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지에서 만난 그녀, 물리적 거리의 한계 외 2편
영화 <아비정전>에서 장국영은 장만옥에게 부탁한다. 자신의 시계를 1분만 같이 봐 달라고. 시계의 분침이 2시 59분에서 3시로 옮겨가자, 장국영은 말한다.
"1960년 4월 16일 오후 3시, 당신과 나는 1분을 같이 했어.
당신 덕분에 난 그 1분을 기억할 거야.
지금부터 우리는 1분의 친구지. 이건 당신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야.
이미 과거가 되어 버렸으니까."
저걸 장국영과 장만옥만 기억하는 게 아니라, 나도 기억하고 있다. 저 중독성 있는 멘트는 한 번 듣고 나면 잊히질 않는다. 감수성이 풍부한 학창시절에 저 장면을 보게 되면, 어느 사람에게건 나중에 써먹고 싶어지는 충동이 든다. 때문에 내 친구 Y군은, 꼬꼬마 시절 이성과 아무 생각 없이 할 수 있는 일들에 의미를 부여해 상대들의 마음을 자주 흔들곤 했다. 이성과 같이 갔던 곳에서 주운 나뭇잎을 반으로 잘라 코팅한 뒤 서로 간직하는 일이라든지, 상대와 통화를 하다가 지금 달을 보라고 말한 뒤 '우리가 본 같은 달' 따위의 의미를 부여하는 일 등을 하며 말이다.
이렇게 글로 적으니 저 Y군이 행동이 우스꽝스럽게 보일지 모르겠지만, 저 말을 들은 상대는 눈을 감는 그날까지 그 기억을 잊지 못할 것이다. 누군가 내게 전화로 불러준 적 있는 노래를 잊지 못하는 것처럼 말이다. 물론 Y군에게도 허점은 있었다. 너무 많은 이성들에게 온갖 의미를 부여한 까닭에, 나중엔 여의도 가는 83번 버스에 같이 의미를 부여한 게 수경인지 혜진인지 구별을 못 했던 것이다. 뭐, 그러거나 말거나 어쨌든 새로 만나는 이성들은 자신을 특별하게 만들어 주는 듯한 Y군의 속삭임에 대부분 넘어갔다.
장국영과 Y군의 이야기가, P군의 사연을 읽으며 떠올랐다. P군은 해외여행 중 만난 외국 썸녀와의 에피소드를 잊지 못하고 있으며-여기선 P군이 아닌 상대가 위와 같은 분위기를 조성했다- 다시 만나기로 한 그 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자, 출발해 보자.
1. 여행지에서 만난 그녀, 물리적 거리의 한계.
낯설지 않은 스토리다 싶어서 생각해 보니, 이 사연은 영화 <비포 선라이즈>의 흐름과 많이 닮아 있는 것 같다. 거기다 일본의 연애영화에 등장할 것 같은, 상대방이
"이렇게 사진을 찍어두면, 당신을 안 잊어버리겠죠?"
라며 P군의 사진을 찍은 얘기도 마음을 말랑말랑하게 만든다. 우연히 만난 뒤 P군은 상대의 통역을 도와주게 되고, 일본인인 그녀는
"유럽의 저녁이 궁금해요. 같이 가주실 수 있나요?"
라는 부탁 들을 하며 P군과 유럽여행을 같이 한다. 거리에 가로등이 켜지고, 파리 세느강변에서 캔맥주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는 두 사람. 캬아. 그 그림 같은 시간들을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물론 내가 직접 가 본 건 아니라서 그게 그림 같은지는 확실히 모르겠다. 그래도 여하튼 좋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난 파리는 가본 적 없고 파리바게트 옆 편의점에서 캔맥주를 사 친구와 마신 적 있는데, 그것도 좋았다. 뭐 그러니 동성도 아닌 이성과 바게트의 본고장인 파리에서 맥주를 마시면, 대략 말랑말랑한 분위기가 만들어지지 않았겠는가. 이것 말고도 P군의 사연에는 당장 유럽으로 떠나고 싶게 만드는 에피소드가 몇 개 더 있는데, 이걸 다 소개했다간 솔로부대원들이 유럽여행에 대한 큰 환상을 가질 수 있으니 에피소드 소개는 이쯤만 하도록 하자.
