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에게 귀찮은 존재가 되고 마는 여자, 이유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스키장에 가게 되었을 때가 기억난다. 중학교 일학년 때였던 것 같은데, 난 친척형들과 함께 베어스타운엘 갔다. 가서 장비를 대여하고, 스키를 A자로 만들어 경로를 바꾸거나 멈추는 법을 배운 후 스키를 타기 시작했다. 그런데 얼마 타지 않아 중급, 상급으로 올라가는 친척형들과 달리 나는 스키가 늘질 않아 시간이 지나도 초보자 연습코너에서 헤매고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스키를 빌릴 때 내가 자꾸 발에 안 맞는다고 바꾸면 민폐를 끼치는 일이 될까봐 신발이 작음에도 불구하고 그냥 대충 맞는다고 말한 것이 그 날 내가 스키를 못 탄 이유 중에 하나인 것 같다. 신발이 작으니 발을 움직일 때마다 딱딱한 신발 앞부분에 발가락이 눌려 아팠다. 그냥 서 있을 때에도 발바닥의 아치 부분이 아팠다. 그런 상태에서 A자를 만들기 위해 다리에 힘을 주면 고문을 당하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난 농촌남자의 체면을 이렇게 구길 수 없다고 생각해 친척 형들을 따라 중급으로 올라갔다. 올라가긴 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내려갈 수 있을 것 같지 않아 중급의 꼭대기 위에서 망설이고만 있었다.
그때였다. 스키장 스피커에서 터보의 <Love is>라는 노래가 나왔다. 이게 아무래도 당시는 내가 중2병을 심하게 앓고 있을 시절이라 그랬던 것 같은데, 난 내가 좋아하는 노래가 나오자 지금 뭔가를 하면 지금까지와는 달리 다 잘 될 것 같다는 근거 없는 자신감을 가졌다. 영화에서 주제가가 나오면 주인공이 갑자기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거나, 숨겨졌던 힘을 쓰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용기를 내 중급에서의 활강을 시도했다.
그건 내가 생각해도 꽤 멋있는 도약이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문제가 발생했다. 활강으로 속력이 계속 붙자, 스키를 A자로 만들어도 멈춰지지가 않는 것이었다. 아니, 감당할 수 없는 속도인 까닭에 A자로 만들기조차 어려웠다. 난 당시 내가 다칠 것보다, 아래에 있는 누군가와 충돌하게 될 것이 더 무서웠다. 그 정도 속도로 내려가다 누군가와 충돌하게 되면, 상대에겐 달려가서 발로 차는 것만큼이나 큰 충격이 갈 것이 분명했다. 지금은 이걸 내가 웃으며 말하고 있지만, 당시 내 표정은 스키장의 눈 보다 더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이때의 트라우마로 인해 난 이후에도 몇 번씩이나 내가 활강하다가 누군가를 폴대로 찌르게 되는 악몽을 꾸기도 했다.
난 다급한 마음에
"비켜~ 비켜~"
라며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내 주행 예정 코스에서 멍하게 서있는 한 사람이, 내 말을 듣지 못한 채 아래쪽을 내려다보며 서 있었다. 그 짧은 순간에 난 '어떻게 부딪혀야 가장 적게 다칠까?'를 잠시 생각했던 것 같다. 상체를 부딪치면 뇌진탕이나 장기파열, 하체를 부딪치면 척추나 다리 골절이 예상되었다. 어느 쪽으로 부딪치든지 대형사고가 되는 상황. 난 어떻게든 충돌을 막아야 한다는 생각에 젖 먹던 힘까지 오른 다리에 집중해 한 쪽만 기울어진 A자를 만들었다. 그러자 몸이 왼쪽으로 돌았고, 주변부에 쌓인 눈 더미를 타고 넘어 이탈방지 녹색 철조망에 내 스키 두 개를 모두 꽂아 넣게 되었다.
