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번 더 화내면 헤어지겠다고 말하는 남친, 어떡해?
어렸을 적 난 엄마에게 특별한 능력이 있다고 생각했다. 분명 엄마가 현관문을 열고 나간 후 내가 학습지를 팽개친 채 TV를 보기 시작했고, 엄마가 돌아올 때쯤 TV를 끄고 방으로 돌아와 학습지를 풀었는데, 엄마는 내가 TV를 보며 시간을 보냈다는 걸 귀신같이 알아맞히곤 내 몸에 파리채 문양을 각인시켰다.
치밀하지 못했던 내가 결정적 단서를 모두 남기고 만 것이다.
커터칼 가지고 장난치다가 손을 베었을 때, 칼 가지고 장난쳤다고 하면 혼날까봐 넘어져서 다쳤다고 엄마에게 거짓말을 한 적도 있었다. 엄마는 그 거짓말도 단박에 집어냈다.
난 엄마를 넘어서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고, 덕분에 지금은 누군가의 키보드를 두드리는 소리만 들어도 그가 뭘 하고 있는지 알아낼 수 있는 경지에 이르렀다. 집에 누가 다녀갔는지, 누가 내 물건을 만졌는지도 금방 알아챈다. 내 책상 위 펜이나 메모리카드 등의 위치나 현관에 있는 신발의 위치, 우체통에 꽂혀 있는 우편물들의 갯수 같은 걸 유심히 보고 기억해 두기 때문이다.
열두 살 때 난, 우리 집에서 킹라이온(볼트론) 장난감을 훔쳐간 범인을 잡았다. 녀석이 다녀간 후 열어 둔 발코니 문의 간격이 달라진 것으로 미루어 난 녀석이 범인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녀석은 장난감 통이 있었던 발코니에 가선 내 킹라이온 1호기를 가져갔던 것이다. 녀석에겐
라는 간단한 떡밥을 던져 장난감을 돌려받을 수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녀석은 '놀이터에서 발견했다'며 장난감을 들고 왔다. 순진한 자식. 충렬이 잘 지내고 있냐.
열일곱 살 때는 역시 우리 집에서 돈을 훔쳐간 범인을 잡았다. 당시 우리 집에선 외출할 때 집 열쇠를 우편함에 넣어 두었는데, 그 날 우리 집에 놀러왔던 동생 친구가 그걸 알게 되었고, 가족들이 다 나간 사이 집에 들어와 돈을 훔쳐갔던 것이다. 녀석은 서랍장에서 돈을 꺼내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꾸미려 서랍장을 모두 닫아 두었다. 서랍장 오른쪽 맨 아래 서랍은 원래 잘 안 닫혀서 살짝 떠 있는데, 녀석은 그것마저 우겨넣어 말끔하게 닫아두고 갔다. 하지만 여전히 물증은 없는 상황. 난 동생에게 친구를 부르라고 시킨 뒤, 녀석이 왔을 때 연기를 시작했다.
당시 초등학생이었던 동생의 친구는, 잠시 집에 다녀오겠다며 밖에 나갔다 다시 돌아와선, 서랍장에 있던 봉투를 안방에서 찾아내는 기적을 일으켰다. 귀여운 자식. 민석이 잘 지내고 있냐. 얼마 전에 중산에서 형 만났으면 인사를 해야지 도망은 왜 가. 다들 흑역사 하나쯤은 가지고 있으니까 너무 긴장하지 마라.
탐정기질 때문에 오해를 산 일도 있었다. 언제라고 말하기가 좀 곤란하고, 여하튼 내 입술이 텄다며 자기 챕스틱을 발라주겠다고 한 '여자인 친구'가 있었다. 보려고 한 것은 아닌데, 그때 그녀가 꺼냈던 챕스틱의 뚜껑과 몸통 사이엔 담뱃잎 가루로 추정되는 가루가 묻어 있었다. 그걸 모른 체 넘어갔어야 했다. 하지만 난 안타깝게도 장난스레 '담배'얘기를 꺼냈고, 그녀는 자신이 담배를 피운다면서 사람들에겐 비밀로 해달라고 했다.
