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해진다는 게 뭔지 모르겠다는 여자 외 2편
내가 가장 피하고 싶은 질문은, 원론적인 질문이다. 예컨대
"무한님은 사랑이 뭐라고 생각하세요?"
"친해진다는 건 뭐죠? 그리고 친해졌다는 건 어떻게 알 수 있죠?"
"이성과 친해져서 연애를 하고, 그러다 결혼을 해야 하는 이유는 뭘까요?"
라는 질문을 해오는 대원이 있으면, 난 그 물음에 답을 하는 대신 그들에게
"친구랑, 혹은 이성이랑 밤새 이야기 해 본 적 없으시죠?"
라는 질문을 하고 싶다.
해 봐야 알기 때문이고, 또 해 봐야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사연을 보낸 P양의 지인이며, 은하수를 보러 가자고 제안했다고 해보자. 그럼 P양은 웹에 떠도는 은하수 사진을 보며 기대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 가서 보면 은하수는 겨우 희뿌연 구름처럼 보이고, 은하수가 보일 정도의 장소는 대개 아무 조명도 없는 외진 곳이라 무서우며, 요즘 같은 때엔 나방과 모기 등의 날벌레들이 수시로 달려들어 녀석들을 쫓아내느라 바쁘다.
그처럼 은하수를 직접 보는 것에 대한 즐거움은 분명 기대이하겠지만, 대신 정말 금방이라도 쏟아질 것 같은 수많은 별들을 볼 수 있다. 또 별빛이 밝히는 서로의 얼굴을 보며 대화를 나누는 즐거움을 느낄 수 있으며, 아주 조용한 곳이라 힘주어 말하지 않아도 서로의 말이 온 몸으로 느껴지는 색다른 경험 등을 할 수 있다. 배고파 질 때쯤 그곳에서 끓여 먹는 사발면은, 국물 한 방울 남기지 않고 다 먹을 정도로 맛있고 말이다. 때문에 난 "그럼 거기 가도 은하수가 사진처럼은 보이지 않는다는 거죠? 그럼 그냥 됐어요. 안 갈래요."라는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있으면, '기대하고 상상하던 일'이 없을까봐 지레 겁먹지 말고 '상상하지도 못했던 일'들이 벌어질 수 있으니 한 번 경험해 보길 권해주고 싶다.
1. 친하다는 게 뭔지 모르겠다는 여자.
사진 기법 중에, 건물 옥상에서 아래를 내려다 본 사진을 찍어 사람들을 미니어처처럼 보이게 만드는 기법이 있다. 그렇게 찍은 사진을 보면 건물들과 사람들은 작은 장난감 같고, 그 사진들을 이어 붙여 영상을 만들면 마치 소인국의 사람들이 개미처럼 움직이는 듯 보인다.
난 P양에게 옥상에서 내려오라는 얘기를 해주고 싶다. 친해지는 유일한 방법은 상대와 부대끼는 것뿐이다. 옥상 위에서 사람들, 특히 이성을 관찰하게 되면 친해질 수 없다. 엉뚱한 짓도 함께 해보고, 서로 싸워도 보고, 상대를 위로도 해보고, 질투도 해보고, 불평도 해봐야 한다.
"나이가 들수록 빠르게 사람을 사귀고, 헤어지는 상황의 반복인데
저는 사람에게 다가가는 데 익숙하지 않으니 새로운 사람과 친해지는 것은 어렵고,
친했던 사람과는 같이 보내는 시간이 적어지니 친하다는 느낌이 점점 작아져요.
대인관계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니에요. 저는 사람을 대할 때 공통점을 찾으려 애쓰고,
칭찬해 줄 이유를 찾아 칭찬도 해주며, 상대의 말을 이해하려 노력해요.
이렇듯 사람들과 인사도 잘 하고, 얘기도 잘 하지만, 친하다는 기분이 들지 않아요."
내가 위에서 친해지기 위한 과정 중 '싸움, 질투, 불평'등의 부정적인 이야기를 주로 적은 건, P양이 누구나와 '좋은 관계'를 맺기 위해 실제로 찾아왔을 감정들을 감추기 때문이다. 나도 공쥬님(여자친구)에게 불평을 한다. 조금 더 예쁘게 말할 수 있는 걸 공쥬님이 무의식 중에 투박하게 말하면, 나는 그 말을 들었을 때 이러이러한 감정이 드니 부드럽게 말해달라고 부탁한다.
