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일 넘는 연애를 못 하는 그녀, 연애불감증?
연애의 한 쪽 극단에 소녀감성을 지닌 금사빠 대원들이 있다면, 그 정반대쪽엔 설렘이 귀찮음을 넘지 못 하는 연애 불감증 대원들이 있다. 내 지인 중 하나도
"근데 나 정말 연애 사이코패스 뭐 그런 건가?
연애를 해도 별로 좋지가 않고, 남자친구가 보고 싶지도 않아.
최근엔 더 심해져서, 데이트 할 때도 귀찮을 걸 참고 겨우 나가는 수준이야."
라는 고백을 한 적이 있다. 그녀에게 난
"그러니까 사귀고 나서 감정이 안 든다고 불평하지 말고,
최소한 보고 싶거나 또 만나고 싶은 감정이 드는 사람이랑 연애를 시작해.
지금 넌 그저 연애를 할 수 있을 것 같은 상대가 나타났을 때
그와 연애를 위한 연애를 시작해 버리니,
'여자친구'라는 자리가 서비스직처럼 느껴지는 거지."
라고 말해주었다. 사연을 보낸 H양 역시 내 지인이 내게 했던 것과 비슷한 얘기를 하고 있는데, 오늘은 그녀를 위해 '연애불감증'의 증세와 그것을 극복하는 방법에 대해 함께 살펴보자.
1. 선천적, 후천적 연애불감증.
연애불감증은 크게 선천적인 것과 후천적인 것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그 중 먼저 H양이 속해있는 선천적 연애불감증은, 타인에게 별로 관심이 없으며 스스로를 과대평가 하고 있는 대원들에게서 그 증세를 찾아볼 수 있다.
이들이 연애에 임하는 마음가짐을 느껴보고 싶다면,
"오늘 노멀마트에서 고등어가 한 손에 오천 원."
이라는 광고전단을 받았을 때를 떠올려 보면 된다. 주부나 집에서 직접 요리를 해 먹는 독자를 제외하면 저 광고전단은 대부분의 대원들에게 별 감흥이 없을 것이다. 한 손에 오천 원이 싼 것인지 아닌지도 분간하기가 어렵고, 어차피 내가 사가지 않아도 집에서는 밥상이 차려질 텐데 굳이 저걸 사가야겠다는 마음이 얼른 들지도 않는다. 물론 광고 전단을 볼 때 옆에 있는 지인이 "이건 정말 대박가격이야. 꼭 사야 해."라고 하면 사갈 순 있다. 하지만 그걸 샀다고 해서 횡재했다는 생각이 들거나 마음 가득한 기쁨이 느껴지진 않을 것이다.
때문에 이들은 연애가 끝난 후에도 상대를 잃었다는 것에 슬퍼하기 보다는,
'내 연애는 왜 계속 일찍 끝나기만 하는가?'
'이전 연애도 그러더니 이번 연애도 비슷하게 끝났는데, 문제가 무엇인가?'
'남들은 다 멀쩡하게 연애 잘 하는데, 왜 나만 자꾸 헤매는가?'
하는 생각만 하기 마련이다. H양 역시 자신의 이별에 대해
"이 오빠와의 관계를 되돌리고 싶은 건 아니고요.
이런 식으로 짧은 연애만 반복하게 되는 이유를 알고 싶어요."
"남들은 잘 하는 연애가 왜 제게 너무 어렵게 느껴지는 걸까요?"
"사귈 때 이 오빠가 저를 덜 좋아한 것 같은데, 그 이유를 알고 싶어요."
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이건 아래에서 자세히 이야기하기로 하고, 여기선 '후천적 연애불감증'에 대한 이야기를 마저 하자.
후천적 연애불감증은 이성에게 크게 한 번 데었거나, 연애 이후 연애에 대한 환상이 사라져버린 대원들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사례가 다양해 전부 열거할 수는 없지만, 대개 6시간 동안 운전을 해 이제 막 목적지에 도착한 것과 같은 심적 상태에 놓여있는 대원들이다. 연애가 드라이브라면, 이들은 이미 지친 까닭에 드라이브고 뭐고 그냥 좀 쉬고 싶다는 마음을 가지는 경우가 많다. 약간의 기운이 남이 있다 하더라도
"드라이브 가자고? 알았어. 운전은 네가 해."
라는 이야기를 하며 그저 조수석에 타려는 대원들이 대부분이다.
자신을 쏟아 붓거나 하얗게 불태우지 않고, 그저 '적당히' 연애를 하려는 상태라고 생각하면 되겠다. 이런 대원들에게선, 더는 상처 받고 싶지 않아 마음에 보호필름을 붙인 까닭에 상대와 친밀해지지 못 하는 문제, 상대가 먼저 이 관계에 올인 하는 모습을 보여야 이쪽에서도 마음을 주기 시작하겠다는 '조건부 애정'의 문제 등이 발견된다.
2. 안방이 없는 마음의 집.
