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험 안 본다고 하니, 생각할 시간을 갖자는 여자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H씨의 여자친구는 '21세기 여성'으로의 사고전환을 아직 못 한 듯 보입니다. 연애는 21세기 여성들처럼 하는데, 결혼 이후의 생활은 20세기 여성처럼 하려고 합니다. 현실감각이 좀 떨어지며, 과거의 사고방식으로 남녀관계를 바라본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전에 발행한 매뉴얼 중에서 여자의 아버지가 "남자가 월 400 벌어서는 서울에서 살 수 없다."라며 결혼을 반대한 사연이 있습니다. 그녀의 어머니는 남자가 찾아왔을 때 문도 열어주지 않았습니다. 여자의 월급은 180이었습니다.
지금의 시각에서 바라보면 저건 '부당거래'를 하려는 것으로 보입니다만, 20세기의 시각에서 보자면 '남자가 일을 해 돈을 벌고 여자가 가정을 꾸려가는 것'은 이상할 게 없는 이야깁니다. 20세기를 떠올려 보시면, '아빠는 회사원, 엄마는 주부'라는 게 평범한 가정의 구성이었다는 걸 H씨도 알 수 있으실 겁니다. 그게 보통 중산층 가정의 모습이었습니다.
94년 총무처 조사에 따르면 당시 공무원의 맞벌이 비율은 29.5%였습니다. 5년에 한 번 실시하는 공무원총조사와 비교를 하면 좋은데, 올해 수치는 현재 조사 중이니 08년 자료와 비교하겠습니다. 행안부에서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08년 공무원의 맞벌이 비율은 47.7%였습니다. 그 중 연령별 맞벌이 비율은 20대 81.3%, 30대 66.4%였습니다.
기계의 펌웨어 업데이트를 하듯, 세상의 변화에 따라 H씨의 여자친구도 생각의 업데이트를 좀 해야 하는데, 안타깝게도 그 부분에 대해 그녀는
라며 현실을 좀 보지 않으려 해던 것 같습니다. 외벌이로도 풍족한 생활이 가능한 고소득자나, 집안의 지원이 든든한 지인들을 보며 '나도 저렇게 살아야지.'라는 생각만 한 것입니다.
저런 생각을 꼭 나쁘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만, 그녀는 자신이 뭔가를 해서 그런 상황을 만들려고 한 게 아니기 때문에 문제가 됩니다. 그녀는 H씨에게 시험을 볼 것을 제의했고, 그 시험에 붙으면 자신이 H씨가 사무실을 열었을 때 옆에 묻어가려는 생각을 했습니다. 야근 때문에 미칠 것 같은 지금의 직장을 때려 친 후 말입니다.
각색을 요구하셔서 여기다 밝힐 수는 없습니다만, 그 시험이 몇 달 공부해서 합격할 수 있는 시험이면 왜 다른 사람들은 그 시험을 보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우리끼리니까 하는 얘기지만, 그 시험을 합격하고 나면 몇 년간의 과정을 이수해야 합니다. 때문에 현실적으론 그 시험을 준비하는 게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돈 내며 배워야 하는 것일 뿐더러, 배우는 중에는 돈벌이를 할 수 없으니 말입니다.
전 저 부분에서 H씨의 여자친구가 현실감각이 아주 많이 떨어진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게 그렇게 말처럼 쉬운 거면 본인이 하든가.(응?)
생각만으론 뭘 못하겠습니까. 저건, 지금이라도 수능을 다시 봐서 의대에 들어가고, 졸업한 뒤엔 의사가 되라는 말과 비슷한 겁니다. 학비는 장학금을 받아 해결하라는 얘기고 말입니다. 그리고 하나 더. 다시 의대에 비유하자면, 의대를 졸업해 의사면허를 땄다고 해서 개인병원을 바로 오픈할 수 있는 건 아니잖습니까. 실력의 미흡함도 있지만, 무엇보다 아무 건물에나 들어가
라고 얘기한다고 병원이 차려지는 게 아니잖습니까. H씨가 시험에 합격하고 그 과정을 이수한다고 해도 모든 게 다 해결되는 게 아닌데, 그녀는 열매의 달콤함만 맛보려 합니다. 아마도 그녀는 그 부분에 대해 "사무실은 대출 받아서 열면 되는 거지."라고 매우 편하게 말할 거란 생각이 듭니다. 갈수록 태산입니다.
