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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매뉴얼(연재완료)/솔로부대탈출매뉴얼(시즌3)

갑자기 나타나 마음에 불을 지핀 동창남, 연애는?

by 무한 2013. 2. 20.
갑자기 나타나 마음에 불을 지핀 동창남, 연애는?
사연 속 이야기에서 느껴지는 H양은 매력적이다. '개념찬 여성'이라고 할 수 있는 스타일로, 자신의 행동을 스스로 단속하며 타인에게도 예의를 갖추는 유형의 여자다. 1990년대 내가 살던 동네에 현재의 H양이 있었다면, 아마 동네에서 참한 신붓감이라고 어르신들이 칭찬을 했을 것이다.

동네 얘기가 나오니까 또 옛날 생각이 난다. 우리 동네에도 H양 같은 여자가 있었다. 나보다 한참 누나였는데, 이름은 송희였다. 당시 그 누나 나이가 스물 다섯인가 그랬다. 지금과 달리 당시엔 스물 다섯이면 얼른 시집가야 할 나이인 것처럼 여겨졌다. 어쩌면 송희누나가 또래에 비해 군계일학의 매력을 지니고 있어서 더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또래의 선미, 경하, 정숙이누나도 있었지만 그 누나들의 연애에 대해선 동네 사람들이 별로 관심을 갖지 않았다.)

송희누나는 경희대를 나온 여자였다. 무슨 과를 나왔는지는 내 기억에 없는데, 그도 그럴 것이 동네 사람들 대부분 '경희대'라는 이름만 주워섬겼을 뿐 무슨과인지는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대개

"송희가 경희대 나왔잖아. 경희대 한방과 하면 다 알아주지."


따위의 이야기들만이 오갔다. "경희대 한방과가 서울대학교 보다 높다.(응?)"라거나, "내가 예전에 경희대 근처에서 산 적이 있다." 라는 이야기를 하는 어른들도 있었다. 물론, 송희누나는 한의학과와 아무 관련이 없었다. 아직 꼬꼬마였던 내 또래의 아이들에겐 "송희는 학교다닐 때 전교 1등만 했다." 라는 '엄친딸 전설' 때문에 힘든 시기이기도 했다.

여하튼 그 빛나는 전설들 때문에 동네 사람 누구 하나 나서서 송희누나에게 선을 잇지 못했다. J초등학교 교장선생님 큰아들과 한 번 이어주려는 시도가 있긴 했는데, 송희누나가 퇴짜를 놓았다. 동네 사람들은 죄다 고개를 끄덕이며

"송희한테 그런 애가 눈에 차겠어? 지 아빠가 교장이지 지가 교장인가."


라고 말했다. 송희누나를 대상으로 한 일종의 '토테미즘'이 형성되었던 것이다.


1. 그녀가 일으킨 농촌마을의 바람


당시 우리 동네의 결혼 적령기가 가까운 남자 무리는 두 부류로 나뉘어 있었다. 하나는 슈퍼집 아들인 K형을 중심으로 한 'P공고 졸업생 연합'이었고, 또 하나는 교회 청년부를 주도하던 J형을 중심으로 한 '기독청년 연합'이었다. 아, 보건소 집 아들인 또 다른 K형을 중심으로 한 '스터디 연합'도 있긴 했는데, 그쪽은 동네 애들 과외 하는 것에만 신경쓰고 있었으니 제외하자.

'P공고 졸업생 연합(이하 졸연)'은 송희누나의 관심을 얻으려 적극적으로 행동했다. 송희누나는 직장에 기차를 타고 다녔는데, 졸연은 송희누나의 출퇴근시간에 맞춰 역전 슈퍼 야외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특히 퇴근시간에는 아예 의자들을 다 역 쪽으로 돌려놓고 앉아 눈에서 빛나는 레이저를 쏘아댔다. 내막을 모르는 다른 누나들은

'지금 나 쳐다보는 건가?'


라며 졸연의 시선을 의식하기도 했으나, 송희누나는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졸연은 자신들을 한 번 쳐다봐 주길 바라며 억지로 큰 소리를 내거나 과장된 대화를 하는 게 티가 났기 때문이다.

'기독청년 연합(이하 기연)'도 가만히 있진 않았다. 그들은 모든 인맥을 동원해 송희 누나를 교회로 이끌려 했다. 기연은

"송희가 주님을 영접할 수 있게, 힘써 전도하고 합심하여 기도하자."