그런데 P양은 그렇게 불평했다간 상대와의 '좋은 관계'가 틀어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선지, 상대가 P양에게 짐을 맡긴 채 기대고 있어도 참고 만다. 기대고 있는 상대가 무거워도 '좋은 게 좋은 거'라는 생각으로 그냥 넘기고 마는 것이다. 이런 태도가 굳어져 P양은 집에서는 -차녀임에도 불구하고-장남 역할, 친구들에겐 언니 역할, 지인들에겐 상담사 역할을 하고 있다. P양이 다 받아주니, 누구나 다 P양에게 기대는 것이다.
더욱 큰 문제는, P양이 '언젠가는 나도 연애를 하게 될 거야. 지금은 아니지만.'이라는 생각을 하며 현재 만나는 이성들을 다른 방향으로 가는 버스 보내듯 보내고 있다는 점이다. 상대에게 관심을 가지고 P양의 솔직한 모습들을 보여줘야 친해질 수 있는 법인데, P양은 '지금 누군가를 사귀는 건 시간낭비일 수 있어. 어찌 보면 연애는 대인관계의 하나일 뿐인데 거기에 목숨 걸 필요 없잖아.'라는 생각으로 눈 앞 상대와의 관계를 가볍게 생각해 버린다. P양에겐 들이대는 남자가 많은데, P양은 그들 역시 '다른 방향으로 가는 버스'라고 생각하며 가끔 말동무 정도나 해 줄 뿐이다.
친해지고 싶은 이성과 단 둘이 자주 만나자. 그러면 P양의 고민은 저절로 해결될 것이다. 단, P양은 타인을 구경하는 옥상생활을 오래 한 까닭에 이성의 미세한 행동(내가 말할 때까지 상대가 말하지 않았다는 것 등)까지 감지하며 그를 분석하고 있는데, 상대에 대해 논문 쓸 기세로 관찰하지 말고 자연스레 만나보기 바란다. 팥빙수를 내가 샀으면 어떻고 상대가 샀으면 어떤가. 이번만 만나고 말 것 아니니 상대의 한 부분만을 가지고 섣불리 결론내지 말고, 계절 하나 정도는 만나보길 권한다.
하나 더. 책이나 누군가의 분석에 너무 깊게 빠지지 말라는 얘기를 해주고 싶다. 과학자들이 써 놓은 책을 일다 보면 나 역시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 느껴지곤 한다. 삶이 유전자나 호르몬의 노예생활처럼 생각되기도 하고, 내 감정과 의지마저 온전히 내 것이 아닐 수 있다는 것에 경악하기도 한다. P양도 이러한 것들에 흥미를 많이 느끼는지 사연에다 '생각의 체계'에 대한 책을 내게 추천해 주기도 했는데, 사랑이 호르몬의 작용에 의한 것임을 머리로는 잘 알아도, 마음 속 보고 싶음의 질량을 어쩌지는 못 하는 것 아닌가. 오늘부터는 상대를 마음으로 만나 보길 권한다. 상대와 작별하는 것이 싫어 정류장에서 타야 할 버스를 그냥 보낼 정도가 되면, 그땐 저절로 친해질 것이다.
2. 썸녀에게 '그만 할란다'라고 보내려다 만 남자.
기원씨, 기원씨가 사연은 재미있게 쓰면서 왜 대화는 그렇게 못 하는 줄 알아? 어깨에 힘이 너무 많이 들어가서 그래. 선동렬 감독님이 기원씨의 사연을 봤으면
"기원씨, 팔꿈치 각도 좁혀야…."
라는 이야기를 했을 거야.
