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연애매뉴얼(연재완료)/솔로부대탈출매뉴얼(시즌3)

여자의 밥차, 커피셔틀이 되는 건 지겹다는 김형에게

by 무한 2012. 11. 13.
여자의 밥차, 커피셔틀이 되는 건 지겹다는 김형에게
김형, 내가 초등학교 5학년 꼬마에게 영어를 가르쳐 준 적이 있거든. 요즘 애들은 영어를 일찍부터 배우기 때문에, 초등학교 5학년 수준의 영어는 우리가 중학교 1학년 때 배우던 것과 비슷해. 만나서 반갑다, 날씨가 어떠냐 뭐 그런 거 있잖아 왜. 그런데 걔는 발음기호에 대한 부분을 명확하게 익혀두질 않아서 '수요일'을 '웨드네스데이'라고 읽는 수준이었어.

기초가 부족하니 학교에서 진도를 나가도 얘한텐 턱턱 막히는 거지. '과학'을 그냥 읽으면 '스키엔스'인데 왜 '사이언스'라고 읽냐, 그런 걸 묻더라고. 그래서 발음기호가 따로 있다는 걸 알려주고, 발음기호 읽는 법도 알려줬어. 그랬더니 이런 얘길 하더라고.

"그럼 처음 보는 단어들은 다 발음기호 찾아서 봐야 해요?"


김형도 그랬겠지만, 우리가 영어 공부할 때 모든 단어의 발음기호를 다 찾아서 읽는 건 아니잖아. 그래서 나도 그런 식으로 설명을 해 줬어. 'Card'와 'Hard'처럼 맞아 떨어지는 게 있고, 분명 철자가 같은데 다르게 소리가 나는 것도 있다고. 참고서나 영어 단어집에 친절하게 발음기호가 나와 있으니, 그걸 보고 익혀두면 될 거라고 했지.


1. 그게 정말 희생일까?
 

그런데 걘 뭔갈 배우려는 마음이 없었어. 친구들처럼 잘하고 싶어 하긴 했는데, 발음기호를 가르쳐 줘도 그 자리에서만 따라하지 돌아서고 나면 잊어버리더라고. 왜 우리가 음악시간에 빠르기 말 배울 때, "안단테는 느리게, 알레그로는 빠르게." 이걸 열 번 배워도 스스로 외워두지 않으면 결국 잊고 말잖아. "아, 그거 들어본 적 있는데…." 수준에만 머물고 말이야. 영어에 대한 걔의 태도가 딱 그랬어. 가르쳐 줄 땐 잘 따라 하는데, 며칠 지나면 백지로 되돌아 가 있더라고.

탓은 참 잘 하더라.

"다른 애들처럼 처음부터 학원을 다니지 않아서 내가 영어를 못 하는 거다."
"과외를 해도 실력이 늘질 않는다."
"난 지금 발음기호도 잘 모르는데, 언제 유창하게 말하는 친구들을 따라 잡냐."


김형이 한 얘기랑 좀 비슷하지 않아?

"고등학교 졸업 이후 여자를 만날 환경이 아니었다."
"여자가 없는 곳에서 지낸 까닭에 여자가 하는 말을 이해 못 하겠다."
"난 빚도 있는데, 이런 나를 이해해줄 여자는 없을 것 같다."



김형은 노력도 좀 했다며 이런 얘기도 했지?

"그래도 희망을 가지고자
그간 관심 있던 여자들이 뭘 사달라고 하면 사준 적도 많고,
내가 갖다 바친 적도 많다. 하지만 죄다 결과는 좋지 않았다."



간단히 말할게. 김형이 경청을 할 줄 모른다고 치자. 상대가 얘기하는 중에 아는 게 나오면 말 자르고 끼어들거나, 어떻게든 한 번 상대를 웃기려고 쓸 데 없는 얘기를 길게 늘어놓는 타입이야. 그럼 그 부분을 다듬어야 하잖아. 근데 김형은 밥이랑 선물 사 주곤 노력했다고 말하네? 김밥으로 끼니를 때울 각오 하고 사 준 선물이니 그건 엄청난 희생이라고? 김형, 그게 희생이면 과천 경마장이나 정선 카지노에는 극한의 희생을 보여주는 성인(聖人)들이 가득하겠네? 거기엔 집이나 차 팔아서, 또는 사채까지 써가며 자금을 마련해 온 사람들도 있잖아.

