애정이 없이 간판만 걸려 있는 사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종종 매뉴얼에 대해
"매뉴얼에서는 가망이 없다고 했는데 우린 잘 사귀고 있다. 매뉴얼이 틀린 거 아니냐?"
라고 말하는 대원들 때문에 씁쓸할 때가 있습니다. 제가 말하는 '가망'이라는 건, '남은 반평생'을 두고 생각해 봤을 때의 이야기이며, 이 연애에 대한 상대의 '태도'를 근거로 하는 이야기입니다. 당장 다시 만나 얼마간 연인으로 더 지낼 수 있느냐를 말하는 게 아니라 말입니다.
글쎄요, 저는 그냥 다 이해하고 참기로 하며 '노터치'를 전제로 다시 만나는 게 과연 무슨 의미가 있나 싶습니다. 단추가 잘못 끼워진 건데, 그걸 모른 척 하며 계속 끼워나가면 결국 나중엔 문제가 생기지 않을까요? 다시 만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상대에게 앞으로 찍소리 안 하고 하자는 대로만 하겠다고 해도 다시 만날 수 있습니다. '최소한의 관심'에도 만족하겠다며 고개 숙이고 들어가도 다시 만날 수 있는 것이고 말입니다.
그렇게 다시 만난 후
"일단 관계는 제가 잘 봉합했어요. 이제 이것 다음에 어떻게 해야 할지 알려주세요."
라고 말씀하시면 저는 할 말이 없습니다. 그건 이쪽에서 바라는 걸 하나라도 얘기하면 당장 헤어지겠다고 말하는 상대에게 "알았어. 앞으로 아무 것도 바라지 않을게."라고 말해 겨우 붙잡아 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L양의 남친이 L양에게 요구하는 건 '믿음'입니다. 그런데 그는 다른 이성들과 단둘이 밥 먹는 것에 대해 전혀 이상할 것 없다고 생각합니다. 뭐, 여기까진 서로 생각이 다를 수 있으니 이해하려 노력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는 일부러 낯선 여자에게 연락해 '아는 관계'를 만듭니다. 이 일로 인해 L양이 상대방 여성에게 연락해 '내 남친이랑 연락하고 지내지 말아달라'고 했는데, 그 후에도 남친은 그녀에게 먼저 선톡을 보냈습니다. L양이 따지자 "말하면 네가 싫어할 것 같아서 하지 않았다."라고 했을 뿐이고 말입니다. 또, 둘은 비밀연애를 하고 있으며 남친은 다른 이성들의 SNS에 들어가 열심히 '좋아요'를 누르고 있습니다. 이런 와중에 그는 '나를 믿지 못 하면 우리는 헤어지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다.'라는 뉘앙스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고 말입니다.
이쪽에서 바라는 것은 이야기 할 수 없으며 오로지 남친의 뜻대로만 흘러가는 연애를 저는 '시한부 연애'라고 생각합니다. L양이 바란다는 '공개연애'와 'SNS에 사진 올리기', '평소에도 연락하기' 등을 남친에게 제안해 보시고, 남친이 아무 것도 들어줄 수 없다고 말한다면 이별을 진지하게 고민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대로라면 '여자친구'라는 자리는 언제 비워줘야 할지도 알 수 없는 자리인데, 그런 자리에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남자친구가 L양의 의견을 존중하는지, 아니면 묵살한 채 그냥 조용히 그 자리에 앉아만 있으라고 말하는지 냉철하게 살펴보시길 권합니다.
3. 골드미스, 소개팅 어플로 시작했다 끝난 연애.
최근 이런 사연이 많이 와서 나중에 특집으로 한 번 발행하려고 하던 차에, C양께서 사연을 주셔서 먼저 다루게 되었습니다.
그런 성향을 보이는 남자들에 대해 제가
- 관성을 극복하지 못 하는 남자, 또는 최면남.
라고 메모해 둔 것이 보입니다. 더불어
- 연애에 대한 환상은 깨졌고 결혼에 대해선 막연히 두려워 함.
- 현실적으로 결혼을 쉽게 생각할 수 없음. (부모님, 빚 등)
- 결혼을 포기한 생활방식 속에서 살아가고 있음. (도박, 주식, 유흥)
- 스스로를 가엾다고 생각하지만 그저 그런 생각만을 할 뿐. (벗어날 노력X)
- 습관화된 포기로 쉽게 또 포기함. (나쁘게 보면 썸만 즐김)
- 잠수전문가.
- 행복을 위해 떠나준다는 소리 같은 걸 함.
- 다른 여자들한테 못 했다는 소리들을 이제는 거침없이 막 쏟아냄.(최면, 컨셉인듯)
라고 그 아래 풀어갈 내용을 적어둔 것도 보입니다.
