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귄지 한 달도 안되어 생각할 시간을 갖기로 한 커플
역술가의 말에 따라 모든 수를 두었던 사연은, 그 답도 역술가에게 듣길 권한다.
이성의 영역 밖에서 일어난 일들에 대해 내게 물으면 난 할 말이 없다. 여기서는 K양의 사연을 살짝만 들여다봐도 '헤어질 게 뻔함'이라는 결론이 나오는데, 역술가의 말만 인용하며 "앞으로 어떻게 될까요?"만 물으면 해 줄 말이 없다.
이 글은, K양의 '결혼운' 같은 것에 대한 얘기가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해도 분명 문제가 될 K양의 성격 및 습관에 대한 이야기라고 생각하며 읽어주길 바란다. 출발해 보자.
소개팅 다음 날 남자친구가 K양과 '결혼'을 생각한다는 얘기를 했을 때, 난 거기서 이 관계의 끝을 봤다. 남자친구는 첫인상만으로 K양의 이미지를 만들었고, 그 이미지와 결혼하면 좋겠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한 달이 안 되는 기간 동안, 남자친구가 가진 K양의 이미지는 산산조각이 났다. K양은 남자친구가
라는 말을 한 것만 부여잡고 있는 것 같은데, 여기서 보면 한숨만 나온다. 저건 소개팅으로 둘이 처음 만난 다음 날 남자친구가 한 말이다. 내 지인 J가 템플스테이를 떠나기 전 "난 정말 자연과 하나 된 저런 곳에서 평생 살고 싶어."라고 한 것과 비슷하다. J는 절에서 발우공양 할 때 도망쳐 나왔다. 밖에서 볼 땐 '발우공양'도 소박한 낭만으로 보이지만, 실제로 가서 김치조각 하나로 발우 씻어가며 제대로 발우공양 한 번 하고 나면, '소박한 낭만'같은 소리는 쏙 들어갈 것이다.
사귀는 동안, K양에 대한 환상이 깨질 계기는 정말 많았다. 큼지막한 것만 골라도 일단 네 개가 보이는데, 그 네 개를 함께 들여다보자.
난 솔직히
라는 K양의 말에서 '여기 과거의 영광 속에 살고 있는 여자가 하나 더 있네.'라고 생각했다.
상황은 변했다. 5년 전 오픈행사 한 미용실에 가서, "저 5년 전에 여기서 머리할 때 펌 2만원에 했거든요? 그러니까 2만원에 펌 해주세요."라고 말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나와 비슷한 성격을 가진 미용실 주인을 만나면, "머리하시기 전에 머리에 이상은 없나 부터 검사해 보세요. 88번 버스 타면 일산병원 앞까지 갈 겁니다."라는 대답을 들을 수 있을 것이다.
사귄 지 열흘도 안 되어 저런 일들이 일어나면, 그 어떤 남자라도 '내가 이 여자랑 왜 사귀는가?'에 대해 고민할 것이다. 특히 서운함이 극에 달하자 친구를 시켜 술자리로 남친을 부르고, 밤새 토하며 남친에게 토사물을 치우게 한 건, 미안하지만 '바보같은 짓'이라 할 수 있다.
통성명을 한 지 열흘도 지나지 않은 상황에서…. 난 정말 뭐라고 말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난 K양이, 집착하는 구남친을 현남친과 통화하게 만든 게 결정적인 사건이라고 생각한다.
무슨 헛소리를 할지 알고 있었으면서도 둘이 통화까지 하도록 상황을 만들었다는 게,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하기 어렵다. 남친이 생겼다는 걸 알고 협박까지 하던 구남친이, 설마 영화 <엽기적인 그녀>에서 나오듯 현남친에게
라며 훈훈한 인수인계 했을까? 여기다 다 적진 않겠지만, 누구나 예상하듯 구남친은 혼신의 힘을 다해 하얗게 불태웠다. 특히 저녁에 이불 덮고 함께 누웠을 때 일어났던 일들에 대해선 아주 세밀하게 묘사까지 해가며 말이다.(구남친으로 인한 1차 피해자는 K양이니, 이 얘기는 여기까지만 하자.)
