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원 점빼기 피부과, 치열했던 세 시간의 기록
눈을 떴을 때, 나를 태운 버스는 한강다리를 건너고 있었다. 다리를 건너자마자 내려야 했기에 난 벨을 눌렀다. 그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는데
'헉. 내 외, 왼발이….'
왼발이 저렸다. 버스가 출발할 때 다리를 꼬고 잠이 든 까닭에 한 시간 가량 그 자세로 왔던 것이다.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수수깡으로 만든 가짜 다리로 걷는 느낌이랄까. 거기에다가 웃음도 나왔다. 사르르 녹는 느낌과 찌르르 울리는 느낌 때문에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아랫배에서 깊은 헛웃음이 튀어나왔다.
사람들이 하나 둘 나를 이상한 시선으로 바라봤다. 하지만 그때 내겐 시선 따위가 문제가 아니었다. 무너져 내리는 이 왼발을 가지고 무사히 정류장에 내려야 하는 일이 더욱 중요했다. 버스 뒷문 계단에서 한 번 넘어질 뻔 했는데, 모든 힘을 팔에 모아 손잡이를 잡은 까닭에 무사히 내릴 수 있었다. 내리자마자 중앙차로 정류장 난간에 기대 안도의 한숨을 내 쉬었다.
'무사히, 내렸어.'
시간이 좀 지나자 다리에 감각이 돌아오며 평소처럼 걸을 수 있게 되었다. 긴장이 풀리니 담배 생각이 간절했다.
서울에서 아무렇게나 담배를 피우다간 벌금을 낼 수 있다는 뉴스를 들었기에 흡연구역부터 찾기 시작했다. 건물 세 개 정도를 돌았는데도 흡연구역이 나오지 않았다.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고 흡연구역을 물을 수도 없는 일이라 묵묵히 다른 건물 주변까지 훑었다. 열심히 찾아도 '흡연구역'이라고 쓰인 장소를 찾을 수 없어 주차장 부근 빈 고추장 통이 있는 곳에서 담배를 피우기로 했다. 통 안에 꽁초와 종이컵들이 있는 것으로 보아 비공식 흡연구역인 듯했다.
담배에 불을 붙이고 일 분이나 지났을까,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그들도 나처럼 한참 흡연구역을 찾아 헤맸는지 퀭한 눈을 해서는 내 옆으로 와서 담배를 빼 물었다. 순식간에 여남은 명의 사람들이 통을 중심으로 모였다. 내가 재를 통에 떨자, 다들 나를 따라 통에 재를 떨었다. 이어서 내가 담배를 껐을 때도 모두 나를 따라 담배를 껐다. 예정되지 않았던 흡연자들의 플래시 몹은 그렇게 끝났다.
난 대로변으로 나와 피부과를 찾기 시작했다. 어머니 친구 분께서 입소문 난 곳이라고 알려주신 피부과였다. 얼굴에 손톱으로 할퀸 듯 난 혈관종 상담을 받을 목적이었다. 혈관종은 어렸을 때부터 있던 건데, 이게 은근히 사람을 귀찮게 한다. 별로 티가 나지 않는 까닭에 내 얼굴에 혈관종이 있는지도 모르고 지나치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들이 어느 날 내 얼굴을 유심히 보게 될 때 꼭 이렇게 묻는다.
"어? 거기 왜 그래요? 다쳤어요?"
그 질문에 원래 그렇다고 답하면 예전엔 못 본 것 같다는 상대의 말이 이어진다. 서른 해 넘게 내 얼굴을 봐온 내가 원래 그렇다는데, 왜 토를 다는지 모르겠다. 여하튼 그 다음엔 여지없이 "혈관종이요?"라는 질문이 이어진다. 그럼 난 이게 혈관이 밖으로 비춰서 보이는 것일 뿐 별 거 아니라는 식으로 답을 해준다. 거기서 그치면 참 좋을 텐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런 거, 레이저로 없앨 수 있지 않아요?"라는 식의 질문을 또 한다. 그럼 난 또 거기에 이게 돌 지나서 손톱 만하게 생겼고, 성인이 되면 없어질 수 있다고 해서 놔뒀는데 완전히 없어지지는 않고 옅게 흔적이 남았다, 라고 에피소드를 들려준다. 아무튼 그런 귀찮음을 그만 겪고자 혈관종을 없애기로 한 것이다.
