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 미팅, 심남이는 잠잠한데 다른 남자가 대시?
상황설명부터 하자. 사연을 보낸 H양은 얼마 전 회사 미팅을 했다. H양의 회사에서 네 명의 여자가, 다른 대기업에서 네 명의 남자가 나왔다. H양은 남자 1호가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당시 남자 1호와 엮이는 듯한 분위기가 들었다는 H양의 주장과 달리, 남자 1호는 연락처를 묻지 않았다.
이쯤에서 일단 하나 말해주고 싶은 건, 미팅 자리에서 장난 좀 같이 치고 단둘이 술잔 몇 번 부딪쳤다고 해서 그게 관심은 아니라는 것이다. 남자에게 장난기가 많거나, 여자가 좀 들이대기만 해도 그런 분위기는 얼마든 조성될 수 있다.(그리고 미안하지만, 그냥 제일 만만해 보이고 리액션을 잘 하는 여자에게 장난을 거는 경우도 있다.)
여하튼 저기서 상황이 종료되었으면 2013년에 찾아온 하나의 에피소드로 끝날 이야기였는데, 며칠 후 H양에겐 놀라운 얘기가 들려왔다. 미팅에 나왔던 남자 중 하나가 주선자에게 H양의 연락처를 물었다는 소식이었다. 그녀는 연락처를 물어 온 사람이 남자 1호일 거라고 생각했으나, 기대와 달리 연락처를 물은 건 남자 4호였다. 미팅자리에서 대화 한 번 나누지 않았고, 가장 멀리 떨어져 앉은 남자였기에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던 남자. 무엇보다 그가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기에 H양은 실망했다. 하지만 그를 통하면 남자 1호와 만날 기회를 만들 수 있다는 생각에 그녀는 남자 4호와 연락을 주고받기 시작했다.
그녀의 바람은 이루어져 현재 남자 1호와 4호, H양, 그리고 미팅엔 참가하진 않았지만 H양과 가까운 친한 언니, 이렇게 넷이 어울리게 되었다. H양은 이제 남자 1호와 엮일 일만 남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은데, 내가 보기엔 얼마 지나지 않아 H양이 두 남자 모두에게 '나쁜 여자'로 낙인찍힐 가능성이 높다. 오늘은 그 이유에 대해 좀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출발해 보자.
남자 4호에게 첫 연락이 와 단둘이 식사를 하자고 했을 때, H양은 거절했다. H양이 밝힌 거절의 이유는 '이렇게 연락하실 줄 몰라서'라는 것과 '너무 뜬금없는 제안이어서'였다. '다른 사람에게 호감이 있는 줄 알았다'는 말도 했다.
이걸 두고 H양은 이후의 모든 행동을 합리화 한다.
라며 스스로 작성한 면죄부를 집어 든 것이다. 그녀는 '자, 만날 의사가 없다는 걸 밝혔으니 이제 슬슬 작전을 시행해 볼까.'라고 생각했는지, 이후 남자 4호에게 먼저 연락을 하기도 하고, 주말에 아는 언니와 함께 만나자는 이야기를 하기도 한다. 단, 짝이 맞아야 하니 미팅에서 봤던 사람 중 하나를 데려오라는 말도 한다. 혹시 남자 4호가 다른 남자를 데려올까봐, H양은 '제일 키 크셨던 분'이라고 남자 1호를 콕 찝어서 말한다.
우리끼리니까 하는 얘기지만, 저기서부터 H양이 남자 4호에게 한 모든 행동은 '희망고문'일 뿐이다. 남자 4호의 카톡 프로필을 보고 먼저 말을 걸기도 하며 H양은 그에게 '가능성'과 '여지'를 줬다. 물론 진짜 남자 4호에게 관심이 있어서 그런 건 아니고, 그걸 핑계로 대화를 한 후 남자 1호의 소식을 묻거나 함께 만날 약속을 잡기 위해서였다.
사연 말고 카톡대화만 H양의 지인에게 보여줘 보길 권한다. 그럼 지인은 분명 H양과 남자 4호가 '썸 타는 관계'라고 받아들일 것이다. H양이 먼저 안부를 묻기도 하고, 칭찬 하고, 만나자는 이야기를 꺼내기도 하는데 그걸 '관심'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이것에 대해 H양이 무슨 얘기를 하든 다 변명일 뿐이다.