그러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같은 모임의 한 선배가, 그녀에게 "야, 나 불 좀 줘."라며 장난을 쳤다. 그 선배는 비흡연자에게 불을 빌려달라고 하듯, 그저 장난으로 정말 별 의미 없이 한 말인데, 그녀는 그 말을 듣자 나를 쳐다봤다. 실망과 환멸이 섞인 눈으로 말이다. 그 후 절대 난 말하지 않았다고 몇 번이나 해명했지만 그렇게 그녀와는 친구의 연이 끊겼다. 진짜 나 아무한테도 안 말했는데.
이거, 내 얘기 하다가 시간 다 가겠다. 다른 이야기들은 나중에 차차 더 하기로 하고, 지금부터는 내가 이 이야기들을 꺼낸 이유가 무엇인지, 제보자인 K양의 사연과는 어떤 연관이 있는지, K양에게 권하고 싶은 건 무엇인지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자.
누가 더 큰 잘못을 했으며, 이 싸움이 무엇 때문에 일어났는지에 대한 얘기는 그만 하자. K양 남자친구가 잘못한 거 맞다. 친구와 12시까지만 술을 마시고 들어간다고 했으면 그 말에 책임을 지고 지켜야지, 얘기가 길어졌다며 연락도 없이 시간을 초과한 건 분명 남자친구 잘못이다.
그런데 잘잘못이 분명한 이런 일에 대해 계속 상대에게 '너의 잘못'만을 이야기 해 버리면, 상대가 견디다 못해 폭주해 버릴 위험이 있다. K양이 버스를 놓쳐 남자친구와의 약속에 늦었는데, 남자친구가 그것을 두고 똥 씹은 표정을 하며 데이트 내내
라며 몰아붙인다고 해보자. 데이트고 뭐고 집에 가버리고 싶지 않겠는가? 잘잘못만 따지자면 약속시간에 늦은 K양이 잘못한 게 맞지만, 그걸 두고 남자친구가 온 몸에 힘이 풀릴 때까지 구박한다면, 연애를 그만 놓아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겠는가? 더군다나 버스를 놓친 게 '스마트폰 버스 알림 어플'이 시간을 잘못 알려줘서 그렇다고 해보자. 억울하지 않겠는가?
다시 둘의 실제 이야기로 돌아와 보자. 약속한 시간을 넘겨버린 남자친구 역시 '억울한 부분'이 있기에, 계속해서 K양에게 호소한다.
저렇게 말해도 K양은 '지금 그래서 잘했다는 거냐?', '약속 어긴 게 누구냐.', '내가 걱정하는 건 생각 안 하냐.', 라며 숨 쉴 틈도 주지 않고 상대를 코너로 몰았다. 그러자 결국 상대도 폭주해 버리고 만다.
남자친구의 표현력이 좀 부족한 까닭에 하고 싶은 말을 제대로 못 하는 것 같은데, 남자친구가 하려는 말을 대신하자면 아래와 같다.
연인이라면, 언제나 상대의 허물을 끝까지 들춰 부끄럽게 만들기 보다는, 가끔 알아도 모르는 척 해주는 관용을 베풀어야 한다. K양의 남자친구가 극도의 스트레스를 받았던 건, K양이 화를 자주 내서라기보다는, 갈등이 생길 때마다 남자친구를 홀딱 벗겨 놓고 수치스럽게 만드는 듯한 K양의 태도 때문이었을 것이다.
저런 일이 매일 있는 것도 아니고, 처음과 비교하자면 그래도 꼬박꼬박 연락해 상황을 알려 줄 정도로 남자친구가 충실해지지 않았는가. 이런 건 어느 정도 감안해 '실수'에 대해서는 용서해 줄줄도 알아야지, 뭐 하나 잘못하면 '너 잘 걸렸다.'라며 벼르고 있었던 사람처럼 총공격을 하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 게다가 남자친구는 새벽에 들어와서는 몇 시간 잠도 안 자고 출근 할 정도로 자신의 일에 철저한 사람 아닌가. 그가 술과 친구 좇다가 인생을 망치는 망나니 타입이라면 때려서라도 버릇을 고치게 만들어야겠지만, 간만에 만난 친구와 술 한 잔 하다가 대화가 길어진 것 정도는 웃으며 넘어가 주자. 그 정도도 허용하지 못하는 여자와는 피곤해서 함께 할 수 없다.