여하튼 종합해 보면, 사귄지 열흘도 지나지 않아 수많은 일들이 일어났다. 남자친구가 K양에게 가졌던 좋은 첫인상은, 술 먹고 아무렇게나 업혀가는 K양의 술버릇으로 인해 한 번 깨지고, 구남친의 '네가 모르는 일들을 알려주마.'라는 이야기들로 두 번 깨졌다. 그 후엔 K양의 애정결핍으로 인한 요구들로 인해 환상은 또 깨졌다. 차에 비유하자면, 빼어난 외관의 포르쉐를 갖게 되어 좋아했는데, 알고 보니 침수차량인데다 잔고장도 많았던 것이다.
구남친으로 인해 현남친이 혼란을 겪고 있음을 잘 보여주는 멘트만 하나 소개하자.
얼마 전 현남친이 한 말이다. 모든 여성들이 바라는 남자는 이런 상황 가운데서도 다 이해하고 다 덮어주며 사랑을 맹세하는 남자겠지만, 남자가 무슨 성자는 아니잖은가. 오히려 '알아가다 보니 엉망진창인 부분이 보이는 여자'를 '첫인상이 좋았다'는 이유만으로 덮어두는 남자가 더 이상한 거다. 반대로 생각해 보자. 그대가 학업과 일을 병행하며 바쁘게 사는 중인데, 소개팅으로 만나 사귀게 된 남자가 외롭다며 자꾸 집으로 부른다. 그러다 친구를 시켜 술자리로 불러내기도 하는데, 그는 필름이 끊긴 채 그대의 자취방에 와서 밤새 주정하고 토한다. 그러다 며칠 뒤 그대는 그의 '구여친'이라는 사람과 통화를 하며 경악스러운 얘기들을 듣는다. 버틸 수 있겠는가? 현남친이 내게 사연을 보냈다면, 나는 1초라도 빨리 그 관계에서 발을 빼라고 조언했을 것이다.
나도 괴롭다. 낯모르는 나에게 한 없이 큰 친근감을 표시하며 "안녕하세요, 무한님!"이라고 시작하는 사연을 보낸 독자에게 왜 나쁜 소리를 하고 싶겠는가. 나 역시 조금만 태도를 바꾸면 달달한 연애로 이어질 수 있는 사연을 다루고 싶고, 축복해주고 싶다.
하지만 내게 도착하는 사연은 대부분 이미 곪을 대로 곪았거나, 산산이 부서지고 난 뒤 몇 조각 파편만 남은 이야기인 경우가 많다. 때문에 난 위기의 순간에 출동하는 구조대라기 보다는, 사건 종료 후 실마리를 찾기 위해 파견된 과학수사대의 역할을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래서 아직 자신의 연애가 회생 가능성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독자들은, 매뉴얼을 받아 본 후 충격을 받기도 한다. 아니, 대개 그렇다. 그 중엔 인정을 하는 제보자도 있지만, 자신이 낸 결론과 다른 결론이라며 화를 내는 제보자가 다수다.
위의 K양 사연만 하더라도, 역술가를 찾기 전 미리 사연을 보냈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역술가가 두 사람 사주가 잘 맞는다고 한 까닭에 K양은 마냥 기뻐했던 것 같은데, 이렇게 현남친의 환상을 조각내 놓은 상황에선 방법이 없다. K양의 애정결핍과 '영광의 시절을 떠올리는 버릇'을 고치지 않는 한, 어떤 남자를 만나도 비슷한 일이 벌어질 것이고 말이다.
확인된 것은 아니지만 K양이 그렇다고 말했고, 또 남자들의 맹목적인 호의를 받아온 과거 경험으로 미루어 K양의 외모는 빼어난 것 같다. 하지만 그 외모로 인해 남자들의 호의와 헌신을 받아온 것이 K양에겐 악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위에서 말한 '구토사건'이 있던 날, 남자친구가 밤새 K양을 보살폈지만, K양은 그걸 '남자친구라면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K양이 이 매뉴얼로 인해 "쳇, 내 편이 아니었네."라며 삐친 채 등 돌리지 않는다면, 앞으로 K양의 사연은 내 메일함 종종 도착할 것 같다. 모양과 향기가 빼어나니 날아오는 나비와 벌은 많겠지만, 그들은 꿀이 없음을 확인하고 금방 떠나갈 테니 말이다. 자연히 K양의 연애는 '용두사미'의 형세가 될 것이고, 그러면서 "동쪽에서 오는 남자가 길하다." 따위의 말만 듣다 보면, 앞으로 10년이 지나도 뭐가 문제인지 모른 채 같은 레퍼토리만 반복하게 될 것이다.
