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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매뉴얼(연재완료)/솔로부대탈출매뉴얼(시즌3)

호의만 베풀던 연애, 63일 만에 헤어진 J군에게

by 무한 2012. 10. 29.
호의만 베풀던 연애, 63일만에 헤어진 J군에게
모임도 중독이 된다.
알코올이나 니코틴처럼 눈에 보이는 물질로 인한 중독은 아니지만, 화기애애한 말들이 오가는 분위기나 소속감, 자리라도 하나 맡게 되면 따라붙는 책임감, 모임의 사람들은 이해해 주며 그들은 그 누구보다 날 응원해 줄 거라는 착각 등이 모임에 중독 되도록 만든다.

모임이 가진 장점도 물론 많지만, 여기선 따로 언급하지 않겠다. 이건 J군에게 보내는 글이고, J군은 현재 모임의 장점만을 바라보고 있으니까. 그 이면도 한 번 생각해 보라고 꺼낸 얘기다. 알코올이나 니코틴 중독이 간암이나 폐암 등의 결과를 낳을 수 있는 것처럼, 모임 중독 역시 그간 투자한 돈, 시간, 열정의 상실감을 맛보게 할 수 있다. 만약 J군이 내 동생이라면,

"모임에서 총대 맸다고 우쭐거리며 네 월급 다 회비로 바치지 말고
아버지 내복 한 벌, 어머니 신발 한 켤레 사 드리라고.
언제나 모임이 제일 먼저라고?
안에서 새는 바가지가 밖에서는 안 샐 것 같냐?
모임 회원들 돌볼 시간에 네 생활이나 좀 돌봐.
시궁창 같은 현실은 덮어두고 거기 가서 잔 부딪히고 있으니까 좋아?
A회원이 모임에 소홀해지고, B회원이 모임을 탈퇴해서 불만이라고?
야, 목 위에 달린 게 머리가 맞으면 생각을 좀 하고 살아.
걔들은 지 살 궁리하려고 유학가고 취직하느라 그런 거잖아.
돈 벌고 가정 꾸리느라 모임에서 탈퇴한 건데, 그게 배신? 에라이.
그런 소속감이 없으면 네가 별 볼 일 없는 사람 같아?
그럼 넌 정말 별 볼 일 없는 사람인 거야."



라며 온갖 쓴 소리를 늘어놓겠지만, J군은 내 동생이 아니니 "모임에는 단점도 있으니, 그 부분도 꼭 살펴보세요."라는 이야기 정도만 적어두겠다.

월요일 아침부터 '모임'에 대한 안 좋은 소리를 늘어놓은 까닭은, J군의 사연이 '모임'에서 시작해 '모임'에서 끝나기 때문이다. 게다가 J군과 63일간 연애를 한 B양 역시 '모임 중독'이었다. 미안하지만 난 이 둘의 만남을 '호의와 보답과 보상과 자가당착의 향연'이라고 생각한다. J군은 그저 후반부에 자신이 보인 집착 때문에 틀어진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그것보다 좀 더 크고 근본적인 문제들을 오늘 함께 살펴보자.


1. B양의 매력은 '아픈 아버지'인가?


J군과 B양은 3년 전부터 같은 모임에 참석하고 있는 회원이다. 모임에선 수다를 떨고 술 마시며 놀지만, 개인적으론 연락하는 일이 없는 관계. 두 사람 모두 서로를 '이성'으로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다. B양의 아버지가 쓰러지시기 전까진.

B양의 아버지가 병원에 입원하시자, J군은 '모임을 대표하여' 날마다 병원을 찾았다. B양을 이성으로 생각해서 그런 건 아니다. 처음엔 J군도

'그냥 모임의 친구일 뿐인데 내가 좀 오버하는 건가?'


라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J군의 호의에 B양은 감동했고, 그에게 이 고마움을 어떻게 갚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말을 했다. 이 말은 J군의 '보호본능'에 불을 지폈다.

J군의 행동이 선행인 까닭에 과하다는 얘기를 하진 않겠다. 그는 병원에 있는 B양 가족들의 밥을 챙기고, 병원생활에 필요한 물품들을 조달하며, 퇴근하면 찾아가서 B양의 아버지를 주물러 드리고, 어느 날은 가족들이 다 출근해 혼자 계실 B양의 아버지를 생각하며 조퇴까지 하고 와 아버지의 말벗이 되어 드렸다.