여자친구가 저렇게 현실과 이상의 초점을 못 잡고 있으면, H씨라도 나서서 영점조정을 해줬어야 합니다. 그녀가 생각하고 있는 것들이, 현실의 어떤 벽에 부딪힐 수 있는지를 말해줬어야 한단 얘깁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H씨는 그녀의 이상을 더욱 부풀리기만 했습니다.
H씨는 저런 행위를 두고 '그녀의 이상향에 장단을 맞춰준 것'정도로 생각하는 것 같은데, 저건 누가 보더라도 '진짜 그렇게 하려고' 한 말들입니다. 당연히 그녀는 기대하고 있었을 거고 말입니다.
저와 H씨가 친구인데, H씨가 유럽여행을 같이 가자는 제안을 했다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저는 H씨의 말에 긍정적으로 호응합니다.
저래놓고는, H씨가 "비행기표 나왔어. 예약할까?"라고 말하니, 전 아래와 같은 말을 합니다.
저 말을 들었을 때 H씨의 기분은 어떠실 것 같습니까? 실망을 넘어 낙담할 것 같지 않습니까?
H씨의 여자친구가 "오빠, 시험 다다음 달이야."라고 이야기를 했을때, 그제야 H씨는 솔직한 자신의 생각을 털어 놓습니다. 그럴 생각이 전혀 없다고 말입니다. 바로 그때, H씨의 여자친구가 느꼈을 기분이 저 위의 '유럽여행 거절'을 들었을 때 H씨의 기분과 같을 겁니다.
저 말에 H씨는 '너도 책임을 좀 져 봐라.'라는 식으로 대답합니다. "네가 몇 년간 도와준다면 할 수 있다."라고 말입니다. 유럽여행에 비유하자면, "네가 경비를 다 부담한다면 갈 수 있다."라는 말을 한 것과 같습니다. 낙담했던 기분에 더해 있던 정까지 모두 떨어질 것 같지 않습니까?
우선 독자 분들을 위해 이후 상황에 대해 좀 적자면, H씨가 그녀에게 위의 이야기를 한 날, 여자친구는 세상이 무너진 것과 같은 표정으로 집에 가겠다고 했습니다. 그 후 통화를 했는데, 여자친구는 "오빠를 있는 그대로 사랑해주지 못해서 미안해. 내가 외로워서 오빠를 만나는 건지, 진짜로 좋아서 만나는 건지 잘 모르겠다.", "시험 안 봐도 돼. 오빠 하고 싶은 거 해.", "우리 사이에 가능성이 보이질 않아. 그냥 좀 생각할 시간을 갖자."라는 말을 했습니다. 그 후 둘은 몇 주째 '생각할 시간'을 가지며 연락을 하지 않는 중입니다.
그러다 며칠 전 여자친구에게서 연락이 왔습니다.
라고 말입니다.
H씨는 저 말이 '헤어지자'는 뜻인지, 아니면 '난 어느 정도 생각을 정리했고, 다시 만날 생각 있는데, 오빤 헤어지고 싶다는 거냐'는 뜻인지를 제게 물었습니다.
이게 좀 복잡한 부분인데, 여자친구는 결론이 듣고 싶은 겁니다. 단, 그 결론이 "네가 말했던 시험 볼게."여서는 안 됩니다. 결론을 듣고 싶다면서 왜 그런 결론이면 안 되는지는 제게 묻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 복잡한 심리에 대해 이야기 하려면, 지금부터 3년 6개월은 제가 이 글을 쓰고 있어야 할 겁니다. 여하튼 그렇습니다.
가장 좋은 해결책은 위에서 제가 말한 부분들을 여자친구에게 그대로 말해주는 겁니다. '20세기 여성'이라는 점만 빼고, H씨가 '열매'에 대한 기대감을 부풀리고 있었다는 점, 그리고 그녀가 바라는 것을 H씨가 당장 시행하긴 현실적으로 어려움이 많이 따른다는 점 등을 설명해야 합니다. 여자친구가
라고 말한 점으로 미루어, 그녀도 크게 깨달은 게 있는 듯 보이니, 그 부분은 더 건드리지 마시기 바랍니다. 말하다보면 자연히 형평성을 맞추기 위해 '나만 잘못했냐, 너도 잘못한 거다.'라는 뉘앙스로 그 말을 흘릴 수 있는데, 이번엔 상대의 허물을 H씨가 안고 가기로 합시다. 재판을 받는 게 아니니 말입니다.
