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간 소개팅 감상문만 보내고 있는 지은씨에게
그간 지은씨의 사연을 다루지 않았던 건, 사연이 전부 상대에 대한 지은씨의 주관적인 '평가'였기 때문이다. A라는 남자는 이래서 마음에 안 들고, B라는 남자는 이런 부분이 별로이며, C라는 남자는 금사빠 냄새가 나더라, 식의 이야기에 난 할 말이 없었다.
이제 캐롤이 좀 들려오고 난 뒤엔 지은씨도 서른넷이 된다. 난 계사년(2013년)에 서른넷이 된 지은씨가 여전히 같은 사연을 계속 보낼까봐 겁이 난다. 뭔가 바꾸지 않으면, 지은씨는 새로운 남자를 만나 데이트를 하다가 또,
이라며 심사위원 놀이를 하고 있을 거다. 그걸 막기 위해 오늘은 지은씨를 위한 이야기를 좀 해볼까 한다. 만났던 남자가 모두 별로여서 이런 상황이 온 거라고 생각하는 지은씨에게는 이 얘기가 껄끄러울 수 있겠지만, 지은씨가 미워서, 혹은 지은씨를 탓하려고 하는 얘기는 아니라는 걸 이해해 주시길 미리 부탁드리며, 출발해 보자.
지은씨의 그 엄격한 잣대로 내 지인들을 평가하면 아래와 같은 일이 벌어진다.
산꼭대기에서 아래의 사람들을 바라보며 "저 사람들은 다 개미 같아."라는 이야기를 하는 모습이라고 할까. 사건에 직접 참여하지 않고 그저 멀리서 바라보면, 뭐든 가볍고 우스워 보일 수 있다. 알랭 드 보통의 <보다 온화하고 부드러운 성공 철학>에 나온 뉴스 이야기를 잠시 보자.
이런 태도를 내려놓지 않는다면, 누구를 만나도 불만스러울 수밖에 없다. 지은씨가 털어놓는 불만에 내가 "정말 그 사람은 개미 같군요."라고 함께 맞장구를 쳐봐야, 산에 있는 시간만 길어질 뿐이다.
만약, 운이 좋아 장점만 가득한 사람을 발견해 결혼까지 하게 되었는데, 결혼하고 나서 그 사람의 단점을 발견한다면 그땐 어떻게 할 것인가? 사람이라는 게, 무슨 강철 따위로 만들어져 절대 구부러지거나 휘지 않는 것은 아니니, 고치고 다듬고 길들여가며 만나보길 권한다.
또, 해운대 한 번 가 봤다고 부산을 전부 아는 것은 아니잖은가. 늘 얘기하듯 사람이란 누구나 그 안에 세계를 지니고 있는 법이니, 초입만 보고 전체를 짐작해 유턴하는 일은 그만두자. 적어도 달이 두 번 찰 때 까지는 그 사람을 겪어보길 바란다.
지은씨는 대단히 위험한 착각을 하고 있다.
상대가 확신을 주면, 그 때 자신도 상대에게 올인 하겠다는 얘기다. 저건 손해 보지 않는 장사를 하고 싶다는 얘기지, 연애를 하고 싶다는 얘기가 아니다. 콩깍지가 씌여 맹목적인 구애를 하는 사람이 아닌 이상, 누가 소개팅으로 몇 번 만난 여자에게 간이라도 빼 줄 것처럼 행동하겠는가?
지은씨의 행동을 좀 보자.
솔직히 말하면, 난 지은씨의 태도가 더 당황스럽다. 지은씨가 바라는 사람은 자신을 위로해 줄 수 있는 남자 아닌가. 그런데 반대로 상대가 지은씨에게 위로를 요청할 때에는
라며 어리둥절해 한다. 속으로는
라는 생각을 하며 말이다.
남자가 대체 지은씨에게 무슨 신세를 졌기에 자신의 푸념은 꾹 참고 지은씨의 푸념만 들어줘야 하며, 평가지 들고 있는 지은씨에게 좋은 점수를 받으려 노력해야 한단 말인가?
헐. 그럼 지은씨는? 이건 마치 박정현이 오디션 프로그램의 심사위원으로 나와서 참가자에게 "왜 노래 부르면서 그렇게 손을 움직이죠? 너무 산만하네요."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아님 조관우가 참가자에게 "노래를 진성으로 불러야지 왜 가성으로 불러?"라고 말하는 것과 비슷하거나.
자기가 말을 제대로 안 해놓고 상대보고 못 알아듣는다고 화를 내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지은씨에게 이런 모습이 살짝 보인다.