내가 '괜찮은 사람'이라는 건, 과거에 내가 사람들에게 어떤 대접을 받았나로 설명될 수 있는 게 아니다. 지금 그 사람을 어떤 마음으로 어떻게 대하느냐로 증명되는 것이다. K양의 이번 연애는 100점으로 시작해 시간이 갈수록 감점을 당하는 연애였다. 지금은 점수가 17점정도 남은 것 같은데, 이런 상황이라면 길거리에서 옷깃을 스치는 그냥 '쌩판 남'인 사람보다도 못한 수준이니 그냥 접길 권한다. 상대 역시 금사빠 기질이 다분한 남자인 까닭에 이건 방법이 없다. 연애의 뚜껑 열기도 전에 "넌 현명한 여자야."라고 말하는 건, 자기 환상이 그렇다고 말하는 것이거나 립서비스 둘 중 하나다.
현명한 남자를 만나는 것도 중요하지만, K양 역시 현명한 여자가 되어야 한다. 바로 위에서도 말했지만 이건 조금만 생각을 했어도 '이상한 점'이 많다는 걸 K양 역시 알아챌 수 있었을 것이다.
우선, K양과 10시간도 함께 지내보지 않은 채 '결혼'을 전제로 하는 이 상황은 분명 이상하다. 하지만 K양은 역술가가 한 얘기(스물여덟에 결혼할 사람을 만난다)도 있고, 또 이렇게 들이대는 남자가 처음은 아니었기에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다보니 연애는 금사빠인 남친이 추진하는 방향대로 전부 흘러갔다. K양이 자취방을 남친 자취방 근처로 옮겼고, K양 고향에 내려가 부모님께 인사를 하기도 했다. 서로가 어떻게 살아온 사람인지를 알기도 전에 마음동하는 대로 다 저지른 것이다. 금사빠인 남자와 연애한 여자들은 대개
라고 말하는데, 그걸 '진정한 사랑'이라고 착각하면 곤란하다. 그건, 뒷생각 안 하고 일단 저지르니 그럴 수 있었던 것일 뿐이다. 내가 금사빠 남자고, 오늘 그대와 사귀기로 했다면, 주말엔 함께 일본을 다녀올 것이다. 그대에게 옷과 가방과 신발을 선물하며 내 마음을 표현하고, 바다가 보고 싶다고 하면 당장 차를 몰아 화진포에 다녀올 것이다. 연락을 하지 않거나 만나지 않으면 당장 숨을 못 쉴 사람처럼, 월차든 연차든 내서 1분 1초라도 더 붙어 있으려 할 것이고 말이다.
하지만 가을엔 유럽에 다녀오자는 내 약속은, 내가 카드 고지서를 받아 들고 난 이후 수정될 것이다. 어떻게든 시간을 내려 했던 모습은 회사에서 경고를 받고 난 이후 달라질 것이고, 줄어가는 통장 잔고를 보며 난 '검소한 데이트'에 관한 얘기를 하게 될 것이다. 금사빠의 연애가 대개 이렇다.
첫 약속만을 부여잡은 채 들떠있는 여자는, 왜 예전과 다르냐며 서운해 하고, 함께 했던 약속들을 왜 지키지 않냐며 추궁할 것이다. 결핍이 느껴질수록 더욱 여자의 요구는 거세지고, 그런 모습들에 남자는 질려 만세를 부르게 될 것이다.
만난 지 열흘도 채 지나지 않아 남자친구가 K양 인생을 책임지겠다고 말해 K양은 기뻤겠지만, 서두에서 말했듯 난 거기서부터 이별의 징후를 읽었다. K양의 헛발질과 구남친의 어시스트로 인해 이번 이별은 속성으로 진행되었지만, 길게 갔어도 실망과 절망의 사건들이 두 사람의 관계를 서서히 무너뜨렸을 것이다. 그러니 미련은 그만 내려두고, 다음번엔 단순히 '예쁜 여자'가 아닌 '현명한 여자'로서의 연애를 하길 바란다.
