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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매뉴얼(연재중)/연애오답노트

그녀의 믿음이 부족한 걸까, 그가 못 믿을 남자일까?

by 무한 2014. 1. 8.
그녀의 믿음이 부족한 걸까, 그가 못 믿을 남자일까?
노멀로그 결산은 며칠 더 미뤄야 할 것 같다. 블로그 데이터 백업이 안 된다. 이것 때문인 줄도 모르고, 혹시 스팸댓글 때문에 데이터 오류가 나서 그런 건 아닐까 해서 밤새 블로그 내 스팸댓글을 모두 지웠다. 몇 시간 동안 앉아서 댓글을 찾아 지웠더니 가슴이 먹먹하고 손발이 저려온다.

아, 좋은 소식도 하나 있다. 어제 발행한 매뉴얼의 주인공 '김형'의 문제가 잘 해결됐다. 김형은 매뉴얼을 읽은 후 썸녀에게 사과했고, 썸녀가 그 사과를 받아들이며 둘이 소고기 사먹으러 갈 약속을 잡았다고 한다. 나도 소고기 참 좋아하는데. 여하튼 축하드린다.

그건 그렇고 오늘 사연은 변화와 혁신의 도시인 파주시에 살고 있는 우리 지역 주민 H양의 사연인데, H양은 여린마음동호회 회원이다. 때문에 사연을 보내면서도 혹 차가운 매뉴얼이 올라오거나 자신을 탓하는 댓글이 올라올까봐 겁이 난다는 이야기를 했다. 유리처럼 깨지기 쉬운 멘탈을 지닌 H양이 다치지 않도록 난 최대한 살살 얘기할 예정이니, 노멀로그 독자 분들 깨서도 '취급주의' 스티커가 붙은 사연이라 생각하며 읽어주시길 바란다. 출발해 보자.


1. 당연한 의심.


H양이 적어 둔 이야기만 보면 나도 그가 의심스러워진다. '엄마에게 온 전화'라면서 받지도 않고, H양이 '엄마에게 온 전화'가 맞는지 보여달라고 하자 화를 내다 집에 가버린 것부터 시작해서 잠수를 타 놓고는 잠수에 대한 핑계를

"너한테 부재중 전화가 너무 많이 와 있어서,
네가 화낼까봐 무섭고 또 미안해서 잠수 탄 거다."



라고 한 것까지. 일반적이라고 보긴 어려운 태도들이 꽤 많다.

난 사연을 읽으며 'H양은 대체 왜 저기서 확인을 안 하고 그냥 넘어가는 걸까?'하는 생각을 몇 번 했다. 전화 사건을 보자. 누가 봐도 의심스러운 상황에선 충분히 남자친구에게 확인시켜 달라는 요청을 할 수 있는 법이다.

"방금 화면에 뜬 발신자, 어머니 아닌 거 봤어.
나 지금 오빠가 하는 말 못 믿겠으니까
정말 오빠가 이 문제를 해결할 생각이 있으면, 누구에게 온 전환지 보여줘."



라며 말이다. 그런데 H양은 남자친구가

"엄마라니까. 왜 날 못 믿고 의심해?
내가 가족한테 연락 온 거 너한테 다 확인시켜 줘야 하는 건 아니잖아."



라고 한 말에 별 대응도 못 하고 혼자 끙끙 앓다가, '생각할 시간'을 갖자는 이야기만 한다. 더 답답한 건, 이렇게 냉전상황에 접어들었다가도 남자친구가 맹목적으로 사과를 하면 H양이 그냥 넘어가 버린다는 점이다. 아무 것도 해결된 것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 얘긴 더 하지 않기로'하며 다시 데이트를 한다.

의심되는 부분들을 확인하다 H양이 의심하고 있는 부분이 사실로 드러나 버릴까봐 H양 혼자 삭히고 마는 거라면, 평생 "믿으라면 그냥 좀 믿어."라는 말을 듣고 사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다는 얘기를 해주고 싶다. 의심이 단순히 H양 혼자의 상상에 의한 게 아니라 상대의 거짓말로 인한 거라면, 그게 풀리지 않는 한 헤어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며 상대에게 도움을 요청하길 바란다. 멘트는

"내가 지금 아무 일도 없었는데 나 혼자 의심하면서
오빠한테 확인시켜 달라는 게 아니잖아.
오빠의 '거짓말'이라는 사건이 있었고,
그 거짓말이 드러나서 혼란스러우니까 날 좀 도와달라는 거잖아.
지금 오빠는 왜 못 믿냐는 말만 반복하고 있는데, 그러면 안 되는 거지.
난 계속 믿어왔는데, 그런 날 오빠가 기만한 거잖아.
그러니까 내가 앞으로도 계속 오빠를 믿을 수 있게,
지금 오빠의 말이 '거짓말을 덮기 위한 거짓말'이 아니라는 걸
확인시켜 달라고 부탁하는 거야."



정도면 괜찮을 듯싶다.