짧은 얘기를 먼저 하자. 남자친구가 '역습'을 하자 당황한 K양은
라며 '답답한 여자' 특유의 흑백논리를 펼치기 시작한다. 화를 내지 말라는 얘기가 아니라고 남자친구가 말해도, K양은 못 알아듣는 건지 아니면 못 알아듣는 척 하고 싶은 건지
라며 뫼비우스의 띠 같은 말을 해 버린다. 언젠가 진중권 교수가 한 "말을 해도 못 알아들으니 이길 자신이 없다."는 말이 생각난다. 두 사람 모두 그런 태도로 대화 할 거라면 14박 15일 동안 토론을 해도 승부를 가릴 수 없을 것이다.
둘 중 누구라도 "그때 내 기분이 이러이러 했어. 그래서 했던 말인데, 지금 생각해 보니까 내가 너무 내 기분에만 집중했던 것 같아. 미안해."라며 사과했으면 끝나는 문제다. 하지만 두 사람 모두 저 간단한 한 마디를 하지 못한 채 "또 화내면 헤어지겠다.", "화를 내지 말라는 거냐?"라는 이야기를 반복하며 냉전 중이다.
높아졌다 낮아졌다 하는 기준 같은 건 얼른 집어치우길 권한다. 확실한 기준을 세우고 싶으면, 변하지 않으며 둘 모두에게 똑같이 적용되는 기준을 세워야 한다. 이건 남자친구 개조작업에 들어간 다른 여성대원들에게도 종종 보이는 모습인데, 그녀들의 고무줄 같은 기준을 보자.
상대에겐 엄격하게, 자신에겐 관대하게 적용할 거라면 저런 이야기는 아예 꺼내질 말자. K양의 남친도 딱 저 '이상한 기준'을 지적하고 있지 않은가. 그는 좋은 남친이 되기 위해 K양의 요구를 거의 대부분 수용했는데, 그러다 보니 자기 혼자만 '애견훈련'같은 걸 받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던 거다. 잘 하려고 노력하면 노력할수록 자신은 K양의 눈치를 보거나 주눅이 들게 되니, 이건 뭔가 아니다 싶어 '난 이 연애를 왜 하고 있는가?'까지 생각했을 수도 있다. 이걸 차분하게 설명하기 어려운 까닭에 "또 화내면 헤어지겠다."는 뭉뚱그린 결론만 꺼내놓았을 것이고 말이다.
하나 더. 난 K양이 사건 다음 날 남자친구에게 한 멘트에 주목한다.
말에는 태도가 묻어난다. K양이 남자친구를 조금이라도 어렵게 생각했다면 "이거나 읽어."라고 말하지 못했을 것이다. 꽤 오래 사귄 커플들에게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는 문제다. 영화 <봄날은 간다>에서도 갈등의 최고조에 저 '예의 없음'에 관한 대사를 넣지 않았던가.
만약 K양이 퇴근 후 직장에서 있었던 일을 남자친구에게 전화로 말했는데, 남자친구가 "전화 끊고 샤워나 해."라고 대답했다면 K양의 기분은 어땠을까?
의도가 무엇이었든 그 방법이 잘못되었다.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려고 금일봉을 전달하더라도, 봉투를 상대에게 집어 던지듯 주면, 상대는 그 행위의 예의 없음만 기억할 것 아닌가. "그런 게 아니었어."라고 뒤늦게 해명하며 외양간 고쳐봐야, 소는 이미 떠난 후라는 걸 잊지 말길 바란다.
이 갈등의 보다 근본적인 원인은, 두 사람 모두 겁이 많은 사람이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K양은 남자친구가 자신보다 다른 것에 관심을 더 쏟게 될까봐 겁을 내고 있고, 남자친구는 K양이 자신을 또 궁지로 몰아 넣을까봐 겁내고 있다. 그런 와중에 남자친구는 그 찝찝한 기분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를 모르니
라고 뭉뚝한 말을 한 것이고, 그 말에 충격 받은 K양은 심리상담까지 받으며 '화내는 것'에 대한 치료를 받고 있다.
난 K양에게 '남친 바라기'를 그만 둘 것을 권해주고 싶다. 고3 수험생의 엄마가 된 기분으로 남자친구를 관리 감독 하려 들면, 본인은 지치고 상대는 미칠 수 있다. 자투리 시간을 아껴서 문제 하나라도 더 풀라고 닦달하듯, 지인 만날 시간에 날 만나라고 강요하는 일이 벌어질 수 있단 얘기다. 계속 남친만 기다리고 있으니 그가 3분만 늦어도 열불이 치밀어 그에게 일부러 더 못 되게 굴 위험도 있다. 그러니 남자친구를 손바닥 위에 올려두려 하지 말고, 손 맞잡은 채 함께 걸을 수 있은 연애를 하길 바란다.