▲ "제가 힘들 때 그가 좀 맞춰주길 바랐을 뿐인데…." 27일 중에 24일 힘들다는 게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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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술가의 말에 따라 모든 수를 두었던 사연은, 그 답도 역술가에게 듣길 권한다.
"스물여덟에 만난다고 했는데, 제가 지금 스물여덟인 것도 맞고요.
이 남자가 제게 오기는 하지만 그 과정이 쉽진 않을 거라고 했어요.
전남친 별로라는 것도 다 맞췄거든요. 헤어진다고 했는데 정말 헤어졌고."
이 남자가 제게 오기는 하지만 그 과정이 쉽진 않을 거라고 했어요.
전남친 별로라는 것도 다 맞췄거든요. 헤어진다고 했는데 정말 헤어졌고."
이성의 영역 밖에서 일어난 일들에 대해 내게 물으면 난 할 말이 없다. 여기서는 K양의 사연을 살짝만 들여다봐도 '헤어질 게 뻔함'이라는 결론이 나오는데, 역술가의 말만 인용하며 "앞으로 어떻게 될까요?"만 물으면 해 줄 말이 없다.
이 글은, K양의 '결혼운' 같은 것에 대한 얘기가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해도 분명 문제가 될 K양의 성격 및 습관에 대한 이야기라고 생각하며 읽어주길 바란다. 출발해 보자.
1. 남자친구가 실망했을 부분들.
소개팅 다음 날 남자친구가 K양과 '결혼'을 생각한다는 얘기를 했을 때, 난 거기서 이 관계의 끝을 봤다. 남자친구는 첫인상만으로 K양의 이미지를 만들었고, 그 이미지와 결혼하면 좋겠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한 달이 안 되는 기간 동안, 남자친구가 가진 K양의 이미지는 산산조각이 났다. K양은 남자친구가
"너와 결혼하고 싶다.
결혼하면 직장은 마실 다니듯 다니고, 재미없으면 언제든 그만 둬도 된다.
취미생활을 함께하고 서로 많은 부분들을 공유하는 부부가 되자."
결혼하면 직장은 마실 다니듯 다니고, 재미없으면 언제든 그만 둬도 된다.
취미생활을 함께하고 서로 많은 부분들을 공유하는 부부가 되자."
라는 말을 한 것만 부여잡고 있는 것 같은데, 여기서 보면 한숨만 나온다. 저건 소개팅으로 둘이 처음 만난 다음 날 남자친구가 한 말이다. 내 지인 J가 템플스테이를 떠나기 전 "난 정말 자연과 하나 된 저런 곳에서 평생 살고 싶어."라고 한 것과 비슷하다. J는 절에서 발우공양 할 때 도망쳐 나왔다. 밖에서 볼 땐 '발우공양'도 소박한 낭만으로 보이지만, 실제로 가서 김치조각 하나로 발우 씻어가며 제대로 발우공양 한 번 하고 나면, '소박한 낭만'같은 소리는 쏙 들어갈 것이다.
사귀는 동안, K양에 대한 환상이 깨질 계기는 정말 많았다. 큼지막한 것만 골라도 일단 네 개가 보이는데, 그 네 개를 함께 들여다보자.
ⓐ 회식 후 집에 가는 길에 남친이 걱정해 주지 않는 것 같아서 싸움.
ⓑ 친구를 이용해 남친을 술자리로 부른 뒤 자신은 필름 끊김.
ⓒ 남친 안고 자고 싶어 불렀는데, 남친이 피곤해서 못 가겠다고 하자 싸움.
ⓓ 집착하는 구남친에게 연락이 오자 현남친에게 연결해 줌.
ⓑ 친구를 이용해 남친을 술자리로 부른 뒤 자신은 필름 끊김.
ⓒ 남친 안고 자고 싶어 불렀는데, 남친이 피곤해서 못 가겠다고 하자 싸움.
ⓓ 집착하는 구남친에게 연락이 오자 현남친에게 연결해 줌.
난 솔직히
"과거엔 저 보러 서울에서 창원까지 내려오는 남자들도 있었는데,
지금 남친은 40분 걸리는 거리를 피곤하다고 안 오더라고요."
