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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기사와 시비 붙은 취객, 술은 점점 깨 가는데

by 무한 2012. 11. 5.
버스기사와 시비 붙은 취객, 술은 점점 깨가는데
버스기사는 분명 뭔가에 화가 나 있었다. 일요일 저녁, 서울의 한 정류장에는 나를 포함한 네 명이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버스가 도착했는데, 기사는 정류장에서 십여 미터 쯤 못 미친 지점에 버스를 세우고 앞문을 열었다. 우리가 십여 미터를 걸어가 버스에 올라타자 기사는 불쾌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게 앞으로 나와 있으면 버스를 못 대요.
한 걸음 뒤로 가서 서 있어야지, 사고 나요."



괜한 트집이었다. 오십대 아주머니와 나는 정류장 벤치에 앉아 있다 일어났고, 이십대 남자는 정류장 뒤에서 담배를 피우다가 뛰어왔다. 이십대 여자는 가로수 옆에 서 있었고 말이다. 다들 두 걸음 정도는 차도에서 물러나 있던 상황이었다. 하지만 나쁜 소리를 한 것도 아니고, 버스를 안 태워준 것도 아니라 난 그냥

"예~"


라고 대답하고 뒤쪽으로 들어가 앉았다.

다음 정류장에서도 버스기사는 버스에 올라타는 사람들에게 같은 말을 했다. 그 승객들은

'나 말고 누가 앞으로 나와 있었나 보다.'


라고 생각하는지, 다들 자신은 아니라는 듯 대꾸하지 않았다.


그 다음 정류장에서도 버스기사는 같은 말을 했다. 역시 승객들은 말없이 올라탔는데, 그 중 오십대 후반으로 보이는 술 취한 아저씨 한 분이 기사의 말을 받아쳤다.

"지금, 나한테 그런 거야?"


버스에 타고 있던 모든 사람의 시선이 그 아저씨에게 향했다. 다들 버스기사에게 같은 말을 들었던 처지인지라, 과연 버스기사가 뭐라고 대답하는지 궁금해 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게 아니라, 차도에 가까이 있으면 사고 나니까…, 근데 왜 반말이야?"


분위기가 험악해졌다. 기사와 취객은 눈싸움을 하고 있었는데, 기사 뒤에 앉아 있던 아주머니가 빨리 가자며 둘 사이에 끼어든 덕분에 일단 출발은 했다. 그렇게 작은 소동으로 끝나는 줄 알았는데, 버스기사가 다음 정류장에서 탄 승객들에게도 같은 말을 하자, 취객이 웃으며 혼잣말을 했다.

"허어 참. 저거 또 저러네?"


그 혼잣말이 너무 컸다. 버스기사가 그 말을 들었고, 이어서 둘의 긴 싸움이 시작되었다.

기사 - 저거? 당신 지금 나한테 그런 거야?
취객 - 그래. 너 인마 너.
기사 - 너? 차암나. 아저씨, 술 드셨으면 그냥 곱게 쳐 가세요. 예? 집에 가서…
취객 - 야, 운전이나 해.
기사 - 운전이나 해? 이 사람이 지금 장난하나, 당신 몇 살이야?
취객 - 너보다 많이 먹었으니까, 얼른 가(얼른 운전해).



이어서 "뭐 저런 놈이 다 있어." "앞이나 잘 봐."등의 말로 치고받는 긴 말싸움이 이어졌다. 기사가 흥분한 것이 걱정되었는지, 기사 뒤에 앉은 아주머니는 계속해서 기사를 토닥이며 참으라는 얘기를 했다. 그 다독임에 기사가 좀 울컥했는지 아주머니에게 이런 말을 했다.

"정말 이런 기분으로 버스 운전 하겠어요? 아오."


그 말을 들은 취객이 외쳤다.

"야, 너만 버스 운전 하냐? 나도 버스 운전 해. 이 자식아."


취객이 버스기사라는 사실에 모두 놀랐다. 지겨운 말싸움에 창밖을 보고 있던 사람들도 다시 둘의 싸움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기사는 실마리를 잡았다는 듯 질문을 퍼부었다.

기사 - 그래? 어디 기사야?
취객 - 9xxx기사다. 이 자식아.
기사 - 당신 이름 뭐야?
취객 - 허xx이다. 왜?
기사 - 허xx. 알았어. 당신, 내리지 말고 영업소로 가.
취객 - 하이고 무섭네, 뷰웅x. 가자 가. 뷰웅x.
기사 - 영업소 가서 얘기해.
취객 - 영업소가 법이냐 이 새x야? 가자 가.