썸녀에 대해서는 '착한 아이로 기억되고자 노력하는 여자'라고 해둘게. 기원씨의 썸녀, 답장을 숨넘어가기 직전에야 하는 거 빼면 매력 있더라. 센스는 좀 떨어지지만 열심히 드립치려고 하는 모습이 그걸 커버하고 있고, 답이 좀 늦는 대신 이전에 기원씨가 했던 말들에 대한 답을 깨알같이 하는 모습이 순수하게 느껴지고 말이야. 진짜 그런 사람인지 그런 척 하는 건지는 아직 나도 확실히 모르겠어. 둘이 만난 지 아직 보름도 안 지났잖아. 지금까지의 모습만 놓고 말해달라고 하면, 난 그린라이트라고 해둘게.
문제는 기원씨야. 우리끼리니까 하는 얘긴데, 기원씨는 연상녀들에겐 '또래보다 생각이 깊은 남자'로 여겨질 수 있는데, 그 장점이 연하녀들에게는 '신선함이 없는 남자'라는 단점으로 작용할 수 있거든. 난 그냥 기원씨가 썸녀와 같이 드립 쳐가며 재미있게 놀았으면 좋겠는데, 그러려고 하다가도 기원씨는 갑자기 '오빠로서의 모습'을 보여주려 딱딱해 지더라. 자기보다 나이 많은 사람과 대화할 땐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하며 드립을 잘 치면서, 연하인 썸녀와의 대화에선 갑자기 교장선생님이 되어버린다고 할까?
나라면 일단 기원씨처럼 혼자 패배감에 젖어 썸녀에게 뜬금없이 '그만 할란다'라고 톡을 보내진 않을 거야. 대신 자연스레 서로 말을 놓는 사이가 되도록 만들겠지. 상대는 지금 극존칭을 쓰고 있잖아.(어쩌면 그래서 기원씨가 더 어른스러운 모습을 보여야 한다는 의무감을 가진 건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말을 놓자고 제안해 편하게 대화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 거야.
그 다음으로는 '인증샷 놀이'를 하는 분위기를 만들 거야. 지금 두 사람의 대화를 보면, 어떤 주제가 등장하면 그것에 대한 이야기 잠깐 하다 말거든. 나라면 그러지 않고 상대가 어떤 이야기를 꺼냈을 때 "그래? 사진 보여줘~"라면서 사진을 받을 거야. 그러면 그 사진 안에서 눈에 띄는 다른 것으로 자연스레 주제를 넘길 수도 있고, 무슨 일이 있을 때 서로에게 알려 사건을 공유하는 게 습관이 될 수 있거든. 길 걷다가 엄청 예쁜 구름을 보게 되면 어서 하늘 좀 올려다보라고 사진 찍어 보내줄 수도 있고, 낙지볶음을 좋아하는 상대에게 사람들이 줄 서 있는 낚지 식당을 찍어 보낸 뒤 나중에 같이 먹자고 약속을 잡겠지. 이게 모든 사람한테 통하는 건 아니야. 혼자서만 저러다가는 그냥 '스팸남' 될 수 있거든. 근데 기원씨와 썸녀의 관계에서는 충분히 이래도 되기에 권하는 거야.
이 관계를 부정적으로 만드는 건, 상대가 아니라 기원씨야. 기원씨는 '부정적으로 보이는 것들'만 열심히 찾고 있거든. 몇 시간 동안 상대 답장이 없다거나, 상대 카톡 프사가 바뀌었는데 기원씨 카톡은 확인하지 않았다던가 하는 것들 말이야. 그런데 봐봐. 둘이 지금까지 하루도 안 빠지고 연락했지? 게다가 둘의 대화는 오전부터 다음 날 새벽까지 빼곡하게 채워져 있어. 정말 아무 마음도 없는 거라면 귀찮아서라도 저렇게 성실하게 대화에 참여하지 않거든.
여기서 보기엔 긍정의 신호가 더 많아. 상대는 기원씨가 만나자고 해도 거절하지 않고, 말을 걸면 늦더라도 빼먹지 않고 깨알같이 답장을 해주며, 자신의 사생활을 기원씨에게 털어 놓으며 공유하려는 모습을 보이기도 하거든. 반면 기원씨는 친구 얘기하며 자랑하고, 교장선생님처럼 대답하며, 상대의 안부만 묻고 있지.
