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스 부저를 내가 누르려 세 정거장 전 부터 준비했는데, 다른 사람이 먼저 누르면 참을 수 없는 허탈감을 느끼던 열 살 때 쯤의 일이다.
당시 난 달란트 시장이 열리거나 주일학교가 시작되는 날에만 교회를 나가는 권태신앙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교회에는 꽃같이 아름다운 피아노 반주자가 있었다. 진숙(가명, 교회피아노반주)이 선생님. 난 그녀를 사모하다 고백했고, 거절당한 뒤에 난 여자의 심리를 탐구하기 시작했다는 건 훼이크고, 당시 꼬꼬마 녀석들이 반항할 수 없을 정도의 미모를 가지고 있던 선생님이었다.
복날 이었다. 복날임을 확실하게 기억하는 것은, 그 날 지방에서 막 올라온 옆집 선희네 삼촌이 빌라 입구 전봇대에 개를 매달아 패던 날이기 때문이다. 선희네 엄마는 그 삼촌(선희 엄마의 동생)에게 이게 동네 창피하게 무슨 짓이냐며 끌고 들어가려 했지만, 삼촌은 그만두기는 커녕 모여있는 아이들을 위한 퍼포먼스로 웃통까지 벗었다. 개를 막 자루에 넣느라 삼촌이 실갱이를 하고 있을 때, 다른 동에서 비명이 들렸다.
비명소리를 쫓아 아이들과 뛰어간 '라'동, 진숙이 선생님이 있었다. 진숙이 선생님은 긴 우산을 든 남자에게 머리를 붙잡혀 있었는데, 진숙이 선생님이 "아악, 아빠, 아아빠"라고 하는 걸로 보아 머리를 붙잡고 있는 건 진숙이 선생님의 아빠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옆에는 교회에서 본 적 있는 진숙이 선생님의 엄마, 그리고 처음 보는 여자가 하나 서 있었다.
"내가, 너, 이년, 이년이."
진숙이 선생님 아빠가 우산을 휘두르기 시작했고, 우산은 파라락, 소리를 내며 진숙이 선생님의 몸에 닿은 모양대로 구부러졌다. 몇 번 우산을 휘두르다 우산이 엉망으로 구부러져 더이상 제 구실 -뭐, 비를 막고 있던 것도 아니지만- 을 못하게 되었을 때, 진숙이 선생님 아빠는 아무렇게나 진숙이 선생님을 때리기 시작했다.
"니가, 이년아, 동네, 동네 창피하게"
진숙이 선생님은 복날의 개처럼 맞았다. 맞고, 또 맞고, 맞고, 또 맞고, 맞고, 지켜보던 내가 오줌이 마려워 관리실 뒤편으로 달려가 오줌을 누고 왔는데도, 맞고, 또 맞고, 맞고, 또 맞고, 동네 아저씨들이 그만 하라며 말리는 데도 진숙이 선생님 아빠는 자신을 붙잡은 동네 아저씨들을 미끄러지듯이 빠져나와 때리고, 또 때리고, 때리고, 또 때리고, 그 장면을 계속 보고 있으니 내 아랫배가 없어지는 것 같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토할 것 같았다. 더위와 높은 습도, 옆에 서 있는 꼬마들의 땀냄새에 쓰러질 것 같은 기분이 들었을 때, 아빠, 아빠, 만 반복하던 진숙이 선생님이 입을 열었다.
"우린 사랑하는 거야. 정말 사랑하는 거야."
삐이-
이이잉-
이이이이잉-
진숙이 선생님이 한 말들이 부서져서 내 귀에 들어오는 지, 고주파음 같은 길고 높은 소리가 들렸다. 다른 사람들도 그 소리를 들어서인지 대략 3초 정도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 정적을 깨고 진숙이 선생님 아빠가 가글 할 때 나는 그르르르륵, 같은 소릴 내며 사람들 사이를 가로 질러 사라졌다. 내 옆을 지나갈 때 터질 것 같은 빨간 눈이 반짝, 빛났는데, 진숙이 선생님 아빠는, 울고 있었던 것 같다.
"일어나. 너, 너 일루 들어와."
진숙이 선생님 엄마가 아무렇게나 넘어져 있는 맨발의 진숙이 선생님을 일으켜 집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그 옆에 있던 여자는 진숙이 선생님과 진숙이 선생님 엄마가 들어간 뒤에도 잠시 멍하게 서 있다가, 놀이터 쪽으로 걸어갔다.