이어서 기사는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는데, 통화 중간 중간에 취객이 끼어들어 외쳤다.

(기사는 다른 사람과 통화 중)
기사 - 지금 9xxx기사가 타서 난동을 부리는데, 운전을 할 수가 없어.
취객 - 지x을 해요. 지x을.
기사 - 어. 지금 타고 있어. 허xx, 9xxx.
취객 - 그래, 일러라 이 자식아.
기사 - 아니, 술 취해서. 응. 영업소로 갈 거니까, 얘기해놔.
취객 - 뷰웅x. 영업소 좋아하네.



통화를 마친 기사는 만반의 준비를 끝냈다는 듯,

"당신, 영업소 가서 보자고. 내리지 마."


라고 말하며 여유로운 모습을 되찾았다. 취객이 계속해서 혼잣말로 시비를 걸었지만, 기사는 대꾸하지 않았다. 기사가 상대해 주지 않자 취객은 잠이 들었다. 그동안 버스는 자유로를 달려 일산에 도착했다.


버스가 일산에 진입해 다시 안내방송이 나오기 시작하자 취객은 잠에서 깨어났다. 그는 버스에 처음 탔을 때와는 달리 한결 수그러진 모양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는데, 취기도 어느 정도 가라앉은 것 같았다. 별 말 없이 조용히 있던 그는, 주엽역임을 알리는 안내방송이 나오자 벨을 눌렀다.

취객은 내리려는 사람들 틈에 조용히 섞여 들었다. 버스가 주엽역에 도착했다. 뒷문은 열리지 않았다. 사람들이 문을 열어달라고 말하자 기사는 앞문으로 좀 내려달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다 보고 있었다는 듯 취객에게 소리쳤다.

"당신, 어딜 내려. 당신 못 내려. 나랑 영업소로 가."


그 말을 들은 취객의 표정은, 소변보는 꿈을 꾸다 깨어났는데 이불이 축축이 젖어 있는 것을 발견했을 때의 표정이었다. 취객은 주제를 바꿔 다시 기사와의 싸움을 시작했다.

취객 - 내가 내린다는데, 왜 문 안 열어?
기사 - 내리긴 어딜 내려. 영업소 가서 얘기해.
취객 - 지금 나 못 내리게 하는 거야?
기사 - 9xxx, 허xx씨. 조용히 앉아 계세요. 당신 못 내려.



기사가 자신의 소속과 이름을 알고 있다는 것에 취객은 적잖은 충격을 받은 눈치였다. 그는 얼마간 기사 옆에서 아무 대꾸도 하지 못하고 서 있었다. 기사는 자신의 완벽한 승리에 도취된 듯 보였다. 취객은 버스가 대화역에 도착하자 다급해졌는지 사람들이 타는 앞문으로 내리려고 자리를 잡았다. 그러자 기사는 버스 앞문을 닫은 채, 타려는 사람들에게 뒷문으로 타 달라고 말했다. 취객은 거의 울 것 같은 표정으로 기사에게 항의했다. 

취객 - 너 왜 나 못 내리게 해?
기사 - 당신은 조용히 있으라니까. 영업소 가서 얘기해.
취객 - (기사를 손으로 건드리며) 무슨 얘기를 해?
기사 - 어? 지금 운행 중인데 쳤어? 당신 지금 나 친 거야. 
취객 - (또 기사를 손으로 건드리며) 내가 언제 쳤어? 물어 본 거 아냐?
기사 - 지금 또 쳤어. 운행 중인데 친 거야. 영업소 가서 보자고.



취객을 완전히 제압한 기사는 계속해서 진부한 조롱을 했는데, 내용이 너무 유치하니 대화문으로 옮기진 않겠다. 초등학생들의 싸움에서나 볼 수 있는 유치한 얘기들이었는데, "내가 가만히 있으니까 가마니로 보이지?", "입에 걸레를 물었나." 등의 독창성 없는 조롱이었다.

멘탈이 붕괴된 취객은 그런 조롱에도 아무 대꾸를 하지 못했다. 패기가 사라진 자리에 절망이 가득 들어찬 듯 보였다. 기사 옆에 서서 아무 말도 못한 채 발을 구르고 있던 취객은,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통화내용으로 미뤄보아, 경찰에 신고를 한 듯 했다.

