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임감과 비전 없는 남자친구, 계속 만나야 할까?
안녕하세요, 은경씨. 보내주신 메일은 잘 받았습니다. 메일은 늘 잘 받을 수밖에 없지요. 메일을 잘 못 받았다면 이렇게 답장을 보낼 수 없을 테니까요. 이게 안 웃긴가요? 난 웃긴데.
저는 선택을 해야 합니다. 은경씨가 보낸 메일에서 남자친구의 '똥차스러운 부분(응?)'을 뽑아내 얘기하며 지금 찾아온 이별이 차라리 잘 된 일이라고 토닥토닥 해야 할지, 아니면 남자친구의 마지막 말인 "너, 정 떨어지니까. 꺼져."라는 말이 대체 왜 나왔나 사연을 벗겨 맨 몸을 들여다볼지 말입니다.
오늘은, 벗기는 게 끌리는군요. 자, 벗겨 봅시다.
은경씨의 사연을 읽으며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동화 <공주와 개구리>였습니다. 공주가 개구리와 친하게 지내다 키스를 하게 되고, 공주의 키스를 받은 개구리는 왕자로 변한다는 내용의 이 동화는 은경씨도 이미 알고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아, 그런데 은경씨의 사연은 <공주와 개구리>의 내용과 좀 다릅니다. 은경씨 사연에서 공주는,
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이 마음을 직접적으로 개구리에게 드러내진 않았겠지만, 그런 마음은 말투, 표정, 몸짓 등을 통해서 언젠가 드러나기 마련이죠. 특히 갈등이 생겨 분노가 폭발 할 때에는, 그 폭발에 이 마음도 같이 묻어 나오기 마련입니다. 은경씨의 사연에도 나와 있죠. 둘이 싸울 때면 남자친구가 자존심 상해하는 일이 많았다고 말입니다.
공주 뿐만 아니라 개구리도 좀 다릅니다. 그 개구리는,
라며 공주에게 자신의 피해의식을 날카롭게 들이대곤 합니다. 이렇게 다른 두 마음을 품고 있는 상황에선 노력이나 인내가 아무 힘도 발휘하지 못합니다. 아버지를 꼰대라고 생각하는 아들과, 아들이 구제불능이라고 생각하는 아버지가 그저 시간을 갖고 서로의 감정이 상하지 않게 조심만 한다고 해서 마음속의 응어리가 풀리는 건 아닌 것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은경씨와 상대 분도 결국 이런 결론을 내리지 않았습니까.
전에도 한 번 인용한 적이 있는데, 사마천의 <사기>에 이런 글이 있습니다.
선비는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목숨을 바치고
여자는 자기를 사랑해주는 사람을 위해 화장을 한다.
- 사마천의 <사기> 중에서
은경씨와 상대 분은 분명 사랑하는 연인이었는데, 왜 상대는 은경씨에게 책임감을 보여주지 않았는지 궁금하다면 위의 글을 다시 한 번 읽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함께 있으면 재미있고, 대화가 잘 통하니 즐거워서 커플이 된 건 이제 막 허브 화분을 사온 것과 같습니다. 그 허브가 잘 자리기 위해서는 앞으로 물을 주고, 태양을 보여줘야 하죠. 책임감도 마찬가지입니다. 칭찬과 격려, 그리고 신뢰로 돌봐줘야 시들지 않고 자랄 수 있습니다.
잠시 은경씨의 연애를 돌아봅시다. 은경씨는 연애를 시작하자마자 상대에게 책임감과 비전을 요구합니다. 그리고 솔직함을 핑계로 "너에겐 책임감과 비전이 부족한 것 같아 확신을 가지기 어렵다."는 얘기도 합니다. 은경씨 본인도 "그 과정에서 제가 남자친구에게 말로 많이 상처를 줬던 것 같습니다."라고 얘기 할 정도로 말입니다.