지도에는 분명 정류장 근처인 것으로 나와 있는데 아무리 찾아도 피부과가 보이지 않았다. 한참 위쪽까지 거슬러 올라가다가 전화를 걸었다. 병원을 못 찾아서 전화했다고 말하자 직원이 늘 있는 일이라는 식으로 내 위치부터 물었다. 내 위치를 말하자, 직원은
"그 아래 스킨푸드 보이시죠? 그 사이 골목으로 들어오셔서 좌측에 있어요."
라고 병원위치를 알려주었다. 분명 지나오며 살핀 곳인데 왜 못 봤을까, 하며 난 다시 발걸음을 돌렸다.
직원이 설명해 준 골목에 들어서야 난 내가 병원을 찾지 못한 이유를 알았다. 건물이 구식이라 피부과가 있을 거라곤 생각지도 않았던 곳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상상한 피부과가 아니었다. 난 홈페이지에서 본대로 핑크색에 세련된 로고가 박혀 있을 거라 예상했는데, 그곳엔 90년대식 보건소 느낌의 건물에 낡은 파란 간판이 붙어 있었다. 대로변 건물들보다 스무 살은 많은 듯한 건물이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게 나을 것 같다는 마음의 소리가 들렸지만, 이왕 온 김에 상담이라도 받아봐야겠다는 생각으로 들어갔다. 출입문 정면으로 데스크가 보이고, 양쪽에는 고객을 위한 대기의자가 있었다. 역시 내 예상과는 달랐다. 병원이라기보다는 은행 고객 대기실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지금이라도 나갈까, 하는 생각이 막 들었을 때 데스크에 있는 직원이 말을 걸었다.
직원 - 예약 하셨어요?
무한 - 아뇨.
직원 - 처음 오셨어요?
무한 - 네.
직원 - 이거 작성해 주시고요, 잠시만 앉아서 기다려 주세요.
무한 - 네.
그 '잠시만'이 50분 일 줄이야. 꽤 오래 기다렸지만 난 다른 고객들을 관찰하느라 시간가는 줄 몰랐다. 나 외엔 대부분 50대 이상(어쩌면 60대 이상)의 고객이었다. 데스크 앞에는 '점빼기 천원'이라는 글자가 크게 적혀 있었는데, 다들 그 '천원 점빼기'를 목적으로 오신 것 같았다.
할아버지 - 얼굴에 있는 거 다 빼려고.
직원 - 너무 많아서 다는 위험하세요.
할아버지 - 안 돼? 그럼 어떡해?
직원 - 오늘 반 빼고, 다음에 반 빼세요.
할아버지 - 다음에 또 와?
직원 - 네. 오늘 다는 못 빼세요.
할아버지 - 여기 손에 있는 건?
직원 - 그것도 다음에 빼세요.
할아버지는 실망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오늘 뺄 부분'을 고르셨다. 부부가 함께 오신 어르신 커플도 있었다. 할아버지께서 먼저 시술을 받고 나오시자, 할머니께서 외투를 건네며 물으셨다.
할머니 - 아퍼?
할아버지 - 어.
어르신 고객이 많아서인지 데스크에 있는 직원은 모든 대화를 큰 소리로 했다. 소심한 아주머니 한 분이 같은 질문을 계속 하다가 직원에게 혼이 나기도 했다.
아주머니 - 저기 그러니까 2월 3일에….
직원 - 그 날은 예약이 다 차서 안 되고요, 그 다음 주로 하셔야 해요.
아주머니 - 그러니까 다음 주가 2월 3일인데….
직원 - 아뇨. 2월 3일 다음 주요.
아주머니 - 이거 금방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직원 - 예약이 다 찼다고요! (달력을 내밀며)2월 3일 다음 주로 정하세요!
그러는 와중에도 나처럼 병원을 못 찾는 사람들의 전화는 계속 걸려왔다.
"스킨푸드 보이세요? 그 골목으로 들어오셔서 좌측에 있어요."