여자친구를 기만하려다 들킨 남자들의 경우 대부분은 "폰 보여줄게. 대신 폰 보고 아닌 거 드러나는 순간 우린 끝이다."라거나 "내가 아니라고 해도 넌 믿지 못하는데 계속 사귀어서 뭐 하겠냐. 그냥 헤어지자."라는 으름장을 놓기도 하는데, 그런 얘기를 하는 남자와는 그 즉시 헤어지는 게 현명한 일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단,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이건 남자친구의 말이 '거짓말'이라는 게 드러났을 경우에 해당되는 얘기다. 회식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남자친구가 회식이라고 거짓말 한 게 탄로 났을 때 폰을 보여 달라고 요청하는 건 괜찮지만, 그냥 막무가내로 폰을 보여 달라고 하는 건 집착일 수 있다.


2. 이타주의 남친이 만드는 이기주의 여친.
 

이건 좀 충격적일 수 있으니 단전에 힘을 좀 모은 뒤에 읽길 권한다. 이대로라면 둘은 6개월 내로 헤어진다. 남자친구가 아틀라스(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신. 땅에 서서 하늘을 받치고 있다.)라고 해도 6개월을 넘기지 못할 것이 분명하다. 내 스마트폰(지금 쓰는 거 말고 해지해서 공기계 된 거)을 걸고 말할 수 있다.

현재 H양의 남자친구가 하고 있는 건 '연애'라기 보다는 '헌신'에 가깝다. H양의 수다를 들어주고, H양에게 밥을 사주며, H양에게 영화를 보여주고, 그러면서도 H양의 눈치를 보고 있다. H양은 이런 남자친구에 대해 아래와 같이 설명한다.

"배려심이 많고 상대에게 맞추려 노력함.
다정다감하고, 챙겨주거나 보살피는 것을 좋아함.
져주는 것과 사과하는 것에 익숙함.
단점이라면 우유부단하고 조금 소심함."



당장은 봉사정신 투철하고 헌신적인 남자친구의 서비스를 받느라 기쁠지 모르지만, 결국은 그게 둘에게 독이 될 것이다. 그는 H양을 실망시키거나 화나게 만들고 싶지 않기에 자신의 뜻을 내비치지 않고 있는 것일 뿐, 그래도 괜찮도록 태어난 사람이 아니다. H양 때문에 아프거나 불쾌하도 참고 있는 거지 그런 감각을 전혀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게 아니란 얘기다. 

H양의 남친과 같은 성향을 지닌 남자와 연애를 하면, 여자는 점점 오만해진다. 그가 겁먹은 표정을 지을 때마다 여자는 그를 더 위협한다. 그의 호의를 당연하게 생각하게 되고, 예의를 거둔 채 그에게 함부로 하게 된다. 헤어지자고 하면 그가 어쩔 줄 몰라 하며 매달리니, 여자는 그 말을 무기삼아 심술이 날 때마다 휘두르기도 한다.

'깨진 유리창의 법칙'을 생각하면 꼭 맞다. 깨진 유리창의 법칙이란, 어느 건물의 깨진 유리창을 그냥 방치하게 되면, 사람들이 그 건물을 관리를 포기한 건물로 판단하고 다른 유리창까지 깨뜨리게 된다는 이론이다. 어린 시절 동네에 하나쯤 있었을 '방치된 폐차량'을 떠올려 보자. 그게 먼지만 뽀얗게 내려앉은 장기주차 차량이라면 누군가 그 차에 해를 가할 가능성이 낮지만, 유리창이 깨져있고 트렁크도 열려 있으면 짓궂은 아이들의 놀이터가 될 수 있다. 부서져 엉망이 된 그 차의 다른 유리창을 누군가 깬다해도, 멀쩡한 새 차에 그럴 때처럼 큰 죄책감이나 두려움을 느끼진 않을 것이고 말이다.

이런 연애엔 가장 지루한 이별이 찾아온다. 남자는 불만이 가득 쌓여 이 관계에 더 이상 희망이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이별을 말하지 않을 것이다. 누군가에게 자신이 이별을 통보했다는 사실을 견딜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철저히 수동적인 모습으로 의무적인 멘트들을 하며 '남자친구'의 자리만 지키고 있을 것이다. 여자 역시 이 관계를 쉽게 정리하지 못한다. 어쨌든 그는 요청하는 걸 다 들어주는 사람이고, 마음이 변했냐고 물으면 아니라고 답하니 판단을 내리지 못하는 것이다. 둘이 영혼 없는 하트를 찍어 보내는 동안에도 마음은 점점 공허해질 뿐이다. 서운해, 미안해, 서운해, 미안해의 반복.

난 H양에게, 서운하다는 말 대신 고맙다는 말을 해 보길 권해주고 싶다.


3. 그래서, 둘 중 누가 문제인 건가요?


사실 둘 다 좀 심각할 정도로 문제다. 위에서 열심히 빙빙 돌렸으니 여기선 좀 질러가자. 일단, H양의 남자친구는 위에서 말했듯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것에 기뻐하고, 또 누군가를 실망시키는 걸 두려워한다. H양과 사귀기 이전을 보자. 그는 H양과 썸을 탈 때 다른 사람과 연애 중이었다. 진작 마음이 뜬 관계인데, 그는 '우유부단 서경지부 회장'인 까닭에 순수하게 의무만 남은 연애를 했다. 아니, 연애를 했다기 보다는 데이트에 출석했다고 하는 편이 나을지도 모르겠다.