B양이 그런 행동들에 고마움을 더욱 표현하자, J군은 저런 건 일도 아니라며 '진짜 호의가 뭔지 보여주겠다.'는 자세로 혼신의 힘을 다한다. 병원을 오가는 B양과 B양의 가족들을 자신의 차로 모시고, 주말엔 병실의 한 정물이라도 된 듯 병실을 지킨다. J군이 보인 '호의'는 이보다 훨씬 많은데, 여기다 다 적으면 J군의 신상이 드러날 것 같아서 이쯤만 적어두겠다. 여하튼 내 부모님이 입원하셨다고 해도 저렇게 할 수 없을 것 같은 일들은 J군은 해냈다.(실제로 B양의 가족 중 J군 보다 열정적인 간호를 한 사람은 없다.)

저런 호의를 누군가에게 받았다면, 철면피가 아닌 이상 상대에겐 언제나 감사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맙다는 말을 하기 마련이다. B양도 그랬다.

"너라는 사람이 있어서 정말 든든하고 고마워. 이걸 다 어떻게 갚을 수 있을까."


이쯤에서 J군의 사랑이 시작된다. 사마천도 얘기하지 않았던가. 남자는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목숨을 건다고. 여기서 곰곰이 생각해 봐야 할 것은, J군과 B양 사이의 접점은 '아픈 아버지'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소설가 김승옥의 <김수만씨가 패가망신한 내력>이라는 소설을 읽어보길 권해주고 싶다. 과부만 보면 돕던 김수만씨의 이야기인데, 나중엔 그것 때문에 아내와 이혼까지 하게 된다. 재미가 반감될 수 있으니 결말은 옮기지 않고, 소설에 나온 글귀 하나만 소개하겠다.

"측은한 마음에 불쑥 덤벼들었다간
내가 상당한 희생을 치를 수밖에 없다는 인생법칙 같은 걸 그때 좀 깨달았지만,
그래도 역시 초점 없는 눈길로 망연하게 한숨 쉬고 있는 여자만 보면
내 처지나 분수를 깜빡 잊어버린단 말야. 그게 바로 내 약점이었어."

 
이제껏 만났던 남자 중에 J군 만큼 자신과 자신의 가족을 챙겨 준 사람은 없으니, B양도 J군의 마음을 받아들인다. 뭔가 이야기에 핀트가 살짝씩 엇나가는 게 보이지 않는가? 모임을 대표해 병문안에 열심을 내는 남자, 그게 자신을 그만큼 생각해서 그러는 거라고 오해하는 여자, 그런 여자의 감사표시에 들떠 더욱 더 열심을 내는 남자(그러다가 남자는 그 관계가 사랑이라고 생각해 고백을 한다.), 이런 남자라면 자신의 보금자리가 될 거라고 생각해 둥지를 트는 여자.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고 생각해 "사귀었으니 된 것 아니냐."고 하는 대원들도 있겠지만, 모래 위에 집 지었다고 들어가 살 일만 남은 것은 아니잖은가. 그런 집은 바람만 불어도 집이 무너지지 않을까 걱정해야 한다. J군의 연애 역시 그랬다. 바람이 불자, 둘의 연애는 뿌리까지 흔들리기 시작했다.


2. 나에겐 관대하지만, 너에겐 아니란다?


둘이 연애를 시작한 지 한 달이 지나 B양의 아버지가 퇴원하셨다. 그 한 달의 '병문안 데이트'는 길게 옮겨 적지 않겠다. 위에서 이야기 한 것처럼 J군은 한 달간 '간병인'과 '도우미'를 오가며 열심히 B양과 B양의 가족들을 위해 봉사했다.

문제는 그 후 B양이 '새로운 모임 활동'을 하면서 발생했다. B양의 행동을 잠시 보자.

- 모임에서 전어 먹으러 간다며 J군 놔두고 4:4로 소래포구 다녀오기.
- 예전에 참가했던 모임에서 번개를 한다며 새벽에 나가서 술 마시기.
- 아는 오빠가 친구 소개팅을 주선했는데 함께 참석해 2:2로 놀기.