사실, H씨의 여자친구가 '시험'을 권한 건 H씨의 출장이 많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녀 자신의 일도 힘들지만, H씨 역시 주중에는 거의 지방으로 출장을 가니, 그런 식으로라면 결혼을 해도 외롭고 힘들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을 것입니다. 때문에 더 '시험'을 권했던 것이고 말입니다.
끝으로 여자친구가 "내가 외로워서 오빠를 만나는 건지, 진짜로 좋아서 만나는 건지 잘 모르겠다."라고 말 한 부분은, 그녀의 표현력이 좀 떨어지는 까닭에 저렇게 표현된 거라고 보시면 됩니다. 저 말을 이해하기 쉽게 풀어서 설명하면,
라는 뜻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녀의 마음속에서 '오빠랑 함께하고 싶은 마음'과 '신데렐라가 되고 싶은 마음'이 충돌하는 중입니다. 그녀가 너무 속물 같다고 생각하진 마시기 바랍니다. 엘리베이터에서 지린내가 나는 작은 동네 예식장에서 식을 올리고 싶다고 생각하는 여자는 아무도 없을 테니 말입니다. 그리고 당장의 문제해결을 위해 그러지도 않을 거면서 "네가 바라는 대로 해줄게."라며 허위공약은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어려운 부분은 어렵다고 말하며, 문제 자체를 그녀와 함께 고민하면 되는 겁니다. 이해가 어려우실까봐 예를 들자면 아래와 같습니다.
어쩌다 상대가 현실감각 떨어지는 얘기를 하더라도, 그것마저 존중하며 "하지만 그게 아닐 경우는?"이라고 말하다 보면 대화가 됩니다. 그저 자기 방어를 위해 상대의 의견을 비웃거나, 왜 나한테만 이러느냐고 피하려고 하다 보면 벽만 생길 뿐이고 말입니다. 이번 주 금요일에 만나신다고 했으니, 지혜롭게 잘 해결하시기 바랍니다. 후기는 메일로 보내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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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부터 얘기하자면 H씨의 여자친구는 '21세기 여성'으로의 사고전환을 아직 못 한 듯 보입니다. 연애는 21세기 여성들처럼 하는데, 결혼 이후의 생활은 20세기 여성처럼 하려고 합니다. 현실감각이 좀 떨어지며, 과거의 사고방식으로 남녀관계를 바라본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전에 발행한 매뉴얼 중에서 여자의 아버지가 "남자가 월 400 벌어서는 서울에서 살 수 없다."라며 결혼을 반대한 사연이 있습니다. 그녀의 어머니는 남자가 찾아왔을 때 문도 열어주지 않았습니다. 여자의 월급은 180이었습니다.
지금의 시각에서 바라보면 저건 '부당거래'를 하려는 것으로 보입니다만, 20세기의 시각에서 보자면 '남자가 일을 해 돈을 벌고 여자가 가정을 꾸려가는 것'은 이상할 게 없는 이야깁니다. 20세기를 떠올려 보시면, '아빠는 회사원, 엄마는 주부'라는 게 평범한 가정의 구성이었다는 걸 H씨도 알 수 있으실 겁니다. 그게 보통 중산층 가정의 모습이었습니다.
94년 총무처 조사에 따르면 당시 공무원의 맞벌이 비율은 29.5%였습니다. 5년에 한 번 실시하는 공무원총조사와 비교를 하면 좋은데, 올해 수치는 현재 조사 중이니 08년 자료와 비교하겠습니다. 행안부에서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08년 공무원의 맞벌이 비율은 47.7%였습니다. 그 중 연령별 맞벌이 비율은 20대 81.3%, 30대 66.4%였습니다.
1. 업데이트를 못 한 여자.
기계의 펌웨어 업데이트를 하듯, 세상의 변화에 따라 H씨의 여자친구도 생각의 업데이트를 좀 해야 하는데, 안타깝게도 그 부분에 대해 그녀는
'내가 생각하는 대로 살고 있는 사람도 있는데….'