병원 문을 열고 들어오는 고객들은 모두 어르신들이었다.
내 차례가 되었다. 진료실로 들어가라는 말에 우측으로 난 복도를 향했다. 똑같이 생긴 고만고만한 방들인데다가 팻말이 작아 한 번에 찾기가 어려웠다.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가 된 기분으로 잠시 주춤하고 있는데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오른쪽이요!"
데스크의 무서운 직원이 지른 소리였다. 진료실 문을 열었다. 아파트 경비실만한 작은 공간에 책상 하나가 있고, 맞은편에 잔뜩 움츠린 듯한 모양으로 의사가 앉아 있었다.
무한 - 안녕하세요.
의사 - 네, 앉으세요.
무한 - 혈관종 때문에 왔는데요.
의사 - 저희는 혈관 레이저가 없는데….
무한 - …….
의사 - …….
잠깐 동안 우린 멍하게 앉아 서로를 쳐다봤다. 그때 갑자기 무슨 생각에서 그랬는지, 난 충동적으로 점을 빼겠다는 얘기를 했다.
무한 - 그럼, 점을 좀….
의사 - 고혈압이나 당뇨 있으세요?
무한 - 아뇨.
의사 - 드시고 계신 약도 없으시고요?
무한 - 네.
의사 - 점은 처음 빼시는 건가요?
무한 - 네.
의사 - 나가서 조금 기다리시면, 마취크림 발라드릴 거예요.
무한 - 네.
다시 대기실로 나와서는 뭔가 큰일을 저지른 듯한 느낌이 들어 공쥬님(여자친구)에게 일단 보고를 했다. 다행히 긍정적 반응이었다. 공쥬님은 내 오른쪽 구레나룻 근처에 있는 점은, 크기가 좀 있는 까닭에 두 번 정도에 나눠서 빼게 될 거라고 했다. 공쥬님이 점빼기 천원이라고 해 놓고 크기에 따라, 혹은 리터치 여부에 따라 가격을 더 받는 곳도 있다며 물어보라고 했는데, 난 여린마음동호회 회장이라 물어보진 못했다. 그런 거 물어보면 왠지 지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마취크림을 발라준다기에, 난 가운을 입고 베드에 누울 거라 생각했다. 평소 듣고 본 대로라면 관리사가 클렌징을 해주고 마취크림을 바른 뒤 시술실로 향해야 했다. 하지만 데스크의 직원은 날 부르더니, 면봉에 뭘 발라 내 얼굴에 찍기 시작했다.
'점 갯수를 세는 건가?'
라고 생각했지만, 오해였다. 그게 마취크림을 바르는 것이었다. 직원은 왼손으론 전화기를 붙들고 통화를 하며 오른손으로 내 얼굴에 마취크림을 찍어 바르고 있었다.
'수화기 내려놓고 내 점에 집중해! 좀 더 성의 있게 발라줘야지!'
라고 외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역시 여린마음동호회 회장이니까. 통화를 하다 잠시 멈춘 직원이 내게 무슨 말을 했다.
직원 - @%^@#$%실 거예요?
무한 - 네?
직원 - 귀에 있는 점도 빼실 거냐고요.
무한 - 아….
내 귀에 점이 있다는 사실을 난 그날 처음 알았다. 얼굴에 있는 점 역시 한 다섯 개 정도 일 줄 알았는데, 열 개가 넘게 있었다.
"아뇨. 귀에 있는 건 안 뺄래요. 그건 제가 아끼는 점이라서요."
별로 웃긴 얘기도 아니었는데 직원이 빵 터졌다. 마취크림을 다 바른 나는 대기 의자로 돌아가서 앉아있었다. 직원은 내 얘기가 한참을 생각해도 웃긴지 또래의 관리사가 데스크로 나왔을 때에도 나를 가리키며 속닥거렸다.
그 후 한 시간쯤을 기다렸다. 흥미로운 고객이 몇 명 더 왔는데, 이건 나중에 다른 이야기에서 소개할 예정이니 접어두자. 여하튼 그렇게 기다리다 차례가 되어 시술실에 들어갔다.