같이 있던 꼬마 녀석들은 다시 선희네 삼촌쪽으로 뛰어갔다. 동네 아저씨들도 쑥덕 거리며 담배를 물곤 다른 곳으로 가 버렸다. 난 진숙이 선생님이 울부짖던 쪽으로 걸어갔다. 핏방울들이 떨어져 모래에 엉겨붙어 있었다. 난 '어른들은 동네 창피한 걸 제일 무서워 하는 구나.'라는 생각을 하며 그 자국을 발로 문질러 없애려고 했다. 핏자국이 흐트러지긴 했지만, 깨끗하게 지워지진 않았다.
놀이터로 갔다. 좀 전에 진숙이 선생님 엄마 옆에 서 있던 여자가 그네에 앉아 있었다. 아이들이 모두 선희네 삼촌에게 몰려간 까닭에 놀이터는 텅 비어 있었고, 그 여자 혼자 울고 있었다. 여자는 슬퍼서, 가 아니고 울 수 밖에 없어서 우는 사람처럼 한참이나 울다가, 닌자처럼 미끄럼틀 뒤에 숨어 지켜보던 나를 발견하곤 다른 곳으로 가 버렸다.
'들켰군.'
난 내 위장술을 들켰다는 것이 씁쓸하긴 했지만, 쿨한 남자답게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 날 저녁, 엄마 아빠가 마루에서 나누는 이야기를 '자는 척 하며 어른들 얘기 엿듣기 스킬'로 청취했다. 청취에 방해되는 시계초침 소리를 막기위해 미리 건전지 빼 놓는 것을 잊지 않았다. 난 프로였다.
유부남, 바람, 회사, 모텔, 다양한 이야기가 흘러나왔고, 난 진숙이 선생님이 같은 회사에 다니는 유부남과 바람을 피웠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아까 그네에 앉아 있던 여자가 그 유부남의 부인이고, 모텔에서 둘의 현장을 잡았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렇게 바람피운 것을 걸리고 난 뒤에도 진숙이 선생님이 유부남의 집까지 드나들었다는 사실도.
그 일이 있었던 주의 주일, 난 소중한 <디즈니 만화동산>도 포기하고 교회를 갔다. '다람쥐 구조대'의 다음 이야기보다, 진숙이 선생님이 더 궁금했다.
진숙이 선생님은 교회에 나오지 않았다. 내 권태신앙을 눈치채곤, "빠지지 않고 교회에 나와야 천국에 갈 수 있지." 라고 말했던 진숙이 선생님인데, 다음 주에도 다다음 주에도 교회에 나오지 않았다. 천국에 가기가 싫어진걸까.
그 후 내가 일산으로 이사오기 전 까지 딱 한 번 진숙이 선생님을 볼 수 있었다. 반납기일이 늦은 <강시선생>을 어떻게 하면 약국아저씨(당시 우리동네에선 약국이 비디오가게를 겸하고 있었다.)에게 걸리지 않고 빠르게 반납하고 나올 수 있는가를 고민하고 있을 때 였는데, 기차역에서 나온 진숙이 선생님이 빌라 쪽으로 걸어갔다. 검은 정장, 갈색 숄더 백, 아이보리색 구두, 또각 또각, 아무도 쳐다보지 않겠다고 말하는 듯 앞만 보고는 또각 또각, 걸어갔다.
몇 해 전, 우연히 뼈해장국 집에서 어렸을 적 교회에 같이 다녔던 동네 형을 만났다. 축구도 잘하고 학교 육상부로도 활동했던 그 형은 (미안하지만) 폭삭 늙어 있었고, 일산에 있는 카센터에서 일한다고 했다. 난 슬쩍 진숙이 선생님 얘기를 꺼냈다.
- 그, 진숙이 선생님은 교회에서 본 적 없고?
- 진숙이 선생님? 아아~ 진숙이 누나! 그 누나 결혼했어.
- 누구랑?
- 누구라고 말하면 니가 아냐? 하하. 종규형이라고, 금촌사는 형 있어.
- 아... 그 사람 혹시 유부남이야?
- 결혼 했으니까 유부남이지 인마. 하하. 너 옛날 그일 땜에 그러지?
- 어? 형도 알아?
- 당연하지. 동네 사람 다 알았는데 인마. 암튼, 그 사람 아니야.
- 아...
- 그나저나 넌 요즘 뭐하냐? 회사다녀?
- 나? 광합성해.
- 뭐?
- 광합성.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지만, 서로 같이 온 일행이 있었기에 전화번호를 주고 받고는 헤어졌다. "연락해라~" 라는 형의 말에 난 알았다고 대답했지만, 앨범에 끼워 놓은 사진처럼 마음에 바람불기 전에는 들춰보지 않는 사이로 전화번호만 끼워 놓았다.