보통사람이 지닌 마음의 집이 거실, 안방, 큰방, 작은방으로 구성되어 있다면, H양과 같은 대원들의 마음은 거실, 작은방1, 작은방2, 작은방3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그 방에는 사람들이 꽉꽉 들어차 있는데, 때문에 밖에서 보면 대인관계 훌륭하고 사회생활 잘 하는 사람으로 보일 뿐이다.
그 부분이 바로 함정이다. 연인에게는 마음의 집 안방을 내줘야 상대가 그곳을 보금자리로 생각하며 정착하게 되는데, H양과 같은 대원들은 연인에게 '작은방1'을 내주는 것이다. 집에 손님이 왔을 때 잠시 내주는 딱 그 정도의 방만 제공하니, 상대는 2박 3일 후 다시 돌아가야 할 것 같은 느낌을 받고 만다.
여기서 잠깐, H양의 말을 들어보자.
"이 오빠와는 눈 떠서 잠들기 전까지 업무시간 외에는 꾸준히 연락을 주고받았고,
또 이 오빠가 만날 때마다 노력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어요.
데이트도 열심히 준비하고, 데이트 끝나면 항상 절 데려다 줬고요.
같이 뭐 하자는 얘기도 많이 했어요. 말로만 그런 게 아니라
실제로 함께 시작한 것도 있어요."
역시 겉으로만 보면 아무 문제가 없다. 하지만 H양이 털어 놓는 속마음을 들어보면, 이게 분명 뭔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 챌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전 사랑의 감정을 느끼거나 보고 싶어서 아른거리진 않았지만,
이 오빠가 내 사람이겠거니 하며 만났습니다.
전 제가 좋아서 미친 적은 없지만 연락 잘 하고, 데이트비용 잘 분담하고,
소소한 선물도 잘 했고, 기본 예의에 어긋나는 일도 한 적 없고요."
요즘 난 내 관심 분야의 연수를 받고 있는데, 그 모임에선 연수생들과 서로 배려하고 예의를 갖추며 호의를 베풀며 지내지만, 아무래도 더는 친해지지 않는 느낌이 든다. 그들과 나는 같은 목적으로 연수에 참여하고 있다는 걸 빼면 남는 게 별로 없기 때문이다. 그 중 인간적인 관심을 가지고 자주 만나는 한 연수생과는 말도 놓는 사이가 되었지만, 나머지 사람들과는 연수를 받을 때에만 웃는 낯으로 대할 뿐 연수가 끝나면 서로 아무 상관없는 남으로 돌아와 지내게 된다.
H양의 말을 조금 더 들어보자.
"밥 먹고, 차 마시고, 드라이브 하고, 서로 애인 없을 때
데이트메이트처럼 지낼 수 있는 이성이 주변에 세 명 정도 있어요.
그치만 꾸준히 연락하거나 용건 없이 긴 통화를 하거나,
여지를 남기는 애매한 행동이나 스킨십 등은 일절 없어요.
이 정도면 결혼해서 같이 살 수 있겠다 싶은 사람은 많지만
친구관계를 유지하고 있어요.
가끔 선을 넘을 기미가 보이면 제가 철벽을 치기도 했고요."
H양이 자신과 친한 주변의 이성들을 대하는 것과 남자친구를 대하는 것 사이에는 별 차이가 없다는 것에 주목하자. H양은 굳이 남자친구가 아니더라도 지인들과 데이트메이트로 지낼 수 있으니 부족함도 없고 간절함도 없다. 때문에 남자친구가 특별하지도, 그다지 소중하지도 않고 말이다.
남자친구 입장에선 H양과의 만남이, '배부르며 가고 싶은 곳 없는 여자'와의 만남처럼 느껴졌을 수 있다. 내가 가자고 하면 가긴 하지만 별로 기뻐하지도 않고, 뭘 같이 먹자고 해도 먹긴 하지만 심드렁한 태도를 보이니 말이다. 이건 H양이 연기를 한다고 해도 완벽하게 상대를 속일 수 없는 부분이다. 눈앞에서 연기를 한다 하더라도 어느 부분에선가 분명 '재미도 감동도 없어 보이는 모습'이 드러나고 말 테니 말이다. 이렇듯 자신을 '객'취급하는 여자에게서, 남자는 체크아웃 하고 만다는 걸 기억해 두자.
3. 뭘 어떻게 해야 할까?
상대가 보고 싶어 미칠 정도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상대에게 궁금한 것이 있을 때 연애를 시작하자. 그게 관심이다. 소개팅 했는데 상대가 대시했다고 사귀거나, 주변에서 고백했다고 해서 사귀진 말자. 그렇게 마음도 안 주면서 오는 남자 막지 않고 있다간, 늘 100일 미만의 짧은 연애만 하게 될 수 있다.
또, 주변의 시선에 대해서도 그걸 의식하지 말든가, 아니면 주변의 평가가 신경 쓰일 정도의 사람과는 만나지 말길 권한다. H양을 보면 모두에게 칭찬을 받거나 좋은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연애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때문에 사귀기 전에도
'이 사람이 내 남자친구로 괜찮은 조건을 가지고 있는가?'