▲ 여기다 뭐라고 적어야 사람들이 안 까먹고 추천버튼을 누를까. 의리도 이제 시들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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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적 난 엄마에게 특별한 능력이 있다고 생각했다. 분명 엄마가 현관문을 열고 나간 후 내가 학습지를 팽개친 채 TV를 보기 시작했고, 엄마가 돌아올 때쯤 TV를 끄고 방으로 돌아와 학습지를 풀었는데, 엄마는 내가 TV를 보며 시간을 보냈다는 걸 귀신같이 알아맞히곤 내 몸에 파리채 문양을 각인시켰다.
- 뜨끈뜨끈한 TV.
- 몇 문제 풀지 않은 학습지.
- 몇 문제 풀지 않은 학습지.
치밀하지 못했던 내가 결정적 단서를 모두 남기고 만 것이다.
커터칼 가지고 장난치다가 손을 베었을 때, 칼 가지고 장난쳤다고 하면 혼날까봐 넘어져서 다쳤다고 엄마에게 거짓말을 한 적도 있었다. 엄마는 그 거짓말도 단박에 집어냈다.
"똑바로 말해. 넘어져서 다친 거 맞아? 칼에 베인 상천데?"
난 엄마를 넘어서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고, 덕분에 지금은 누군가의 키보드를 두드리는 소리만 들어도 그가 뭘 하고 있는지 알아낼 수 있는 경지에 이르렀다. 집에 누가 다녀갔는지, 누가 내 물건을 만졌는지도 금방 알아챈다. 내 책상 위 펜이나 메모리카드 등의 위치나 현관에 있는 신발의 위치, 우체통에 꽂혀 있는 우편물들의 갯수 같은 걸 유심히 보고 기억해 두기 때문이다.
1. 내 얘기 하는 거 재미있으니까 조금 더.
열두 살 때 난, 우리 집에서 킹라이온(볼트론) 장난감을 훔쳐간 범인을 잡았다. 녀석이 다녀간 후 열어 둔 발코니 문의 간격이 달라진 것으로 미루어 난 녀석이 범인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녀석은 장난감 통이 있었던 발코니에 가선 내 킹라이온 1호기를 가져갔던 것이다. 녀석에겐
"킹라이온 1호기 놀이터에서 놔둔 것 같은데, 없어졌어.
경찰에 신고해서 찾아달라고 해야 겠다. 가져간 사람 잡혀갈 텐데…."
경찰에 신고해서 찾아달라고 해야 겠다. 가져간 사람 잡혀갈 텐데…."
라는 간단한 떡밥을 던져 장난감을 돌려받을 수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녀석은 '놀이터에서 발견했다'며 장난감을 들고 왔다. 순진한 자식. 충렬이 잘 지내고 있냐.
열일곱 살 때는 역시 우리 집에서 돈을 훔쳐간 범인을 잡았다. 당시 우리 집에선 외출할 때 집 열쇠를 우편함에 넣어 두었는데, 그 날 우리 집에 놀러왔던 동생 친구가 그걸 알게 되었고, 가족들이 다 나간 사이 집에 들어와 돈을 훔쳐갔던 것이다. 녀석은 서랍장에서 돈을 꺼내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꾸미려 서랍장을 모두 닫아 두었다. 서랍장 오른쪽 맨 아래 서랍은 원래 잘 안 닫혀서 살짝 떠 있는데, 녀석은 그것마저 우겨넣어 말끔하게 닫아두고 갔다. 하지만 여전히 물증은 없는 상황. 난 동생에게 친구를 부르라고 시킨 뒤, 녀석이 왔을 때 연기를 시작했다.
"지문 나온 거 경찰서에 갖다 주고 올게.
잡히면 주거침입에 절도, 그리고 기물파손까지 했느니 무기징역일 거야.
넌 정말 도둑이 훔쳐간 게 맞는지 잘 찾아보고 있어."
잡히면 주거침입에 절도, 그리고 기물파손까지 했느니 무기징역일 거야.
넌 정말 도둑이 훔쳐간 게 맞는지 잘 찾아보고 있어."