J군은 저런 행동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했는데, 나 역시 마찬가지다. 솔직히 카톡대화 중,

B양 - 현규오빠랑 미지랑 바다 보러 간다는데, 같이 가자고 해서 다녀오려고.
J군 - 셋이?
B양 - 아, 민철오빠도 올 수 있어. 그 오빠가 근처에 살거든.

 
라는 부분을 읽으며 난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남자친구 내버려 두고 2:2로 바다 보러 간다는 얘기를 저렇게 아무 일도 아닌 양 말할 수 있다니. 여자친구에게 저런 얘기를 들으면 혼란스러운 게 당연하다. 당연하긴 한데, J군이 할 말은 없어 보인다. J군이 좋아하는 그 '모임'에선 저게 '이상할 것 없는 일' 아니었는가.

두 사람 모두 과거에 같은 모임활동을 할 때 이성친구가 있었다. 그런데 연애 중이던 그 때에도 모임에 참석해 새벽까지 술을 마시기도 하고, 노래방에서 밤을 새우기도 했다. 연인을 놔두고 모임 사람들과 놀러 다니는 것이 이상할 것 없었고, 그 모습에 항의하는 사람은 '이해를 못 하고 의심만 하는 사람'으로 낙인찍었다.

"네가 생각하는 그런 모임이 아니라고. 절대로 이성으로 생각해서 어울리는 거 아냐."


그 말을 그대로 지금 상황에 가져다 붙이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바다를 보러 가든, 전어를 먹으러 가든, 새벽에 번개를 하든, 소개팅에 참석해서 놀든 그건 '네가 생각하는 그런' 것이 아니게 된다. J군은

"그 남자들이 웃긴 것 아닌가요? 남자친구 있는 여자를 왜 불러서 술을 마셔요?
그리고 바다 보러 2:2로 간다면 이상한 생각이 드는 게 당연한 거 아닌가요?"


라고 말하는데, 다 맞는 말이다. 그런데 가만히 돌아보면 J군도 연애할 때 그렇게 어울려 놀았고, B양 역시 남자친구가 있을 때 J군을 포함한 모임의 다른 남자들과 수를 맞춰 놀았다. 그 때는 자신이 B양과 새벽까지 술을 마시는 게 괜찮았고, 지금 B양이 다른 남자와 그러는 건 안 된다니 뭔가 좀 이상하지 않은가?

B양을 두둔하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지만, 사귀기 전까지 '신뢰는 하는 거지 주는 게 아니다.'라고 말하던 남자가, 사귀고 난 뒤 '신뢰는 줘야지 할 수 있는 것이다.'라고 말을 바꾸면 당황스러울 것 같다. 생각이 변한 거라면, 왜 그렇게 변하게 되었는지를 상대가 알아들을 수 있도록 설명했어야 하는데 J군은 그러지 못했다. 그래서 결정적인 실수를 저지르게 된다. 실수에 대해선 아래에서 자세히 살펴보자.


3. 너 이따가 집에 가서 보자.

 
꼬꼬마시절 내가 제일 싫어했던 말이 "너 이따가 집에 가서 보자."였다. 비슷한 말로 "너 이따가 사람들 다 가고 나서 봐."도 있다. 부모님에게 저런 이야기를 들으면, 기다림의 시간이 모두 폭력으로 변한다. 초조하고 불안하다. '이따가'라는 시간이 찾아오기 전까진 가시로 된 외투를 입고 있는 것 같다. 벗어버리고 싶은데 벗어지질 않는다.

꼬꼬마 - "이따가 왜? 뭐? 나 때릴 거야?"
부모님 - "조용히 하고 있어. 너, 이따가 봐."


끔찍하지 않은가? 그런데 이 끔찍한 일을 J군은 저지르고 만다. 대화를 보자.

J군 - 저녁에 회사 앞으로 갈게. 얘기 좀 해.
B양 - 무슨 얘기?
J군 - 이따 만나서 얘기해.
B양 - 뭔데? 바다보러 간다는 것 때문에?
J군 - 어. 이따 얼굴 보고 얘기하자.
B양 - 그게 왜 그렇게 된 거냐면…
J군 - 얘기 들으니까 더 이해가 안 된다. 암튼 이따가 만나서 얘기하자.