저 말은 '식사 하셨어요?'라는 뜻과, '메뉴가 뭐였어요?'라는 뜻으로 읽힐 수 있다. 전자의 뜻으로 이해한 상대는 "네, 밥 먹었어요."라고 대답한다. 그런데 지은씨는
라고 말한다. '동창회 사건'도 마찬가지다. 첫 만남에서 지은씨는 상대에게 "다음 주 토요일에 동창회가 있다."는 얘기를 했다. 자세히 말한 건 아니고, 일정 얘기를 하다가 지나가듯 흘린 말이었다. 그런데 상대가 그걸 기억하지 못하고 그 주 금요일에 "내일 뭐해요?"라고 묻자, 지은씨는 속으로 화를 냈다.
짜증이 났으면 그걸 상대에게 전하자. "전에 동창회 간다고 말씀드렸는데 설마 기억 못하시는 건가요? 벌점 이 점 드립니다. 십 점 모이면 영화 쏘셔야 해요." 정도로 가볍게 말할 수 있는 것 아닌가. 그런데 지은씨는 "내일 동창회 가요."라고 아무렇지 않게 대답해 놓고, 속으로만 분노를 축적해 간다. 상대에게 긴장감도 불어넣지도 못하고, 본인은 본인대로 스트레스만 받게 되는 최악의 방법이다.
게다가 자신의 진심을 숨긴 채 괜찮은 척 포장하는 것은 상대에게 '변덕'으로 보일 수 있다. 지은씨가 사연에 적었던 '속마음'들을 잠시 살펴보자.
호감을 표시하는 사람에게 심통을 부리면 답이 없다. 그리고 이건 우리끼리니까 하는 얘기지만,
라는 얘기는, 예의상 묻는 거지 일상을 캐묻는 게 아니다. 지은씨는 상대가 저런 모습을 보이면 '남자친구 행세를 하려고 하는 것 같아 부담스럽다'고 하는데, 솔직히 난 뭐라고 말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연락 없으면 연락 없다고 짜증내고, 연락하면 남자친구 행세 한다고 부담스럽다는데, 그럼 대체 지은씨에겐 어떻게 다가가야 하는 걸까?
학창시절, 교과서에 실린 <메밀꽃 필 무렵>이나 <수난이대>를 읽을 땐 별 감흥이 없었다. 그저 전자에서 시적 분위기를 나타내기 위해 동원된 소재가 달밤과 메밀꽃이고, 후자에서 주제를 형상화하기 위해 들어간 소재가 외나무다리라는 것을 외웠을 뿐이다.
그런데 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다시 읽은 두 작품은, 교과서로 대할 때와는 느낌이 달랐다. 분석하려는 자세로 볼 때완 달리 편안한 마음으로 소설을 대하니, 머릿속에 그림이 그려지고 등장인물들이 이웃처럼 느껴졌다. 난 전자를 서정적인 소설, 후자를 투박한 소설이라 생각했던 것을 반성했다.
지은씨는 현재 이성을 분석하려는 태도로 대하고 있다. 그 태도를 내려놓기 전까지는, 이성을 많이 만나봐야 모두 마음에 들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좋은 사람 만났다고 누구에게 칭찬 들어야 하는 것 아니고, 상대에게 단점 하나 있다고 사람들이 손가락질 하는 거 아니니, 친구를 사귀듯 만나보길 권한다. 상대에 대한 평가도 그렇게 지내 본 후에야 할 수 있는 거다. 지금 지은씨가 하는 건 두세 번 만난 후에 그저 단점 찾아 조롱하는 것을 벗어나지 못한다. 만나자는 얘기를 누가 먼저 했네, 답장이 빠르네 늦네, 이런 건 접어두고 먼저 친하게 지내보자.
▲ 토닥토닥하며 그저 용기를 드리고 싶지만, 그럼 내년에도 사연만 보내실 것 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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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간 지은씨의 사연을 다루지 않았던 건, 사연이 전부 상대에 대한 지은씨의 주관적인 '평가'였기 때문이다. A라는 남자는 이래서 마음에 안 들고, B라는 남자는 이런 부분이 별로이며, C라는 남자는 금사빠 냄새가 나더라, 식의 이야기에 난 할 말이 없었다.
이제 캐롤이 좀 들려오고 난 뒤엔 지은씨도 서른넷이 된다. 난 계사년(2013년)에 서른넷이 된 지은씨가 여전히 같은 사연을 계속 보낼까봐 겁이 난다. 뭔가 바꾸지 않으면, 지은씨는 새로운 남자를 만나 데이트를 하다가 또,
'아싸! 단점 발견! 이거 사연에 적어야지. 후후, 너도 아웃이야.'