김형이 한 게 정말 희생이 맞을까? 베팅이 아니고?


2. 오늘은 애원을, 내일은 분노를


내가 매뉴얼을 발행하는 건, 연애와 관련해 찾아올 수 있는 어려움을 보다 현명하게 해결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해서야. 영어공부에 빗대서 표현하면 '어떤 경우에 The를 붙이고, 어느 때 안 붙이나.' 같은 걸 말하는 것과 비슷하지. 공부를 하는 사람들은 저런 걸 궁금해 하거든.
 
그런데 김형의 태도는

"난 이러이러해서 영어를 잘 못한다. 하지만 영어를 잘 하고 싶다.
나름 한다고 해봐도 안 되는데, 방법이 있으면 제시해 봐라.
단, 열심히 하라는 얘기나 기초부터 공부하라는 얘기는 사양한다."



라는 것과 비슷해. "저런 건 와 닿지도 않고, 내가 영어를 잘 할 수 있는지가 궁금하다."라고만 말하지. 이미 스스로는 "난 영어를 잘 못 할 것 같다."는 주장을 세워둔 채로 말이야. 

거기에 대고 무슨 말을 해. 난 다정한 타입이 아니라서 저런 얘기를 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냥 냅둬. 그 사람은 그냥 화가 난 거거든. 애초에 무슨 방법 같은 건 알고 싶지도 않은 사람이야. 신세한탄을 쭉 늘어놓다가, 누군가 그 이야기에 마음이 동해 위로를 하려 들면, 그런 얘기는 백 번도 넘게 들었다며 화만 내지. 봐봐. 마음씨 좋은 독자들이 김형의 글에 답글을 달았다가 김형의 비아냥만 경험했잖아.

솔직히 난 <지킬박사와 하이드> 보는 줄 알았어. 같은 사람이 단 댓글이 맞나 관리자 페이지 들어가서 IP확인까지 했다니까?(12일에 단 건 IP 앞자리만 같긴 하던데, 닉네임을 대문자 부분까지 같게 만들며 사칭할 사람은 없으니까 같은 사람이라 생각할게.) 김형 자신이 단 댓글들을 천천히 한 번 봐봐. 댓글이 전부 감정의 극단까지 가 있어. 10일의 댓글은 분노에 차 있고, 11일의 댓글은 공손하며, 12일의 댓글은 비웃음을 머금고 있지.

혹시 김형이 연애에서 저런 모습을 보이고 있다면, 그것이야 말로 '관계 단절'을 부르는 가장 확실한 원인이야. 상대에겐 저 모습이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으로 보이거든. 어제는 애원하고, 오늘은 화를 내고, 내일은 비아냥거린다면 말 다 한 거지. 모든 걸 다 줄 수 있다며 다가오던 상대가 갑자기 태도를 바꿔 날 비웃는다고 생각해봐. 끔찍하지 않아?

미리 사과할게. 김형이 혹시 저런 모습을 가지고 있다면, 분명 나에게 화를 낼 거거든. 오늘 글을 읽고 반성한다는 댓글을 남길 수도 있지만, 다음 날이면 "나에 대해서 뭘 안다고 그런 얘기를 하나?"고 따질 수 있어. 그 다음날엔 자신과 상관없는 글에도 조롱을 쏟아낼 수 있고 말야. 쉽게 감정의 극단을 오가는 사람들은 대부분 그렇더라고. 그러니까 '온화한 김형'이 아닌 '분노의 김형'이 된 날에도 나 너무 미워하진 않기. 약속. 