스키 앞 부분 두 개가 모두 녹색 철조망에 꽂힌 채 난 거꾸로 매달려 있었다. 지나가던 사람들은 내가 실수로 그렇게 된 뒤 다시 일어날 거라 예상하곤 그냥 지나쳤는데, 그들의 예상은 모두 틀렸다. 충돌과 함께 스키 폴대를 놓쳐버린 까닭에 스키 뒷부분에 있는 분리탭을 누를 수가 없었다. 거꾸로 누운 채로 몸도 돌려지지 않았다. 그렇게 한참이 지났는데 아무도 도와주질 않았다. 저위에다 내가 우리 부모님이 패딩코트를 사주셨다고 적어 두었는데, 그 패딩코트가 방수를 못 하는 까닭에 옷이 축축하게 젖어왔다. 이러다 얼어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난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라고 사람이 지나갈 때마다 외쳤다. 다행히 얼마쯤 지나 안전요원이 날 발견했고, 난 그제야 철조망에 거꾸로 매달린 신세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당시 안전요원이 내게 뭐라고 이야기를 했는데, 난 살았다는 감격에 겨워있던 상태라 그가 뭐라고 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그가 내 패딩코드 지퍼에 붙어있는 리프트권에 매직으로 어떤 표시를 했던 것은 기억난다. '이 꼬마는 중급 이상으로 올려서는 안 된다'라는 뜻의 표시라고 했다.
1. 남자에게 귀찮은 존재가 되고 마는 여자.
사연을 보낸 S양에게 난,
"좋아하는 마음이 들고 난 뒤에야 남자에게 다가가며,
그러면서 영화 같은 일이 일어나길 바라고만 있는 게 문제."
라는 이야기를 해주고 싶다. 이성을 대하는 S양의 태도는, 내가 처음으로 스키장에 갔을 때 <Love is>라는 노래를 듣고 무모한 활강을 시도했던 것과 비슷하다. 제대로 할 줄 모르고 경험도 없으면서 무작정, 충동적으로 용기만 내는 것과 같다고 할까. 초급자 코스에서 헤매던 사람이 겨우 노래 한 곡 나왔다고 중급 코스를 여유롭게 탈 수 없는 것처럼, 평소에 이성과 '친한 관계'를 형성하지 못 했던 사람이 생각지도 못한 인연으로 누구를 만나게 되었다고 해서 갑자기 그와 둘 도 없는 사이가 되기는 아무래도 어려운 법이다.
S양이 이성과의 대화에서 소질이 없다는 것은, 대화 중 자꾸 '딴소리'를 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상대가 교통사고로 병원에 입원했다는 이야기를 했을 때, S양은
"네가 전에 말 한 거기 가 보려고. 가서 인증샷 찍어 보내줄게."
라는 당황스러운 대답을 했다. 상대의 상황 같은 건 생각하지 않은 채 그저 자신의 할 말이 급하고, 자신의 기대하는 반응을 상대가 해주길 바라는 마음이 앞서 '자기 하고 싶은 얘기'만 한 것이다. 반대로 S양은, 상대가 '하고 싶은 얘기'를 하는 것에 대해선 짜증을 내는 더욱 황당한 모습을 보인다.
"집에 갈 때 무슨 강아지가 쫓아왔다는 얘기만 해대더라구요."
대화자체가 불가능한데 무슨 연애를 할 수 있겠는가. 이런 관계는 끝가지 지켜보지 않아도, 급해지는 마음에 S양이 "시간 돼? 나랑 밥 먹을래? 카톡 답장이 너무 늦네."하는 탈춤을 추다 상대로부터 차단될 것이라는 걸 예상할 수 있다.
또, S양은 상대라는 사람에겐 별 관심이 없다. 그저 '내가 좋아하는 남자가 나를 좋아하게 되는 것'에만 몰두한 채, 빨리 그 꿈같은 시간이 찾아오길 바랄 뿐이다. S양이 한 말을 보자.