이라며 심사위원 놀이를 하고 있을 거다. 그걸 막기 위해 오늘은 지은씨를 위한 이야기를 좀 해볼까 한다. 만났던 남자가 모두 별로여서 이런 상황이 온 거라고 생각하는 지은씨에게는 이 얘기가 껄끄러울 수 있겠지만, 지은씨가 미워서, 혹은 지은씨를 탓하려고 하는 얘기는 아니라는 걸 이해해 주시길 미리 부탁드리며, 출발해 보자.
1. 상대의 단점을 기가막히게 찾는 여자
지은씨의 그 엄격한 잣대로 내 지인들을 평가하면 아래와 같은 일이 벌어진다.
ⓐ 세계 각국을 다니며 여행기를 쓰는 A씨
-> 경제적인 부분에서 불안함. 역마살 낀 듯.
ⓑ 친절함과 배려로 좋은 평가를 듣고 있는 B씨.
-> 다른 여자에게도 다 이럴 듯.
ⓒ 공기업에서 일하며 착실하게 사는 C씨.
-> 임팩트가 없음. 같이 살면 지루할 듯.
ⓓ 주변 사람들을 웃게 만드는 분위기 메이커 D씨.
-> 어른스럽지 못함. 진중함이 없을 듯.
-> 경제적인 부분에서 불안함. 역마살 낀 듯.
ⓑ 친절함과 배려로 좋은 평가를 듣고 있는 B씨.
-> 다른 여자에게도 다 이럴 듯.
ⓒ 공기업에서 일하며 착실하게 사는 C씨.
-> 임팩트가 없음. 같이 살면 지루할 듯.
ⓓ 주변 사람들을 웃게 만드는 분위기 메이커 D씨.
-> 어른스럽지 못함. 진중함이 없을 듯.
산꼭대기에서 아래의 사람들을 바라보며 "저 사람들은 다 개미 같아."라는 이야기를 하는 모습이라고 할까. 사건에 직접 참여하지 않고 그저 멀리서 바라보면, 뭐든 가볍고 우스워 보일 수 있다. 알랭 드 보통의 <보다 온화하고 부드러운 성공 철학>에 나온 뉴스 이야기를 잠시 보자.
그리고 그 신문사에 가서 얘길 했죠.
서구 예술의 위대한 비극들에 대해서요.
저는 이 사람들이 이야기의 뼈대만 가지고 이걸 어떻게 뉴스 아이템으로
잡아내서 토요일 오후 뉴스데스크에서 기사를 쓰는지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오델로에 대해 말해줬죠. 들어본 적은 없지만 무척 흥미롭다더군요.
그리고 저는 오델로 이야기의 헤드라인을 뽑아달라고 했죠. 그들은
'사랑에 미친 이주민, 상원의원의 딸을 살해하다.'
라고 제목을 정했습니다.
저는 보바리 부인 줄거리도 얘기해 줬습니다.
(그들은)이책도 재미있겠다고 하면서
"쇼핑 중독에 걸친 탕녀, 신용 사기 후 비소 삼켜."라는 제목을 정하더군요.
서구 예술의 위대한 비극들에 대해서요.
저는 이 사람들이 이야기의 뼈대만 가지고 이걸 어떻게 뉴스 아이템으로
잡아내서 토요일 오후 뉴스데스크에서 기사를 쓰는지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오델로에 대해 말해줬죠. 들어본 적은 없지만 무척 흥미롭다더군요.
그리고 저는 오델로 이야기의 헤드라인을 뽑아달라고 했죠. 그들은
'사랑에 미친 이주민, 상원의원의 딸을 살해하다.'
라고 제목을 정했습니다.
저는 보바리 부인 줄거리도 얘기해 줬습니다.
(그들은)이책도 재미있겠다고 하면서
"쇼핑 중독에 걸친 탕녀, 신용 사기 후 비소 삼켜."라는 제목을 정하더군요.
이런 태도를 내려놓지 않는다면, 누구를 만나도 불만스러울 수밖에 없다. 지은씨가 털어놓는 불만에 내가 "정말 그 사람은 개미 같군요."라고 함께 맞장구를 쳐봐야, 산에 있는 시간만 길어질 뿐이다.
만약, 운이 좋아 장점만 가득한 사람을 발견해 결혼까지 하게 되었는데, 결혼하고 나서 그 사람의 단점을 발견한다면 그땐 어떻게 할 것인가? 사람이라는 게, 무슨 강철 따위로 만들어져 절대 구부러지거나 휘지 않는 것은 아니니, 고치고 다듬고 길들여가며 만나보길 권한다.