H양이 떳떳하려면, 남자 4호를 통해 만남을 가진 뒤 남자 1호와 카톡을 트게 되었을 때, 남자 1호에게 직접 연락을 했어야 한다. 하지만 H양은 남자 1호에게 직접 관심을 표현했다가 그의 콧대가 높아질까봐 남자 4호를 통해 만남을 주선하고 있다. 얍삽하다. 나가고 싶다느니, 만나서 직접 확인하라느니 하는 밑밥을 던져 남자 4호가 만나자는 얘기를 꺼내게 만들고, 그러면 또 단둘이 만나는 건 어색하다면서 넷이 보자고 말하는 것. 당장 얕은꾀로 상대를 속여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을진 몰라도, 그게 드러나는 순간 H양은 두 남자 모두에게 인격적으로 '불량' 판정을 받을 확률이 높다.
남자는 바보가 아니다. 남자 4호가 H양의 요청대로 남자 1호를 데리고 나왔던 건, 따지고 보면 H양의 '아는 언니'와 남자 1호를 짝 지워주려는 듯한 뉘앙스를 H양이 흘렸기 때문이다. H양은 자신의 속마음을 들키지 않기 위해
라고 말하지 않았는가. 남자 4호는 H양이 '검은 속셈'을 가지고 있는 여자라고 생각하지 않았기에 그 말대로 따른 거지, 그가 '심남이 셔틀'역에 어울리는 호구라서 따른 게 아니다. 남자 4호는 남자 1호를 데려오기 위해 사정을 다 설명하고 H양과 이어질 수 있게 도와달라는 말을 했을 것이다. 이건 남자 1호가 H양의 연락에 무덤덤하게 답하고, 만나서 H양이 관심을 표현할 때 무관심한 모습을 보이는 것으로도 알 수 있다.
생각을 좀 하자. 남자 4호와 1호는 어쨌든 정년이 될 때까지 같은 직장에 다닐 사람들이다. 게다가 주말이면 단둘이 술을 마실 정도로 친한 사이다. 둘이 친한 까닭에 남자 4호를 통해 1호를 불러내는 일이 쉽겠지만, 이후 H양의 '검은 속셈'이 드러난 후의 뒷감당은 어떻게 할 생각인가?
나 좀 솔직하게 말해도 되나? 포기한 게 아니라 처음부터 호감이 없었던 거다. H양은 또 "1호는 먼저 연락하거나 만나자고 하는 타입은 아닌 것 같아요."라고 말하는데, 그런 타입이 아니라서 그런 게 아니라, H양에게 관심이 없기 때문에 그런 거다.
이런 상황에선 처음부터 1호에게 다가가며 '부탁 작전'을 사용했으면 됐는데, 안타깝게도 위에서 말했듯 H양은 손쉽게 계기를 만들려 4호를 이용했다. 임시방편으로 테이프를 덕지덕지 발라 놓은 까닭에 이제 수리도 어려운 관계가 되었다고 할까. H양이 1호와 친해져도 껄끄러운 상황이 되고 만 것이다. 계기를 만들기 위한 전투에선 이겼지만, 전쟁의 형세는 불리해졌다.
도움을 요청한다며 '지인들'을 끌어들인 것 역시 최악의 수다. 현재 H양을 돕기 위해 구원투수로 나섰던 '아는 언니'는 그 행실이 수상하기까지 하다. 남자 1호와 함께 카톡 게임을 하며 아이템을 선물해주는 사이가 되었으니 말이다. 표면적으로야 H양을 돕기 위해 그에게 접근하는 거라지만, H양 말대로라면 남자 1호는 미팅에 참석한 모든 여자들이 마음에 들어 했던 남자 아닌가. '아는 언니'가 지금이야 '밥상을 차려서 너에게 주겠다'고 말하지만, 사람 일은 모르는 거다. '정성껏 차려서 이걸 왜 걜 줘? 내가 먹어야지.'라고 생각하는 순간이 찾아올 수 있다. 돕겠다고 나섰던 지인이 썸남을 채가는 사연은 내 메일함에 가득하다. 아는 언니가
라며 밑밥을 깔아두는 것도, 솔직히 좀 수상하다. 그렇게 밑밥을 까는 경우, 대개 '썸남과 단둘이 연락하는 것'을 이쪽에서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도록 해 놓고, 직접 자리를 까는 경우가 많다.