당시 초등학생이었던 동생의 친구는, 잠시 집에 다녀오겠다며 밖에 나갔다 다시 돌아와선, 서랍장에 있던 봉투를 안방에서 찾아내는 기적을 일으켰다. 귀여운 자식. 민석이 잘 지내고 있냐. 얼마 전에 중산에서 형 만났으면 인사를 해야지 도망은 왜 가. 다들 흑역사 하나쯤은 가지고 있으니까 너무 긴장하지 마라.
탐정기질 때문에 오해를 산 일도 있었다. 언제라고 말하기가 좀 곤란하고, 여하튼 내 입술이 텄다며 자기 챕스틱을 발라주겠다고 한 '여자인 친구'가 있었다. 보려고 한 것은 아닌데, 그때 그녀가 꺼냈던 챕스틱의 뚜껑과 몸통 사이엔 담뱃잎 가루로 추정되는 가루가 묻어 있었다. 그걸 모른 체 넘어갔어야 했다. 하지만 난 안타깝게도 장난스레 '담배'얘기를 꺼냈고, 그녀는 자신이 담배를 피운다면서 사람들에겐 비밀로 해달라고 했다.
그러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같은 모임의 한 선배가, 그녀에게 "야, 나 불 좀 줘."라며 장난을 쳤다. 그 선배는 비흡연자에게 불을 빌려달라고 하듯, 그저 장난으로 정말 별 의미 없이 한 말인데, 그녀는 그 말을 듣자 나를 쳐다봤다. 실망과 환멸이 섞인 눈으로 말이다. 그 후 절대 난 말하지 않았다고 몇 번이나 해명했지만 그렇게 그녀와는 친구의 연이 끊겼다. 진짜 나 아무한테도 안 말했는데.
이거, 내 얘기 하다가 시간 다 가겠다. 다른 이야기들은 나중에 차차 더 하기로 하고, 지금부터는 내가 이 이야기들을 꺼낸 이유가 무엇인지, 제보자인 K양의 사연과는 어떤 연관이 있는지, K양에게 권하고 싶은 건 무엇인지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자.
2. 코너로 모는 여자.
누가 더 큰 잘못을 했으며, 이 싸움이 무엇 때문에 일어났는지에 대한 얘기는 그만 하자. K양 남자친구가 잘못한 거 맞다. 친구와 12시까지만 술을 마시고 들어간다고 했으면 그 말에 책임을 지고 지켜야지, 얘기가 길어졌다며 연락도 없이 시간을 초과한 건 분명 남자친구 잘못이다.
그런데 잘잘못이 분명한 이런 일에 대해 계속 상대에게 '너의 잘못'만을 이야기 해 버리면, 상대가 견디다 못해 폭주해 버릴 위험이 있다. K양이 버스를 놓쳐 남자친구와의 약속에 늦었는데, 남자친구가 그것을 두고 똥 씹은 표정을 하며 데이트 내내
"넌 왜 매사에 시간관념이 없냐."
"버스를 놓치면 늦을 정도로 촉박하게 나오니까 그런 거 아니냐."
"이렇게 늦을 것 같았으면 내가 하던 일 마저 마무리 하고 나올 수도 있었다."
"빨리 나오라고 닦달 하더니 네가 늦는 건 무슨 경우냐."
"말을 좀 해 봐라. 억울한 얼굴로 있지 말고, 대답을 좀 해라."
"버스를 놓치면 늦을 정도로 촉박하게 나오니까 그런 거 아니냐."
"이렇게 늦을 것 같았으면 내가 하던 일 마저 마무리 하고 나올 수도 있었다."
"빨리 나오라고 닦달 하더니 네가 늦는 건 무슨 경우냐."
"말을 좀 해 봐라. 억울한 얼굴로 있지 말고, 대답을 좀 해라."
라며 몰아붙인다고 해보자. 데이트고 뭐고 집에 가버리고 싶지 않겠는가? 잘잘못만 따지자면 약속시간에 늦은 K양이 잘못한 게 맞지만, 그걸 두고 남자친구가 온 몸에 힘이 풀릴 때까지 구박한다면, 연애를 그만 놓아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겠는가? 더군다나 버스를 놓친 게 '스마트폰 버스 알림 어플'이 시간을 잘못 알려줘서 그렇다고 해보자. 억울하지 않겠는가?
다시 둘의 실제 이야기로 돌아와 보자. 약속한 시간을 넘겨버린 남자친구 역시 '억울한 부분'이 있기에, 계속해서 K양에게 호소한다.