또, 해운대 한 번 가 봤다고 부산을 전부 아는 것은 아니잖은가. 늘 얘기하듯 사람이란 누구나 그 안에 세계를 지니고 있는 법이니, 초입만 보고 전체를 짐작해 유턴하는 일은 그만두자. 적어도 달이 두 번 찰 때 까지는 그 사람을 겪어보길 바란다.
2. 절대 손해 보지 않으려는 여자
지은씨는 대단히 위험한 착각을 하고 있다.
"그 사람이 제 버팀목이 되어 준다면,
그 때는 저도 그 사람의 좋은 아내가 되고 싶습니다."
그 때는 저도 그 사람의 좋은 아내가 되고 싶습니다."
상대가 확신을 주면, 그 때 자신도 상대에게 올인 하겠다는 얘기다. 저건 손해 보지 않는 장사를 하고 싶다는 얘기지, 연애를 하고 싶다는 얘기가 아니다. 콩깍지가 씌여 맹목적인 구애를 하는 사람이 아닌 이상, 누가 소개팅으로 몇 번 만난 여자에게 간이라도 빼 줄 것처럼 행동하겠는가?
지은씨의 행동을 좀 보자.
"술을 한 잔 하셨는지, 그 분이 밤에 전화를 하셨더라고요.
근데 직장에서 무슨 일이 있었다고 직장 얘기를 늘어놓는데,
전 대체 왜 그런 얘기를 저에게 하는지 좀 황당했어요.
그 얘기를 저에게 하시는 의도가 뭔지 물었더니,
그냥 위로 받고 싶어서 그랬다고 하더라고요.
웬 위로? 우리가 무슨 사인데 위로를 하죠? 당황스럽더라고요."
근데 직장에서 무슨 일이 있었다고 직장 얘기를 늘어놓는데,
전 대체 왜 그런 얘기를 저에게 하는지 좀 황당했어요.
그 얘기를 저에게 하시는 의도가 뭔지 물었더니,
그냥 위로 받고 싶어서 그랬다고 하더라고요.
웬 위로? 우리가 무슨 사인데 위로를 하죠? 당황스럽더라고요."
솔직히 말하면, 난 지은씨의 태도가 더 당황스럽다. 지은씨가 바라는 사람은 자신을 위로해 줄 수 있는 남자 아닌가. 그런데 반대로 상대가 지은씨에게 위로를 요청할 때에는
"우리가 무슨 사인데 위로를 하죠?"
라며 어리둥절해 한다. 속으로는
'이 사람은 아직 어린 것 같고, 결혼할 준비가 안 된 것 같다.'
라는 생각을 하며 말이다.
남자가 대체 지은씨에게 무슨 신세를 졌기에 자신의 푸념은 꾹 참고 지은씨의 푸념만 들어줘야 하며, 평가지 들고 있는 지은씨에게 좋은 점수를 받으려 노력해야 한단 말인가?
"그 사람이 절 간 본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분명히 그건 저에게 관심 있는 남자의 모습이 아니었어요."
분명히 그건 저에게 관심 있는 남자의 모습이 아니었어요."
헐. 그럼 지은씨는? 이건 마치 박정현이 오디션 프로그램의 심사위원으로 나와서 참가자에게 "왜 노래 부르면서 그렇게 손을 움직이죠? 너무 산만하네요."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아님 조관우가 참가자에게 "노래를 진성으로 불러야지 왜 가성으로 불러?"라고 말하는 것과 비슷하거나.
3. 겉으로 웃으면서 속으로 화 내는 여자
자기가 말을 제대로 안 해놓고 상대보고 못 알아듣는다고 화를 내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지은씨에게 이런 모습이 살짝 보인다.
"뭐 드셨어요?"
저 말은 '식사 하셨어요?'라는 뜻과, '메뉴가 뭐였어요?'라는 뜻으로 읽힐 수 있다. 전자의 뜻으로 이해한 상대는 "네, 밥 먹었어요."라고 대답한다. 그런데 지은씨는
"전 뭘 드셨다고 물어본 건데,
밥 먹었다고 대답하니까 답답하더라고요.
그래서 저도 더 말 안 걸었어요."
밥 먹었다고 대답하니까 답답하더라고요.
그래서 저도 더 말 안 걸었어요."
라고 말한다. '동창회 사건'도 마찬가지다. 첫 만남에서 지은씨는 상대에게 "다음 주 토요일에 동창회가 있다."는 얘기를 했다. 자세히 말한 건 아니고, 일정 얘기를 하다가 지나가듯 흘린 말이었다. 그런데 상대가 그걸 기억하지 못하고 그 주 금요일에 "내일 뭐해요?"라고 묻자, 지은씨는 속으로 화를 냈다.