아는 동생에게 남자 1호와의 카톡을 대신 하게 한 것 역시 악수다. '아는 동생'에겐 미안하지만, 그녀가 사용하는 건 "오빠 나 쉬워요~ 나 오빠한테 관심있어요~ 날 가져요~"라며 일단 들이대고 보는 작전이다. 급한 남자나 외로운 남자에겐 그게 통하겠지만, 보통의 남자에겐 그저 술주정처럼 보일 뿐이다. 남자 1호도 한 문장으로 표현하지 않았는가.
가슴이 아프다. 자신의 연애에 아무도 못 끼어들게 하라고 그렇게 말했거늘….
H양이 하고 있는 연애의 모습은, 중학생인 내 조카와 조카의 친구들이 하고 있는 연애와 닮아있다. 언젠가 조카가 우리 집에 놀러왔을 때, '남자에게 고백 받았다'는 이야기를 한 적 있다. 자초지종을 물어 보니, 조카가 학원에서 또래의 아이들과 어울리다가 이상형이 '손이 예쁜 남자'라는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그 이야기를 들은 학원의 한 남학생이, 그게 자신을 지칭하는 말이라고 착각했던 것 같다. 실제로 그 남학생은 길쭉길쭉하며 예쁜 손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때문에 그는 그 이후로 내 조카에게 놀이터에 가서 얘기를 하자느니, 피자를 먹자느니 하면서 대시를 했다.
난 조카가 모질게 거절하는 대신 여러 핑계를 대며 여지를 남기는 것을 보았다. 남학생이 피자를 먹자는 카톡을 보내면, 조카는 다음에 누구누구와 함께 먹자느니 하는 식으로 미룰 뿐이었다. 내가 그 남학생과 만나는 건 어떠냐고 묻자, 조카는
라며 짧고 임팩트 있는 대답을 했다. 그러면서 동시에 다른 남학생과도 카톡을 하고 있었다. 다른 남학생은 또 어떤 남자냐고 물으니, 친구가 좋아하는 남자라서 이어 주려고 한다고 답했다. 친구에게 '걔가 영어학원 등록하게 해달라'는 부탁을 받았다고 했다.
내가 중학생 일 때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친구가 한 학년 후배인 S양을 좋아했는데, 둘은 같은 성당에 다니지만 서로 어색한 사이였다. 때문에 친구는 S양과 같은 동네에 살며 친한 A군을 섭외했다. A군을 성당에 나오게 만들어 자연스레 같이 어울린 뒤, S양에게 고백한다는 작전이었다. 이 작전은 결국 A군과 S양이 사귀는 비극적 결말이 되고 말았지만, 여하튼 누가 누구와 사귈 수 있게 도와주고, 대신 이야기를 전달해 주거나 여지를 남긴다는 점에서 H양의 이야기와 닮아있다.
H양은 이제 이십대 후반을 향해 달려가는 나이인데, 아직까지 저 '사춘기 연애'에만 머물러 있으면 곤란하다. 특히 남자 1호와 카톡을 할 때, 멍석만 깔아두고 상대가 다 알아서 진행해 주길 기다리는 수동적인 태도를 고쳐야 한다.
이쪽에서 보답으로 밥을 산다고 했으면, 약속도 이쪽에서 정하는 게 맞는 거다. 밥 산다는 얘기만 툭 던져놓고 그 이후엔 바라만 보고 있으니 상대도 달리 할 말이 없는 것 아닌가. 구체적으로 "부탁을 들어줘서 고마우니 뭘 먹으러 가자. 언제 시간이 괜찮냐." 등을 물어 약속을 잡으면 된다. H양은
라며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있다. 이쪽에서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걸 들키기 싫어 먼저 연락도 하지 않고, 넷이 만났을 때 취한 척 하며 남자 1호를 떠보고만 있으니 어떻게 관계가 더 진행되겠는가. 노멀로그에서 '빙수 작전'을 보고 따라했으면, 언제 어디서 먹자는 약속까지 잡길 권한다. 지금처럼 기다리고 기다리다 잊을만할 때쯤 한 번 카톡을 보내는 건, 그냥 심심해서 그러는 것처럼 보일 수 있으니 자제하자.