"만약 그녀와 연애를 하게 되면 물리적인 거리가 너무 멀고,
만나도 한두 달에 한 번이 한계인 조건이 됩니다.
물론 저는 감당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만….
제가 만약 거기에 머문다고 해도 3~4달 정도가 될 것 같습니다."
난 P군에게, 나중 걱정은 나중에 하고 일단은 당장 그녀와 연락하며 지내라는 이야기를 해주고 싶다. 찬물을 좀 끼얹자면, 둘은 맥주 한 잔 하고 사진 한 장 찍었을 뿐이다. 이런 일은 여행 중 수도 없이 일어날 수 있다. 아직 서로의 생일이 언제인지도 모르는 상황인데 혼자 김칫국부터 마시지 말자. 현재는 그녀가 솔로인지 아닌지도 확실히 모르는 것 아닌가. P군과 나는 당시의 상황이 로맨틱하기에 이걸 연애와 결부시켜서 생각하고 있지만, 뚜껑을 열어보면 그냥 그녀가 자신의 여행기를 쓰기 위해 P군의 사진을 찍었다는 황당한 결과가 나올 수도 있다. 이 이야기는 그녀에게 그냥
"내 여행 중 통역을 도와준 외국인. 코미디언 누구누구 닮아서 한 컷!"
정도의 코멘트 하나로 쓰일 수 있다는 얘기다. 그러니 들뜬 기분을 내려두고 우선 진정하자.
내가 P군이라면 우선 그녀에게 우편물을 받아볼 수 있는 주소를 물어볼 것이다. 그러고는 내가 여행지를 옮길 때마다 그곳에서 팔고 있는 엽서에 편지를 써서 그녀에게 보낼 것이다. 또, 어디를 가든 그녀와 함께 돌아다녔던 곳을 기준으로 하며 비교하는 이야기를 해 줄 것이다. 파리의 아이스크림과 스위스의 아이스크림은 어떻게 다른 지 등의 이야기를 하며 말이다. 그녀라는 한 사람의 독자만을 대상으로 하는 내 여행기를 쓰는 것이다.
더불어 그녀가 한국어를 배우고 싶다고 했으니, 틈이 날 때마다 간단한 한국어 표현들도 알려줄 것이다. 한국의 특산물 치맥(응?)에 대해서도 스토리텔링을 해가며, 치맥의 본고장에 오고 싶어 하도록 만들 것이다. 그리고 그녀가 좀 더 내게 동질감을 가질 수 있도록, 그녀가 하는 행동들을 따라할 것이다. 예컨대 위에서처럼 그녀가 사진을 한 장 찍겠다고 했으면, 나도 그녀의 사진을 한 장 찍겠다고 말하는 것이다. 혼자만 사진 찍힌 뒤 '나 좋아하나? 나한테 관심이 있어서 사진을 찍는 건가?'라며 고민하지 않고, 그녀에게 여러 포즈를 알려준 뒤 같이 사진도 찍었을 것이다. 그걸 볼 때마다 웃음과 함께 내가 생각나도록.
거리가 멀리 떨어져 있지만 함께 있는 듯한 느낌을 가질 수 있도록 만들 수 있는 방법은 많다. 주먹만한 인형을 두 개 산 뒤, 내가 하나 가지고 그녀에게 하나 주면 된다. 그러고는 내가 어디를 갈 때마다 그 인형과 함께 사진을 찍어 그녀에게 보내주는 방법도 있다. 당장 뭔가를 줄 수 없다면 세계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것들에 대한 이야기를 한 후 그것의 꼬리를 잡아 이어가는 방법도 있다. 나라면 오리온자리에 대한 이야기를 상대에게 해준 후 세계 각지에서 찍은 밤하늘의 오리온자리 사진을 보내줄 것 같다.