지금 남친은 40분 걸리는 거리를 피곤하다고 안 오더라고요."
라는 K양의 말에서 '여기 과거의 영광 속에 살고 있는 여자가 하나 더 있네.'라고 생각했다.
상황은 변했다. 5년 전 오픈행사 한 미용실에 가서, "저 5년 전에 여기서 머리할 때 펌 2만원에 했거든요? 그러니까 2만원에 펌 해주세요."라고 말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나와 비슷한 성격을 가진 미용실 주인을 만나면, "머리하시기 전에 머리에 이상은 없나 부터 검사해 보세요. 88번 버스 타면 일산병원 앞까지 갈 겁니다."라는 대답을 들을 수 있을 것이다.
사귄 지 열흘도 안 되어 저런 일들이 일어나면, 그 어떤 남자라도 '내가 이 여자랑 왜 사귀는가?'에 대해 고민할 것이다. 특히 서운함이 극에 달하자 친구를 시켜 술자리로 남친을 부르고, 밤새 토하며 남친에게 토사물을 치우게 한 건, 미안하지만 '바보같은 짓'이라 할 수 있다.
"전 사실 구남친들에게도 종종 그래왔기에 이 일이 아무 일도 아니었거든요.
그런데 남친에게는 큰일이었던 것 같아요. 여성스러운 이미지가 사라졌나 봐요."
그런데 남친에게는 큰일이었던 것 같아요. 여성스러운 이미지가 사라졌나 봐요."
통성명을 한 지 열흘도 지나지 않은 상황에서…. 난 정말 뭐라고 말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2. 결정적인 사건.
난 K양이, 집착하는 구남친을 현남친과 통화하게 만든 게 결정적인 사건이라고 생각한다.
"저는 알고 있었어요. 구남친이 지금 남친에게 무슨 헛소리를 할지.
그래서 정말 헤어질지도 모르겠다는 마음으로 전화통화를 지켜봤고요.
침착하게 전화를 끊은 남친이, 되게 고통스러워 하더니…."
그래서 정말 헤어질지도 모르겠다는 마음으로 전화통화를 지켜봤고요.
침착하게 전화를 끊은 남친이, 되게 고통스러워 하더니…."
무슨 헛소리를 할지 알고 있었으면서도 둘이 통화까지 하도록 상황을 만들었다는 게,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하기 어렵다. 남친이 생겼다는 걸 알고 협박까지 하던 구남친이, 설마 영화 <엽기적인 그녀>에서 나오듯 현남친에게
"K양 가끔 술 많이 마시고 필름 끊길 때 있거든요.
그럴 땐 화내지 마시고 토하는 거 치워주세요. 휴지는 화장실 선반에 많아요.
그리고 오이 알러지 있으니까 김밥 먹을 때 오이를 빼 주시고요.
얼음 들어간 커피 마시면 설사하니까, 여름에도 커피는 따뜻한 걸로 주시고…."
그럴 땐 화내지 마시고 토하는 거 치워주세요. 휴지는 화장실 선반에 많아요.
그리고 오이 알러지 있으니까 김밥 먹을 때 오이를 빼 주시고요.
얼음 들어간 커피 마시면 설사하니까, 여름에도 커피는 따뜻한 걸로 주시고…."
라며 훈훈한 인수인계 했을까? 여기다 다 적진 않겠지만, 누구나 예상하듯 구남친은 혼신의 힘을 다해 하얗게 불태웠다. 특히 저녁에 이불 덮고 함께 누웠을 때 일어났던 일들에 대해선 아주 세밀하게 묘사까지 해가며 말이다.(구남친으로 인한 1차 피해자는 K양이니, 이 얘기는 여기까지만 하자.)
여하튼 종합해 보면, 사귄지 열흘도 지나지 않아 수많은 일들이 일어났다. 남자친구가 K양에게 가졌던 좋은 첫인상은, 술 먹고 아무렇게나 업혀가는 K양의 술버릇으로 인해 한 번 깨지고, 구남친의 '네가 모르는 일들을 알려주마.'라는 이야기들로 두 번 깨졌다. 그 후엔 K양의 애정결핍으로 인한 요구들로 인해 환상은 또 깨졌다. 차에 비유하자면, 빼어난 외관의 포르쉐를 갖게 되어 좋아했는데, 알고 보니 침수차량인데다 잔고장도 많았던 것이다.