라며 현실을 좀 보지 않으려 해던 것 같습니다. 외벌이로도 풍족한 생활이 가능한 고소득자나, 집안의 지원이 든든한 지인들을 보며 '나도 저렇게 살아야지.'라는 생각만 한 것입니다.
저런 생각을 꼭 나쁘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만, 그녀는 자신이 뭔가를 해서 그런 상황을 만들려고 한 게 아니기 때문에 문제가 됩니다. 그녀는 H씨에게 시험을 볼 것을 제의했고, 그 시험에 붙으면 자신이 H씨가 사무실을 열었을 때 옆에 묻어가려는 생각을 했습니다. 야근 때문에 미칠 것 같은 지금의 직장을 때려 친 후 말입니다.
각색을 요구하셔서 여기다 밝힐 수는 없습니다만, 그 시험이 몇 달 공부해서 합격할 수 있는 시험이면 왜 다른 사람들은 그 시험을 보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우리끼리니까 하는 얘기지만, 그 시험을 합격하고 나면 몇 년간의 과정을 이수해야 합니다. 때문에 현실적으론 그 시험을 준비하는 게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돈 내며 배워야 하는 것일 뿐더러, 배우는 중에는 돈벌이를 할 수 없으니 말입니다.
"오빠가 열심히 해서 장학금 받으면 되잖아."
전 저 부분에서 H씨의 여자친구가 현실감각이 아주 많이 떨어진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게 그렇게 말처럼 쉬운 거면 본인이 하든가.(응?)
생각만으론 뭘 못하겠습니까. 저건, 지금이라도 수능을 다시 봐서 의대에 들어가고, 졸업한 뒤엔 의사가 되라는 말과 비슷한 겁니다. 학비는 장학금을 받아 해결하라는 얘기고 말입니다. 그리고 하나 더. 다시 의대에 비유하자면, 의대를 졸업해 의사면허를 땄다고 해서 개인병원을 바로 오픈할 수 있는 건 아니잖습니까. 실력의 미흡함도 있지만, 무엇보다 아무 건물에나 들어가
"저 여기서 병원 좀 하려고 하는데요. 저 의사예요."
라고 얘기한다고 병원이 차려지는 게 아니잖습니까. H씨가 시험에 합격하고 그 과정을 이수한다고 해도 모든 게 다 해결되는 게 아닌데, 그녀는 열매의 달콤함만 맛보려 합니다. 아마도 그녀는 그 부분에 대해 "사무실은 대출 받아서 열면 되는 거지."라고 매우 편하게 말할 거란 생각이 듭니다. 갈수록 태산입니다.
2. H씨의 치명적인 실수.
여자친구가 저렇게 현실과 이상의 초점을 못 잡고 있으면, H씨라도 나서서 영점조정을 해줬어야 합니다. 그녀가 생각하고 있는 것들이, 현실의 어떤 벽에 부딪힐 수 있는지를 말해줬어야 한단 얘깁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H씨는 그녀의 이상을 더욱 부풀리기만 했습니다.
"그래? 그럼 난 응시자격은 되는 거네. 시험과목 뭐뭐야?"
"내가 합격해서 사무실 열면, 너랑 같이 일할 수 있겠다."
"사무실 이름은 뭐로 할까? 그럼 우리 거기서 점심은 도시락으로?"
"내가 합격해서 사무실 열면, 너랑 같이 일할 수 있겠다."
"사무실 이름은 뭐로 할까? 그럼 우리 거기서 점심은 도시락으로?"
H씨는 저런 행위를 두고 '그녀의 이상향에 장단을 맞춰준 것'정도로 생각하는 것 같은데, 저건 누가 보더라도 '진짜 그렇게 하려고' 한 말들입니다. 당연히 그녀는 기대하고 있었을 거고 말입니다.
저와 H씨가 친구인데, H씨가 유럽여행을 같이 가자는 제안을 했다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저는 H씨의 말에 긍정적으로 호응합니다.
"그래, 로마에서 판다는 아이스크림 나도 먹어보고 싶었어."
"여행 가려면 카메라 고용량 메모리카드 하나 사고, 배터리도 여분으로 챙겨야겠다."
"어디어디는 꼭 여행 끝으로 집어넣으라고 하던데. 거기 보면 다른 게 시시하다고."
"여행 가려면 카메라 고용량 메모리카드 하나 사고, 배터리도 여분으로 챙겨야겠다."
