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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매뉴얼(연재중)/커플생활매뉴얼

나쁜 남자를 힐링해 주고 싶다는 여자, 어떡해?

by 무한 2013. 3. 6.
나쁜 남자를 힐링해 주고 싶다는 여자, 어떡해?
지난주부터 이 사연을 두고 고민했음을 먼저 밝힌다. 앞뒤로 꼼꼼하게 살펴봐도 분명 정상적인 연애가 아닌데, 사연을 보낸 대원은 둘을 '연인'이라 말하고 상대를 '남자친구'로 여기고 있는 상황.

이런 사연이 꽤 많다. 굳이 내가 뭐라 말하지 않아도 조만간 알아서 정리될 이야기가 대부분이기에 매뉴얼로 다루진 않는다. 말을 꺼내봐야,

A - 네 시간 쯤 달려왔는데 아직도 강원도 표지판이 안 보여요. 
     얼마나 더 가야 강릉이죠?
B - 여기, 서해안고속도로인데요? 계속 가면 목포 나오는데….



정도의 대화밖에 안 되기 때문이다. 차라리 길이라면 저렇게 명확히 밝히고 유턴을 권하는 게 쉬울 수 있다. 하지만 연애에 대해선 '네가 우리에 대해서 뭘 아냐.'부터 시작해서 '세상이 우리를 인정하지 않아도 무한님만은 우리를 인정해 주리라 믿었는데, 실망이다.'라는 난감한 반응들이 돌아오기 마련이기에, 그냥 조용히 흘려보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S양의 사연을 다루는 건, S양이 20대 후반이기 때문이다. 이십대의 마지막을 시궁창에서 보내는 걸 막기 위한 내 작은 노력이라 생각하며 매뉴얼을 읽어주길 바란다. 그렇게 이십대를 다 보냈다간, 시장에서 엄마 손 놓친 미아의 기분으로 서른이 될 위험이 있다. 출발해 보자.


1. 감수성이 만든 이상한 해몽


감수성이 예민한 여자는 '나쁜 남자'의 희생양이 될 가능성이 높다. 그녀들은 선천적으로 자신에게 일어난 모든 일에 '의미부여'하는 습관을 타고나는데, 그게 나쁜 남자의 '수작'마저도 문학적으로 승화시켜 버리는 놀라운 기능을 하기 때문이다.

랜덤채팅이나 만남어플, 또는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이성이 말을 걸기만 해도 그녀들은 그걸 '인연'으로 받아들인다. 물론 따지자면 '인연'이라 할 수 있지만, 그게 일반적인 경우와 좀 다르다. 보통의 여자들은 낯모르는 이성에게

"토요일에 같이 남산 갈래요?"


라는 쪽지를 받으면, '저건 또 어떤 종류의 몽유병자인가?'라는 생각을 하며 답장을 하지 않기 마련이다. 그러나 감수성이 풍부한 여자들은

"그는 다른 남자들과 달랐어요. 나이나 이름을 묻지 않고, 남산에 가자는 말부터 꺼냈죠.
술을 마시자는 얘기를 한 것도 아니고, 당장 만나자고 한 것도 아니에요.
뜬금없는 이야기에 저도 모르게 그러자고 했어요. 우린 만날 시간을 정했고…."



라며 소설을 쓰기 시작한다. 하이에나를 보고 호랑이를 그려내는 재주가 있다고 할까. 개꿈을 꾸고도 그 꿈에 엄청난 해몽을 해 버리고 마는 것이다. 그러면서 내겐

"왜 제 해몽대로 일이 진행되지 않는 거죠? 전 분명 그런 꿈을 꾸었는데요?"


라고 말한다. 참 난감한 일이다.

여기에 옮겨 적진 않겠지만, S양의 남자친구가 S양에게 다가온 루트대로 다른 여자에게 다가갔다면, 상대에게 "저 아세요? 왜 그러시죠?"라는 대답을 듣거나 '이상한 남자' 취급을 당했을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외로운데다 관심이 고팠던 S양은 상대의 수작들에 의미부여를 시작했고, 오프라인에서 만나기까지 했다. 그리고 첫 만남에서 그는 S양에게 고백을 했고, 스킨십을 했다. 첫 눈에 반했다는 그의 말에, S양은 '드디어 내게도 사랑이 왔구나.'라고 생각했을 뿐이다. 