유부남, 또는 여자친구 있는 남자와 사랑에 빠졌다는 '연애사연'이 날아올 때 마다 난 진숙이 선생님이 떠오른다. 복날, 지켜보던 내가 토할 것 같을 정도로 맞던 진숙이 선생님이 비명처럼 뱉어낸 말,
"우린 사랑하는 거야. 정말 사랑하는 거야."
그 비명들이 내 메일함에 있는 사연에도 곳곳에 적혀있다.
"소울메이트 같은 사람입니다. 그 사람도 절 그렇게 생각하고요."
"지금 여자친구는 그냥 사귀는 거라고 했어요. 제가 진짜래요."
"다른 사람들이 바람피는 거랑 같다고 생각하지 말아주세요."
"이혼하고 저에게 온다고 했어요. 거짓말이 아니에요."
내가 무슨 말을 해도 소용 없다. 그들에게 그것은, 이미 남들의 '불륜'과 다른, 자신의 '로맨스'가 되었으니까. 그게 그 남자의 아내나 여자친구가 아닌 '다른 여자'라는 판타지라고 얘기해도 그 사람은 그런 게 아니라고 말하고, 그 사람은 당신이 아니라 그렇게 만날 수 있는 다른 여자라면 누구든 괜찮을 거라고 말해도 우린 그런 게 아니라고 말한다. 당신에게 잘해주고, 이야기를 들어주고, 뭐든 맞춰주는 건, 욕심대로 두 사람을 양 손에 쥐어야 하니 그럴 수 밖에 없는 거라고 말해도 돌아오는 답은 '소울메이트'다. 그래 내가 졌다. 소울메이트 해라. 하는 김에 바디메이트도 하고 더 나아가 둘이 합쳐 자웅동체도 해라.
그런데 난 잘 이해 안 되는 부분이 있다. 바로 이 부분.
둘이 그렇게 '진짜사랑'을 하고 있다면서 당신은 왜 힘든가?
진숙이 선생님은 복날의 개처럼 맞고, 다른 여자는 그네에서 영혼을 쏟아가며 우는데, 우리의 유부남씨는 어디에 가 있었을까. 자신의 판타지 세계가 우산이 휘도록 공격당해 바닥에 핏방울이 뚝, 뚝, 떨어지는데 소울메이트는 뭐하고 있었을까. 진숙이 선생님과 정말 사랑한다던 그 사람은 왜 진숙이 선생님에게 그 무서운 '동네창피'를 당하게 만들었을까. 당신이 진짜 사랑이라면, 왜 그는 진짜 사랑과 가짜 사랑을 양손에 다 쥐고 있을까.
오, 소울메이트! 주변의 모든 사람들을 바보로 만드는 용사여!
▲ 절대 알아볼 수 없도록 각색한 이야기 입니다. 걱정하는 분이 계실까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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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난 달란트 시장이 열리거나 주일학교가 시작되는 날에만 교회를 나가는 권태신앙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교회에는 꽃같이 아름다운 피아노 반주자가 있었다. 진숙(가명, 교회피아노반주)이 선생님. 난 그녀를 사모하다 고백했고, 거절당한 뒤에 난 여자의 심리를 탐구하기 시작했다는 건 훼이크고, 당시 꼬꼬마 녀석들이 반항할 수 없을 정도의 미모를 가지고 있던 선생님이었다.
복날 이었다. 복날임을 확실하게 기억하는 것은, 그 날 지방에서 막 올라온 옆집 선희네 삼촌이 빌라 입구 전봇대에 개를 매달아 패던 날이기 때문이다. 선희네 엄마는 그 삼촌(선희 엄마의 동생)에게 이게 동네 창피하게 무슨 짓이냐며 끌고 들어가려 했지만, 삼촌은 그만두기는 커녕 모여있는 아이들을 위한 퍼포먼스로 웃통까지 벗었다. 개를 막 자루에 넣느라 삼촌이 실갱이를 하고 있을 때, 다른 동에서 비명이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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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너, 이년, 이년이."
진숙이 선생님 아빠가 우산을 휘두르기 시작했고, 우산은 파라락, 소리를 내며 진숙이 선생님의 몸에 닿은 모양대로 구부러졌다. 몇 번 우산을 휘두르다 우산이 엉망으로 구부러져 더이상 제 구실 -뭐, 비를 막고 있던 것도 아니지만- 을 못하게 되었을 때, 진숙이 선생님 아빠는 아무렇게나 진숙이 선생님을 때리기 시작했다.