시술실 문을 열자, 매캐하면서 역한 냄새가 확 풍겼다. 오징어 굽는 냄새에 간디(애완견) 발 냄새를 섞어 놓은 듯한 농도 짙은 냄새였다. 워낙 많은 사람이 점을 빼는데다가 환기도 잘 안 되는 까닭에 좁은 시술실에 냄새가 꽉 차 있었다. 점을 뺄 때 아플 거라는 염려 보다는 역한 냄새 때문에 공포가 밀려왔다. 이 냄새를 하루 종일 맡아야 하는 의사의 고충이 피부로 느껴졌다.
아니, 사실 피부로 느껴진 건 점빼기의 고통이다. 마취크림을 발랐지만 생각보다 많이 아팠다. 얼굴에 난 뾰루지를 면봉으로 눌러 짤 때의 통증이 시술부위에 전해졌다. 눈가에 있는 점을 뺄 때는 혹시 레이저 설정이 잘못 되어 뼈를 건드리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시술을 마치고 대기실로 걸어 나오는데, 점을 뺀 부위가 얼얼하고 쓰라렸다.
데스크에 있는 직원이 이름을 불러서 가니, 재생을 돕는다는 테이프를 얼굴에 붙여줬다. 마취크림을 바를 때와 달리 성의 있게 붙여줬다. 대충 한 번 읽어보면 알 것 같은 주의사항도 밑줄을 그어가며 열심히 설명해 줬다.
'후후… 아까 한 번 빵 터지더니 친절해 지셨군.'
이라고 생각했으나, 그건 내 착각이었다. 설명을 끝마친 직원은, 점빼기는 시술보다 관리가 중요하다며 재생크림을 꼭 발라줘야 한다고 했다. 그러곤 병원에서 재생크림 판매 중인데 구입 할 거냐고 덧붙여 물었다.
"아뇨. 집에 있어요."
집에 재생크림 같은 게 있을 리 없지만 뭔가 당한다는 느낌이 들어 사양했다. 거절과 동시에 직원은 아까의 태도로 돌변했다.
"만 이천 원 나오셨네요."
왜 만 이천 원을 높이냐고 물어볼까 하다가, 조용히 계산을 하고 나왔다.
동네로 돌아와 약굴엘 갔다. 재생 테이프가 하얗게 변하면 새로 붙여야 한다기에, 집에 들어가는 길에 하나 사려고 들른 것이다.
무한 - 듀오덤 있나요?
약사 - 듀오덤이요, 어, 네. 있어요.
무한 - 어디 있어요?
약사 - 드려요?
무한 - 네.
약사의 행동이 수상했다. 바가지를 씌우는 게 익숙지 않은 사람이 바가지를 씌우려고 할 때 보이는 행동을 했다.
무한 - 얼마예요?
약사 - 이거, 잘라서 나온 것도 있거든요.
무한 - 이건 얼마고, 잘라진 건 얼만데요?
약사 - 둘 다 가격은 같아요.
무한 - 얼만데요?
약사 - 오천 원이요.
잠깐이었지만 치열한 두뇌싸움이 벌어져다.
'아무래도 잘라진 것은 그 양이 더 적을 것이고,
약사 아주머니가 처음 내민 게 '듀오덤'이란 마크가 선명해.
이게 진품이야! 아주머닌 지금 양 적은 유사 상품을 팔려고 하고 있어!'
약사가 처음 내민 제품을 선택했다. 분명 잘 한 선택이라 생각했는데, 봉지에 담아주며 허둥대는 약사의 모습에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집에 돌아와 '듀오덤 가격'을 검색했다. 보통 삼천오백 원쯤 하는 제품이라는 글을 볼 수 있었다. 졌다.
공쥬님에게 점 뺀 곳을 보여주니 오른쪽 구레나룻 근처의 점을 한 번에 뺀 거냐며 놀란다. 그런 점은 나눠서 빼야 흉터가 안 남는 법인데, 내가 간 곳은 말 그대로 '빼는 것'에만 의의를 둔 것 같다고 한다. 점 뺀 곳에 바르는 연고도 사다 주었다. 그나저나 점 뺀 곳에 흉터가 남지 않아야 할 텐데….