"제가 분명히 첫 만남에서 이번 주 토요일에 동창회 한다고 했는데,
그걸 기억 못하고, 내일 뭐 하냐고 묻더라고요.
제 얘기를 주의 깊게 듣지 않는 것 같아서 좀 짜증이 났어요."
그걸 기억 못하고, 내일 뭐 하냐고 묻더라고요.
제 얘기를 주의 깊게 듣지 않는 것 같아서 좀 짜증이 났어요."
짜증이 났으면 그걸 상대에게 전하자. "전에 동창회 간다고 말씀드렸는데 설마 기억 못하시는 건가요? 벌점 이 점 드립니다. 십 점 모이면 영화 쏘셔야 해요." 정도로 가볍게 말할 수 있는 것 아닌가. 그런데 지은씨는 "내일 동창회 가요."라고 아무렇지 않게 대답해 놓고, 속으로만 분노를 축적해 간다. 상대에게 긴장감도 불어넣지도 못하고, 본인은 본인대로 스트레스만 받게 되는 최악의 방법이다.
게다가 자신의 진심을 숨긴 채 괜찮은 척 포장하는 것은 상대에게 '변덕'으로 보일 수 있다. 지은씨가 사연에 적었던 '속마음'들을 잠시 살펴보자.
"무슨 말인지 몰라서 답장 안 했어요."
"당연히 회식 왔으면 술자리겠죠. 아직도 회식 중이냐고 묻는데 짜증났어요."
"금요일 날 휴무라고 하더라고요. 참나. 그래서 저보고 어쩌라는 건지…."
"통화하고 싶은 기분이 아니라서 바쁘다고 했어요."
"당연히 회식 왔으면 술자리겠죠. 아직도 회식 중이냐고 묻는데 짜증났어요."
"금요일 날 휴무라고 하더라고요. 참나. 그래서 저보고 어쩌라는 건지…."
"통화하고 싶은 기분이 아니라서 바쁘다고 했어요."
호감을 표시하는 사람에게 심통을 부리면 답이 없다. 그리고 이건 우리끼리니까 하는 얘기지만,
"식사 하셨어요?"
"회식하면 주로 뭐 먹어요?"
"집에 잘 들어갔어요?"
"회식하면 주로 뭐 먹어요?"
"집에 잘 들어갔어요?"
라는 얘기는, 예의상 묻는 거지 일상을 캐묻는 게 아니다. 지은씨는 상대가 저런 모습을 보이면 '남자친구 행세를 하려고 하는 것 같아 부담스럽다'고 하는데, 솔직히 난 뭐라고 말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연락 없으면 연락 없다고 짜증내고, 연락하면 남자친구 행세 한다고 부담스럽다는데, 그럼 대체 지은씨에겐 어떻게 다가가야 하는 걸까?
학창시절, 교과서에 실린 <메밀꽃 필 무렵>이나 <수난이대>를 읽을 땐 별 감흥이 없었다. 그저 전자에서 시적 분위기를 나타내기 위해 동원된 소재가 달밤과 메밀꽃이고, 후자에서 주제를 형상화하기 위해 들어간 소재가 외나무다리라는 것을 외웠을 뿐이다.
그런데 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다시 읽은 두 작품은, 교과서로 대할 때와는 느낌이 달랐다. 분석하려는 자세로 볼 때완 달리 편안한 마음으로 소설을 대하니, 머릿속에 그림이 그려지고 등장인물들이 이웃처럼 느껴졌다. 난 전자를 서정적인 소설, 후자를 투박한 소설이라 생각했던 것을 반성했다.
지은씨는 현재 이성을 분석하려는 태도로 대하고 있다. 그 태도를 내려놓기 전까지는, 이성을 많이 만나봐야 모두 마음에 들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좋은 사람 만났다고 누구에게 칭찬 들어야 하는 것 아니고, 상대에게 단점 하나 있다고 사람들이 손가락질 하는 거 아니니, 친구를 사귀듯 만나보길 권한다. 상대에 대한 평가도 그렇게 지내 본 후에야 할 수 있는 거다. 지금 지은씨가 하는 건 두세 번 만난 후에 그저 단점 찾아 조롱하는 것을 벗어나지 못한다. 만나자는 얘기를 누가 먼저 했네, 답장이 빠르네 늦네, 이런 건 접어두고 먼저 친하게 지내보자.
▲ 토닥토닥하며 그저 용기를 드리고 싶지만, 그럼 내년에도 사연만 보내실 것 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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