만나서 뭐라도 좀 먹어. 이런 날씨에 치맥 좋잖아. 상대와 만나고 통화하고 그러라고. 폰만 붙잡고 있지 마. 폰 붙잡고 앉아서 뭐 하겠다는 거야? 내가 기원씨 자리에 있었으면 오늘 저녁 상대와 팥빙수 먹고 있을 거라니까? 어깨에 들어간 힘 빼고 상대랑 만나서 놀아. 그리고 요즘 마트에 가보면 생전 처음 보는 수입과일들 세일할 때 많거든. 별로 안 비싸. 그러니까 그거 하나 사다가 만날 때 가지고 나가서 썸녀에게 주든가 같이 먹든가 해봐. 안 그러면 기원씨가 또 딱 정해진 대로만 '팥빙수, 팥빙수, 팥빙수….'하면서 팥빙수만 먹고 돌아올 것 같아서 하는 말이야. 넓게, 그리고 여유롭게 생각해. 안 그러면 본 실력의 절반도 발휘하지 못할 테니까. 긴장 풀고 만나 봐. 그럼 잘 될 거야.
3. 연인, 부부로 발전할 가능성이 있냐고 묻는 여자.
직구를 던져도 괜찮겠습니까? 가능성은 전혀 없습니다. 상대에게 S양은 '급할 때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둘 사이에 애정이 있는지, 아니 애정이 아니라면 우정이라도 있는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현재의 관계만 놓고 보자면 S양이 채권자, 상대가 채무자인 느낌입니다.
이 사연은 내용을 그대로 적으면 주변 사람들이 금방 눈치 챌 수 있으니, 아예 완전히 다른 이야기로 설정해 이야기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S양의 썸남이 되어 이야기를 풀어가는 형식입니다.
S양과 저는 제주도에서 만났습니다. 게스트 하우스에서 이야기를 나누다, 우린 스파크가 튀어 다음 날부터 함께 여행을 했습니다. 2박 3일의 여행이 끝나고 S양은 서울로 돌아갔습니다. 저도 얼마 후 서울에 왔고, 심심하던 터라 마침 전화번호부에 있는 S양에게 연락을 했습니다. 우리는 만났고, 그날 제 자취방에서 밤을 보냈습니다.
그 날 이후 S양은 제 자취방에 놀러와 청소와 음식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집에 돌아오면 집은 치워져 있고, 먹을 걸 사가지고 오지 않아도 S양이 먹을 걸 다 가져다 준비해 두었습니다. 대접 받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S양의 호의는 거기서 끝이 아니었습니다. 제가 하려고 하는 사업에 대해 묻더니, S양은 돈을 투자하겠다고 했습니다. 생각지도 않았던 돈이 생겨 저도 의욕이 살아났습니다. 더불어 S양은 제가 하려는 사업의 자질구레한 일들을 자신이 다 할 수 있다고 말하며 도와주겠다고 했습니다. 그것도 사람 사서 하려면 다 돈인데, S양이 그런 일들까지 다 해준다고 하니 저는 많은 부분에서 절약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며 S양이 자꾸 참견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냥 투자자 및 잡일 담당만 해주었다면 참 좋았을 텐데, 경영과 마케팅에까지 참여하려 한 것입니다. 이건 동업이 아니라 제 사업에 S양이 돈을 댄 것일 뿐인데, S양은 동업을 하는 걸로 착각했던 것 같습니다. S양은 웹에서 홍보하고 있는 것에 뭐가 잘못되었다는 얘기부터 시작해서 자신이 기획한 게 있으니 자기 아이디어를 활용하라는 얘기까지, 끊인 없이 사업에 간섭을 했습니다. 제가 알아서 한다고 말하면, S양은 자신이 '투자자'라는 걸 강조하며 '알아야 할 권리'같은 이야기를 해댔습니다.
갈수록 전 S양이 싫어졌습니다. 정확히 따지자면 S양과 저는 연인도 아니고, 썸을 탄 것도 아닙니다. 그냥 '아는 사이'였다가, S양이 저를 좋아하게 되고, 투자를 하게 되고, 잡일을 하게 된 그런 관계입니다. S양도 모르는 건 아닙니다. 그러니 자신이 누구에게 프로포즈를 받았다는 이야기를 제게 하기도 하고, 제게 여자친구랑 잘 지내냐는 질문을 하는 것이고 말입니다. 현재 S양은 자신이 '투자자'라는 것을 빌미로 저의 사생활까지 캐려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전 S양과의 관계를 끊을 생각입니다.