그런 행위들은 상대로 하여금 책임감과 비전을 보여주고 싶게 만들긴커녕, 비뚤어진 마음만 갖게 만듭니다. 은경씨가 어느 회사에 입사했는데, 그 부서의 선배직원이 가르쳐 줄 생각은 하지 않고 갈구기만 한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 갈굼이 은경씨를 자극해 더 이상 싫은 소리 듣지 않도록 열심히 하게 만드는 긍정적인 효과를 낼 수도 있겠습니다만, 그렇다 하더라도 선배직원의 따귀 한 대 때리고 싶은 마음은 계속 남아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상대의 자존심과 자신감을 그렇게 짓밟으면, 책임감은 한 뼘도 자라지 못합니다. 그런 척박한 땅에서는 저주하는 마음만 무럭무럭 자라, 복수심이라는 열매를 맺게 됩니다. 짓밟힌 자존심을 만회하기 위해 상대는 일부러 더 은경씨를 무시하려 하고, 거기에 열 받은 은경씨는 더 강한 세기로 상대의 자존심을 밟고, 그럼 또 상대는 더 은경씨를 존중하려 하지 않고, 그렇게 둘 다 만신창이가 되고 만 것 아닙니까.
언젠가 TV에서, 안철수씨가 이런 이야길 하는 걸 본 적이 있습니다.
부모님들 스스로가 책을 항상 곁에 두고 읽는 모습을 보여주면
아이들도 자연스럽게 따라하게 됩니다."
연애엔 '교육의 기능'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나'라는 사람에 대해 '너'에게 알려줘야 하고, '우리'가 되기 위해 뭐가 필요한지 함께 배워가야 하니 말입니다. 그러한 교육을 날 잡아서 강의하듯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만, 만남과 대화를 통해 우리는 학습하게 됩니다.
그 '교육'의 부분에서, 은경씨는 상대에게 "백 점 맞으면 사줄게."라고 말하는 부모의 모습을 보입니다. 열심히 해, 열심히 해, 더 열심히 해, 라는 말만 하는 부모 말입니다. 함께 책을 읽는다든가, 어려운 문제를 같이 푼다던가 하는 모습을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남들 다 푸는 쉬운 걸 왜 틀려."라거나 "꼼꼼히 읽고 풀라고 몇 번을 말해."라고 다그치는 모습이 대부분 입니다.
이별을 앞두고도 은경씨는, 상대가 그냥 은경씨에게 다시 다가와 안아줬으면 좋겠다거나, 위로와 확신을 가지고 돌아왔으면 좋겠다며 여전히 상대에게 바라고만 있습니다.
라는 이야기만 합니다. 끝까지 "백 점 맞으면 사줄게."의 자세를 고수하며, 상대가 빨리 이 불편한 상황을 해결해 주길 기다리고 있을 뿐입니다. 은경씨는 시간이 지나면 서로의 상처도 치유되고, 다시 만날 수 있는 날이 오지 않겠냐고 말하지만, 천 년이 지나 다시 만나도 "백 점 맞으면 사 줄게."에서 벗어나지 않는 이상, 이별은 비슷한 형태로 다시 진행될 것입니다.
안 그래도 혼란스러운 시기를 보내고 계신데, 더 혼란스럽게 만드는 얘기만 해서 죄송합니다. 하지만 그저 시간이 지나 무덤덤해 지는 것만으로는 아무 것도 해결되지 않기에, 이야기를 꺼낼 수 밖에 없었습니다. 상대와 인연이 아닌 거라고 생각하며 여기서 그만 접고, 사람들에게 위로 받는 쉬운 방법도 있습니다만, 그런 방법은 은경씨에게, 이 연애를 그냥 놀이공원 가서 놀이기구 몇 개 타고 온 것과 다를 바 없는 것으로 만들 거라 생각합니다.
마음속에 남아 있는 진짜 카드 한 장을 뒤집어서 보여주는 건 어떨까요? 은경씨와 상대 둘 다 그 한 장은 뒤집지 않은 채, 나머지 카드만 보여주다 "나 안 해."를 외친 것 같은데, 나머지 카드로 감정싸움 하는 건 그만두고, '뒤집지 않은 진짜 카드 한 장'을 상대에게 보여주는 겁니다.
설마, 이번에도 "백 점 맞으면 보여줄게."라며 조건을 다실 건가요? 나가서 광합성 하고 싶은 마음이 샘솟음 칠 정도로 날씨 좋은 후라이데이, 눅눅한 감정싸움은 그만 하고 햇볕 쬐러 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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