▲ 입소문은, 가격이 싸기만 해도 날 수 있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위추(위로추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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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발이 저렸다. 버스가 출발할 때 다리를 꼬고 잠이 든 까닭에 한 시간 가량 그 자세로 왔던 것이다.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수수깡으로 만든 가짜 다리로 걷는 느낌이랄까. 거기에다가 웃음도 나왔다. 사르르 녹는 느낌과 찌르르 울리는 느낌 때문에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아랫배에서 깊은 헛웃음이 튀어나왔다.
사람들이 하나 둘 나를 이상한 시선으로 바라봤다. 하지만 그때 내겐 시선 따위가 문제가 아니었다. 무너져 내리는 이 왼발을 가지고 무사히 정류장에 내려야 하는 일이 더욱 중요했다. 버스 뒷문 계단에서 한 번 넘어질 뻔 했는데, 모든 힘을 팔에 모아 손잡이를 잡은 까닭에 무사히 내릴 수 있었다. 내리자마자 중앙차로 정류장 난간에 기대 안도의 한숨을 내 쉬었다.
'무사히, 내렸어.'
시간이 좀 지나자 다리에 감각이 돌아오며 평소처럼 걸을 수 있게 되었다. 긴장이 풀리니 담배 생각이 간절했다.
서울에서 아무렇게나 담배를 피우다간 벌금을 낼 수 있다는 뉴스를 들었기에 흡연구역부터 찾기 시작했다. 건물 세 개 정도를 돌았는데도 흡연구역이 나오지 않았다.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고 흡연구역을 물을 수도 없는 일이라 묵묵히 다른 건물 주변까지 훑었다. 열심히 찾아도 '흡연구역'이라고 쓰인 장소를 찾을 수 없어 주차장 부근 빈 고추장 통이 있는 곳에서 담배를 피우기로 했다. 통 안에 꽁초와 종이컵들이 있는 것으로 보아 비공식 흡연구역인 듯했다.
담배에 불을 붙이고 일 분이나 지났을까,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그들도 나처럼 한참 흡연구역을 찾아 헤맸는지 퀭한 눈을 해서는 내 옆으로 와서 담배를 빼 물었다. 순식간에 여남은 명의 사람들이 통을 중심으로 모였다. 내가 재를 통에 떨자, 다들 나를 따라 통에 재를 떨었다. 이어서 내가 담배를 껐을 때도 모두 나를 따라 담배를 껐다. 예정되지 않았던 흡연자들의 플래시 몹은 그렇게 끝났다.
난 대로변으로 나와 피부과를 찾기 시작했다. 어머니 친구 분께서 입소문 난 곳이라고 알려주신 피부과였다. 얼굴에 손톱으로 할퀸 듯 난 혈관종 상담을 받을 목적이었다. 혈관종은 어렸을 때부터 있던 건데, 이게 은근히 사람을 귀찮게 한다. 별로 티가 나지 않는 까닭에 내 얼굴에 혈관종이 있는지도 모르고 지나치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들이 어느 날 내 얼굴을 유심히 보게 될 때 꼭 이렇게 묻는다.
"어? 거기 왜 그래요? 다쳤어요?"
그 질문에 원래 그렇다고 답하면 예전엔 못 본 것 같다는 상대의 말이 이어진다. 서른 해 넘게 내 얼굴을 봐온 내가 원래 그렇다는데, 왜 토를 다는지 모르겠다. 여하튼 그 다음엔 여지없이 "혈관종이요?"라는 질문이 이어진다. 그럼 난 이게 혈관이 밖으로 비춰서 보이는 것일 뿐 별 거 아니라는 식으로 답을 해준다. 거기서 그치면 참 좋을 텐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런 거, 레이저로 없앨 수 있지 않아요?"라는 식의 질문을 또 한다. 그럼 난 또 거기에 이게 돌 지나서 손톱 만하게 생겼고, 성인이 되면 없어질 수 있다고 해서 놔뒀는데 완전히 없어지지는 않고 옅게 흔적이 남았다, 라고 에피소드를 들려준다. 아무튼 그런 귀찮음을 그만 겪고자 혈관종을 없애기로 한 것이다.