그런데 바로 끊을 수는 없습니다. S양이 사업과 꽤 엮여 있기 때문입니다. S양은 이쪽에서 부탁하지 않아도 알아서 헌신하는 타입인데, 그러다 보니 알게 모르게 제 사업과 관련된 잡일을 꽤 많이 하고 있습니다. 물론 투자자이기도 한 것이 가장 큰 이유입니다만, 그 외에 명의를 빌려준 것 등 지금 S양이 빠지면 제 사업이 곤란해질 수 있습니다. 때문에 S양이 지금 투자금 회수하고 명의 다 찾아가겠다고 하면 돌려는 줘야겠지만, 그것 보다는 '비지니스 파트너'라는 이름으로 묶어서 좀 더 같이 가고 싶은 생각입니다.
S양에게 전혀 마음이 없는 거냐고요? 전 사생활이 따로 있습니다. 이걸 왜 S양에게 말 안 하냐고요? 우리가 아무 사이도 아닌데 제가 직접 말 할 필요는 없죠. 물론 S양도 눈치는 채고 있을 겁니다. 제 SNS보고 이 여자 누구냐고 물어봐서, 사생활 침범하지 말라고 대답은 해줬거든요. 그리고 이걸 확실하게 말하면 S양이 투자금 회수하고 명의도 받아서 떠날 거 아닙니까. 아직 못 만든 제품 홍보페이지도 많은데 그러면 안 되죠. S양이 '비지니스 파트너'로는 쭉 남아 있었으면 합니다.
하지만 이제 이것도 끝일지 모르겠습니다. 며칠 전에 연락을 해서 "내가 절실해서 투자를 하라고 한 게 아니라, 그렇게 투자를 하면 네게 도움이 될 수 있기에 투자하라고 했던 거다. 나 나쁘게 생각하지 말고, 나에 대해 마음대로 단정 짓지는 마라. 그리고 네가 만들어 준다는 기업 블로그 내 아이디랑 비번 알려줄 테니까 내 이름으로 만들어 주면 된다. 아, 그리고 전에 만들어 놓았던 제품 상세페이지들 나한테 좀 보내줬으면 좋겠다."라고 꿈과 희망을 심어줬는데, S양은 블로그 만들 마음도 사라지고 상세페이지도 다 지웠다고 합니다.
뭐, 그래도 제가 어려워져서 이제 접겠다고 하면 S양이 다시 만들어 줄 테니 걱정은 안 합니다. 제가 "그럼 블로그 내가 만들어야겠네. 그동안 고마웠어. 블로그는 아무 것도 모르지만 내가 만들어 볼게."라고 흘리니, 벌써 "하다가 못 하겠으면 나한테 말해."라고 답이 왔습니다. 이제 제가 못 한다고 말만 하면 S양이 다 만들어 줄 겁니다. 역시, S양은 좋은 비지니스 파트너 입니다.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현재 상대가 S양 보다 큰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을 만나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 투자금 돌려받으시고 이 관계도 정리하시길 권해드립니다. S양은 투자금을 돌려 받으면 상대와의 연결고리가 완전히 끊기는 거 아니냐고 제게 물으셨는데, 그건 당연한 겁니다. 상대의 카톡 프로필에 다른 여자 사진이 올라가 있다고 하셨는데, 물어도 사생활 존중해 달라고 하면서 대답 회피하며 그 사진이 들어있는 창으로 "배당금 챙겨줄 테니, 비지니스 파트너로 기다려라."라는 이야기 하는 사람과는 연을 끊으셨으면 합니다.