- 나도 다음 날 출근해야 하고, 너에게 말한 것도 있어서 일찍 들어가려 했다.
- 시간이 지나긴 했지만 그래도 난 '들어갈 때 톡 보내 두겠다'는 약속 지키지 않았나.
- 연락을 해도 뭐라고 하고 안 해도 뭐라고 하면, 대체 나더러 어쩌라는 건가.
- 시간이 지나긴 했지만 그래도 난 '들어갈 때 톡 보내 두겠다'는 약속 지키지 않았나.
- 연락을 해도 뭐라고 하고 안 해도 뭐라고 하면, 대체 나더러 어쩌라는 건가.
저렇게 말해도 K양은 '지금 그래서 잘했다는 거냐?', '약속 어긴 게 누구냐.', '내가 걱정하는 건 생각 안 하냐.', 라며 숨 쉴 틈도 주지 않고 상대를 코너로 몰았다. 그러자 결국 상대도 폭주해 버리고 만다.
- 네가 마음대로 룰 정하고 거기에 안 따르면 화내는 거, 진짜 싫다.
- 넌 그런 적 없냐? 전에 술 먹고 필름 끊겼을 때 내가 데리러 갔다. 그때 내가 화냈냐.
- 우리 중 화를 더 많이 내는 건 누굴까? 일단 화부터 내는 건?
- 넌 나를 위한다고 말하지만, 일하고 있는 지금도 날 괴롭히고 있잖아.
- 넌 그런 적 없냐? 전에 술 먹고 필름 끊겼을 때 내가 데리러 갔다. 그때 내가 화냈냐.
- 우리 중 화를 더 많이 내는 건 누굴까? 일단 화부터 내는 건?
- 넌 나를 위한다고 말하지만, 일하고 있는 지금도 날 괴롭히고 있잖아.
남자친구의 표현력이 좀 부족한 까닭에 하고 싶은 말을 제대로 못 하는 것 같은데, 남자친구가 하려는 말을 대신하자면 아래와 같다.
- 넌 나를 통제만 하려 한다. 어느새 난 네 눈치만 보고 있는 연애를 하는 것 같다.
- 난 널 '이해'하고 너에게 맞추려고 노력하는데, 넌 아무 노력도 안 한다.
- 넌 나에게 서운함과 섭섭함의 감정만 느끼는 것 같다. 애정이 안 느껴진다.
- 난 널 '이해'하고 너에게 맞추려고 노력하는데, 넌 아무 노력도 안 한다.
- 넌 나에게 서운함과 섭섭함의 감정만 느끼는 것 같다. 애정이 안 느껴진다.
연인이라면, 언제나 상대의 허물을 끝까지 들춰 부끄럽게 만들기 보다는, 가끔 알아도 모르는 척 해주는 관용을 베풀어야 한다. K양의 남자친구가 극도의 스트레스를 받았던 건, K양이 화를 자주 내서라기보다는, 갈등이 생길 때마다 남자친구를 홀딱 벗겨 놓고 수치스럽게 만드는 듯한 K양의 태도 때문이었을 것이다.
저런 일이 매일 있는 것도 아니고, 처음과 비교하자면 그래도 꼬박꼬박 연락해 상황을 알려 줄 정도로 남자친구가 충실해지지 않았는가. 이런 건 어느 정도 감안해 '실수'에 대해서는 용서해 줄줄도 알아야지, 뭐 하나 잘못하면 '너 잘 걸렸다.'라며 벼르고 있었던 사람처럼 총공격을 하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 게다가 남자친구는 새벽에 들어와서는 몇 시간 잠도 안 자고 출근 할 정도로 자신의 일에 철저한 사람 아닌가. 그가 술과 친구 좇다가 인생을 망치는 망나니 타입이라면 때려서라도 버릇을 고치게 만들어야겠지만, 간만에 만난 친구와 술 한 잔 하다가 대화가 길어진 것 정도는 웃으며 넘어가 주자. 그 정도도 허용하지 못하는 여자와는 피곤해서 함께 할 수 없다.
3. 말 한 마디 못해서 계속되는 싸움.
짧은 얘기를 먼저 하자. 남자친구가 '역습'을 하자 당황한 K양은
"그럼 나더러 화를 내지 말라는 거네? 화나도 화내지 말라고?"