위에서 H양이 그닥 듣고 싶지 않을만한 얘기를 많이 했기에, 해결책을 제시하는 걸로 마무리를 할까 한다. 그닥 바람직한 방법은 아니지만, 내가 H양과 같은 상황에 놓였다면 우선 남자 4호를 커플로 만들 것 같다. H양이 소개팅을 주선해주고 성실한 주선자 역할을 담당하면 남자 4호와의 관계는 매끄럽게 정리할 수 있다.
그러고 나서 남자 1호가 한다는 그 게임을 시작할 것 같다. 아이템을 선물하는 사이게 되면, 대화를 하기 보다 수월해 질 것이니 말이다. 그리고 호칭은 '1호씨'에서 '오빠'로 즉시 변경하고, 그간 남자 4호를 통해서 하던 행동(기프티콘 보내기, 약속 잡기 등)을 모두 직접 할 것이다. '아는 언니'에게 조언을 구하거나 대신 뭔가를 해달라는 부탁은 목에 칼이 들어와도 하지 않을 것이다. 단체카톡방에서 "H양 이러이러해요~"라고 누가 묻지도 않은 말을 해 띄워주려는 걸 보면, 그 언니 역시 '사춘기 연애'에서 몇 걸음 못 벗어난 듯 보인다.
H양의 친구들이 "그 남자 어장관리하는 것 같다."라고 한 말에는 아무 의미도 두질 말길 바란다. 다시 말하지만 H양에게 관심이 없는 거지, 어장관리 하는 남자는 아니다. 어장관리 하는 남자가 주말에 라이딩 다니며 축구 동호회에 소속되어 공차는 경우는 거의 없다. 회사 끝나고 직장 남자 동료들과 늘 어울리지도 않고 말이다. 오히려 어장관리는 H양이 남자 4호에게 하는 게 어장관리니, 즉시 중단하길 권한다. 필요할 때 아무 핑계나 하나 앞세워 말 걸곤, 다른 목적 채우려 하는 게 어장관리가 아니고 뭐겠는가. 그러다 상대가 둘이 만나자고 하면 "단둘이서 보는 건 부담스럽네요. 같이 만나요."라며 밀어내고….
H양이 미워서 한 얘기들이 아니니 너무 상처는 받지 말길 바란다. 그냥 두었다간 주변 남자들에게 매장당하기 딱 좋은 태도를 가지고 있기에 그 부분을 말해주고 싶었다. "단 둘이 보는 건 싫다고 말했으니까, 전 관심 없다는 걸 확실히 표현한 거잖아요?"라는 합리화는 너무 빈약하다. 그래놓고 카톡 남김말이 어쩌고 하면서 남자 4호에게 말 건 것은 누군가? 그건 인터넷 쇼핑몰 핸드백 상세페이지에 '회사 사정 상 위의 이미지에서 디자인이 조금 변형된 제품이 발송될 수 있음'이라고 작게 적어 놓곤 종이봉투 보내버리는 것과 같은 짓이다. 그래놓고 "전 분명히 명시했는데요?"라고 말한다고 용서받을 수 있겠는가? 주변의 누군가에게 기대거나 누군가를 이용하지 말고, H양 본인의 힘으로 연애를 이루길 권한다.
▲ 다 같이 만나서는 대화에서 소외되고, 술값 계산만 했다는 남자 4호를 생각하면 눈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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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황설명부터 하자. 사연을 보낸 H양은 얼마 전 회사 미팅을 했다. H양의 회사에서 네 명의 여자가, 다른 대기업에서 네 명의 남자가 나왔다. H양은 남자 1호가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당시 남자 1호와 엮이는 듯한 분위기가 들었다는 H양의 주장과 달리, 남자 1호는 연락처를 묻지 않았다.