이렇듯 상대와 링크가 걸리기 시작하면, 그 다음 링크를 또 연결하는 건 보다 쉬워진다. 차근차근 링크를 이어가다 보면 서로는 일상의 '일부'에서 훗날 '전부'가 될 수도 있고 말이다. 그러니 서로 연락도 하지 않고 지내는 지금 상황에서
"가능성이 있어 보이시나요? 어떻게 될 것 같아 보이시나요?"
라며 점 보듯 묻지 말고, 링크부터 걸어보자. 나도 링크가 걸린 이후로는 매일 우편함을 열어보며 혹시 내게 온 우편물이 없는지 기다리고 있다.
"우와, 공쥬님(여자친구)이 손편지 쓰시나 봐요."
그게 아니라 홍콩 딜러가 상품을 우편으로 보내기로 했는데, 홍콩에서 오는 물건은 늘 이런 식으로 늦는다.
2. 무덤덤한 동호회 오빠.
난 요즘 경차를 하나 구입할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다. 사진을 찍으러 다닐 때 짐이 많아지다 보니, 자전거로는 이동하는 것에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그 이전에 스쿠터를 하나 사려고 했었는데, 오토바이는 절대 반대라는 주변의 의견에 밀려 좌절하고 말았다.
차를 사려고 하니 주변에서는 경차보다는 소형차, 소형차 보다는 중형차, 그리고 이왕 살 거면 외국 브랜드의 차량을 구입하라고 말했다. 이것저것 다 따지다 보면 결국 상위기종으로 가야 하는 게 당연한 거지만, 취미생활로 사진을 찍으러 다니느라 외제차를 구입한다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배보다 배꼽이 더 큰 일이었다. 게다가 이전에 차를 몰고 다닐 때에도, 큰 차를 타고 다닌 까닭에 동네에서 잠깐잠깐 움직여도 믿기지 않을 정도로 많은 유지비가 들었다. 바다낚시라도 한 번 갔다 오면, 노량진에서 2박 3일 동안 광어회로만 끼니를 때울 수 있을 정도의 기름값이 들기도 했고 말이다.
여하튼 지금은 경품으로 중형차를 받는 일이 생긴다고 해도, 그걸 팔곤 부담 없이 타고 다닐 수 있는 경차를 구입할 것 같다. 난 큰 차나 외제차가 필요한 게 아니라, 최소한의 비용으로 마음껏 돌아다닐 수 있는 차가 필요한 것이니 말이다.
위에서 말한 내 태도를, L양의 '무덤덤한 동호회 오빠'가 연애에 대해 보이고 있는 것 같다고 나는 생각한다. L양은 주변 사람들에게 칭찬 받을 정도의 미모를 가지고 있고, 또 성공하려는 야망을 가지고 있으며, 스펙 역시 또래의 사람들에 비해 뛰어난 편이다. 자동차로 치자면 7000만원 급의 중형차라고 할 수 있다. 때문에 누군가에겐 분명 얼른 곁에 두고 싶은 사람이다. 하지만 그런 사람을 원하지 않는 그에게는 L양이 그저 부담스러울 가능성이 높다.
이건, 파티에서 주목 받는 걸 좋아하는 여자와 집에서 혼자 프라모델 만드는 걸 좋아하는 남자의 관계 같다고 생각하면 된다. L양은 자신을 좋아하는 남자들이 '불한당'이거나 '쑥맥' 둘 중 하나라서 고민이라는 이야기도 했는데, 그건 주목 받는 걸 즐기는 여자들의 연애패턴이기도 하다. 누군가 저자세로 다가오면 '저게 나를 대하는 남자의 올바른 태도'라고 생각하며 그에게 여지를 주니 금사빠인 남자와 이어지기 쉽고, 누군가가 바람을 잔뜩 넣으며 다가오면 그것 역시 당연하게 생각하며 받아들이니 나쁜 남자를 만나기 쉽다.