라며 '답답한 여자' 특유의 흑백논리를 펼치기 시작한다. 화를 내지 말라는 얘기가 아니라고 남자친구가 말해도, K양은 못 알아듣는 건지 아니면 못 알아듣는 척 하고 싶은 건지
"그러니까 그 말이 나더러 화내지 말라는 건데?"
라며 뫼비우스의 띠 같은 말을 해 버린다. 언젠가 진중권 교수가 한 "말을 해도 못 알아들으니 이길 자신이 없다."는 말이 생각난다. 두 사람 모두 그런 태도로 대화 할 거라면 14박 15일 동안 토론을 해도 승부를 가릴 수 없을 것이다.
K양 - 그러니까 앞으로 가라는 얘기네?
남친 - 앞으로 가라는 얘기가 아니라, 뒤로 가지 말라고.
K양 - 뒤로 가지 말라는 게 앞으로 가라는 얘기잖아.
남친 - 뒤만 있는 게 아닌데, 넌 계속 뒤로만 가잖아.
K양 - 그러니까 앞으로 가라는 얘기네?
남친 - 앞으로 가라는 얘기가 아니라, 뒤로 가지 말라고.
(이후 무한반복)
남친 - 앞으로 가라는 얘기가 아니라, 뒤로 가지 말라고.
K양 - 뒤로 가지 말라는 게 앞으로 가라는 얘기잖아.
남친 - 뒤만 있는 게 아닌데, 넌 계속 뒤로만 가잖아.
K양 - 그러니까 앞으로 가라는 얘기네?
남친 - 앞으로 가라는 얘기가 아니라, 뒤로 가지 말라고.
(이후 무한반복)
둘 중 누구라도 "그때 내 기분이 이러이러 했어. 그래서 했던 말인데, 지금 생각해 보니까 내가 너무 내 기분에만 집중했던 것 같아. 미안해."라며 사과했으면 끝나는 문제다. 하지만 두 사람 모두 저 간단한 한 마디를 하지 못한 채 "또 화내면 헤어지겠다.", "화를 내지 말라는 거냐?"라는 이야기를 반복하며 냉전 중이다.
4. 이상한 기준과 예의의 상실.
높아졌다 낮아졌다 하는 기준 같은 건 얼른 집어치우길 권한다. 확실한 기준을 세우고 싶으면, 변하지 않으며 둘 모두에게 똑같이 적용되는 기준을 세워야 한다. 이건 남자친구 개조작업에 들어간 다른 여성대원들에게도 종종 보이는 모습인데, 그녀들의 고무줄 같은 기준을 보자.
ⓐ 건강을 생각해서 금연 하라는 거다. 담배 끊고 건강하게 살자.
-> 하지만 내가 약속시간에 늦어 네가 기다릴 땐 한 대 피우고 있어도 된다.
ⓑ 내일 출근 늦을 수 있으니 일찍 들어가라는 거다. 술 그만 마시고 들어가라.
-> 하지만 나랑 새벽 3시까지 놀다가 늦게 들어가는 건 괜찮다.
ⓒ 친구와 술 마실 시간은 있으면서 나랑 만날 시간은 없는 것 같아 서운하다.
-> 하지만 내가 모임에 가는 건 이해해줘야 한다.
ⓓ 잠 얼마 못 자면 업무에 지장 있으니까 한 소리지, 괴롭히려고 한 말이 아니다.
-> 하지만 네가 업무 중이라도 난 지금 화가 났으니 좀 풀어야 겠다. 대답해라.
-> 하지만 내가 약속시간에 늦어 네가 기다릴 땐 한 대 피우고 있어도 된다.
ⓑ 내일 출근 늦을 수 있으니 일찍 들어가라는 거다. 술 그만 마시고 들어가라.
-> 하지만 나랑 새벽 3시까지 놀다가 늦게 들어가는 건 괜찮다.
ⓒ 친구와 술 마실 시간은 있으면서 나랑 만날 시간은 없는 것 같아 서운하다.
-> 하지만 내가 모임에 가는 건 이해해줘야 한다.
ⓓ 잠 얼마 못 자면 업무에 지장 있으니까 한 소리지, 괴롭히려고 한 말이 아니다.
-> 하지만 네가 업무 중이라도 난 지금 화가 났으니 좀 풀어야 겠다. 대답해라.