지도에는 분명 정류장 근처인 것으로 나와 있는데 아무리 찾아도 피부과가 보이지 않았다. 한참 위쪽까지 거슬러 올라가다가 전화를 걸었다. 병원을 못 찾아서 전화했다고 말하자 직원이 늘 있는 일이라는 식으로 내 위치부터 물었다. 내 위치를 말하자, 직원은
"그 아래 스킨푸드 보이시죠? 그 사이 골목으로 들어오셔서 좌측에 있어요."
라고 병원위치를 알려주었다. 분명 지나오며 살핀 곳인데 왜 못 봤을까, 하며 난 다시 발걸음을 돌렸다.
직원이 설명해 준 골목에 들어서야 난 내가 병원을 찾지 못한 이유를 알았다. 건물이 구식이라 피부과가 있을 거라곤 생각지도 않았던 곳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상상한 피부과가 아니었다. 난 홈페이지에서 본대로 핑크색에 세련된 로고가 박혀 있을 거라 예상했는데, 그곳엔 90년대식 보건소 느낌의 건물에 낡은 파란 간판이 붙어 있었다. 대로변 건물들보다 스무 살은 많은 듯한 건물이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게 나을 것 같다는 마음의 소리가 들렸지만, 이왕 온 김에 상담이라도 받아봐야겠다는 생각으로 들어갔다. 출입문 정면으로 데스크가 보이고, 양쪽에는 고객을 위한 대기의자가 있었다. 역시 내 예상과는 달랐다. 병원이라기보다는 은행 고객 대기실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지금이라도 나갈까, 하는 생각이 막 들었을 때 데스크에 있는 직원이 말을 걸었다.
직원 - 예약 하셨어요?
무한 - 아뇨.
직원 - 처음 오셨어요?
무한 - 네.
직원 - 이거 작성해 주시고요, 잠시만 앉아서 기다려 주세요.
무한 - 네.
그 '잠시만'이 50분 일 줄이야. 꽤 오래 기다렸지만 난 다른 고객들을 관찰하느라 시간가는 줄 몰랐다. 나 외엔 대부분 50대 이상(어쩌면 60대 이상)의 고객이었다. 데스크 앞에는 '점빼기 천원'이라는 글자가 크게 적혀 있었는데, 다들 그 '천원 점빼기'를 목적으로 오신 것 같았다.
할아버지 - 얼굴에 있는 거 다 빼려고.
직원 - 너무 많아서 다는 위험하세요.
할아버지 - 안 돼? 그럼 어떡해?
직원 - 오늘 반 빼고, 다음에 반 빼세요.
할아버지 - 다음에 또 와?
직원 - 네. 오늘 다는 못 빼세요.
할아버지 - 여기 손에 있는 건?
직원 - 그것도 다음에 빼세요.
할아버지는 실망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오늘 뺄 부분'을 고르셨다. 부부가 함께 오신 어르신 커플도 있었다. 할아버지께서 먼저 시술을 받고 나오시자, 할머니께서 외투를 건네며 물으셨다.
할머니 - 아퍼?
할아버지 - 어.
어르신 고객이 많아서인지 데스크에 있는 직원은 모든 대화를 큰 소리로 했다. 소심한 아주머니 한 분이 같은 질문을 계속 하다가 직원에게 혼이 나기도 했다.
아주머니 - 저기 그러니까 2월 3일에….
직원 - 그 날은 예약이 다 차서 안 되고요, 그 다음 주로 하셔야 해요.
아주머니 - 그러니까 다음 주가 2월 3일인데….
직원 - 아뇨. 2월 3일 다음 주요.
아주머니 - 이거 금방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직원 - 예약이 다 찼다고요! (달력을 내밀며)2월 3일 다음 주로 정하세요!
그러는 와중에도 나처럼 병원을 못 찾는 사람들의 전화는 계속 걸려왔다.
"스킨푸드 보이세요? 그 골목으로 들어오셔서 좌측에 있어요."
병원 문을 열고 들어오는 고객들은 모두 어르신들이었다.
