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인 회사의 남자, 을인 거래처의 그녀 외 2편
최형, 난 최형이 그녀에게 해줄 수 있는 게 뭐가 있는지 궁금해. 회사랑 연관 지어 생각하면 최형이 좀 힘을 써서 상대방의 회사에 호의를 보일 수는 있겠지. 그런데 그게 뭐? 그게 상대한테 직접적인 도움이 되는 건가? 아니잖아.
"실제로 거래처에 가면 그쪽 직원들이 저를 잘 챙겨줍니다.
간식을 주거나 식사를 대접하는 경우도 있죠."
난 아무리 봐도 최형이 큰 착각을 하는 것 같아. 그건 손님을 향한 호의야. 최형이 직업을 밝히지 말아달라고 해서 이걸 어떻게 말해야 좋을지 모르겠는데, 얼마 전에 이전한 병원과 인테리어 회사 얘기로 바꿔 볼게. 병원을 오픈하면서 원장은 인테리어 회사 사장(원장의 고교 선배)에게 '최소한의 비용으로 최대 효과를'이라는 부탁을 했어. 그래서 시세의 2/3가격으로 계약을 했지. 그러다 보니 인테리어 회사 사장에게 쩔쩔매는 일이 많아졌어. 그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면 일반인들이 모르는 부분을 엉망으로 해 놓을 수 있으니까.
인테리어 회사 사장은 구병원에 종종 들렀어. 원장과 상의한다는 명목이었는데, 오면 그곳 직원들이 사장님 오셨냐며 친절하게 맞이해 주니까 데스크 앞에 와서는 괜히 말도 걸고 그랬지. 오픈하는 곳에 직원들을 위해 옷장을 만들어 주겠다, 직원 휴게실에 신발장을 만들어 주겠다, 일하기 편하도록 배선과 수도 배치를 어떻게 해 주겠다 하는 이야기를 하면서 기분을 낸 거야. 직원들은 당연히 그가 자신들을 위해 뭔갈 해 주겠다고 하니까 고마워했고, 필요한 게 있으면 건의를 하라는 말에 몇 가지 건의를 하기도 했어. 따지고 보면 그 사장은 원장 손님인 거니까 '손님을 향한 호의'를 계속 보이면서 말이야.
그런 일이 반복되니까 사장이 정신줄을 놔버리더라고. 따지고 보면 병원 직원이랑 인테리어 회사 사장이랑은 별 관련 없는 사이잖아. 그런데 손님을 향한 호의도 계속 되고, 또 예의상 감사하다는 리액션이 계속 되니까, 그 사장은 자신이 무슨 대단한 칼자루를 쥐고 있는 사람처럼 행동하고 말았어. 그래서 결국 직원들은 더는 그를 반갑게 맞이하지도 않았고, 오히려 피하게 되었지. 생각해 봐. 직원은 계약대로 자기 월급 받으면 그걸로 되는 거야. 신발장 안 만들어 줄까봐 쩔쩔매는 입장이 아니잖아. 원장이야 혹 그가 인테리어 엉망으로 해 놓을까봐 생글생글 웃으면서 비위맞춰 주겠지만, 직원은 그 사장에게 굽신굽신 할 필요 없는 거잖아. 최형, 여기까지 읽으면서 뭔가 느껴지는 거 없어?
1. 갑인 회사의 남자, 을인 거래처의 그녀.
최형은 저 위의 이야기에 나오는 인테리어 회사 사장 같아. 아니, 정확히 하자면 인테리어 회사 사장도 아니지. 인테리어 회사에서 일하는 직원이야. 직원인데, 병원 직원들이 친절하게 맞이해 주고 '손님에 대한 호의'를 보이니까, 그걸 최형이 착각한 것 같아.
내가 갑을관계를 아예 부정하는 게 아니야. 작년 이맘때쯤 모 기업의 팀장과 대리점주의 통화내용이 공개되어서 '갑을논란'이 된 적이 있었잖아. 지금 어딘가에도 힘에 밀려서 울며 겨자 먹는 사람이 있을 거고, 더럽고 치사해도 하소연 할 곳이 없기에 속만 태우는 사람도 있겠지. 갑인 회사의 담당자가 찾아와 헛소리를 늘어놔도, 거기에 억지로 웃어가며 비위 맞춰주는 사람도 있을 거고 말이야.