아, 그리고 그간 사업을 구실로 다시 연락해 봐야 늘 잡일만 떠안게 되었다는 걸 이제는 깨달으시길 권해드립니다. 이만큼 했으면 이제는 알아야 하는 겁니다. 상대가 하는 당장의 달콤한 말 말고 그간 어땠는지를 차분히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S양은 썸남과 대화할 때마다 자신이 사이코가 되는 기분이라고 하셨는데, 원래 궤변남들과 대화하면 그러기 마련입니다. 그들은 말만 번지르르하게 해놓고 아무 책임도 못 지며, 그것을 지적하면 "너 성격 이상하다. 넌 배려를 안 한다. 너보다 내가 더 괴롭다."라는 말로 사람 바보 만드는 게 특기 입니다. 그러니 이제 우리, 그만합시다.
상대에게 베푸는 걸 즐거움으로 삼는 S양 같은 대원들이 꽤 많다. 그게 나쁜 건 아닌데, 남이 부탁한 것도 아닌 것을 무리를 해가면서까지 베푼 뒤, 상대도 내가 한 걸 알아주길 기대하고 있기에 문제가 된다. 나도 사실 이런 타입인 까닭에 "나나 잘 하자."라는 슬로건으로 살아 본 적도 있는데, 난 이런 증상을 보이는 사람들이 '오지라퍼'라고 생각한다.
오지라퍼들은 상대가 배고파 할 때 밥 한 그릇 주면 딱 좋을 것을, 남의 집에서 잔칫상 빌리고, 옆집 가서 식재료 얻고, 후식으로 먹을 것들까지 저 멀리에서 공수해다 대접을 한다. 자신의 형편을 넘어 남에게 아쉬운 소리까지 해가며 상대를 대접하는 것이다.
그렇게 식사를 한 상대는 이쪽의 노고를 전부 체감하며 그만큼 감동하고 고마워할까? 그렇지 않다. 99.82%는 차려진 밥을 얼른 먹곤 잘 먹었다고 인사를 할 뿐, 그게 남의 집 가서 음식동냥까지 해가며 마련해 준 밥상이니 각골난망해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때문에 상대로부터 기대하던 결초보은의 자세는 애초부터 이루어지기 어려웠던 것이다. 게다가 오지랖을 펴느라 남의 집에 가서 동냥을 하다가 엄하게 귓방망이를 막는 일이 벌어지기도 한다. 웹에서 한 때 유행했던 어느 오지라퍼의 대화를 보자.(대화와 상황은 내가 각색했다.)
여자후배 - 오빠 안녕하세요. 저 14학번 김혜숙입니다.
남자선배 - 어. 안녕. 근데 우리 본 적 있나?
여자후배 - 아니요. 아직 본 적은 없지만, 선배님이시잖아요.
남자선배 - 어. 그래. 암튼 반갑다.
여자후배 - 아, 오빠 근데 오빠 학교에 오토바이 타고 다니시는 거 맞죠?
남자선배 - 어.
여자후배 - 저 오토바이 하루만 빌릴 수 있을까요?
남자선배 - 오토바이를 빌린다고? 왜?
여자후배 - 제 친구가 오토바이 면허 따려고 하는데 연습할 오토바이가 필요해서요.
남자선배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여자후배 - 딱 하루만 빌리고 바로 가져다 드릴게요.
남자선배 - 너 나 알아?
여자후배 - 네?
남자선배 - 너 나 본 적 있어?
여자후배 - 아니요. 오빠가 오토바이 타고 다니신다고 얘기만 들었어요.
남자선배 - 초면에 네 친구 오토바이 연습하게 내 오토바이 빌려달라는 게 말이 되냐?
여자후배 - 안 되면 할 수 없죠. 알겠습니다.
남자선배 - 아 이거 생각할수록 어이가 없네.
S양도 썸남을 위해 자기 지인들의 재능을 빌리거나 소개시켜 줘서 도우려 했는데, 결과는 참담했다. 다음 연애를 할 때에는 '내 능력 이상의 것'을 상대에게 베풀려 하지 말길 권한다. 남의 호의까지 내가 상대에게 베풀겠다고 말해 즐거움을 얻어 놓고, 이후 남에게 욕먹는 건 바보짓이다. 상대에게 뭔가를 해줘야만 유지되는 관계 말고, 그냥 서로의 존재만으로도 감사하고 즐거운 연애를 하길 바란다.
▲ "카톡 보내요. 읽어 보시고 답장 주세요." 신청서 없는 사연은 모두 삭제하는데…, 어쩌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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