"어디어디는 꼭 여행 끝으로 집어넣으라고 하던데. 거기 보면 다른 게 시시하다고."
저래놓고는, H씨가 "비행기표 나왔어. 예약할까?"라고 말하니, 전 아래와 같은 말을 합니다.
"사실 너나 나나 일을 하고 있는데, 여행 때문에 며칠씩 비울 수 없잖아.
그리고 아무리 배낭여행이라고 해도 경비는 분명 많이 들 거야.
좀 비현실적이야. 그저 가면 재미있을 것 같다고 떠났다간,
나중에 감당해야 할 후폭풍이 엄청 많을 거야.
그냥 가까운 국내 여행지로 1박 2일 갔다 오자."
그리고 아무리 배낭여행이라고 해도 경비는 분명 많이 들 거야.
좀 비현실적이야. 그저 가면 재미있을 것 같다고 떠났다간,
나중에 감당해야 할 후폭풍이 엄청 많을 거야.
그냥 가까운 국내 여행지로 1박 2일 갔다 오자."
저 말을 들었을 때 H씨의 기분은 어떠실 것 같습니까? 실망을 넘어 낙담할 것 같지 않습니까?
H씨의 여자친구가 "오빠, 시험 다다음 달이야."라고 이야기를 했을때, 그제야 H씨는 솔직한 자신의 생각을 털어 놓습니다. 그럴 생각이 전혀 없다고 말입니다. 바로 그때, H씨의 여자친구가 느꼈을 기분이 저 위의 '유럽여행 거절'을 들었을 때 H씨의 기분과 같을 겁니다.
"그럼 오빤 그동안 아예 생각도 없었던 거야?"
저 말에 H씨는 '너도 책임을 좀 져 봐라.'라는 식으로 대답합니다. "네가 몇 년간 도와준다면 할 수 있다."라고 말입니다. 유럽여행에 비유하자면, "네가 경비를 다 부담한다면 갈 수 있다."라는 말을 한 것과 같습니다. 낙담했던 기분에 더해 있던 정까지 모두 떨어질 것 같지 않습니까?
3. H씨의 질문에 대한 답변.
우선 독자 분들을 위해 이후 상황에 대해 좀 적자면, H씨가 그녀에게 위의 이야기를 한 날, 여자친구는 세상이 무너진 것과 같은 표정으로 집에 가겠다고 했습니다. 그 후 통화를 했는데, 여자친구는 "오빠를 있는 그대로 사랑해주지 못해서 미안해. 내가 외로워서 오빠를 만나는 건지, 진짜로 좋아서 만나는 건지 잘 모르겠다.", "시험 안 봐도 돼. 오빠 하고 싶은 거 해.", "우리 사이에 가능성이 보이질 않아. 그냥 좀 생각할 시간을 갖자."라는 말을 했습니다. 그 후 둘은 몇 주째 '생각할 시간'을 가지며 연락을 하지 않는 중입니다.
그러다 며칠 전 여자친구에게서 연락이 왔습니다.
"궁금한 게 있어. 연락이 없는 건, 헤어지자는 뜻이지?"
라고 말입니다.
H씨는 저 말이 '헤어지자'는 뜻인지, 아니면 '난 어느 정도 생각을 정리했고, 다시 만날 생각 있는데, 오빤 헤어지고 싶다는 거냐'는 뜻인지를 제게 물었습니다.
이게 좀 복잡한 부분인데, 여자친구는 결론이 듣고 싶은 겁니다. 단, 그 결론이 "네가 말했던 시험 볼게."여서는 안 됩니다. 결론을 듣고 싶다면서 왜 그런 결론이면 안 되는지는 제게 묻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 복잡한 심리에 대해 이야기 하려면, 지금부터 3년 6개월은 제가 이 글을 쓰고 있어야 할 겁니다. 여하튼 그렇습니다.
가장 좋은 해결책은 위에서 제가 말한 부분들을 여자친구에게 그대로 말해주는 겁니다. '20세기 여성'이라는 점만 빼고, H씨가 '열매'에 대한 기대감을 부풀리고 있었다는 점, 그리고 그녀가 바라는 것을 H씨가 당장 시행하긴 현실적으로 어려움이 많이 따른다는 점 등을 설명해야 합니다. 여자친구가
"내 문제를 오빠를 통해 풀려고 했던 것 같아."