구남친으로 인해 현남친이 혼란을 겪고 있음을 잘 보여주는 멘트만 하나 소개하자.
"왜, 전남친은 그렇게 해 줬어?"
얼마 전 현남친이 한 말이다. 모든 여성들이 바라는 남자는 이런 상황 가운데서도 다 이해하고 다 덮어주며 사랑을 맹세하는 남자겠지만, 남자가 무슨 성자는 아니잖은가. 오히려 '알아가다 보니 엉망진창인 부분이 보이는 여자'를 '첫인상이 좋았다'는 이유만으로 덮어두는 남자가 더 이상한 거다. 반대로 생각해 보자. 그대가 학업과 일을 병행하며 바쁘게 사는 중인데, 소개팅으로 만나 사귀게 된 남자가 외롭다며 자꾸 집으로 부른다. 그러다 친구를 시켜 술자리로 불러내기도 하는데, 그는 필름이 끊긴 채 그대의 자취방에 와서 밤새 주정하고 토한다. 그러다 며칠 뒤 그대는 그의 '구여친'이라는 사람과 통화를 하며 경악스러운 얘기들을 듣는다. 버틸 수 있겠는가? 현남친이 내게 사연을 보냈다면, 나는 1초라도 빨리 그 관계에서 발을 빼라고 조언했을 것이다.
3. 그 밖의 이야기들.
나도 괴롭다. 낯모르는 나에게 한 없이 큰 친근감을 표시하며 "안녕하세요, 무한님!"이라고 시작하는 사연을 보낸 독자에게 왜 나쁜 소리를 하고 싶겠는가. 나 역시 조금만 태도를 바꾸면 달달한 연애로 이어질 수 있는 사연을 다루고 싶고, 축복해주고 싶다.
하지만 내게 도착하는 사연은 대부분 이미 곪을 대로 곪았거나, 산산이 부서지고 난 뒤 몇 조각 파편만 남은 이야기인 경우가 많다. 때문에 난 위기의 순간에 출동하는 구조대라기 보다는, 사건 종료 후 실마리를 찾기 위해 파견된 과학수사대의 역할을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래서 아직 자신의 연애가 회생 가능성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독자들은, 매뉴얼을 받아 본 후 충격을 받기도 한다. 아니, 대개 그렇다. 그 중엔 인정을 하는 제보자도 있지만, 자신이 낸 결론과 다른 결론이라며 화를 내는 제보자가 다수다.
위의 K양 사연만 하더라도, 역술가를 찾기 전 미리 사연을 보냈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역술가가 두 사람 사주가 잘 맞는다고 한 까닭에 K양은 마냥 기뻐했던 것 같은데, 이렇게 현남친의 환상을 조각내 놓은 상황에선 방법이 없다. K양의 애정결핍과 '영광의 시절을 떠올리는 버릇'을 고치지 않는 한, 어떤 남자를 만나도 비슷한 일이 벌어질 것이고 말이다.
확인된 것은 아니지만 K양이 그렇다고 말했고, 또 남자들의 맹목적인 호의를 받아온 과거 경험으로 미루어 K양의 외모는 빼어난 것 같다. 하지만 그 외모로 인해 남자들의 호의와 헌신을 받아온 것이 K양에겐 악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위에서 말한 '구토사건'이 있던 날, 남자친구가 밤새 K양을 보살폈지만, K양은 그걸 '남자친구라면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K양이 이 매뉴얼로 인해 "쳇, 내 편이 아니었네."라며 삐친 채 등 돌리지 않는다면, 앞으로 K양의 사연은 내 메일함 종종 도착할 것 같다. 모양과 향기가 빼어나니 날아오는 나비와 벌은 많겠지만, 그들은 꿀이 없음을 확인하고 금방 떠나갈 테니 말이다. 자연히 K양의 연애는 '용두사미'의 형세가 될 것이고, 그러면서 "동쪽에서 오는 남자가 길하다." 따위의 말만 듣다 보면, 앞으로 10년이 지나도 뭐가 문제인지 모른 채 같은 레퍼토리만 반복하게 될 것이다.