이쯤에서 일단 하나 말해주고 싶은 건, 미팅 자리에서 장난 좀 같이 치고 단둘이 술잔 몇 번 부딪쳤다고 해서 그게 관심은 아니라는 것이다. 남자에게 장난기가 많거나, 여자가 좀 들이대기만 해도 그런 분위기는 얼마든 조성될 수 있다.(그리고 미안하지만, 그냥 제일 만만해 보이고 리액션을 잘 하는 여자에게 장난을 거는 경우도 있다.)
여하튼 저기서 상황이 종료되었으면 2013년에 찾아온 하나의 에피소드로 끝날 이야기였는데, 며칠 후 H양에겐 놀라운 얘기가 들려왔다. 미팅에 나왔던 남자 중 하나가 주선자에게 H양의 연락처를 물었다는 소식이었다. 그녀는 연락처를 물어 온 사람이 남자 1호일 거라고 생각했으나, 기대와 달리 연락처를 물은 건 남자 4호였다. 미팅자리에서 대화 한 번 나누지 않았고, 가장 멀리 떨어져 앉은 남자였기에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던 남자. 무엇보다 그가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기에 H양은 실망했다. 하지만 그를 통하면 남자 1호와 만날 기회를 만들 수 있다는 생각에 그녀는 남자 4호와 연락을 주고받기 시작했다.
그녀의 바람은 이루어져 현재 남자 1호와 4호, H양, 그리고 미팅엔 참가하진 않았지만 H양과 가까운 친한 언니, 이렇게 넷이 어울리게 되었다. H양은 이제 남자 1호와 엮일 일만 남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은데, 내가 보기엔 얼마 지나지 않아 H양이 두 남자 모두에게 '나쁜 여자'로 낙인찍힐 가능성이 높다. 오늘은 그 이유에 대해 좀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출발해 보자.
1. 도구가 되어버린 남자 4호.
남자 4호에게 첫 연락이 와 단둘이 식사를 하자고 했을 때, H양은 거절했다. H양이 밝힌 거절의 이유는 '이렇게 연락하실 줄 몰라서'라는 것과 '너무 뜬금없는 제안이어서'였다. '다른 사람에게 호감이 있는 줄 알았다'는 말도 했다.
이걸 두고 H양은 이후의 모든 행동을 합리화 한다.
"전 분명히 거절의사를 밝혔어요."
라며 스스로 작성한 면죄부를 집어 든 것이다. 그녀는 '자, 만날 의사가 없다는 걸 밝혔으니 이제 슬슬 작전을 시행해 볼까.'라고 생각했는지, 이후 남자 4호에게 먼저 연락을 하기도 하고, 주말에 아는 언니와 함께 만나자는 이야기를 하기도 한다. 단, 짝이 맞아야 하니 미팅에서 봤던 사람 중 하나를 데려오라는 말도 한다. 혹시 남자 4호가 다른 남자를 데려올까봐, H양은 '제일 키 크셨던 분'이라고 남자 1호를 콕 찝어서 말한다.
우리끼리니까 하는 얘기지만, 저기서부터 H양이 남자 4호에게 한 모든 행동은 '희망고문'일 뿐이다. 남자 4호의 카톡 프로필을 보고 먼저 말을 걸기도 하며 H양은 그에게 '가능성'과 '여지'를 줬다. 물론 진짜 남자 4호에게 관심이 있어서 그런 건 아니고, 그걸 핑계로 대화를 한 후 남자 1호의 소식을 묻거나 함께 만날 약속을 잡기 위해서였다.
사연 말고 카톡대화만 H양의 지인에게 보여줘 보길 권한다. 그럼 지인은 분명 H양과 남자 4호가 '썸 타는 관계'라고 받아들일 것이다. H양이 먼저 안부를 묻기도 하고, 칭찬 하고, 만나자는 이야기를 꺼내기도 하는데 그걸 '관심'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이것에 대해 H양이 무슨 얘기를 하든 다 변명일 뿐이다.