내 차례가 되었다. 진료실로 들어가라는 말에 우측으로 난 복도를 향했다. 똑같이 생긴 고만고만한 방들인데다가 팻말이 작아 한 번에 찾기가 어려웠다.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가 된 기분으로 잠시 주춤하고 있는데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오른쪽이요!"
데스크의 무서운 직원이 지른 소리였다. 진료실 문을 열었다. 아파트 경비실만한 작은 공간에 책상 하나가 있고, 맞은편에 잔뜩 움츠린 듯한 모양으로 의사가 앉아 있었다.
무한 - 안녕하세요.
의사 - 네, 앉으세요.
무한 - 혈관종 때문에 왔는데요.
의사 - 저희는 혈관 레이저가 없는데….
무한 - …….
의사 - …….
잠깐 동안 우린 멍하게 앉아 서로를 쳐다봤다. 그때 갑자기 무슨 생각에서 그랬는지, 난 충동적으로 점을 빼겠다는 얘기를 했다.
무한 - 그럼, 점을 좀….
의사 - 고혈압이나 당뇨 있으세요?
무한 - 아뇨.
의사 - 드시고 계신 약도 없으시고요?
무한 - 네.
의사 - 점은 처음 빼시는 건가요?
무한 - 네.
의사 - 나가서 조금 기다리시면, 마취크림 발라드릴 거예요.
무한 - 네.
다시 대기실로 나와서는 뭔가 큰일을 저지른 듯한 느낌이 들어 공쥬님(여자친구)에게 일단 보고를 했다. 다행히 긍정적 반응이었다. 공쥬님은 내 오른쪽 구레나룻 근처에 있는 점은, 크기가 좀 있는 까닭에 두 번 정도에 나눠서 빼게 될 거라고 했다. 공쥬님이 점빼기 천원이라고 해 놓고 크기에 따라, 혹은 리터치 여부에 따라 가격을 더 받는 곳도 있다며 물어보라고 했는데, 난 여린마음동호회 회장이라 물어보진 못했다. 그런 거 물어보면 왠지 지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마취크림을 발라준다기에, 난 가운을 입고 베드에 누울 거라 생각했다. 평소 듣고 본 대로라면 관리사가 클렌징을 해주고 마취크림을 바른 뒤 시술실로 향해야 했다. 하지만 데스크의 직원은 날 부르더니, 면봉에 뭘 발라 내 얼굴에 찍기 시작했다.
'점 갯수를 세는 건가?'
라고 생각했지만, 오해였다. 그게 마취크림을 바르는 것이었다. 직원은 왼손으론 전화기를 붙들고 통화를 하며 오른손으로 내 얼굴에 마취크림을 찍어 바르고 있었다.
'수화기 내려놓고 내 점에 집중해! 좀 더 성의 있게 발라줘야지!'
라고 외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역시 여린마음동호회 회장이니까. 통화를 하다 잠시 멈춘 직원이 내게 무슨 말을 했다.
직원 - @%^@#$%실 거예요?
무한 - 네?
직원 - 귀에 있는 점도 빼실 거냐고요.
무한 - 아….
내 귀에 점이 있다는 사실을 난 그날 처음 알았다. 얼굴에 있는 점 역시 한 다섯 개 정도 일 줄 알았는데, 열 개가 넘게 있었다.
"아뇨. 귀에 있는 건 안 뺄래요. 그건 제가 아끼는 점이라서요."
별로 웃긴 얘기도 아니었는데 직원이 빵 터졌다. 마취크림을 다 바른 나는 대기 의자로 돌아가서 앉아있었다. 직원은 내 얘기가 한참을 생각해도 웃긴지 또래의 관리사가 데스크로 나왔을 때에도 나를 가리키며 속닥거렸다.
그 후 한 시간쯤을 기다렸다. 흥미로운 고객이 몇 명 더 왔는데, 이건 나중에 다른 이야기에서 소개할 예정이니 접어두자. 여하튼 그렇게 기다리다 차례가 되어 시술실에 들어갔다.