여하튼 H양은 그 모습을 생중계로 지켜봤기 때문에, 현재 남자친구가 자신보다 다른 것을 우선순위에 두는 것을 보면 덜컥 겁을 먹는다. 오로지 이것 때문인지, 아니면 원래 H양이 가지고 있는 성향인지는 확실하지가 않은데, H양은 오기로 남자친구를 만나기도 한다. 피곤해서 집에서 쉬고 싶음에도 불구하고 남자친구와의 약속을 취소하면 우선순위에서 밀리게 될까봐 억지로 나가기도 하는 것이다. 남자친구에게 일이 생겨 못 보게 되는 날에 더 급격하게 보고 싶어 하는 H양의 태도에 난 고개를 갸우뚱 했다. '보고 싶다'는 마음을 만드는 동력이 애정과 그리움이 아니라 불안과 질투였기 때문이다.

다시 남자친구의 이야기로 돌아와 보자. 남자친구의 '누군가를 실망시키는 걸 두려워하는 태도'는 그의 가족들을 향해서도 나타난다. 그는 데이트를 하느라 주말을 모두 밖에서 보내면 부모님을 실망시킬까봐, 둘 중 한 날은 온전히 가족들과 보낸다. 이건 뭐 가정의 특색이라고 이해하고 넘기더라도, H양과 선약이 있을 때에도 가족이 요청하면 H양과의 선약을 취소해 버리는 건 분명 일반적인 모습이 아니다. 꼭 가족이 아니라 친구나 지인이 요청을 할 때에도 그는 H양에게 양보를 부탁한다.(개인적으로 난 이런 태도가 결혼 후 고부갈등의 촉매가 되며, 지인과 부인을 원수로 만드는 근본적인 원인이라고 생각한다.)

이것 외에도 이 관계의 초점이 나간 부분에 대해 할 말이 A4용지 20페이지는 넘게 남았는데, 전부 다 말했다간 마음 여린 H양이 실신할 수 있으니 이쯤만 하자. 이게 H양이 내게 한 질문

"제가 문제인가요? 그럼 뭘 어떻게 고쳐야 하죠?
오빠가 문제인가요? 믿으면 안 되는 사람인가요?"



처럼 간단한 문제가 아니라는 말을 해주고 싶다. H양은 내게 "무한님이 제 친오빠라면 뭐라고 해주실 건가요?"라고도 물었는데, 거기에 대한 답변을 하며 매뉴얼을 마칠까 한다.


그가 없는 시간도 H양에게 의미 있는 시간으로 만들길 권한다. 현재 H양은 쉴 새 없이 그에게 카톡을 보내고 또 그와 대화하고 싶어한다. H양은 그걸 '오빠를 너무 좋아하기 때문에'라고 말하는데, 미안하지만 여기서 보기엔 그저 도피로 보인다. 카톡대화를 보면 둘은 거의 하루 종일-폰을 손에서 놓지 않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대화를 하던데, 그 빈도로 연락을 주고받으며 '내일의 나'를 돕는 삶을 사는 건 불가능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H양은 현재 시험을 준비 중이라고 했는데, 이대로 계속 지내면

ⓐ수다 떠느라 공부를 못함.
ⓑ공부를 못해서 시험에 떨어짐.
ⓒ시험에 떨어져서 슬프다며 수다.
ⓓ다시 시험을 준비하지만 역시 수다 떠느라 공부를 못함.
ⓔ공부를 못해서 시험에 떨어짐.
ⓕ시험에 떨어져서 슬프다며 수다.



위와 같은 패턴을 반복할 것이 뻔하다. 남자친구와의 카톡방을 자유게시판으로 여기며 계속 가십거리만 올리진 말길 권한다. 첫 마디를 "뭐해?", "보고 싶어."로 연다고 그게 다 의미 있는 대화가 아니니 말이다.

더불어 남자친구와의 연애는 이번 봄까지만 하길 권한다. 봄까지 만나고 헤어지라는 얘기가 아니다. 봄까지 만나보고 괜찮으면 여름까지 만나보고, 또 여름까지도 괜찮으면 가을까지 만나보고 하라는 얘기다. 언제라도 이별이 찾아올 수 있다는 긴장감을 늘 유지해야 한다. 갑갑한 긴장감 같은 건 벗어버린 채 그냥 영원이나 약속받았으면 하겠지만, 긴장감 없는 영원의 약속은 자리 뜨면 사라질 '말'이 될 수 있음을 잊지 말자. H양은 "제가 마음 푹 놓고 이 오빠를 믿어도 될까요?"라고 물었는데, 마음 놓는 순간 H양은 남자친구에게 움직임 없는 정물이 되어버릴 것이다. 거침없이 함께 항해해야 할 시기에 왜 닻을 내리려 하는가. 닻은 그대로 두고 돛을 올리길 권한다.




바쁜 벌꿀은 슬퍼할 시간이 없다(응?)는 말 잊지 마세요. 선유꿀 좋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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