L양은 지금도 비슷한 방식으로 상대에게 다가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쪽에서 먼저 이야기를 건 후 상대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질문을 해주길 바라거나, 뭔가를 하고 싶다는 얘기를 살짝 흘린 후 상대가 그걸 받아 쥐곤 같이 하자고 말할 때까지 기다린다. 만남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자신의 의사를 정확히 밝히지 않고 모호한 말을 던진 뒤, 상대보고 의사를 밝히라고 한다. 위에서 말했듯 이런 '미끼 던지는 접근법'은 배고픈 남자에게 잘 통한다. 급한 남자나 쉬운 남자들에게 말이다. 하지만 현재의 상대는 L양이 아쉽지 않은 남자고, 그러다 보니 L양의 이런 훼이크는 혼자 벌이는 일인극이 되어 버리고 만다. 아무 반응이 없자 L양은 뭔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며 혼란스러워 하는 중이고 말이다.
"전 그냥 평범하고 무난한 남자 만나서 남들처럼 평범하게 연애하고 싶은데…."
그러고 싶다면 L양이 평범해져야 한다. 상대를 평범하고 무난한 남자라고 생각하는 만큼, L양 자신도 평범하고 무난하다고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평범한 연애가 가능하다. 하지만 현재 L양은 자신이 특별하다고 생각하고 있고, 그런 와중에 L양이 '평범하고 무난하다'고 여겨지는 남자를 만나 연애하면, 그에게 대접 받고 대우 받으려는 생각밖에 들지 않게 된다.
하나 더. 난 L양에게, L양이 말하는 '애교 섞인 징징거림'과 '능청'을 사용하지 말길 권해주고 싶다. 이렇게 말해서 미안하지만, 그건 철없는 여자아이의 (그게 예뻐 보인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자신밖에 없는)예쁜 짓 같아 보인다. 그 태도는 내려놓고, 사연신청서를 작성할 때와 같은 '본래 L양의 모습'으로 상대를 대하길 권한다. 더불어 현란한 이모티콘과 연속적인 기호들의 사용도 자제하길 권해주고 싶다. 그건 쓰는 사람 본인만 귀엽다고 생각하는 것들이다. 내가 만약 누군가에게
"배고프당. ㅎ_ㅎ 밥 먹었썽? ^*^
으아아앙 나능 꼬기 먹고싶당 ㅠ.ㅠ 꼬기를 달라~달라~ ;("
하고 있으면, 난 저게 귀여워 보일 거라 생각하며 쓰지만, 상대는 나를 좀 모자란 남자로 보게 될 것이다. L양도 이제 20대가 꺾이지 않았는가. 고등학교 졸업할 때 학교에 두고 왔어야 할 표현들을 지금까지 사용하면 곤란하다. 귀여워 보일 거라 생각하며 억지로 꾸미지 말고, 있는 그대로 말하고 표현해 보길 바란다.
다음 모임 전까지 연락을 해봐야 하냐고 물었는데, 그건 권해주고 싶지가 않다. 여기다 밝힐 순 없지만 L양이 움직이려 할 때 상대가 사정 상 거절했으니, 그것에 대한 액션은 다시 상대가 하도록 놔두길 권한다. 밀어내도 다가오는 여자는 '그래도 되는 여자'로 여겨질 수 있으니, 자존심이 가장 필요한 이 시기에 자존심을 지키길 바란다. 평소에 이것 좀 보라며 높게 세운 자존심 늘 보여주다가 이런 결정적인 순간에 허물어 버리지 말고 말이다. 다만, 모임에서 다시 만났을 땐 배우 정우성 실제로 본 것처럼 눈을 빛내며 상대를 대하길 권한다. 그 정도면 충분하다.
3. 원리원칙에 충실한 바른생활 그녀.
리나씨, 혹시 유명한 방송사고 모음 본 적 있어? 그것 중에 현장 연결하다가 실수하는 장면 나오거든. 상대방이 방송 중인 줄 모르고 아무렇게나 대답하는 장면이야.
앵커 - 현장을 연결해서 알아보겠습니다. 김모모 기자.