H양이 떳떳하려면, 남자 4호를 통해 만남을 가진 뒤 남자 1호와 카톡을 트게 되었을 때, 남자 1호에게 직접 연락을 했어야 한다. 하지만 H양은 남자 1호에게 직접 관심을 표현했다가 그의 콧대가 높아질까봐 남자 4호를 통해 만남을 주선하고 있다. 얍삽하다. 나가고 싶다느니, 만나서 직접 확인하라느니 하는 밑밥을 던져 남자 4호가 만나자는 얘기를 꺼내게 만들고, 그러면 또 단둘이 만나는 건 어색하다면서 넷이 보자고 말하는 것. 당장 얕은꾀로 상대를 속여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을진 몰라도, 그게 드러나는 순간 H양은 두 남자 모두에게 인격적으로 '불량' 판정을 받을 확률이 높다.
2. H양이 놓치고 있는 부분들.
남자는 바보가 아니다. 남자 4호가 H양의 요청대로 남자 1호를 데리고 나왔던 건, 따지고 보면 H양의 '아는 언니'와 남자 1호를 짝 지워주려는 듯한 뉘앙스를 H양이 흘렸기 때문이다. H양은 자신의 속마음을 들키지 않기 위해
"언니가 키가 크니까, 짝 맞춰서 오시는 분도 키가 컸으면 좋겠다."
라고 말하지 않았는가. 남자 4호는 H양이 '검은 속셈'을 가지고 있는 여자라고 생각하지 않았기에 그 말대로 따른 거지, 그가 '심남이 셔틀'역에 어울리는 호구라서 따른 게 아니다. 남자 4호는 남자 1호를 데려오기 위해 사정을 다 설명하고 H양과 이어질 수 있게 도와달라는 말을 했을 것이다. 이건 남자 1호가 H양의 연락에 무덤덤하게 답하고, 만나서 H양이 관심을 표현할 때 무관심한 모습을 보이는 것으로도 알 수 있다.
생각을 좀 하자. 남자 4호와 1호는 어쨌든 정년이 될 때까지 같은 직장에 다닐 사람들이다. 게다가 주말이면 단둘이 술을 마실 정도로 친한 사이다. 둘이 친한 까닭에 남자 4호를 통해 1호를 불러내는 일이 쉽겠지만, 이후 H양의 '검은 속셈'이 드러난 후의 뒷감당은 어떻게 할 생각인가?
"무한님, 그럼 1호가 정말 4호 때문에 저를 포기한 걸까요?"
나 좀 솔직하게 말해도 되나? 포기한 게 아니라 처음부터 호감이 없었던 거다. H양은 또 "1호는 먼저 연락하거나 만나자고 하는 타입은 아닌 것 같아요."라고 말하는데, 그런 타입이 아니라서 그런 게 아니라, H양에게 관심이 없기 때문에 그런 거다.
이런 상황에선 처음부터 1호에게 다가가며 '부탁 작전'을 사용했으면 됐는데, 안타깝게도 위에서 말했듯 H양은 손쉽게 계기를 만들려 4호를 이용했다. 임시방편으로 테이프를 덕지덕지 발라 놓은 까닭에 이제 수리도 어려운 관계가 되었다고 할까. H양이 1호와 친해져도 껄끄러운 상황이 되고 만 것이다. 계기를 만들기 위한 전투에선 이겼지만, 전쟁의 형세는 불리해졌다.
도움을 요청한다며 '지인들'을 끌어들인 것 역시 최악의 수다. 현재 H양을 돕기 위해 구원투수로 나섰던 '아는 언니'는 그 행실이 수상하기까지 하다. 남자 1호와 함께 카톡 게임을 하며 아이템을 선물해주는 사이가 되었으니 말이다. 표면적으로야 H양을 돕기 위해 그에게 접근하는 거라지만, H양 말대로라면 남자 1호는 미팅에 참석한 모든 여자들이 마음에 들어 했던 남자 아닌가. '아는 언니'가 지금이야 '밥상을 차려서 너에게 주겠다'고 말하지만, 사람 일은 모르는 거다. '정성껏 차려서 이걸 왜 걜 줘? 내가 먹어야지.'라고 생각하는 순간이 찾아올 수 있다. 돕겠다고 나섰던 지인이 썸남을 채가는 사연은 내 메일함에 가득하다. 아는 언니가
"나 오늘 1호랑 카톡했어~"
라며 밑밥을 깔아두는 것도, 솔직히 좀 수상하다. 그렇게 밑밥을 까는 경우, 대개 '썸남과 단둘이 연락하는 것'을 이쪽에서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도록 해 놓고, 직접 자리를 까는 경우가 많다.