 
J군이 내 동생이었다면,

"야, 아침부터, 그 아침 일찍부터 꼭 그래야만 했냐?
이따 얼굴 보고 얘기하자고 말하면 넌 기분이 좋아져?
그 말 듣고 저녁까지 오들오들 떨고 별 상상을 다 할 상대는 어떨 것 같아?"


라는 이야기를 해주고 싶다. 내 예상대로 B양은 저 말에 오들오들 떨다가 점심시간이 지나 장문의 카톡을 보낸다. "저녁까지 기다리려니 일도 손에 안 잡히고, 너무 답답하고, 머리가 계속 아파서 이렇게 미리 말할게…."로 시작하는 이야기를. 오들오들 떨다가 보낸 얘기라 내용은 방어적이고, '나를 조금 더 이해해 달라.'고 호소하는 부분이 주를 이룬다. 그걸 듣고 J군은 폭발한다. J군이 보낸 카톡 중 정이 확 떨어지게 만드는 부분만 살펴보자.

"내 말은 다 무시하고 네 말만 하냐? 난 벽에 대고 소리친 거냐?"
"나에 대한 네 진심이 안 느껴진다. 넌 놀 거 다 놀고 심심하면 나 만나냐?"
"난 너랑 사귀는 지금도 외롭다. 내가 외로운 건 너한테 문제가 있는 거 아니냐?"
"친구가 어색할까봐 같이 간다고? 그거 오지랖이다. 정도껏 해라."
"네가 지금 하는 행동을 날 무시하는 거고, 분명히 잘못된 거다."


어쨌든 저 말로 J군은 전투에서 승리한다. 그런데 전쟁에서는 진다.

"J군아. 난 네가 원하는 여자가 아닌 것 같아.
너랑 사귀며 시간이 지날수록 너에 대한 내 감정은 죄책감과 부담감인 것 같아.
(중략)
카톡으로 이런 얘기해서 미안해. 부탁할게 그만하자."


'이따 만나서 얘기'는 하지도 못하고 끝나 버렸다. 패전을 통보받은 J군은 3주째 폐허가 된 곳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전쟁에서 진 사람들이 대부분 그렇듯 그는 상대의 사이버 공간에 들어가 글과 사진을 매만지며 그리워하고, 어느 날은 반성문을 보냈다가, 또 어느 날은 마지막 연락이라며 편지를 보냈다가 하며, 구멍 난 마음으로 새어 들어오는 찬바람에 하얗게 식어가고 있다. 


J군은 헤어진지 한 달이 되는 시점에 다시 만나 고백할 예정이라고 하며 이상한 얘기를 덧붙인다.

"다시 저를 좋아하도록 만들어보려 합니다."


'다시'라는 말이 이상하다. 내가 보기엔 B양이 J군을 좋아한 적은 없다. '고마움'과 '책임감'이 있었을 뿐이다. 그게 계속되자 '부담감'과 '죄책감'으로 변한 것이고 말이다. 다시 고백하는 건, 그 '부담감'과 '죄책감'에 호소하는 것을 벗어나지 못한다.

만약 B양이 그 호소를 받아들여 다시 사귀면 어떻게 할 것인가? 받아줘서 너무 고마우니 '무조건 네 뜻대로'의 자세로 납작 엎드려 모두 이해하려 노력할 것인가? '다시 사귀게 되었으니 외로워도 괜찮아.'라며 묵묵히 '간병인'과 '도우미', '기사'라는 역할에 만족할 것인가? 아무 해답도 없이 무작정 매달려 '봉합'해봐야, 다시 벌어지는 건 시간문제다. 

소속감 없이도 충분히 자신의 삶을 잘 살고 있으며, 희생과 봉사와 양보를 계속 하지 않고도 관계가 유지되는 사람과 만나길 권한다. 하나 더. 앞으로는 전투보다 전쟁에 더욱 신경 쓰자. 나에게 집중하라고 소리치는 것보단 집중할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게 중요하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매뉴얼을 통해 꾸준히 이야기를 나누고 있으니, 좋은 친구와 사귀듯 즐겨찾기 해두고 가까이 하길 바란다.



▲ 상대 페북에 쓰여 있는 글이 '나에게 보내는 암호'라고 생각하기 시작하면, 약도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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