"니가, 이년아, 동네, 동네 창피하게"
진숙이 선생님은 복날의 개처럼 맞았다. 맞고, 또 맞고, 맞고, 또 맞고, 맞고, 지켜보던 내가 오줌이 마려워 관리실 뒤편으로 달려가 오줌을 누고 왔는데도, 맞고, 또 맞고, 맞고, 또 맞고, 동네 아저씨들이 그만 하라며 말리는 데도 진숙이 선생님 아빠는 자신을 붙잡은 동네 아저씨들을 미끄러지듯이 빠져나와 때리고, 또 때리고, 때리고, 또 때리고, 그 장면을 계속 보고 있으니 내 아랫배가 없어지는 것 같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토할 것 같았다. 더위와 높은 습도, 옆에 서 있는 꼬마들의 땀냄새에 쓰러질 것 같은 기분이 들었을 때, 아빠, 아빠, 만 반복하던 진숙이 선생님이 입을 열었다.
"우린 사랑하는 거야. 정말 사랑하는 거야."
삐이-
이이잉-
이이이이잉-
진숙이 선생님이 한 말들이 부서져서 내 귀에 들어오는 지, 고주파음 같은 길고 높은 소리가 들렸다. 다른 사람들도 그 소리를 들어서인지 대략 3초 정도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 정적을 깨고 진숙이 선생님 아빠가 가글 할 때 나는 그르르르륵, 같은 소릴 내며 사람들 사이를 가로 질러 사라졌다. 내 옆을 지나갈 때 터질 것 같은 빨간 눈이 반짝, 빛났는데, 진숙이 선생님 아빠는, 울고 있었던 것 같다.
"일어나. 너, 너 일루 들어와."
진숙이 선생님 엄마가 아무렇게나 넘어져 있는 맨발의 진숙이 선생님을 일으켜 집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그 옆에 있던 여자는 진숙이 선생님과 진숙이 선생님 엄마가 들어간 뒤에도 잠시 멍하게 서 있다가, 놀이터 쪽으로 걸어갔다.
같이 있던 꼬마 녀석들은 다시 선희네 삼촌쪽으로 뛰어갔다. 동네 아저씨들도 쑥덕 거리며 담배를 물곤 다른 곳으로 가 버렸다. 난 진숙이 선생님이 울부짖던 쪽으로 걸어갔다. 핏방울들이 떨어져 모래에 엉겨붙어 있었다. 난 '어른들은 동네 창피한 걸 제일 무서워 하는 구나.'라는 생각을 하며 그 자국을 발로 문질러 없애려고 했다. 핏자국이 흐트러지긴 했지만, 깨끗하게 지워지진 않았다.
놀이터로 갔다. 좀 전에 진숙이 선생님 엄마 옆에 서 있던 여자가 그네에 앉아 있었다. 아이들이 모두 선희네 삼촌에게 몰려간 까닭에 놀이터는 텅 비어 있었고, 그 여자 혼자 울고 있었다. 여자는 슬퍼서, 가 아니고 울 수 밖에 없어서 우는 사람처럼 한참이나 울다가, 닌자처럼 미끄럼틀 뒤에 숨어 지켜보던 나를 발견하곤 다른 곳으로 가 버렸다.
'들켰군.'
난 내 위장술을 들켰다는 것이 씁쓸하긴 했지만, 쿨한 남자답게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 날 저녁, 엄마 아빠가 마루에서 나누는 이야기를 '자는 척 하며 어른들 얘기 엿듣기 스킬'로 청취했다. 청취에 방해되는 시계초침 소리를 막기위해 미리 건전지 빼 놓는 것을 잊지 않았다. 난 프로였다.
유부남, 바람, 회사, 모텔, 다양한 이야기가 흘러나왔고, 난 진숙이 선생님이 같은 회사에 다니는 유부남과 바람을 피웠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아까 그네에 앉아 있던 여자가 그 유부남의 부인이고, 모텔에서 둘의 현장을 잡았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렇게 바람피운 것을 걸리고 난 뒤에도 진숙이 선생님이 유부남의 집까지 드나들었다는 사실도.
그 일이 있었던 주의 주일, 난 소중한 <디즈니 만화동산>도 포기하고 교회를 갔다. '다람쥐 구조대'의 다음 이야기보다, 진숙이 선생님이 더 궁금했다.
진숙이 선생님은 교회에 나오지 않았다. 내 권태신앙을 눈치채곤, "빠지지 않고 교회에 나와야 천국에 갈 수 있지." 라고 말했던 진숙이 선생님인데, 다음 주에도 다다음 주에도 교회에 나오지 않았다. 천국에 가기가 싫어진걸까.