내가 '괜찮은 사람'이라는 건, 과거에 내가 사람들에게 어떤 대접을 받았나로 설명될 수 있는 게 아니다. 지금 그 사람을 어떤 마음으로 어떻게 대하느냐로 증명되는 것이다. K양의 이번 연애는 100점으로 시작해 시간이 갈수록 감점을 당하는 연애였다. 지금은 점수가 17점정도 남은 것 같은데, 이런 상황이라면 길거리에서 옷깃을 스치는 그냥 '쌩판 남'인 사람보다도 못한 수준이니 그냥 접길 권한다. 상대 역시 금사빠 기질이 다분한 남자인 까닭에 이건 방법이 없다. 연애의 뚜껑 열기도 전에 "넌 현명한 여자야."라고 말하는 건, 자기 환상이 그렇다고 말하는 것이거나 립서비스 둘 중 하나다.
현명한 남자를 만나는 것도 중요하지만, K양 역시 현명한 여자가 되어야 한다. 바로 위에서도 말했지만 이건 조금만 생각을 했어도 '이상한 점'이 많다는 걸 K양 역시 알아챌 수 있었을 것이다.
우선, K양과 10시간도 함께 지내보지 않은 채 '결혼'을 전제로 하는 이 상황은 분명 이상하다. 하지만 K양은 역술가가 한 얘기(스물여덟에 결혼할 사람을 만난다)도 있고, 또 이렇게 들이대는 남자가 처음은 아니었기에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다보니 연애는 금사빠인 남친이 추진하는 방향대로 전부 흘러갔다. K양이 자취방을 남친 자취방 근처로 옮겼고, K양 고향에 내려가 부모님께 인사를 하기도 했다. 서로가 어떻게 살아온 사람인지를 알기도 전에 마음동하는 대로 다 저지른 것이다. 금사빠인 남자와 연애한 여자들은 대개
"그 사람과는 정말 불같은 사랑을 했어요."
라고 말하는데, 그걸 '진정한 사랑'이라고 착각하면 곤란하다. 그건, 뒷생각 안 하고 일단 저지르니 그럴 수 있었던 것일 뿐이다. 내가 금사빠 남자고, 오늘 그대와 사귀기로 했다면, 주말엔 함께 일본을 다녀올 것이다. 그대에게 옷과 가방과 신발을 선물하며 내 마음을 표현하고, 바다가 보고 싶다고 하면 당장 차를 몰아 화진포에 다녀올 것이다. 연락을 하지 않거나 만나지 않으면 당장 숨을 못 쉴 사람처럼, 월차든 연차든 내서 1분 1초라도 더 붙어 있으려 할 것이고 말이다.
하지만 가을엔 유럽에 다녀오자는 내 약속은, 내가 카드 고지서를 받아 들고 난 이후 수정될 것이다. 어떻게든 시간을 내려 했던 모습은 회사에서 경고를 받고 난 이후 달라질 것이고, 줄어가는 통장 잔고를 보며 난 '검소한 데이트'에 관한 얘기를 하게 될 것이다. 금사빠의 연애가 대개 이렇다.
첫 약속만을 부여잡은 채 들떠있는 여자는, 왜 예전과 다르냐며 서운해 하고, 함께 했던 약속들을 왜 지키지 않냐며 추궁할 것이다. 결핍이 느껴질수록 더욱 여자의 요구는 거세지고, 그런 모습들에 남자는 질려 만세를 부르게 될 것이다.
만난 지 열흘도 채 지나지 않아 남자친구가 K양 인생을 책임지겠다고 말해 K양은 기뻤겠지만, 서두에서 말했듯 난 거기서부터 이별의 징후를 읽었다. K양의 헛발질과 구남친의 어시스트로 인해 이번 이별은 속성으로 진행되었지만, 길게 갔어도 실망과 절망의 사건들이 두 사람의 관계를 서서히 무너뜨렸을 것이다. 그러니 미련은 그만 내려두고, 다음번엔 단순히 '예쁜 여자'가 아닌 '현명한 여자'로서의 연애를 하길 바란다.
▲ "제가 힘들 때 그가 좀 맞춰주길 바랐을 뿐인데…." 27일 중에 24일 힘들다는 게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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