우선, C양이 잘못한 건 없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잘못이 있다면 모성애로 상대를 감싸려고 했던 것이 잘못입니다. 뭐, 그것도 그 마음을 알아줄 수 있는 상대라면 감동할 수 있는 부분이니 꼭 '잘못'이라고는 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저라면 C양이 그에게 했던 말을 제게 해줬을 때, 격한 감동을 느꼈을 것 같습니다.
이 관계가 틀어진 건 전적으로 상대 때문입니다. 그에겐 이 관계를 함께 이끌어갈 의지가 없습니다. 그는 자신은 C양을 행복하게 해줄 수 없으니 보내준다는 식으로 이야기 하고 있지만, 그건 '말'일 뿐이며 둘이 사귈 때 그가 보인 '행동'만 봐도 마찬가지로 그에겐 의지가 없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분명 코드가 잘 맞고 행복했던 시절도 잠깐이지만 있었는데요?"
그 시절에 스킨십 진도와 관련해서는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도 한 번 비교하며 보시기 바랍니다. 저도 이걸 그저 단순히 '스킨십 때문'이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지만, 애써 부정하고 싶어도 그 그래프의 곡선이 맞아 떨어지는 걸 모른 체 하기가 어렵습니다.
또, C양은 그가 왜 독한말로 끊어내지 않는 거냐, 다음에 연락하겠다는 건 왜 그러겠다고 한 거냐고 제가 묻고 계신데, 두어 달 잠수 타다가 나와도 버선발로 마중 나와 주는 사람이 흔한 건 아니잖습니까? 게다가 C양은 특유의 모성애까지 발휘하며 '다 이해하겠다. 다 감당할 수 있다.'라는 뉘앙스로 그에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결혼이 아니라 그냥 연애만이라도 괜찮다는 의미로 말입니다. 이건 달리 말하자면 전 재산을 들고 와선 자신이 어떤 메뉴든 밥을 살 테니 밥만 좀 같이 먹어달라고 하는 것과 같은 건데, 이걸 굳이 명확하게 선을 그으며 거절할 사람은 적은 것 아니겠습니까?
저는 C양이 그의 최면에 걸린 것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그가 자신이 어렵고 힘들다는 이야기를 할수록 C양의 모성애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발동했던 거고, 그가 다른 구여친들을 자신의 상황 때문에 떠나보낼 수밖에 없었다는 이야기를 C양에겐 대놓고 할 때에도 C양은 그 이야기에 아무 필터링 없이 전부 믿으며 그냥 빠져버린 겁니다. 이게 생각해 보면 참 웃긴 게, 다른 여자들에게는 아무 말도 못 하고 끙끙 앓기만 했다는 걸 C양에겐 너무나 쉽게 털어 놓지 않습니까? 다른 여자들에겐 자존심 상해서 못 말했다던 것들이, C양을 만날 때에는 자존심이 갑자기 튼튼해져서 막 쏟아낼 수 있게 된 걸까요? 이런 최면에 빠진 여성대원들은
'이 사람이 나라서 믿고 털어 놓을 수 있었던 거다.'
'난 이 사람이, 자기 상황이 힘들어서 날 밀어낸다는 걸 알기에 놓지 않을 거다.'
'내가 더 푸시(push)하면 안 된다. 일단 다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평소 같았으면 욕이라도 한 바가지 해주고 발로 차버렸을 관계를, 최면에 걸렸을 땐 주변에서 뜯어 말려도 놓지 않고 품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의 행동만 봐도 의지나 관심, 애정이 없다는 게 눈에 빤히 보이는 데, 애써 그걸 부정하며 '그 사람이 이야기 했던 그런 속사정이 있는 거니까….'라고 오히려 그를 변호합니다.
레드 썬! 이제 그만 그 최면에서 깨어나셔야 할 시간입니다.
오늘 진짜 역대 급으로 글쓰기 힘든 날이라, 이 글을 중간에 여덟 번이나 저장을 했다가 다시 열어 작성했다. 책상 앞에 오래 앉아 있는 사람은 하루에 얼마쯤 운동을 하든 안 하든 장기가 망가지고 일찍 죽는다는데, 오늘 그 수명단축에 도움 하나 보탠 것 같다.
열심히 쓴다고 쓰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1월 초 사연을 다루고 있다. 이후 지금까지 도착한 사연이 160여 편 정도 되는데, 죄송하지만 물리적 한계로 인해 모든 사연을 다루진 못할 것 같다. 모든 사연을 다루려고 하얗게 불태웠더니, 그럴수록 더 많은 사연들이 도착하고 있다. 그래서 연애 때문에 밥을 먹지 못 하거나 잠을 못 자고 있는 사연, 엄마도 모르는 알콜중독으로 향해가고 있는 사연들 위주로 다룰 예정이니, 양해해 주시길 이렇게 머리 숙여 부탁드린다.
이제 몇 분만 지나면 불금이 시작된다. 다들 즐거운 불금 맞이하시길! 우린 내일 금요사연모음에서 다시 만나는 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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