3. 날 이해해줄 여자


연애의 시작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어. 하나는 서로 알아가다가 좋아져서 사귀는 거고, 다른 하나는 사귀고 난 뒤 서로를 알아가기 시작하는 거지. 김형은

'이런 날 이해해줄 여자'


를 찾는다고 했지? 그럼 고민할 필요도 없이 전자의 길을 가야해. 상대가 '김형의 알맹이까지 다 보여줘도 피하지 않을 사람'이라는 걸 확인해야 그때 연애를 할 수 있는 거라고.

그런데 김형은 어떻게 연애에 임하고 있나를 돌아봐봐. 상대에게 식당에서 밥 사주고 김형은 삼각김밥으로 끼니를 때운다고? 밥차와 커피셔틀의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다고? 그건 후자의 길을 택해 '사귀는 것'에 매달릴 때에나 하는 일이야. 김형은 스스로를 포장만 하고 있잖아.

후자의 길을 택했을 때 가장 큰 위험이 뭔지 알아? 상대의 어장에 들어갈 수 있다는 거야. 김형의 맹목적인 호의를 거절하지 않는 사람들은, 대부분 김형을 발라먹을 생각을 가지고 있는 치들이거든. 개념이 서 있는 사람이라면, 마음이 없는 경우 불편해서라도 거절을 할 거야. 마음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김형의 호의를 계속 받아들인다는 건 '무개념'이거나 그 호의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지.

악순환이 계속 되는 거야. 김형은 거절하는 사람들은 제쳐두고, 계속 호의를 받는 사람들에게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해 들이댈 테니까. 상대는 김형을 자신의 '팬클럽'이라 생각하며 조공 받듯 호의를 받고, 김형은 그 모습을 보며 언젠간 이 노력(?)이 등가교환 될 수 있겠다 착각하지. 김형 자신이 상대의 밥차와 커피셔틀이었을 뿐이라는 걸 깨달았을 땐, 하아- 때가 너무 늦고만 거지.

매뉴얼을 통해, 왜 고백을 '상대와 10번 이상 식사를 했을 때'가 아닌 '상대와 30분 이상의 통화를 할 수 있을 때' 하라고 했나 곰곰이 생각해 봐봐. 마음이 없어도 누가 밥 산다면 나가서 먹을 수 있어. 회식 가는 기분으로 갈 수 있다니까? 난 남자지만, 별로 안 친한 친구가 저녁 같이 먹자고, 참치회 사겠다면 하면 고민 없이 나가. 그런데 그 친구와 30분 이상 통화는 못해. 그건 식사보다 어렵거든. 김형도 알겠지만, 마음이 없으면 할 말도 없는 법이야.

떨려서 할 말이 없을 수 있는 거 아니냐고? 그거랑 달라. 둘 사이엔 '끊고 싶어 한다'는 명확한 차이가 있어.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모를 경우엔 침묵의 시간이 있더라도 지루해 하거나 끊으려고 하진 않거든. 그런데 마음이 없기에 할 말도 없을 때에는 빨리 끊고 싶어 하지. 카톡만 해도 쉽게 구별이 가능해. 상대에겐 존중하는 마음이 없으니 뭘 물어도 대수롭지 않게 무시하거나, 심심할 때에만 대화를 받아주지.

낚시 좋아해? 낚시 할 때 가물치를 잡으려면 미끼로 지렁이나 미꾸라지를 써야 하거든. 걔가 육식어종이라 떡밥은 쳐다도 안 봐. 떡밥에 반응하는 건 붕어나 잉어같은 치들이지. 그런데 지금 김형은 가물치를 잡고 싶다면서 떡밥만 매달아 놓고 있는 모양이거든. 그러다가 붕어나 잉어만 입질을 하자,

"여자들은 다 여우다. 남자 갖고 놀 생각밖에 하지 않아."


라며 혼자 화를 내고 있어. 게다가 "이 떡밥을 사려고 무리한 까닭에 난 삼각김밥으로 끼니를 때우고 있다."라며 신세한탄까지 해. 뭐가 문제인지 이제 좀 보이지 않아?