"나는 있잖아요. 얘랑 잘 될 걸 바라는 게 아니라,
내가 그때 느낀 느낌. 그 느낌을 한 번 느끼고픈 거예요.
다른 건 됐고 얘랑 밥 한 번 먹고 싶은 거라고요.
나도 가능성이 없는 걸 알고 있어요.
하지만 한 번 만나서 밥 한 번이나 술 한 잔 먹고,
살아온 경험들을 알고 싶은 거라고요.
내가 상대에게 매력적으로 보일 수 있는 게 뭘까요?
그리고 처음에는 둘 다 호감 있었다가
결국 왜 일방적으로 나만 호감을 갖게 되는지도 궁금해요."
이건 뭐 거의 "내가 스키를 잘 타는 사람이 되고 싶은 건 아니고, 그냥 최상급에 올라가서 타도 무난하게 내려올 수 있을 정도만 되었으면 좋겠어요."하는 말과 비슷한 얘기 아닌가. 그 둘은 분명 나누어 생각할 수 없는 것인데, S양은 그 둘이 별개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얘가 내 카톡에 대답은 안 하면서 그 시간에 페북은 겁나 잘함.
그것 때문에 기분 나빠서 난 페북 비활성화 했다가 다시 활성화 했다가 아주….
(중략)
내가 연락을 안 끊고 있었던 건 얘랑 밥 한 번 먹어야 하기 때문임.
솔직히 나는 한 번 만나면 상황을 역전시킬 수 있다는 확신이 있음."
S양이 좀 겸손한 모습을 보이며 상대를 존중하든가, 아니면 상대를 S양에게 빠지게 만들 수 있다는 확신이 있다면 -권하고 싶진 않지만- 그 마음대로 강하게 나가든가 하자. S양의 현실은 상대의 반응 하나에 일희일비 하고 있는 상황인데, 속으로는 '저 남자 정도는 내가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내게 빠지게 할 수 있음'이라고 생각하니, 이 엄청난 간격 속에서 S양 혼자 자진모리장단에 맞춰 탈춤을 추는 것 아닌가. S양이 상대가 마음을 여는 속도 같은 건 개나 줘버리라는 마음으로 S양의 마음만 들이대니, 결국 상대에게 S양은 '날 붙잡고 자기 얘기 하다가 부담스러운 요청까지 늘어놓는 여자'가 되고 만다.
아무리 지금 당장 상대와 연애를 시작하든 밥을 먹든 하고 싶어도,
"야, 4885…. 너지?"
하며 달려드는 '추격자'가 되진 말자. 상대와 연락 텄다고 해서 '24시간 수다 가능 티켓'을 얻게 된 것도 아닌데, 상대가 누구든 지금 뭘 하고 싶어 하든 일단 내 연락에 무조건 대답해야 한다고도 생각하지 말자. 사랑에 빠지는 속도로 치자면 S양은 우사인 볼트 급인데, 상대가 그 속도롤 못 쫓아온다고 해서 금방 마음을 바꿔 '못 먹는 감 찔러나 본다'는 생각으로 도박 같은 떠보기를 하진 말자. 마치 오늘만 날인, 그리고 오늘만 살고 말 사람처럼 달려들지 않으면 처음에 있었던 '서로 호감'은 쉽사리 사라지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오늘 이번 주말 몫까지 하루 열다섯 끼를 먹어둘 수 없는 것처럼, 오늘은 오늘의 진도만 나가자. S양이 '가속'에 투자하는 노력의 절반이라도 '제동'에 기울이면, S양의 연애는 '맑음'이 될 것이라 나는 생각한다.
원래 사연 하나를 더 다루려고 했는데, 오늘은 '내 얘기' 분량조절 실패로 글이 너무 길어졌으니 이쯤에서 마무리를 지을까 한다. 내일은 사연들로 꽉 찬 매뉴얼을 발행할 것을 약속하며, 다들 즐거운 월요일 보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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