아는 동생에게 남자 1호와의 카톡을 대신 하게 한 것 역시 악수다. '아는 동생'에겐 미안하지만, 그녀가 사용하는 건 "오빠 나 쉬워요~ 나 오빠한테 관심있어요~ 날 가져요~"라며 일단 들이대고 보는 작전이다. 급한 남자나 외로운 남자에겐 그게 통하겠지만, 보통의 남자에겐 그저 술주정처럼 보일 뿐이다. 남자 1호도 한 문장으로 표현하지 않았는가.
"H씨 술 한 잔 걸친 듯."
가슴이 아프다. 자신의 연애에 아무도 못 끼어들게 하라고 그렇게 말했거늘….
3. H양, 우리 열여섯 소녀가 아니잖아요.
H양이 하고 있는 연애의 모습은, 중학생인 내 조카와 조카의 친구들이 하고 있는 연애와 닮아있다. 언젠가 조카가 우리 집에 놀러왔을 때, '남자에게 고백 받았다'는 이야기를 한 적 있다. 자초지종을 물어 보니, 조카가 학원에서 또래의 아이들과 어울리다가 이상형이 '손이 예쁜 남자'라는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그 이야기를 들은 학원의 한 남학생이, 그게 자신을 지칭하는 말이라고 착각했던 것 같다. 실제로 그 남학생은 길쭉길쭉하며 예쁜 손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때문에 그는 그 이후로 내 조카에게 놀이터에 가서 얘기를 하자느니, 피자를 먹자느니 하면서 대시를 했다.
난 조카가 모질게 거절하는 대신 여러 핑계를 대며 여지를 남기는 것을 보았다. 남학생이 피자를 먹자는 카톡을 보내면, 조카는 다음에 누구누구와 함께 먹자느니 하는 식으로 미룰 뿐이었다. 내가 그 남학생과 만나는 건 어떠냐고 묻자, 조카는
"걘 손은 괜찮은데, 얼굴이…."
라며 짧고 임팩트 있는 대답을 했다. 그러면서 동시에 다른 남학생과도 카톡을 하고 있었다. 다른 남학생은 또 어떤 남자냐고 물으니, 친구가 좋아하는 남자라서 이어 주려고 한다고 답했다. 친구에게 '걔가 영어학원 등록하게 해달라'는 부탁을 받았다고 했다.
내가 중학생 일 때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친구가 한 학년 후배인 S양을 좋아했는데, 둘은 같은 성당에 다니지만 서로 어색한 사이였다. 때문에 친구는 S양과 같은 동네에 살며 친한 A군을 섭외했다. A군을 성당에 나오게 만들어 자연스레 같이 어울린 뒤, S양에게 고백한다는 작전이었다. 이 작전은 결국 A군과 S양이 사귀는 비극적 결말이 되고 말았지만, 여하튼 누가 누구와 사귈 수 있게 도와주고, 대신 이야기를 전달해 주거나 여지를 남긴다는 점에서 H양의 이야기와 닮아있다.
H양은 이제 이십대 후반을 향해 달려가는 나이인데, 아직까지 저 '사춘기 연애'에만 머물러 있으면 곤란하다. 특히 남자 1호와 카톡을 할 때, 멍석만 깔아두고 상대가 다 알아서 진행해 주길 기다리는 수동적인 태도를 고쳐야 한다.
"제가 그렇게 말하면 1호가 약속을 잡자고 할 줄 알았는데, 안 그러더라고요."
이쪽에서 보답으로 밥을 산다고 했으면, 약속도 이쪽에서 정하는 게 맞는 거다. 밥 산다는 얘기만 툭 던져놓고 그 이후엔 바라만 보고 있으니 상대도 달리 할 말이 없는 것 아닌가. 구체적으로 "부탁을 들어줘서 고마우니 뭘 먹으러 가자. 언제 시간이 괜찮냐." 등을 물어 약속을 잡으면 된다. H양은
"그렇게 하면 제가 상대 콧대만 높여주는 것 아닌가요? 그러긴 싫은데…."