"지금 제가 납치를 당하고 있어요. 
버스 안이에요. 1xxx번 버스요. 예, 지금 달리고 있어요. 
여기요? 여기가, 여기가, 어딘지는 모르겠구요. 
예, 저를 못 내리게 해요. 납치하고 있어요. 
아뇨. 문을 안 열어 줘요. 빨리 좀 와 주세요. 
모르겠어요. 예, 1xxx번이요. 사람들도 타고 있어요."

 

신고를 한 것인지, 아니면 신고를 하는 척 한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저 통화를 마친 후에도 취객은 계속해서 내려달라고 얘길 했으니까. 뒷문이든 앞문이든 억지로 내리면 충분히 내릴 수 있을 텐데, 취객은 그러지 않고 기사의 허락을 구하듯 매달렸다. 기사가 자신의 소속과 이름을 알고 있어서 그런 것 같았다.

버스가 운정신도시에 접어들었을 때쯤엔 취객도 포기한 것 같았다. 그는 다시 주제를 바꿔 "내가 무슨 잘못을 했으며, 뭘 그렇게 잘못한 거냐. 다 내 잘못은 아니지 않냐."에 대한 얘기를 해댔다. 기사는 취객을 비웃으며 영업소에 가서 얘기하자는 말만 반복했다.

내려야 할 곳이 가까워진 까닭에 나도 슬슬 내릴 준비를 하고 있는데, 이십대 초반으로 보이는 건장한 청년 하나가 일어서서 뒷문으로 다가갔다. 뒷문 쪽에는 내리기 위해 자리를 잡은 여자들이 있었다. 그녀들은 기사와 취객의 소란스러움에 대해 구시렁거리고 있었다.

여자A - 서울에서부터 여기까지 저러고 왔어.
여자B - 진짜 왜 저러냐.
여자C - 아까 들었어? 납치한데 ㅋㅋㅋㅋㅋ 납치 ㅋㅋㅋㅋ.



기사와 취객은 여전히 말싸움을 하고 있었는데, 여자들 근처로 다가갔던 그 청년이 기사와 취객을 향해 소리쳤다.

"드만좀 해. 이 대댁끼들 들아. 돈나 띠끄럽네."


청년은 나름대로 뭔가 위협적인 말을 꺼내 상황을 정리하고 싶었던 것 같은데, 안타깝게도 혀가 짧았다. 게다가 어림잡아 보더라도 기사나 취객 모두 청년의 아버지뻘 될 정도로 나이가 많은 사람들이었다. 거기에 대고 '대댁끼'라는 욕을 한 것은 누가 봐도 어울리지 않았다. 청년 옆에 서 있던 여자들은 터져 나오는 웃음을 억지로 참는 듯 끄윽끄윽 거리는 소리를 냈다.

버스가 정류장에 멈췄고, 그 청년은 카드도 찍지 않은 채 서둘러 버스에서 내렸다. 그러고는 정류장 뒤 상가 쪽으로 도망치듯 걸어갔다. 난 종점까지 따라가서 이야기의 마무리를 지켜볼까 하다가 그냥 내렸다. 같은 정류장에서 내린 여자들은

"대댁끼 ㅋㅋㅋㅋㅋㅋ"
"돈나 띠끄럽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하며 웃겨 죽겠다는 듯 그 청년의 말을 따라하고 있었다. 난 그 모습에 웃음을 머금으며 집으로 발길을 향했다. 날이 찬 까닭에, 얼마 전에 산 스웨이드 장갑을 가방에서 꺼내 꼈다. 스웨이드와 니트가 잘 조화된 이 장갑은 원래 89,000원 짜린데 백화점에서 19,000원에 세일할 때 샀다. 안감이 기모로 되어 있어 더욱 따뜻하며, 차콜과 블랙으로 구성된 색상 덕분에 어느 옷에든 잘 어울린다. 또한 손바닥 부분엔 실리콘 처리가 되어 있어 그립감이 우수하다.

나도 한 번쯤 기-승-전-병의 글을 써 보고 싶었기에, 오늘 글은 이렇게 마무리 짓는다.



▲ 웃긴 부분 하나를 빼 먹었다. 기사가 "승객 여러분~ 누가 잘못한 겁니까?"라고 묻던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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