기자 - 왜?
앵커 - (잠깐의 침묵 후)현장 상황은 어떤가요?
기자 - 몰라.
예의를 갖춰 서로를 대하는 줄 알았던 사람들이, 저런 식의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 게 리나씨에겐 좀 충격적이지? 근데 카메라가 돌지 않을 땐 저럴 수도 있는 거거든. 개그프로그램을 보면 그 사람들은 전부 유쾌할 것 같고, 서로 친하며 늘 개그를 위한 아이디어 회의하고 그럴 것 같잖아. 그런데 그쪽만 하더라도 선후배 위계질서에 대한 이야기, 폭력 이야기, 범죄 이야기 들이 종종 들려오곤 하잖아. 보여 지는 건 보여 지는 거고, 카메라가 꺼진 뒤 그들의 삶은 그들의 삶인 거야.
멀리서 찾을 것 없이, 당장 리나씨 지인들 카스나 페이스북만 봐도 '보여 지는 것'과 '실제'의 차이는 금방 찾아낼 수 있을 거야. 내 지인만 하더라도 호주에 워홀 갔다가 농장에서 일만 하다 돌아왔거든. 그가 꿈꿨던 건 자유롭고 낭만적인 호주여행이었는데, 가서 먹고 살려다 보니 '농장 노예'와 같은 생활을 했다고 해. 물론 그런 와중에 호주의 풍경을 몇 장 사진으로 남겨왔지. 그걸 카스에 올리니까 사람들은 좋아요, 멋져요 버튼 누르면서 부러워했거든. 그림 같은 농장도 보며 여행 한 것 같다면서 말이야. 실상은 포도 따다가 병나서 귀국한 건데, 사람들은 포도가 탐스럽다느니 와인도 즐겨 마셨냐느니 하는 이야기를 했지.
리나씨에게는 '보여 지는 것들'을 가지고 환상을 만드는 문제가 있어. 내가 만약 오늘 임진각까지 라이딩한 글을 올리면, 리나씨는
"우와 무한님 부러워요! 저는 회사에 묶여서 라이딩 할 마음만 가지고 있는데,
실제로 무한님은 자유롭게 다니시는군요. 임진각 풍경도 너무 멋져요!"
라고 할 수도 있어. 그런데 실제로는 라이딩이 그렇게 즐겁지 않거든. 숨이 차오른 상태에서 패달링 하는 게 8할이야. 자전거를 오래 타면 엉덩이와 손목에 극심한 통증도 찾아오지. 몸은 땀으로 축축하게 젖고, 임진각에 도착하면 돌아올 힘이 없어서 기차에 자전거를 싣고 와야 해. 리나씨가 편안하게 책상 앞에 앉아서 사진만 볼 때의 기분으로 관광하듯 다녀오는 게 아니야. 자전거 길도 없는 곳 달리다가 덤프트럭에 치일 수 있는 위험도 있고, 얼굴로 날아드는 벌레와 거미줄 때문에 짜증이 나기도 하지.
누군가를, 혹은 무언가를 동경만 하며 내 현재의 삶은 그것보다 못하다고 침울해 하는 건 바보 같은 짓이야. 사실 리나씨에게는 현실을 바라볼 기회가 많았어. 하지만 리나씨는 그럴 때마다
"저런 사람이랑 말 섞으며 친해질 필요 없다."
"나처럼 생각하는 사람과 잘 지내는 게 낫다."
"저 사람의 행동은 바르지 않으며 지저분하다."
"난 내가 정한 불문율을 어기지 말고 살아야 한다."
라면서 계속 피하거나 눈을 돌려 버렸거든.
"외눈박이 별에서 두눈박이가 된 기분이었습니다.
두눈박이가 정상인데,
외눈박이 별에서는 제가 비정상처럼 느껴지는 그런 감정 말입니다."