그런데 잘 봐봐. 우선, 상대는 최형이나 최형네 회사에 아쉬울 게 없는 사람이야. 울면서 겨자를 먹어야 할 이유도, 필요도 전혀 없는 사람이라고. 사실 그녀는 최형을 맞이해야 하는 사람도 아니잖아. 어쩌다 보니까 잠깐 그 임무를 맡은 것뿐이야.
"저는 그녀에게 저희 회사를 담당하는 역할을 부여하자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연락처를 주고받으며 궁금한 점이 있으면 묻겠다고도 했고,
일정이나 진행에 대해 서로 의견을 교환하자는 이야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녀는 제가 그녀에게 설정하려던 역할에 대해
자신이 그 역할을 하는 게 아니라는 점을 돌려서 말하더군요.
자신은 잠시 행사 도우미 역할만 맡았을 뿐이지, 자신과 상관없는 일이라고요."
그녀의 반응이 지극히 정상적이고, 당연하고, 상식적인 반응이야. 이게 뭐랑 똑같은 거냐면, 내가 마트에 가서 믹스커피 매대에 있는 직원을 붙잡고
"제가 이 커피 10년 째 마시고 있는 사람입니다.
요즘 이거 맛이 많이 바뀌어서, C사 커피로 옮길까도 생각 중입니다.
지금 C사 커피는 머그컵도 주는데, M사는 아무 것도 안 주고 있죠?
이런 부분에서도 차이가 나니까 제가 커피를 갈아탈 생각을 하는 겁니다.
이것 말고도 건의 사항은 많습니다. 지금은 잘 생각이 안 나는데,
생각해 보고 떠오르면 다시 또 찾아와서 이렇게 얘기하겠습니다."
라는 이야기를 하는 거랑 같은 거야. 그럼 매대에 있는 직원은 말하겠지. 자기는 마트에 고용되어 판매하고 있는 사람이고, 물건에 대한 불만이나 문의사항, 건의사항은 제조사로 말하라고. 당연한 거잖아. 이런 상황에서 내가 그 직원에게 "저는 지금 그쪽에게 그런 역할을 부여하려 하는 겁니다."라고 말하면, 그 직원은 마트에서 일하는 입장이라 손님에게 정색하며 화를 낼 순 없으니까 웃으며 제조사에 말하라고만 하겠지. 속으로는 나에 대해 '이건 또 어디가 어떻게 아픈 인간인가?'하는 생각을 하면서 말이야.
최형의 장황한 '우리 회사와 나의 역할'에 대한 설명을 들은 뒤 그녀가 말했지.
"엄청난 일을 하시네요."
저 말에 기뻐하고 있을 때가 아니야. 저 말의 속뜻은,
"그래서 뭐? 어쩌라고?"
라는 거거든. 최형은 상대가 말단이라서 최형과 최형네 회사의 영향력을 잘 모르는 것 같다고 생각하는 것 같은데, 내가 보기엔 그건 상대가 알 필요도 없고 안다고 해서 최형 비위를 맞춰야 하는 것도 아니야. 만약 최형이 뭔가 영향력을 발휘하려고 하면, 오히려 상대는 강하게 반격할 수 있거든. 그녀가 최형네 회사에 연락해서 "담당자가 자꾸 사적으로 연락해서 찝쩍거린다."라고 항의하면, 최형은 거기에 어떻게 대처할래? 평일 업무시간도 아닌 시간에 연락한 것, 주말에 연락한 것등을 근거로 따지기 시작하면 최형이 위태로워질 수 있는 거잖아.
