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변의 아는 여자를 멸종시키는 남자, 문제는?
스마트폰을 처음 사용하는 지인들이 있으면 난 그들에게 키보드 어플을 깔아준다. 전에 사용하던 폰과 같은 제조사의 제품이면 문자를 입력하는 데 문제가 없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바뀐 키보드에 적응하느라 한동안 고생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키보드 어플을 깔고 전에 사용하던 자판으로 설정해 두기만 하면, 손에 익은 방식대로 폰을 사용할 수 있다.
주변의 아는 여자를 멸종시키는 남자는, 키보드에 적응을 못 하고 있는 사람들과 같다. 그들은 자신이 가진 호감과 열정을 상대에게 제대로 전달하지 못한다. 꼭 한 박자씩 늦어 상대를 지루하게 만드는 경우가 있고, 표현에 오타를 내 놓고도 상대가 알아서 잘 해석해 주길 바라며 무작정 전송만 하는 경우가 있다. 또 차근차근 이끌어가야 할 대화를 생략한 채 '본론'만 던지는 경우도 있다.
오늘은 그들에게 키보드 어플을 깔아주는 마음으로 이야기를 좀 해볼까 한다. 그들이 가진 호감과 열정 자체엔 아무 문제가 없기에, 표현의 순서와 방법만 좀 손보면 오늘 저녁에라도 여자사람과 함께 파르페를 먹으며 행복한 저녁시간을 보낼 수 있다. 여자사람과 파르페 먹으며 보드 타러 가자는 약속 잡아 봤는가? 그러고 싶다면 아래에서 말하는 사항들을 곰곰이 생각해 보며, 순서와 방법을 어떻게 바꿔야 하는지 살펴보길 바란다. 출발해 보자.
자신에 대한 상대방의 호감을 확인해야만 한 걸음 다가가는 대원들이 있다. 고참에게 허락을 받아야만 뭔가를 할 수 있는 군대도 아닌데, 그들은 끊임없이 상대에게 묻는다.
"이번 주말에 바쁘신가요?"
"지은씨는 절 이성으로 생각하시나요?"
일단 두드려 보고, 안전하다는 것이 확인되면 그 때 한 발 앞으로 내딛겠다는 태도다. 어쩌면 좋을까. '경쟁자'라고 할 수 있는 남들은 이미 다리를 다 건너 상대의 코앞까지 가 있는데.
상대를 나에게 초대했다고 생각하자. 그대는 집 주인이고, 상대는 손님이다. 손님이 왔으면 앉으라는 말도 하고, 과일이나 음료도 알아서 대접해야 하는 것 아닌가. 상대가 뭔갈 요구하기 전까지 멀뚱하게 서있기만 하면, 상대는 나가버리고 만다. 현관에 서서 한참 안부인사만 나누다 상대가 나가려고 하니 그제야 "들어올래?"라고 묻는 남자. 지루하다.
내 친구 중에 오지랖 넓은 녀석이 하나 있는데, 언젠가 녀석의 회사에서 에어컨을 시중가의 절반 가격으로 판매한 적이 있다. 녀석은 그 '빅뉴스'를 지인들에게 알리며 서둘러 에어컨을 구입하라고 권했다. 난 그 얘기를 듣고 같은 모델의 인터넷쇼핑몰 판매가를 찾아보았는데, 인터넷쇼핑몰 판매가보다도 40% 정도 저렴한 가격이었다.
그런데 지인의 말을 듣고 구입한 사람은 몇 명 되지 않았다. 대부분 구입계획이 없다고 거절하거나, 너무 저렴한 까닭에 뭔가 문제가 있는 것 아니냐며 거절하거나, 친구가 별다른 설명 없이 무작정 구입하라고 부채질을 하니 그에 대한 반작용으로 위축되어 거절했다.
친구가 그 소란을 떤 지 며칠이 지났을 때였다. 그 가격이 회사의 착오로 잘못 설정된 것이라는 게 밝혀져 판매가가 정정되었다. 단, 이미 구입한 사람에 대해서는 회사에서 차액을 지불해, 추가금을 내지 않아도 좋다고 했다. 친구가 자신의 제안을 거절했던 지인들을 비웃으며 내게 말했다.