김형은 내가 지난 글에 "자신을 응원하지 않는 사람을 응원하는 것은 힘들다."라고 적은 부분을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그랬지?

가정해 보자. 김형이 꼬마 둘에게 영어를 가르치는데, 둘 다 수준은 비슷해. 그런데 A라는 꼬마는 위에서 말한 것처럼 신세한탄만 늘어놓으며 제자리걸음이고, B라는 꼬마는 발음기호 다 외우고 문법 문제를 질문하고 있어. 둘 다 아직 영어를 잘하는 건 아니지만 분명 차이가 있잖아. 그 얘기야. 의욕을 가진 B에겐 문법책이라도 한 권 선물해 주고 싶은데, 불평을 늘어놓으며 누가 다 떠먹여 주기만 바라는 A는 집어 치우고 싶어져. (물론, A네 엄마나 아빠라면 그렇지 않겠지. 자기 자식이니까. 근데 세상 사람들이 다 A의 부모가 아니잖아.)

자신의 삶이 불행으로 점철되어 있다고 소개하면서, 취미생활과 운동에도 흥미가 없다는 남자를 누가 만나고 싶겠어? 그런 것도 다 이해해 줄 수 있는 여자를 만나고 싶다는 건, 그냥 부모의 마음으로 자신을 보살펴 줄 또 다른 보호자를 찾고 있다는 얘기잖아. 설마 연애가 시궁창 같은 현실에서 김형을 구원해 줄 거라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니지? 그런 생각으로 연애를 시작한 대부분의 사람이 '아, 이건 그냥 내가 상대를 시궁창으로 끌고 들어온 거였구나.'라고 깨달았다는 걸 적어둘게.

자신을 응원하는 사람은, 세상이 그래도 좀 살만한 곳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야. 스스로 찾아낸 즐거움을 누군가와 나눌 줄 아는 사람이고. 그런데 자신을 응원하지 않는 사람은 불평불만과 절망 말고는 상대에게 줄 게 없는 사람이야. 누군가가 자신에게 즐거움을 주길 기대만 하고 있는 사람이지.

난 도서관을 추천할게. 나도 종종 일상이 마른 커피자국 같이 느껴지는 날이 있는데, 그럴 때면 도서관에 가거든. 날 살찌워줄 다양한 책들과, 책을 읽으며 몰입 중인 사람들을 보면 막 흥분되는데, 내가 이상한 건가? 여하튼 한 번에 다섯 권밖에 빌릴 수 없다는 게 야속할 정도로 독서욕이 왕성해져. 나름 엄격한 기준으로 선별해 빌려 온 책을 펼치면, 내게 막 도착한 편지를 뜯어 읽는 것처럼 설레기도 하고.(그 다음 날부터 반납일이 지날 때까지 책을 방치해 둔다는 건 비밀.) 웃으며 할 수 있는 일을 먼저 찾아봐. 연애가 아니라, 바로 그게 김형을 구원해 줄 거야. 그 구원의 기쁨을 이성과 나누면, 그게 바로 연애지.



"극빈 상태에 이르면 자기가 먼저 자신을 모욕하려 드니까요." <죄와 벌> 중에서




<연관글>

연애를 처음하는 남자가 저지르는 안타까운 일들
착한 성격 때문에 연애하기 힘들다는 남자, 정말일까?
금사빠 남자가 여자를 좋아할 때 벌어지는 일들
전 여자친구가 망나니 같은 남자와 사귄다면?
여자가 이별을 결심하게 만드는 남자의 특징

<추천글>

유부남과 '진짜사랑'한다던 동네 누나
엄마가 신뢰하는 박사님과 냉장고 이야기
공원에서 돈 뺏긴 동생을 위한 형의 복수
새벽 5시, 여자에게 "나야..."라는 전화를 받다
컴팩트 디카를 산 사람들이 DSLR로 가는 이유

카카오뷰에서 받아보는 노멀로그 새 글과 연관 글! "여기"를 눌러주세요.

 새 글과 연관 글을 편하게 받아보실 수 있습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