이런 대원들을 위해 모임을 하나 만들까 생각 중이다. 월 회비 3만원만 내면 주 2회 등짝을 맞을 수 있는 모임이다. 우리 집에서 일하시는 아주머니(라고 쓰고 엄마라고 읽는다)를 섭외해 풀스윙으로 등짝을 때려달라고 하면, 이런 대원들이 좀 줄어들지 않을까.


2. 유명한 남자 중엔 나쁜 남자가 없을까?


신문에서 이름을 볼 수 있는 가수, 배우, 개그맨, 교수, 학원강사 등을 비롯해 작게는 클럽 디제이, 밴드 보컬, 보컬 트레이너, 작가, 블로거, 온라인 커뮤니티 네임드에 이르기까지 '나쁜 남자'와 관련된 사연이 내 메일함엔 수두룩하다. 그 중엔 제보자가 경찰서에 신고만 하면 바로 다음 날 포털사이트 메인에 걸릴 이야기도 있다.

이제는 좀 정착하고 싶다, 앞으론 순수하게 살고 싶다, 너와 여행 다니며 살고 싶다, 아내와는 이혼을 생각 중이다, 내가 헤어지자고 하면 여자친구가 자살할까봐 헤어지지 못하고 있는 중이다, 이번 글은 너를 위해 썼다, 너를 연구하고 싶다(응?)…. 그들의 개드립도 가지각색이다.

S양의 남자친구 역시 신문에서 이름을 찾아볼 수 있는 사람이기에 S양은 완전히 안심한 것 같다. '그런 사람이 겨우 잠깐의 즐거움 때문에 나를 이용할 리 없잖아. 뭐가 부족해서.'라고 아주 단순하게 생각하는 듯 보인다.

당사자가 '우린 비밀연애 한 거예요.'라고 말하는데, 거기다 대고 내가 무슨 얘기를 해야 좋을지 솔직히 모르겠다. 비밀 연애가 아니라도 마찬가지다. 연인이라는 이름의 간판만 걸려 있지, 그 안을 들여다보면 필요할 때 불러서 욕구만 충족하는 '엔조이'인 경우가 많다. 하지만 위에서 말한 대로 감수성이 예민한 대원은 그 나머지 빈 공간에 '바쁘니까', '공인이니까', '그에겐 상처가 있으니까' 등의 의미부여를 한다. 그냥 딱 봐도 이젠 흥미가 떨어져 다른 여자에게 작업 걸고 있다는 게 보이는데, 그걸 두고

"그에겐 상처가 있거든요. 그래서 마음의 문을 쉽게 열지 못하고,
자극을 위해 다른 사람에게 자신을 드러내 보이는 것에 열중해요.
얼마 전엔 어느 여대생과 만났다고 하더라고요.
그 여대생이 스폰서가 되어달라는 요청을 하기에 거절했다고 하던데…."



따위의 이상한 얘기를 하는 경우도 있다.(뭐야 이거 무서워.)  

사이비 종교에 심취한 사람과 대화하는 느낌이랄까. 평범한 사람이 얘기했다면 개드립이나 섹드립으로 여길 이야기들을, 유명인이나 인기인이 했다는 이유로 무슨 자유로운 몽상가적 얘기라고 받아들인다. 내가 길게 얘기한다고 해서 그 믿음이 하루아침에 바뀔 것 같진 않고, 여기엔 그저 그들도 많은 포유동물 중의 하나라는 것만 적어두도록 하겠다.


3. 치료라뇨? 치료라뇨!


여기까지 얘기하면 꼭 등장하는 멘트가 있다.

"그러면 그 사람이 그저 절 이용한 거란 얘긴가요?
그 사람이 한 말이 다 거짓말이란 얘긴가요?
분명 진심이었어요. 그는 진심으로 저에게 이야기 한 거라고요."



진심이 아니란 얘기는 아니다. 우리 어머니의 지인인 최집사(59세, 무직)님의 얘기를 잠시 소개할까 한다.

최집사님은 자녀들이 출가한 후 우울증을 앓았다. 삶의 의욕을 잃은 최집사님께 자녀들은 강아지를 선물했다. 최집사님은 그 강아지를 끔찍이도 사랑했다. 한 번은 강아지가 새벽에 아픈 적이 있었는데, 최집사님은 강아지를 안고 동네 24시 동물병원까지 달려갈 정도였다. 강아지는 사료와 간식을 너무 많이 먹어서 복통으로 괴로워했던 것인데, 이건 중요하지 않으니 패스하자.