물론 최형이 영향력을 발휘해서 상대를 괴롭히려 한 게 아니라는 거 알아. 최형의 역할을 설명해 상대를 이해시킨 뒤, 최형의 다가감을 좀 공적으로 보이고 싶은 생각에서 그런 거지. 그래서 그 이후로도 최형은 업무와 관련된 질문을 했잖아. 근데 위에서도 말했지만 그 업무는 그녀 담당이 아니고, 그녀에겐 최형에게 '손님에 대한 호의'말고는 호의를 베풀 아무 의무도 없어. 때문에 최형이 공적인 얘기-어떻게 보면 자신의 회사와 자신의 영향력을 자랑하는 듯한 얘기-를 자꾸 하니까, 그녀는 좀 짜증이 났을 거라고 나는 생각해. 그래서 눈치 좀 채라고 공적인 최형의 질문에 일부러 답을 다음 날에야 겨우 보내는 거라고 생각하고.
최형은 "저는 첫 오프라인 대화와 첫 전화 통화도 나름 괜찮았다고 생각하는데…."라고 했잖아. 오프라인 대화가 괜찮았다는 건 나도 인정해. 서로 초면인 까닭에 최형은 "이거 마셔도 돼요?"라고 말을 건 뒤, 상대의 첫인상과 업무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이야기를 잘 이끌었어. 번호도 받았지. 난 최형이 계속 그렇게 이끌어 갔으면 어땠을까 싶어. 전공에 대한 이야기, 취미에 대한 이야기, 아니면 음식이나 영화에 대한 이야기 등을 했으면 나았을 것 같아. 최형이 정말 손톱만큼이라도 그녀에게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면, 보다 더 겸손한 태도로 말이야.
상대에게 호감이 생겨 밥 한 번 같이 먹고 싶으면, 밥 한 번 같이 먹고 싶다고 하면 되는 거야. 물론 다짜고짜 시간 내라고 하면 안 되지. 우리가 살면서 지금 한 번 마주친 다음에는 영영 서로 다시 볼 일이 없을 수도 있는데, 난 그쪽과 밥 한 번 같이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이렇게 요청하는 거라고 말하면 돼. 당황스러운 요청일 수 있지만 나도 빙빙 돌려서 얘기하기 보다는, 거절당하더라도 솔직하게 부탁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해서 용기를 낸 거라고 말하면, 그런 얘기를 한다고 따귀를 때릴 사람은 없을 거야. 이렇게 솔직하게 말하는 게, 내 회사와 내 영향력이 크다는 걸 상대에게 인식시킨 후 "5월 행사는 어떻게 되나요?"라고 묻는 것보다 백배는 나을 거라는 걸 내가 보장할게. 상황에 따라 다가가는 법이 다르기는 한데, 최형에게는 진심을 꺼내 놓고 질러가는 게 가장 나을 거야. 무슨 며칠 되면 키프티콘 보내고 또 며칠 지나면 수제쿠키주고 하는 작전을 짜서 상대를 최형 손바닥에 올려놓으려고 하지 말고, 해물파전 좋아하냐고 물어봐. 정말 맛있게 하는 집 안다고, 혹시라도 맛없으면 최형이 벌칙 받겠다고 하면, 잘 될 거야.
2. 김수현 닮은 체대생 오빠.
쌍꺼풀이 없지만 웃을 때 눈웃음이 예뻐서 괜찮다고 말하는 은지 안녕. 은지가 걱정하는 것처럼 고등학교 3학년 학생의 사연이라고 그냥 넘기진 않으니 걱정하지 마. 자 그럼, 출발해 보자.
난 학창시절에 학원 형, 누나들이랑 친했어. 인사를 잘 했거든. 보통 학원차를 같이 타더라도 학년이 다르면 서로 소 닭 보듯 하면서 말 한 마디 하지 않잖아. 그런데 난 같은 학원차를 타는 형이나 누나들에게도 인사를 했어. 그러다 보니까 그들도 내게 말을 걸고, 그들과 친해지니 그들의 친구인 형, 누나들과도 엮여서 친해지게 되고 그랬지.
은지도 오늘부터는 그 오빠를 보면 무조건 인사부터 해. 이미 자세를 봐 달라고 부탁하며 말을 트긴 했다며. 그러면 그때부터는 '아는 사람' 된 거라 생각하면서 인사를 해. 인사한다고 상대가 은지 옆구리에 돌려차기를 꽂아 넣진 않을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제가 모레부터는 대련을 하는데,
그 오빠랑 대련하고 싶다고 관장님께 말 할 수도 없고….