상대에겐 엄격하게, 자신에겐 관대하게 적용할 거라면 저런 이야기는 아예 꺼내질 말자. K양의 남친도 딱 저 '이상한 기준'을 지적하고 있지 않은가. 그는 좋은 남친이 되기 위해 K양의 요구를 거의 대부분 수용했는데, 그러다 보니 자기 혼자만 '애견훈련'같은 걸 받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던 거다. 잘 하려고 노력하면 노력할수록 자신은 K양의 눈치를 보거나 주눅이 들게 되니, 이건 뭔가 아니다 싶어 '난 이 연애를 왜 하고 있는가?'까지 생각했을 수도 있다. 이걸 차분하게 설명하기 어려운 까닭에 "또 화내면 헤어지겠다."는 뭉뚱그린 결론만 꺼내놓았을 것이고 말이다.
하나 더. 난 K양이 사건 다음 날 남자친구에게 한 멘트에 주목한다.
"이거나 읽어."
말에는 태도가 묻어난다. K양이 남자친구를 조금이라도 어렵게 생각했다면 "이거나 읽어."라고 말하지 못했을 것이다. 꽤 오래 사귄 커플들에게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는 문제다. 영화 <봄날은 간다>에서도 갈등의 최고조에 저 '예의 없음'에 관한 대사를 넣지 않았던가.
상우 - 나 어디 좀 갔다 올게.
은수 - 빨리 와서 라면이나 끓여. 어?
상우 - 나 일, 일 있어.
은수 - 무슨 일? 내가 모르는 일 있어? 또 어디 가서 술이나 마시려고 그러지 뭐.
상우 - 은수씨. 내가 라면으로 보여? 말조심해.
은수 - 빨리 와서 라면이나 끓여. 어?
상우 - 나 일, 일 있어.
은수 - 무슨 일? 내가 모르는 일 있어? 또 어디 가서 술이나 마시려고 그러지 뭐.
상우 - 은수씨. 내가 라면으로 보여? 말조심해.
만약 K양이 퇴근 후 직장에서 있었던 일을 남자친구에게 전화로 말했는데, 남자친구가 "전화 끊고 샤워나 해."라고 대답했다면 K양의 기분은 어땠을까?
"전 남자친구에게 그 글을 보낸 게, 웃겨서 보낸 거였거든요.
남자친구를 탓하려고 했다거나 면박을 주려고 보낸 게 아니었어요."
남자친구를 탓하려고 했다거나 면박을 주려고 보낸 게 아니었어요."
의도가 무엇이었든 그 방법이 잘못되었다.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려고 금일봉을 전달하더라도, 봉투를 상대에게 집어 던지듯 주면, 상대는 그 행위의 예의 없음만 기억할 것 아닌가. "그런 게 아니었어."라고 뒤늦게 해명하며 외양간 고쳐봐야, 소는 이미 떠난 후라는 걸 잊지 말길 바란다.
이 갈등의 보다 근본적인 원인은, 두 사람 모두 겁이 많은 사람이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K양은 남자친구가 자신보다 다른 것에 관심을 더 쏟게 될까봐 겁을 내고 있고, 남자친구는 K양이 자신을 또 궁지로 몰아 넣을까봐 겁내고 있다. 그런 와중에 남자친구는 그 찝찝한 기분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를 모르니
"또 화내면 헤어질 거다."
라고 뭉뚝한 말을 한 것이고, 그 말에 충격 받은 K양은 심리상담까지 받으며 '화내는 것'에 대한 치료를 받고 있다.
난 K양에게 '남친 바라기'를 그만 둘 것을 권해주고 싶다. 고3 수험생의 엄마가 된 기분으로 남자친구를 관리 감독 하려 들면, 본인은 지치고 상대는 미칠 수 있다. 자투리 시간을 아껴서 문제 하나라도 더 풀라고 닦달하듯, 지인 만날 시간에 날 만나라고 강요하는 일이 벌어질 수 있단 얘기다. 계속 남친만 기다리고 있으니 그가 3분만 늦어도 열불이 치밀어 그에게 일부러 더 못 되게 굴 위험도 있다. 그러니 남자친구를 손바닥 위에 올려두려 하지 말고, 손 맞잡은 채 함께 걸을 수 있은 연애를 하길 바란다.
▲ 여기다 뭐라고 적어야 사람들이 안 까먹고 추천버튼을 누를까. 의리도 이제 시들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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