민주누나가 예전 가격으로 살 수 있냐고 물어보던데, 끝난 거지.
그러게 내가 말했을 때 미리미리 샀어야지. 쯧쯧."
만약 상황이 달라졌어도 친구가 저런 얘기를 할 수 있었을까? 회사에서 양해를 구하며 추가금을 내 달라고 했다거나, 그 에어컨이 리퍼상품이었다면? 그런 가정을 하지 않더라도, 친구는 지인에게 불만을 들었다. (친구가 에어컨이 싸게 나왔다는 소식을 전하는 것에 흥분해 설치비 얘기를 하지 않았던 까닭에)설치비도 있는 거였냐고 묻는 지인이 있었고, 배송이 왜 이렇게 늦냐고 친구에게 항의하는 지인도 있었다.
연애에서 열정을 앞세워 상대에게 다가가는 대원들이 저 친구와 비슷한 모습을 보인다. 그들은 '사귀는 것'이 가장 급선무인 까닭에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상대에게 알리는 것에 소홀하고, 일부는 무작정 '사귀면 다 맞춰주겠다.'는 얘기를 하며 들이대기도 한다. 아무 증거도 내보이지 않은 채 일단 사귀겠다는 판정부터 해달라고 조르는 격이다. 상대가 그 얘기라도 믿어보고 싶을 정도로 곤란한 상황에 있거나, 그것 말고는 대안이 없는 처지에 놓인 여자가 아니라면, 대부분 'NO'라는 판정을 내린다는 걸 잊지 말자.
'이심전심'이라는 말의 유래는 다음과 같다.
제자들은 그 뜻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서 모두들 아무 말 없이 잠자코 있었는데,
그 중 가섭만이 그 뜻을 깨닫고 미소를 지어보였다.
이것이 바로 '이심전심'이며 다른 말로 '염화미소'라고도 한다.
저 일이 지금 막 벌어지고 있으며, 우리가 그 옆을 지나가고 있다고 가정해 보자. 한 무리의 사람들이 연못 옆에 모여 있는데, 그 중 누군가가 연꽃 한 송이를 들어 올린다. 그걸 보고 그대나 내가 웃는다면, 그건 이심전심이 아니라 그냥 웃겨서 웃는 거다.
라는 생각을 하며 말이다. 가섭은 석가모니의 십대 제자 중 한 사람이다. 설법을 하루 이틀 듣다가 미소를 지은 게 아니란 얘기다. 소개팅 이후 이제 세 번쯤 만났거나, 모임에서 몇 번 본 것뿐인데 상대에게 '이심전심'을 요구하는 대원들이 있어 내가 담배를 못 끊고 있다.
전 그냥 같이 있기만 해도 좋은데, 그녀는 제 마음 같지 않은가 봐요."
그건 그대 생각이고, 만나서 그렇게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있으면 상대는 불편하다니까? 이심전심은 서로 눈빛만 봐도 알 수 있을 때나 찾자. 지금 그대가 말하는 건 '이심전심'이 아니라, 그냥 알아서 저절로 다 잘 되길 바라는 '욕심'이다. 상대에게 "너는 왜 내 판타지 속의 모습하고 다른 거야?" 라고 물으면, 놀라서 도망가는 게 당연한 것 아닐까?
내게 도착한 사연에서
라는 문장을 발견하는 나는 담배를 한 개비 태운다. 저 얘기를 하는 대원은 자신이 전력투구를 한다는 것에만 관심이 있는 거다. 외로움이나 심심함에 복수하기 위한 고백이며, 스스로도 가능성이 별로 없다는 걸 알면서 도박처럼 일단 배팅하는 고백이다. 그걸 상대가 모를까?
이에 대해서는 '중거리 슛만 날리는 남자'에 비교해 설명한 [좋은 오빠동생 사이, 연인으로 발전할 가능성은?]이라는 매뉴얼이 있으니 참고하길 바란다. 해당 매뉴얼에
- 자기 진영으로 돌아와야 할 사례들
- 쉬는 시간을 좀 가져야 할 사례들
이라고 정리가 되어 있다. 알고 지내는 모든 여자에게 중거리 슛을 날리다간, '여자네트워크'에 '찝쩍남'으로 등록되는 무서운 일이 벌어질 수 있다는 것도 기억해 두길 바란다.