그렇게 말하면 관장님이 분명 이상하게 볼 수 있잖아요."
사진가 브라이언 피터슨이 한 말을 소개해 줄게. 그가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 촬영할 때, 바닥에 배를 깔고 엎드려야 할 상황을 두고 한 말이야.
"(생략)그들은 나를 보고 분명히 카메라 장비를 들고 다니는 이방인이라고
생각했을 것이고, 나는 (그들 앞에서 배를 깔고 엎드리기가)창피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종종 이런 느낌이 들 때면 나는 간단히 이렇게 자문해 본다.
'강렬한 느낌이 들 수 있는 이미지를 필름에 담을 것이냐,
아니면 사람들이 나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본다고 해서 그냥 지나쳐버릴 것이냐?'
(중략)
당신 주변의 사람들에게 '바보처럼' 보이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이
강렬한 이미지를 만들어내지 못하는 것에 대한 핑계가 될 수는 없다."
관장님 역시, 그 오빠와 대련을 시켜달라고 했다고 은지의 명치에 정권을 내지르진 않으실 거야. 그러니까 이런 경우엔 일단 저질러. 남들은 은지가 생각하는 것만큼 은지의 행동이나 말에 대해 오랫동안 생각하지 않아. 물론 난 고교시절 수업시간 내 앞자리에 앉아 자다가 방귀를 낀-그 소리에 자기가 놀라서 깬-여자애를 아직 기억하고 있긴 한데, 아무튼 이건 그런 게 아니잖아. 은지가 그 오빠와 대련하겠다는 얘기를 했다고, 관장님이 집에 돌아가서도 '은지가 걔 좋아하나?'라고 생각하진 않을 거야. 그리고 대충 핑계를 좀 댈 수도 있는 거잖아. 관장님이 왜 그 오빠랑 대련하고 싶냐고 물어보면, 오빠가 친절하게 자세 봐 준 적이 있어서 그렇다고 하면 돼.
도장 내에서 운동할 때 수다 금지라 대화하기가 힘들면, 준비를 좀 일찍 해서 십 분 정도 빨리 나와 있는 거야. 그러다 그가 들어오면 위에서 말했듯 인사하고, 그 다음으로는 아무래도 그가 야외활동을 많이 할 테니까 "오빠 얼굴이 많이 탄 것 같아요. 밖에서 운동 하셨어요?"정도로 짧게 물으면 돼. 그러다 운동시간 되면 자세 맞는지 봐 달라고 말하거나, 서로 미트 잡아주기 하자고 하면 되는 거고.
대화 주제는, 그가 체대생이잖아. 그러면 체대입시부터 물어보면 돼. 은지가 체대 갈 생각 없더라도 체대 입시 실기에 대해서 물어봐. 그러면 그가 자신이 이미 통과한 그 시험에 에누리 조금 보태서 열심히 설명해 줄 거야. 그럼 또 은지는 친절히 알려줘서 고맙다며 음료수 하나 사면 되는 거고 말야. 아니면 체대에서 뭘 배우는지에 대해서 물어봐도 되고, 수영도 할 줄 아냐고 묻거나, 아니면 부상을 당했을 때 한방치료가 도움이 되는지 등을 물어봐도 돼. 상대가 알고 있을 것 같은 걸 묻는 거야. 은지는 상대가 은지에게 '알려줄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도록 길만 터준다고 생각해. 스트레칭에 대해 물으면 그가 스트레칭 자료들을 출력해서 은지에게 줄 수 있어. 묻지 않는다면? 뭐, 둘 사이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겠지.
난 요즘 어느 모임에서 알게 된 학교선생님들과 연락을 하고 지내는데, 그들이 추천해 준 다큐나 책은 빼놓지 않고 다 보고 있어. 그러면 그것과 관련해 이야기 할 거리들이 생기고, 우리는 식당에서 같이 밥을 먹고 나와서도 빛의 산란과 굴절에 대해서 이야기 할 수 있거든. 그런 게 없었다면 타 회원들과 마찬가지로 학교에 대한 표면적인 이야기만 했겠지. 그러다 모임이 없어지면 서로 뭐 하는 사람들이었는지도 모르는 채 잊게 될 수도 있고 말이야. 그러니까 은지도 겁내지 말고 시도해 봐. 다시 오지 않을 이 순간을 놓치지 말고 말이야.