라는 슬로건을 내걸었다.(물론 그 속뜻은 '주님'만이 아시리라.) 기연은 송희누나의 부모님과 친구들을 먼저 교회로 이끌어야 한다는 계획을 세웠는지 열심히 전도를 했다. 이 과정에 종진이형을 짝사랑하던 정숙이누나(송희누나의 친구)의 안타까운 러브스토리가 포함되어 있기도 하다. 난 정숙이누나의 부탁을 받고 종진이형을 놀이터로 부른 적이 있는데, 아, 이건 너무 슬픈 얘기니까 생략하도록 하자.

아무튼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과연 누가 송희누나의 선택을 받을지는 동네 사람 모두의 관심사였다. '단무지'라는 별명을 가진 형이 송희누나에게 친하게 지내고 싶다며 들이댄 적이 있지만, 결과가 좋지 않았던 것은 당연할 뿐더러 그건 모두가 '무리수'라고 생각했던 에피소드니 생략하자. 그 사건으로 인해 '단무지'형의 별명은 '다꽝'이 되었다.

그 해 가을, 폭풍처럼 등장한 형이 하나 있다. 가스집(당시엔 다들 LPG가스를 썼다.) 아저씨 조카인 L형이다. L형을 뭐라고 표현하면 좋을까. 내 마음 속에는 '데미안'으로 남아 있는 형이다. 풍기는 분위기부터가 동네 형들과는 달랐다. 짜장면을 먹어도 입에 짜장을 묻히지 않을 것 같은 사람이었다. 기연쪽 형들에게서도 그런 분위기를 풍기는 형들이 몇 있었지만, 그 형들이 믹스커피라면 L형은 원두커피였다.


2. 북가좌동의 힘


L형의 집은 북가좌동에 있었다. 북가좌동. 단순한 지명이지만, 내게 저 지명은 L형의 영향으로 인해 지금도 '암스테르담' 정도의 느낌이 든다. 그냥 가좌동이면 그러려니 할 텐데, 앞에 '북'이 붙은 까닭에 뭔가 강한 느낌이 들고, 자신은 외롭고 쓸쓸한 가운데서도 남의 등을 툭툭 두드려 줄 수 있는 의리의 분위기가 풍긴다.

"저 송전탑 부근으론 앞으로 10년 간 재개발이 이루어지지 않을 거야.
지금 저렇게 세워두고 바로 철거할 순 없는 거니까."



언젠가 L형이 내게 했던 말이다. 난 잠자리를 잡으려고 기찻길 옆 잔디밭에 있었는데, 가스배달을 다녀오던 L형과 마주쳤다. L형과 나는 농구를 같이 하다가 꽤 친해진 후였다. L형은 오토바이에서 내려 밀잠자리(예민한 까닭에 잡기 어려운 잠자리)를 잡아주겠다고 했다. 그러다 재개발 얘기가 나오고, 이어 저 말이 나오게 된 것이다.

"저 송전탑 분해해서 팔면 돈 많이 받을 것 같지 않냐?"


라는 이야기만 하던 동네 형들과는 확실히 다른 사람이었다.

그런 L형에게 송희누나가 빠져든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L형은 동네 형들과 전혀 다른 방법으로 송희누나에게 접근했다. 기차를 함께 탄 것이다. 동네 형들이 거칠기는 했지만 마음만은 순박했던 까닭에, L형처럼 '아무렇지 않게' 접근하는 방식은 시도하지 못했다. 혼자 마음을 키워 고백하는, 그런 정형화된 고백방식만 고집했던 것이다.

반면 L형은 물 흐르듯 아주 자연스레 접근했다. "나랑 친구해줄래?"따위의 질문 같은 건 생략하고, 그냥 처음부터 친구로 시작한 것이다. 약속을 잡고, 데이트를 하고, 대화를 나눴다. 상황이 다급해지자 졸연의 형들 가운데서는 '무리수 고백'을 하는 사람들이 늘어났고, 일부는 L형에게 괜한 시비를 걸기도 했다. 기연의 형들은 새벽기도까지 빠짐없이 참석하며 신앙심을 불태웠다. 교회가 부흥했다.

"여자가 원하는 것을 다 들어줄 필요는 없어.
여자들이 그런 남자를 바라는 듯 얘기하지만, 정작 좋아하진 않거든.
여자들은 자기가 상상도 못한 것들을 보여주는 남자를 좋아하지."