'불법주차 적반하장'이라는 게시물을 본 적 있는가? 한 네티즌이 자신이 사는 아파트 장애인 주차구역에 상습적으로 주차를 하는 어느 사람의 차량을 신고했다. 장애인 소유의 차량이 아니었으며, 그쪽이 아파트 입구와 가깝기에 그곳에 주차한 차량이었다. 구청에 신고를 하고 며칠이 지나 엘리베이터에 아래와 같은 글이 붙어 있었다.(내용은 요약본이다.)
계도를 할 수도 있었을 텐데, 신고를 하다니 상식이 결여된 것 같습니다.
그런 사람이 이웃이라는 것이 화가 납니다.
그 사람을 보실 경우 어떤 생각으로 그런 짓을 하는지 물어보시기 바랍니다.
문제를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저런 반응까지도 가능한 것이다. 자신이 무슨 짓을 했든 결과적으론 손해를 봤으니 피해자라는 반응. 저런 반응을 연애에서 보이는 대원들이 있다. 화가 풀릴 때까지 관계를 짓밟은 후에야 떠나는 대원들. 그게 한 번이면 그나마 괜찮을 텐데, 안타깝게도 많은 대원들이 다시 돌아와 관계를 초토화 시킨다. 대표적인 사례는 아래와 같다.
그게 또 가능성인 줄 알고 들이댔다가, 아닌 것을 깨닫곤 다시 짓밟는 대원.
2. 사과하는 척 다가와선 예전처럼 행동하다 짓밟는 대원.
3. 가능성이 전혀 없다는 걸 확인하려 떠본 후 짓밟는 대원.
4. 이제 대답도 안 하는 거냐며 혼자 피해자 코스프레 하며 짓밟는 대원.
5. 적반하장으로, 자신이 용서하겠다며 다가와서 짓밟는 대원.
6. 친구로라도 지냈으면 좋겠다고 슬그머니 다시 와선,
소개팅 시켜달라고 조르다가 안 시켜주니 짓밟는 대원.
상대가 이쪽을 다신 보고 싶지 않아 한다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그들은 떠난다. 차단이 되어야만 진정한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는 대원들도 있다. 그들의 특기는 '차단되었는지 확인하기'인데, 우리끼리니까 하는 얘기지만, 그들은 상대에게 차단이 되어야만 안심하는 듯한 이상한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빨리 차단당하고 싶어 안달난 사람처럼 행동한다.
어휴, 차단 안 하는 줄 알고 걱정했네. 하마터면 여기서 오래 있을 뻔 했잖아.'
속으로 저런 생각을 하고 있는 듯이 말이다.
그렇게 '아는 여자'들에게 차단을 당하다 보면, 이제 주변에 '아는 여자'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깨닫게 된다. 조급함이 찾아와 어떻게든 빨리 연애를 시작해야겠다고 생각한다. 사귈 가능성이 가장 높아 보이는 이성에게 다가간다. 그녀에게 이심전심을 기대해 본다. 통하지 않는다. 결과가 어떻든 우선 고백부터하기로 마음먹는다. 고백을 한다. 결과가 좋지 않다. 그래도 아직 차단까지 당한 것은 아니니 계속 매달린다. 차단을 당한다. '아는 여자'가 또 하나 줄어든 것이다. 빨리 연애를 시작해야 한다는 생각이 더욱 확고해진다. 사귈 가능성이 가장 높아 보이는 이성에게….
저게 바로 부킹대학에서 발표한 '아는 여자 멸종설'이다. 멸종 직후의 상황을 '아는 여자 빙하기'라고 하는데, 그 땐 자신감과 자존감 모두 얼어붙어 새로운 이성을 알게 되어도 한 박자 늦은 접근만 하게 된다.
불혹의 나이가 되어도 저걸 모르는 사람은 계속 모른다. 장애인 주차구역에 불법주차를 했던 저 사람처럼 누군가에게 화풀이 할 생각만 한다. 자 그대는, 화풀이를 할 것인가 아니면 파르페를 먹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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