라며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있다. 이쪽에서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걸 들키기 싫어 먼저 연락도 하지 않고, 넷이 만났을 때 취한 척 하며 남자 1호를 떠보고만 있으니 어떻게 관계가 더 진행되겠는가. 노멀로그에서 '빙수 작전'을 보고 따라했으면, 언제 어디서 먹자는 약속까지 잡길 권한다. 지금처럼 기다리고 기다리다 잊을만할 때쯤 한 번 카톡을 보내는 건, 그냥 심심해서 그러는 것처럼 보일 수 있으니 자제하자.
위에서 H양이 그닥 듣고 싶지 않을만한 얘기를 많이 했기에, 해결책을 제시하는 걸로 마무리를 할까 한다. 그닥 바람직한 방법은 아니지만, 내가 H양과 같은 상황에 놓였다면 우선 남자 4호를 커플로 만들 것 같다. H양이 소개팅을 주선해주고 성실한 주선자 역할을 담당하면 남자 4호와의 관계는 매끄럽게 정리할 수 있다.
그러고 나서 남자 1호가 한다는 그 게임을 시작할 것 같다. 아이템을 선물하는 사이게 되면, 대화를 하기 보다 수월해 질 것이니 말이다. 그리고 호칭은 '1호씨'에서 '오빠'로 즉시 변경하고, 그간 남자 4호를 통해서 하던 행동(기프티콘 보내기, 약속 잡기 등)을 모두 직접 할 것이다. '아는 언니'에게 조언을 구하거나 대신 뭔가를 해달라는 부탁은 목에 칼이 들어와도 하지 않을 것이다. 단체카톡방에서 "H양 이러이러해요~"라고 누가 묻지도 않은 말을 해 띄워주려는 걸 보면, 그 언니 역시 '사춘기 연애'에서 몇 걸음 못 벗어난 듯 보인다.
H양의 친구들이 "그 남자 어장관리하는 것 같다."라고 한 말에는 아무 의미도 두질 말길 바란다. 다시 말하지만 H양에게 관심이 없는 거지, 어장관리 하는 남자는 아니다. 어장관리 하는 남자가 주말에 라이딩 다니며 축구 동호회에 소속되어 공차는 경우는 거의 없다. 회사 끝나고 직장 남자 동료들과 늘 어울리지도 않고 말이다. 오히려 어장관리는 H양이 남자 4호에게 하는 게 어장관리니, 즉시 중단하길 권한다. 필요할 때 아무 핑계나 하나 앞세워 말 걸곤, 다른 목적 채우려 하는 게 어장관리가 아니고 뭐겠는가. 그러다 상대가 둘이 만나자고 하면 "단둘이서 보는 건 부담스럽네요. 같이 만나요."라며 밀어내고….
H양이 미워서 한 얘기들이 아니니 너무 상처는 받지 말길 바란다. 그냥 두었다간 주변 남자들에게 매장당하기 딱 좋은 태도를 가지고 있기에 그 부분을 말해주고 싶었다. "단 둘이 보는 건 싫다고 말했으니까, 전 관심 없다는 걸 확실히 표현한 거잖아요?"라는 합리화는 너무 빈약하다. 그래놓고 카톡 남김말이 어쩌고 하면서 남자 4호에게 말 건 것은 누군가? 그건 인터넷 쇼핑몰 핸드백 상세페이지에 '회사 사정 상 위의 이미지에서 디자인이 조금 변형된 제품이 발송될 수 있음'이라고 작게 적어 놓곤 종이봉투 보내버리는 것과 같은 짓이다. 그래놓고 "전 분명히 명시했는데요?"라고 말한다고 용서받을 수 있겠는가? 주변의 누군가에게 기대거나 누군가를 이용하지 말고, H양 본인의 힘으로 연애를 이루길 권한다.
▲ 다 같이 만나서는 대화에서 소외되고, 술값 계산만 했다는 남자 4호를 생각하면 눈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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