L형이 그 해 겨울 내게 한 말이다. 꼬꼬마인 나에게 저런 얘기를 했던 건, 아마 송희누나의 선택을 받은 유일한 남자라는 기쁨이 커서였던 것 같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면, L형은 연애의 '타짜'였다.

겨울이 지나 봄이 되었고, L형이 다시 북가좌동으로 돌아가며 둘의 연애는 끝났다. 졸연의 형들이 잠시 송희누나를 저질스럽게 말하는 시기가 잠깐 왔다가, 송희누나가 서울로 가 버리자 그런 뒷담화도 자연히 사라졌다. 난 당시 첫사랑의 열병을 앓고 있었기에 둘의 얘기에 더 관심을 가지진 못했다. 나 역시 또래 중 군계일학이라 할 수 있는 K양에게 마음을 빼앗겼던 것이다. 포도밭 근처에서 고백을 했고, 좋은 친구로 지내자는 대답을 들었다. 집에 돌아와 샤워를 하며 소리죽여 울었다. 눈물이 샤워기의 온수보다 뜨거웠다.

L형이 전에 가르쳐 준 방법을 쓸 수도 없었다. 중학교에 올라가며 학교가 갈렸기 때문이다. 그녀는 버스를 탔고, 난 기차를 탔다. 언젠가 만나면 햄버거를 같이 먹자고 얘기하려고 교복 안주머니 속엔 늘 오천 원을 넣고 다녔다. 당시 햄버거 세트가 2,500원이었기에, 오천 원이면 세트 두개를 시키기 꼭 알맞았기 때문이다. 아 잠깐만, 이 얘기를 내가 왜 하고 있는 거지? H양의 사연을 살펴보기로 해놓고 다른 얘기만 너무 많이 했으니, 더 늦기 전에 아래에선 H양의 사연을 살펴보자.


3. H양에게


나도 H양의

"아주 오랜만에 오래도록 알아가고 싶은 친구가 생겼습니다."


라는 말에, "그럼 이러이러하게 해 보세요."라고 권해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하지만 H양의 사연 속 동창남에게선 '타짜'의 냄새가 나고, H양은 둘의 관계를 이미 '친구'의 선을 넘어 저 먼 곳까지 끌고 나가 버렸다.

H양은 '동창생과 오랜만에 만나 나눌 수 있는 이야기들'을 '연인이 될 인연이라 나누게 된 얘기들'로 착각했다. 이를 테면 무슨 회사에 다니는지, 다시 만나기까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에 대해 묻는 건 '동창생'으로서 이상할 것 없는 질문들이다. 그러나 H양은 그걸 '관심'으로 여겼고, 그의 바로 옆자리까지 다가갔다. 사회에 나와서 알게 되었거나 소개팅 등으로 만난 남자들과는 다른, 그 동창남과의 '공감대'를 연애의 감정으로 받아들였다.

동창남이 확실히 센스 있긴 하다. 그처럼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얘기를 하면서 여자를 빠져들게 만들만한 남자는 많지 않다. 때문에 H양은 더욱 그에게 매력을 느꼈고, 무료한 일상에 한 줄기 빛이 되어주는 관계에 계속 다가서게 되었다. 먼저 말을 걸고, 칭찬을 하고, 이런 저런 수다를 떨며 그의 일상에 끼어든 것이다.

저기까진 참 괜찮았는데, 이제 남은 건 연인이 되는 것밖에 없다고 생각한 H양이 몸과 마음의 진도를 너무 나가 버렸다. 남자친구의 몫인 일들을 상대와 함께하고, 또 상대에게 요구한 것이다. 사연을 읽으며 내가 좀 황당했던 부분은

"넌 왜 나와 이러이러한 일을 했니?"


라고 물은 부분이다. 친구와 같이 여행을 갔다가 뭔가 서운한 일이 생기자

"넌 왜 나와 여행을 왔니?"


라고 묻는 것과 비슷하다. 아무 쓸모없으며, 저 질문을 받은 사람을 그저 당혹스럽게만 만드는 질문이다. 또, 행여 상대에게 꿍꿍이가 있었다 하더라도 저 질문에 그 꿍꿍이를 그대로 드러내겠는가? 그저 이쪽이 원할만한 이야기들을 들려주며 얼른 상황을 모면할 뿐이다. H양의 동창남 역시 '이쪽에서 듣기 좋을 만한 이야기'를 하며 대충 상황을 정리했다.