라는 걸 먼저 살피고, 이성적으로 괜찮다는 판결이 나면 그제야 연애를 시작한다.
연애를 시작한 이후, H양이 유난히 상대의 태도만 살피는 것 역시 문제다. 그녀가 자신의 연애사에 대해 털어 놓은 부분을 보자.
"사귄 사람 중 두 명은 저를 많이 좋아해줬지만
제가 더 이상 감정이 안 생겨서 헤어졌고,
나머지 두 명은 저를 많이 좋아해주지 않아서 헤어졌습니다."
남자친구는 '남친 오디션'보러 온 사람, H양은 '심사위원'이 되어 버린 것이다. 위에서 말한 것처럼 H양은 연애를 할 때 '무개념녀'라는 소리를 듣지 않으려고 최선을 다하는데, 그렇게 의식적인 친절과 호의를 베풀고는 얼마 지나지 않아 상대에게 이런 통보를 한다.
"두 달간 수고하셨습니다. 제 점수는요…."
또 H양은 위에서 말한 네 명의 남자 말고 두 명의 남자가 '구여친을 못 잊겠다'며 떠나갔다고 했는데, 그 중 한 남자로부터는
"너는 인간적인 매력은 정말 많은데, 여자친구로서는 잘 모르겠다…."
라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현재 '나는 왜 여자로서 매력이 없는 것인가?'를 고민하며 표류하고 있다고 하는데, 난 그것 역시 '상대에게 마음의 안방을 주지 않는 문제' 때문이라는 얘기를 해주고 싶다. 연인이라면 "너 때문에 내가 살아."까지는 아니더라도, "네가 있어서 행복해."정도의 마음은 들어야 하는 것 아닌가. H양은 그런 마음 없이 연인에 대해 "얘가 내 남자친구인갑다."하며 지내기 때문에 상대는 H양과의 사이에 허리쯤까지 쌓아져 있는 벽을 느끼고 마는 것이다.
하나 더. 연애를 무조건 결혼과 연관 지어 생각하진 말길 바란다. H양은 연애를 시작할 낌새가 보이면,
'이 남자는 나와 결혼할 조건을 갖췄는가?'
'이 남자와 결혼하게 되면 어떤 가정을 꾸리게 될 것인가?'
'이 남자와 함께 산다고 했을 때 장점과 단점은 무엇인가?'
등의 생각을 하며 너무 먼 미래까지 생각하는 버릇이 있다. 신중한 건 좋지만, 아직 상대의 신발 사이즈도 모르는 상황에서 상대에 대해 정의한 후, 그 불확실하고 오류 가득한 추측만으로 미래를 단정 짓는 건 '오답'을 구하는 거라는 얘기를 해주고 싶다. 우리나라 속담에도
- 말은 타봐야 알고, 사람은 사귀어 봐야 안다.
- 겨울이 다 되어야 솔이 푸른 줄 안다.
라는 말이 있잖은가. 지금 열렬히 구애한다고 해서 그 모습만 보지 말고, 상대의 화난 모습, 짜증내는 모습, 귀찮아하는 모습들까지 모두 본 후 답을 내리길 권한다. 반대로 위기가 찾아왔을 때에야 그 진가를 보이는 사람도 있으니, 당장 뭐 하나 마음에 안 든다고 너무 쉽게 내치치도 말길 바란다.
H양은 이 사연을 보내기 전 이미 지인들에게 연애고민을 털어 놓은 뒤
"인연이라는 게 사람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거 아니냐. 인연이 아니라고 생각해라."
라는 대답을 들었다고 하는데, 듣기 좋은 그런 얘기를 수집하며 이걸 다 운명론, 인연론으로 편하게만 생각하진 말자. 그리고 헤어진 후 지인에게 달려가 공짜 위로를 받는 것보다, '만약 상대가 연애 중 나와 같은 모습을 보였다면, 난 어땠을까?'를 한 번 생각해 보는 게 스무 배는 나은 일이라는 얘기를 해주고 싶다.
끝으로 H양은 '나를 설레게 하는 남자를 아직 못 만나서 그렇다'고 생각하며 스스로를 위안하고 있는데, 상대가 다가와도 H양이 관심을 가지고 다가가지 않으면, 모든 남자가 그냥 -H양이 관심을 두고 있지 않은-동네 길고양이처럼 보일 수 있다는 걸 잊지 말자. <어린 왕자>에도 이런 대사가 나오지 않는가.
"네 장미꽃을 그렇게 소중하게 만든 것은,
너의 장미꽃을 위해 네가 들인 시간 때문이야."
상대가 처음부터 완전히 소중한 존재로 눈앞에 나타나길 기다리지 말고, 서로를 알아가며 서로에게 의미를 하나 둘씩 부여해 보길 바란다.
▲ "무한님, 이전 글에 험한 댓글이 달린 것 때문에 새 글 안 올리신 건가요?"
밤에 관측지 나가서 밤하늘 보다가 동 트는 거 보고 들어오다 보니, 리듬이 깨져서 그렇습니다.
내일부터는 다시 불꽃 포스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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