라고 말한 점으로 미루어, 그녀도 크게 깨달은 게 있는 듯 보이니, 그 부분은 더 건드리지 마시기 바랍니다. 말하다보면 자연히 형평성을 맞추기 위해 '나만 잘못했냐, 너도 잘못한 거다.'라는 뉘앙스로 그 말을 흘릴 수 있는데, 이번엔 상대의 허물을 H씨가 안고 가기로 합시다. 재판을 받는 게 아니니 말입니다.
사실, H씨의 여자친구가 '시험'을 권한 건 H씨의 출장이 많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녀 자신의 일도 힘들지만, H씨 역시 주중에는 거의 지방으로 출장을 가니, 그런 식으로라면 결혼을 해도 외롭고 힘들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을 것입니다. 때문에 더 '시험'을 권했던 것이고 말입니다.
끝으로 여자친구가 "내가 외로워서 오빠를 만나는 건지, 진짜로 좋아서 만나는 건지 잘 모르겠다."라고 말 한 부분은, 그녀의 표현력이 좀 떨어지는 까닭에 저렇게 표현된 거라고 보시면 됩니다. 저 말을 이해하기 쉽게 풀어서 설명하면,
"내가 오빠를 정말 사랑한다면, 이런 현실쯤은 이겨내고
같이 산골짜기에 들어가 산나물 캐먹고 살아도 행복해야 하는데
지금 내가 하는 걸 보면, 그게 아니라 상황만 바꾸려고 하고 있으니
이게 정말 '오빠만 있으면 행복한 것'이 아닌 것 같아서 혼란스럽다."
같이 산골짜기에 들어가 산나물 캐먹고 살아도 행복해야 하는데
지금 내가 하는 걸 보면, 그게 아니라 상황만 바꾸려고 하고 있으니
이게 정말 '오빠만 있으면 행복한 것'이 아닌 것 같아서 혼란스럽다."
라는 뜻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녀의 마음속에서 '오빠랑 함께하고 싶은 마음'과 '신데렐라가 되고 싶은 마음'이 충돌하는 중입니다. 그녀가 너무 속물 같다고 생각하진 마시기 바랍니다. 엘리베이터에서 지린내가 나는 작은 동네 예식장에서 식을 올리고 싶다고 생각하는 여자는 아무도 없을 테니 말입니다. 그리고 당장의 문제해결을 위해 그러지도 않을 거면서 "네가 바라는 대로 해줄게."라며 허위공약은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어려운 부분은 어렵다고 말하며, 문제 자체를 그녀와 함께 고민하면 되는 겁니다. 이해가 어려우실까봐 예를 들자면 아래와 같습니다.
(X)
남자 - 그럼 그동안의 학비는 어떻게 하라고?
여자 - 장학금 받으면 되잖아.
남자 - 그게 쉽냐?
(O)
남자 - 그럼 그동안의 학비는 어떻게 감당하지?
여자 - 장학금 받으면 되잖아.
남자 - 노력은 하겠지만, 장학금을 못 받게 되면 어쨌든 내야 하는 부분이니까….
여자 - 그럼 이러이러하게 하면 어떨까?
남자 - 그럼 그동안의 학비는 어떻게 하라고?
여자 - 장학금 받으면 되잖아.
남자 - 그게 쉽냐?
(O)
남자 - 그럼 그동안의 학비는 어떻게 감당하지?
여자 - 장학금 받으면 되잖아.
남자 - 노력은 하겠지만, 장학금을 못 받게 되면 어쨌든 내야 하는 부분이니까….
여자 - 그럼 이러이러하게 하면 어떨까?
어쩌다 상대가 현실감각 떨어지는 얘기를 하더라도, 그것마저 존중하며 "하지만 그게 아닐 경우는?"이라고 말하다 보면 대화가 됩니다. 그저 자기 방어를 위해 상대의 의견을 비웃거나, 왜 나한테만 이러느냐고 피하려고 하다 보면 벽만 생길 뿐이고 말입니다. 이번 주 금요일에 만나신다고 했으니, 지혜롭게 잘 해결하시기 바랍니다. 후기는 메일로 보내주시길!
▲ 마우스 클릭을 할 때에도 칼로리가 소비된다고 합니다. 추천도 하고 다이어트도 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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