이후 동창남의 연락은 줄어들었다. H양은 속이 탔다. 그래서

"너 계속 바쁘다고 나를 안 만나주면 난 삐질 것 같다."
"전에 네가 얘기했던 '그녀들'. 나도 '그녀들' 중에 한 명이 된 거냐?"
"사실 우리가 무슨 관계인 것도 아닌데 내가 왜 너에게 이러는지 모르겠다."



따위의 크고 아름다운 헛발질을 잔뜩 해 버렸다. 저 말을 들은 남자는 무슨 생각을 할까? 아마 L형이라면,

'얜 이제 내가 원할 때 언제든 옆으로 부를 수 있게 되었군.
정말 바빠서 그러는 건데 대체 왜 날 나쁜 사람 만들어 힘들게 하냐고 말해야지.
그럼 알아서 조용히 자기비판의 시간을 갖겠지.'



라고 생각했을 지도 모르겠다. 동창남의 생각이 그럴 거라고 단정 짓는 건 아니다. 다만, 아쉬운 여자를 대하는 '나쁜 남자'들의 생각이 대략 저렇다는 걸 이야기 하는 거다. 저 상황을 타파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상대의 행동을 그대로 모방하는 것이라는 얘기를 적어두겠다. 상대처럼 관계를 방치한 채 내 할 일 하는 거다. 그럼 '오토매틱 연애'가 될 줄 알았던 상대는 당황해 다시 돌아올 것이다.

"만약 그렇게 했다가 그가 떠나면요?"


그래서 떠날 남자 같으면, 옆에 강철로 묶어 두어도 떠난다.


동창남을 '타짜'라고 가정한 건, 그가 한 '예전에 사귄 여자들' 이야기 때문이었다. H양에겐 그의 '이전에 사귀었던 여자를 말하는 방식'이 어떤지를 곰곰이 살펴보길 권한다. 사랑한다고 고백하며 즐거운 날을 함께했을 그녀들에 대한 그의 태도가 그 정도인데, 그저 동창생일 뿐인 H양에겐 뭐….

저런 걸 다 접고 아주 단순하게도 살펴볼 수 있다. 이게 그냥 해프닝일 수 있는 경우다. 예컨대 내가 동창생 A군을 만났다고 해보자.

[1차 만남]
A - (헤어지며) 그래, 언제 술 한잔 하자.
나 - 이번 주말 괜찮아?
A - 어? 이번 주말? 음, 그래. 그때 보자.

[2차 만남]
A - (술 마시고 헤어지며) 오늘 즐거웠다. 다음에 또 보자.
나 - 언제? 이번 주 목요일에 치맥 먹을까?
A - 목요일? 어, 그러지 뭐.

[3차 만남]
A - (역시 만났다가 헤어지며) 나 여행사에 있으니까, 표 구할 일 있을 때 말해.
나 - 진짜? 나 호주 가려고 하는데….
A - 음…. 그래, 한번 알아볼게.



이래 놓고는 내가 "이제야 진짜 친구를 만난 듯. A군과 난 앞으로 베프!"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A군이 예의상 한 일들을 난 모두 '날 향한 우정의 표시'로 받아들인 것이다. H양에겐 미안하지만, 동창남은 단 한 번도 연애를 예고하는 말을 꺼낸 적 없다. 아무리 살펴봐도 H양과 사귀고 싶다거나, H양에게 이성으로서의 호감이 있다는 얘기는 찾아볼 수 없다. 심지어 그 흔한 '이상형이 뭐냐'는 것도 묻지 않았다. H양 혼자 상대의 옛사랑 물어가며 인터뷰 한 게 전부다.

상대에게 H양 마음의 해답지를 이미 보여줘 놓고, 다시 억지로 앉혀 답 모르는 척 하며 문제 풀라고 말하면 당연히 상대는 지겨워할 것 아닌가. 그가 그 답을 다 잊을 때까지, 혹은 자신이 본 답이 틀릴 수 있다는 생각을 할 때까지 멀찍이 떨어져 있길 권한다. 지금은 이쪽에서 무슨 짓을 하든 그에겐 '매달리는 행위'로 보일 테니 말이다. 그를 오래도록 알아가고 싶다면, 이게 최선의 방법이다.



"무한님 여자친구가 첫사랑 K양 얘기 보면 불편하지 않을까요?" 본인 얘기라 괜춘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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