3. 구남친에게 그때 미안하고 고마웠었다는 말을.
몇 주 전에 저는 계절이 바뀐 건 생각도 하지 않고 패딩점퍼를 입고 나간 적이 있습니다. 파주에서 광화문까지 버스에 서서 갔는데, 광화문에 내렸을 땐 상의가 축축하게 젖어 있었습니다. 버스에서 점퍼를 벗지 그랬냐고 하실 분이 있을지도 모르겠는데, 나름 사정이 있었습니다. 그날 안에 새로 산 티셔츠를 입고 나갔는데, 그 티셔츠 길이가 유난히 짧았습니다.-아마 그게, 정상 티셔츠보다 크게 한 뼘이나 짧게 잘못 만든 까닭에 싸게 팔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버스 손잡이를 잡으려 팔을 들면, 티셔츠는 배꼽티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점퍼를 벗지 못하고 있었던 건데, 여하튼 지금 배꼽티가 중요한 게 아니고.
계절이 바뀐 지금은 한겨울에 했던 행동들이 '정말 그런 적이 있었나?'싶을 정도로 낯설게 느껴집니다. 몇 겹씩 옷을 껴입고 핫팩까지 쥐고 다녔는데, 지금은 그렇게 입고 나갔다간 뇌가 익어버리는 듯한 더위를 느끼고 말 테니 말입니다. 책상에 앉아 타자를 칠 때면, 우측 창문에서 들어오는 냉기로 인해 오른손이 얼어버렸던 것도 남의 이야기 같습니다. 겨울 내내 좋은 친구가 되어 주었던 전기장판은 이제 보기만 해도 더운 느낌이 들어 치워버렸고 말입니다.
지금은 그렇지만, 다시 또 겨울이 오면 저는 패딩을 입고, 핫팩을 손에 쥐고, 목도리를 목에 두를 것입니다. 다시는 쓸 일 없는 것처럼 치워버린 전기장판도 찾아서 잠자리에 깔 것이고 말입니다. 현재의 상황에서 지금 마음으로는 한겨울에 사진 찍으러 나가 손가락이 펴지지 않아 고생했던 일이 바보같이 생각되고, 다시 그런 상황에 처한다면 삼각대 펴고 셔터 누르는 일 아무 것도 아닐 거라고 여겨지기도 합니다만, 막상 또 그 상황에 처하면 저는 추위를 이기지 못하고 금방 철수하게 될 것입니다.
저는 Y양이, 현남친과의 연애를 '봄'이라고 생각했으면 좋겠습니다. 이런 사람 또 만나기 힘들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와의 연애는 큰 굴곡 없이 잘 진행되고 있습니다. 물론 두 사람이 노력한 덕분입니다만, 그렇게 평탄하게 연애가 진행되는 까닭에 Y양에겐 '딴생각'이 찾아온 것 같기도 합니다. 모임에서 구남친을 만나게 되었을 때, 이전의 추억과 감정이 떠오른 것입니다. Y양이 현남친을 두고 다시 구남친에게 가려고 생각한 것은 아닙니다만, 구남친에 대한 미안한 마음, 그리고 함께 했던 정, 또 고마웠다고 말하지 못했던 일 등이 떠올라 그와 따로 만나 '과거 정산'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전 Y양이 구남친과의 연애, 그 추웠던 겨울 같은 연애를 너무 낭만적으로만 회상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제가 Y양의 그 '과거 정산'을 반대하는 이유는 세 가지 입니다.