여하튼 최집사님은 세 달 정도 강아지에게 빠져 있었다. 강아지 옷을 사고, 영양제를 사고, 간식을 사고, 액세서리 등을 샀고, 소고기를 사다가 강아지에게 구워줬을 정도로 녀석을 아꼈다. 그런데 세 달이 지나 문제가 발생했다. 최집사님이 아들 집으로 가서 손주를 봐주게 된 것이다.

몇 주 정도는 최집사님이 아들 집에 강아지를 데리고 다녔다. 하지만 강아지와 손주에게 둘 다 애정을 쏟는 일이 점점 버거워 졌고, 주변에서는 애완견이 아이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소리도 해댔다. 결국 최집사님은 강아지를 입양 보낼 생각을 하게 되었고 주변에 수소문을 했다. 우리 집에도 맡아서 길러 줄 수 없냐고 물은 적 있는데, 그 때문에 나도 최집사님의 이야기를 알게 되었다. 강아지 두 마리를 키우는 건 아무래도 벅찰 것 같아 난 거절했다.

그 얘기를 들은 지 며칠이 지나 난 어머니께 최집사님 댁 강아지 안부를 물었다. 어머니는 그 강아지를 맡아 길러 줄 곳이 없어, 최집사님이 결국 안락사를 시켰다는 얘기를 하셨다.

진심이라고 다가 아니다. 그 당시에 충만한 감정을 굳센 목소리로 얘기한다 하더라도, 상황이 바뀌면 마음과 감정과 생각이 바뀔 수 있다. 그러면 이전의 그 진심도 유효기간이 지난 옛날 얘기가 될 수 있고 말이다. 개업 초기에 손님이 끊이질 않던 음식점도 경영에 실패하면 파리만 날리게 될 수 있는 것처럼, 사람과 사람의 관계 역시 꾸준한 노력이 없으면 종말을 맞을 수 있다.

그런데 S양은 언젠가 한 번 전해들을 상대의 '진심'만을 부여잡고, 그게 영원히 변치 않으며 언제까지고 그대로일 거라 생각한다. 때문에 지금 보이는 상대의 행동들은 모두 '일탈' 쯤으로 여기거나 '마음의 상처'가 만들어낸 비뚤어진 행동이라 여기는 것이다. 그래서 내게 묻는다.

"그가 다시 정상궤도로 돌아올 수 있게, 제가 옆에서 힐링 해주고 싶어요.
마음의 상처 때문에 그러는 것 같거든요. 치료할 수 있도록 돕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일단은 편지를 써볼까 생각하는데, 무한님 생각은 어떠신가요?"



하아, 지금 남 걱정 하고 있을 때가 아닌데….


위와 같은 부분들을 다 이해할 수 있으며, 그래도 여전히 그의 곁에서 그의 '치료사'가 되고 싶다고 말한다면, 내가 실례한 것 같다. 그건 나 따위가 범접할 수 없는 거대한 인류애적 태도다. 평생을 그의 '교화'를 위해 바치겠다고 마음먹은 거라면, 나 역시 S양에게 그저 행운을 빌 뿐이다.

다만 내가 하나 권하고 싶은 것은, 그와 '몸'으로 만나지 말라는 거다. 미안하지만 난, 현재 S양이 무슨 얘기를 하든 상대가 다 들어주고 있는 것은 그의 욕구를 S양이 충족시켜주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 충족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교화고 뭐고 그냥 몇 주 내로 연락두절 될 가능성이 높다. 잊지 말자. S양이 말하는 '교화'는, 그가 S양을 한 사람의 인격체로 존중할 수 있을 때 가능한 것이다. 지금은 상대가 S양이 자신의 손바닥 위에 있다고 생각하는 상황이니, 거기서 치료사 운운 해봐야 그저 재롱으로 보일 뿐이다.

S양과 나는 낯모르는 사이인 까닭에 이렇게만 적는다. S양이 내 여동생이었다면 긴 말 필요 없이, 정신 차리라며 등짝을 찰지게 한 대 때려줬을 것 같다.



▲ 제 즐겨찾기 목록을 한 주에 하나씩 공유하는 코너를 생각 중인데, 어떠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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