걔네는 걔네고, 리나씨는 리나씨야. 여기가 누구네 별이 아니라, 그냥 다 모여서 살고 있는 별이라고. 누군가를 너무 쉽게 혐오하지 마. 완전무결한 사람은 없어. 직장에서 동료 사원들이 수다 떠는 걸 듣다가 리나씨의 생각과 다른 생각을 말하는 사람이 있다고 해서 그를 혐오하지 마. 그게 그냥 농담일 수도 있는 거잖아. 개개인으로 놓고 보면 다 괜찮은 사람들일 수 있어. 그냥 여러 사람 모여 있고 시시껄렁한 이야기도 좀 할 필요가 있으니 장난삼아 "결혼이요? 모르죠. 그때 가서 옆에 있는 사람이랑 해야죠. 하하."할 수 있다고. 저 말 한 마디만 가지고 상대를 외눈박이로 단정 지은 후 앞으로 말도 섞지 않겠다는 다짐 같은 걸 하는 건, 리나씨가 편협한 거 아닐까?
리나씨의 연애도 저 태도의 연장에서 벌어지거든. 리나씨는 상대를 현실에서 알아가지 않잖아. 첫 만남은 현실에서일지 모르지만, 그 이후는 상대의 SNS를 보며 마음을 키워나가지. 위에서 말했듯 이러면 그냥 판타지 되는 거야. 그렇게 짝사랑하다가 마음을 접을 땐 또 어때? 상대가 리나씨의 기준에서 '옳지 않은 말'을 SNS에 적거나 댓글로 남기면 그걸 보고 마음을 접잖아. 이게 뭐야? 그 말 한 마디 때문에 상대도 역시 외눈박이 된 거야?
이미 마음을 접었다니까 이건 살펴볼 필요 없겠지만, 그래도 리나씨를 위한 거라고 생각하며 한 번 들여다보자고.
"저는 엄청 오랜만에 만나는 친구라도, 나랑 안 맞는다 싶거나 대화가 삐걱거리면
연락을 더 안 하거나 몇 번 하다 말고 안 보게 되는 경우가 제법 있거든요.
그 아이에게 제가 더 만나고 싶고 궁금한 사람으로 남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내가 저 위에서 말한 '편협하다'는 말의 뜻은, '한쪽으로 치우쳐 도량이 좁고 너그럽지 못함.'이야. 거기서 벗어나지 못하면 '더 만나고 싶고 궁금한 사람'이 되는 건 불가능해. 이거 지금 고치지 않으면, 운이 좋아 연애를 시작하더라도 분명 이게 다시 리나씨의 발목을 잡을 거야. 훗날 남친의 친구가 혐오스러워지거나, 남친의 가족이 혐오스러워지는 경우가 발생할 수 있거든. 친구나 동료야 안 보고 살면 그만이지만, 리나씨의 연인과 깊은 관계에 있는 사람들까지 안 보고 살 순 없잖아.
나도 리나씨랑 크게 다르지 않아. 비슷한 생각을 한 적 있고, 누군가를 차단해 버릴까 하는 생각도 한 적 있어. 얼마 전에는 조카가 '노트3'으로 폰을 바꾸고 싶어 한다며 친척누나가 이야기해서, 중학생이 좀 저렴한 폰 써도 되는데 왜 꼭 최신폰을 사야 하는 거냐며 내가 뭐라고 한 적 있거든. 그때 누나가 말하더라.
"아직 애잖아."
저렇게, 상대를 위한 변명을 해줄 수 있을 정도로 우리 좀 너그러워지면 어떨까. 내 기준에서 이해하지 못할 일을 한다고 해서 상대와 인연을 끊거나 몰아세우기보다, 좀 더 너그럽게 생각하면 어떨까. 내 기준에 상대가 부합하느냐 아니냐만 재고 있지 말고, 앞으로는 상대의 기준은 뭔지 까지도 살펴보자고. 그게 관심이고 사랑이니까.
어제 쓰다 만 글을 오늘 다시 정리해 올립니다. 세월호 승객 구조작업이 무사히 이루어지길 기도합니다.
▲ 현재 위치에서 절대 이동하지 말라는, 선내가 더 안전하다고 했던, 그 안내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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