첫째, Y양이 구남친을 생각하는 것의 기저에는 그를 향한 가여움과 안타까움이 있습니다. Y양이 구남친과 현남친에 대해 묘사한 것만 봐도 현남친은 온실에서 잘 자란 남자로, 구남친은 열등감이 강한 실패자 비슷한 남자로 그려져 있습니다. 또 현재 Y양은 커플부대원이고 구남친은 솔로부대원이니 그를 생각하면 마음이 뭉클할 수는 있겠습니다만, 그도 그의 방식대로 잘 살고 있는 중이라는 걸 Y양이 인식했으면 좋겠습니다. 만약 그가 현재 커플부대원이고, Y양과 마주치게 되었을 때 여자친구와 행복하게 지내고 있는 모습을 보여줬더라도 Y양이 이 '과거 정산'을 하려 했을지 한번 곰곰이 생각해 보시길 권하고 싶습니다.
둘째, 이 '과거 정산'을 Y양이 당한다면, Y양은 견디지 못할 정도로 싫을 수 있습니다. 우선, 현남친이 구여친에게 Y양이 하려는 것과 똑같은 '단 둘이 만나서 과거 정산'을 한다고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Y양이 말한대로 머리로는 이해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마음으로는 그 상황 자체가 정말 싫을 것입니다. 평생 그 기억은 잊히지 않을 것이고 말입니다. 구남친이 현재 커플부대원이고 Y양이 솔로부대원인 상황에서 그가 '과거 정산'을 한다고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구남친이 지금의 Y양과 똑같은 마음으로 말을 꺼낸다고 해도, Y양은 그걸 그저 고맙게만 받아들이긴 힘들 거라 생각합니다. 그렇게 말한 뒤 정리하고 나면 구남친은 후련하겠지만, Y양은 확인사살을 당한 듯한 기분이 들 수도 있습니다.
셋째, Y양의 말을 구남친은 '여지'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Y양은 원인 모를 마음 속 불편함을 툭툭 털어버리고자 정산을 하려 한 것인데, 구남친은 Y양이 연애 하는 중임에도 자신에게 만남을 요청해 그 이야기들을 하는 걸 마음이 남아 있어서 그러는 것으로 오해할 수 있습니다. 솔직히 저도 그 부분이 걱정됩니다. Y양은 구남친에 대해 아무 감정이 없다고 하셨지만, 아무 감정이 없다면 Y양이 이렇게 제게 사연을 보낼 일도 없었을 겁니다. Y양의 과거를 보면 '맺고 끊음을 잘 못하는 문제'와 '확실하게 입장을 밝히지 않는 문제'가 조금 있다는 걸 알 수 있는데, 그 습관에 다시 손을 대 현남친과의 연애를 망치지 말길 권해주고 싶습니다. 카메라 렌즈 안에 들어간 먼지 하나 꺼내려고 렌즈를 분해했다가, 광축이 틀어져 결국 렌즈를 버리게 된 저처럼 말입니다.
'구남친에게 Y양은, 그냥 '전전여친'일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해주고 싶습니다. 사귈 때 그가 한 행동을 봐도 헤어지기 전에는 Y양에 대한 애정도 없었고, 언제든 Y양이 끝내자고 말하면 동의 할 준비를 하고 있었을 수 있습니다. 실제로 둘은 그렇게 헤어졌고 말입니다. 지금 Y양이 봄처럼 따뜻한 연애를 하고 있다고 해서 현재의 마음으로만 이전 연애를 바라보진 말길 바랍니다. 그러다 보면 자꾸 이전의 그 연애를 미화하게 되고, 상대 역시 나처럼 우리의 추억을 곱씹고 있을 거란 착각만 하게 될 수 있습니다. 다시 그때로 돌아가면 더 잘 할 수 있을 거라는 근거 없는 자신감만 커질 수 있고 말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겨울이 다시 오면 또 추워집니다. 이미 5년이라는 시간이 둘을 충분히 화해시켜 두었으니, 모임에서 만나게 되면 구남친이 아무렇지 않게 인사하는 것처럼 Y양도 그렇게 대하시길 권합니다.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오늘 하얗게 불태운 까닭에, 배웅글은 쉽니다.
▲ 5월 6일 물병자리 유성우 소식이 있습니다. 미리 별빛샤워 준비하시기 바랍니다. 추천은 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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