시술실 문을 열자, 매캐하면서 역한 냄새가 확 풍겼다. 오징어 굽는 냄새에 간디(애완견) 발 냄새를 섞어 놓은 듯한 농도 짙은 냄새였다. 워낙 많은 사람이 점을 빼는데다가 환기도 잘 안 되는 까닭에 좁은 시술실에 냄새가 꽉 차 있었다. 점을 뺄 때 아플 거라는 염려 보다는 역한 냄새 때문에 공포가 밀려왔다. 이 냄새를 하루 종일 맡아야 하는 의사의 고충이 피부로 느껴졌다.
아니, 사실 피부로 느껴진 건 점빼기의 고통이다. 마취크림을 발랐지만 생각보다 많이 아팠다. 얼굴에 난 뾰루지를 면봉으로 눌러 짤 때의 통증이 시술부위에 전해졌다. 눈가에 있는 점을 뺄 때는 혹시 레이저 설정이 잘못 되어 뼈를 건드리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시술을 마치고 대기실로 걸어 나오는데, 점을 뺀 부위가 얼얼하고 쓰라렸다.
데스크에 있는 직원이 이름을 불러서 가니, 재생을 돕는다는 테이프를 얼굴에 붙여줬다. 마취크림을 바를 때와 달리 성의 있게 붙여줬다. 대충 한 번 읽어보면 알 것 같은 주의사항도 밑줄을 그어가며 열심히 설명해 줬다.
'후후… 아까 한 번 빵 터지더니 친절해 지셨군.'
이라고 생각했으나, 그건 내 착각이었다. 설명을 끝마친 직원은, 점빼기는 시술보다 관리가 중요하다며 재생크림을 꼭 발라줘야 한다고 했다. 그러곤 병원에서 재생크림 판매 중인데 구입 할 거냐고 덧붙여 물었다.
"아뇨. 집에 있어요."
집에 재생크림 같은 게 있을 리 없지만 뭔가 당한다는 느낌이 들어 사양했다. 거절과 동시에 직원은 아까의 태도로 돌변했다.
"만 이천 원 나오셨네요."
왜 만 이천 원을 높이냐고 물어볼까 하다가, 조용히 계산을 하고 나왔다.
동네로 돌아와 약굴엘 갔다. 재생 테이프가 하얗게 변하면 새로 붙여야 한다기에, 집에 들어가는 길에 하나 사려고 들른 것이다.
무한 - 듀오덤 있나요?
약사 - 듀오덤이요, 어, 네. 있어요.
무한 - 어디 있어요?
약사 - 드려요?
무한 - 네.
약사의 행동이 수상했다. 바가지를 씌우는 게 익숙지 않은 사람이 바가지를 씌우려고 할 때 보이는 행동을 했다.
무한 - 얼마예요?
약사 - 이거, 잘라서 나온 것도 있거든요.
무한 - 이건 얼마고, 잘라진 건 얼만데요?
약사 - 둘 다 가격은 같아요.
무한 - 얼만데요?
약사 - 오천 원이요.
잠깐이었지만 치열한 두뇌싸움이 벌어져다.
'아무래도 잘라진 것은 그 양이 더 적을 것이고,
약사 아주머니가 처음 내민 게 '듀오덤'이란 마크가 선명해.
이게 진품이야! 아주머닌 지금 양 적은 유사 상품을 팔려고 하고 있어!'
약사가 처음 내민 제품을 선택했다. 분명 잘 한 선택이라 생각했는데, 봉지에 담아주며 허둥대는 약사의 모습에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집에 돌아와 '듀오덤 가격'을 검색했다. 보통 삼천오백 원쯤 하는 제품이라는 글을 볼 수 있었다. 졌다.
공쥬님에게 점 뺀 곳을 보여주니 오른쪽 구레나룻 근처의 점을 한 번에 뺀 거냐며 놀란다. 그런 점은 나눠서 빼야 흉터가 안 남는 법인데, 내가 간 곳은 말 그대로 '빼는 것'에만 의의를 둔 것 같다고 한다. 점 뺀 곳에 바르는 연고도 사다 주었다. 그나저나 점 뺀 곳에 흉터가 남지 않아야 할 텐데….
▲ 입소문은, 가격이 싸기만 해도 날 수 있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위추(위로추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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