그 후 내가 일산으로 이사오기 전 까지 딱 한 번 진숙이 선생님을 볼 수 있었다. 반납기일이 늦은 <강시선생>을 어떻게 하면 약국아저씨(당시 우리동네에선 약국이 비디오가게를 겸하고 있었다.)에게 걸리지 않고 빠르게 반납하고 나올 수 있는가를 고민하고 있을 때 였는데, 기차역에서 나온 진숙이 선생님이 빌라 쪽으로 걸어갔다. 검은 정장, 갈색 숄더 백, 아이보리색 구두, 또각 또각, 아무도 쳐다보지 않겠다고 말하는 듯 앞만 보고는 또각 또각, 걸어갔다.
몇 해 전, 우연히 뼈해장국 집에서 어렸을 적 교회에 같이 다녔던 동네 형을 만났다. 축구도 잘하고 학교 육상부로도 활동했던 그 형은 (미안하지만) 폭삭 늙어 있었고, 일산에 있는 카센터에서 일한다고 했다. 난 슬쩍 진숙이 선생님 얘기를 꺼냈다.
- 그, 진숙이 선생님은 교회에서 본 적 없고?
- 진숙이 선생님? 아아~ 진숙이 누나! 그 누나 결혼했어.
- 누구랑?
- 누구라고 말하면 니가 아냐? 하하. 종규형이라고, 금촌사는 형 있어.
- 아... 그 사람 혹시 유부남이야?
- 결혼 했으니까 유부남이지 인마. 하하. 너 옛날 그일 땜에 그러지?
- 어? 형도 알아?
- 당연하지. 동네 사람 다 알았는데 인마. 암튼, 그 사람 아니야.
- 아...
- 그나저나 넌 요즘 뭐하냐? 회사다녀?
- 나? 광합성해.
- 뭐?
- 광합성.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지만, 서로 같이 온 일행이 있었기에 전화번호를 주고 받고는 헤어졌다. "연락해라~" 라는 형의 말에 난 알았다고 대답했지만, 앨범에 끼워 놓은 사진처럼 마음에 바람불기 전에는 들춰보지 않는 사이로 전화번호만 끼워 놓았다.
유부남, 또는 여자친구 있는 남자와 사랑에 빠졌다는 '연애사연'이 날아올 때 마다 난 진숙이 선생님이 떠오른다. 복날, 지켜보던 내가 토할 것 같을 정도로 맞던 진숙이 선생님이 비명처럼 뱉어낸 말,
"우린 사랑하는 거야. 정말 사랑하는 거야."
그 비명들이 내 메일함에 있는 사연에도 곳곳에 적혀있다.
"소울메이트 같은 사람입니다. 그 사람도 절 그렇게 생각하고요."
"지금 여자친구는 그냥 사귀는 거라고 했어요. 제가 진짜래요."
"다른 사람들이 바람피는 거랑 같다고 생각하지 말아주세요."
"이혼하고 저에게 온다고 했어요. 거짓말이 아니에요."
내가 무슨 말을 해도 소용 없다. 그들에게 그것은, 이미 남들의 '불륜'과 다른, 자신의 '로맨스'가 되었으니까. 그게 그 남자의 아내나 여자친구가 아닌 '다른 여자'라는 판타지라고 얘기해도 그 사람은 그런 게 아니라고 말하고, 그 사람은 당신이 아니라 그렇게 만날 수 있는 다른 여자라면 누구든 괜찮을 거라고 말해도 우린 그런 게 아니라고 말한다. 당신에게 잘해주고, 이야기를 들어주고, 뭐든 맞춰주는 건, 욕심대로 두 사람을 양 손에 쥐어야 하니 그럴 수 밖에 없는 거라고 말해도 돌아오는 답은 '소울메이트'다. 그래 내가 졌다. 소울메이트 해라. 하는 김에 바디메이트도 하고 더 나아가 둘이 합쳐 자웅동체도 해라.
그런데 난 잘 이해 안 되는 부분이 있다. 바로 이 부분.
둘이 그렇게 '진짜사랑'을 하고 있다면서 당신은 왜 힘든가?
진숙이 선생님은 복날의 개처럼 맞고, 다른 여자는 그네에서 영혼을 쏟아가며 우는데, 우리의 유부남씨는 어디에 가 있었을까. 자신의 판타지 세계가 우산이 휘도록 공격당해 바닥에 핏방울이 뚝, 뚝, 떨어지는데 소울메이트는 뭐하고 있었을까. 진숙이 선생님과 정말 사랑한다던 그 사람은 왜 진숙이 선생님에게 그 무서운 '동네창피'를 당하게 만들었을까. 당신이 진짜 사랑이라면, 왜 그는 진짜 사랑과 가짜 사랑을 양손에 다 쥐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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