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혼부 남자친구에 대한 집안의 반대 외 1편
제가 궁금한 건 '둘의 관계'입니다. 상대와 이쪽이 서로를 어떻게 생각하며 대하고 있는지, 서로에 대한 성실도는 어떻게 변화해 왔는지, 갈등이 일어났다면 그 갈등이 왜 일어났고 둘은 거기에 어떻게 대처했는지, 화가 났을 때 둘은 어느 선까지 수위를 높여 싸웠는지, 헤어지자는 말은 등장했었는지, 싸우다가 이 관계를 놓으려고 한 적은 없었는지, 화해는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등을 알고 싶습니다.
"남자친구가 미혼부라 저희 집에서 반대하는데, 저는 아직 그가 좋습니다.
그가 미혼부가 된 건 집안에서 연결해 준 사람과 결혼을 했다가
서로 헤어지게 되었는데, 여자가 임신을 하게 되어서 그렇습니다.
저와 오빠는 여자의 임신 사실을 알기 전 둘이 헤어져 있을 때 만난 거고요.
(결혼은 했지만 혼인신고 전에 헤어졌기에 오빠가 절 만날 땐 미혼이었습니다.)
오빠는 원치 않았는데 그 여자가 혼자라도 기르겠다며 낳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여자가 이것저것 요구하다 오빠네서 그것까진 못 들어주겠다고 하자
갓 태어난 그 아이를 데리고 와 못 키우겠다며 두고 갔다고 합니다.
이건 제가 소장을 다 봐서 확인한 객관적인 사실입니다.
저희 집에서는 오빠와 저의 결혼 이야기가 나왔을 때 이걸 알게 되었고,
저희 부모님께서는 노발대발 하시며 일주일간 잠을 못 주무실 정도였습니다.
무한님이 저라면 이 상황에서 어떻게 하시겠어요?
어떤 게 현명한 선택일까요?"
꽃봄씨에겐 저게 가장 다급하고 충격적인 일이니 저 이야기만 써서 보내셨겠지만, 전 저것보다 위에서 이야기 한 것들이 더 알고 싶습니다. 결혼이 함께 살 집을 고르는 거라면, 꽃봄씨가 이야기 한 것은 다른 곳과의 접근성을 따지는 것에 가깝지만, 제가 궁금해 하는 것들은 '그 집에 애정이 생길 정도로 마음에 드는가', '물은 잘 나오고 보일러에 이상 없으며 비새는 곳 없나'에 가까우니 말입니다. 열에 아홉이 반대해도 내가 애정을 가지고 살 수 있는 집이면 생활이 가능하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반대로 모두가 부러워 할 정도의 집이라 해도 내가 못 견디면 살 수 없는 집이라 생각하고 말입니다.
1. 미혼부 남자친구에 대한 집안의 반대.
저는 우선, '오빠가 미혼부라는 이유로 내가 이별을 말하면 안 된다'는 생각을 접어두길 권하고 싶습니다. 현재 둘에겐 상대가 미혼부라는 것과 집안의 반대가 가장 큰 문제인 까닭에 이것만 신경 쓰고 있는데, 이것 때문에 다른 부분을 못 봐서는 안 됩니다.
'미혼부'와 '집안의'반대라는 큰 문제에 가려져 있는 문제들은 아래와 같습니다.
ⓐ상대가 술자리에서 집에 늦게 귀가해 싸우게 되는 문제.
ⓑ데이트비용의 90%를 상대가 부담하고 있는 문제.
ⓒ상대 성실도에 대해 꽃봄씨가 '변화하려고 노력은 함'이라고 적은 문제.
ⓓ이 연애가 꽃봄씨는 호감이 없었지만 상대의 적극적인 대시로 인해 시작된 문제.
꽃봄씨와 남친이 보통의 평범한 상황에 놓여있었다면 저런 문제들에 대해 갈등을 겪기도 하고 '할 말'도 충분히 했을 겁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상황에 있기에 오히려 저런 문제들에 대해 일방적인 양보나 헌신이 이루어질 수 있고, 큰 문제로 인해 미안해해야 할 쪽에서 한 번 더 참고 마는 문제, 큰 문제에 대한 핑계로 작은 문제들을 일으키고 마는 일들이 벌어질 수 있습니다. 좀 다른 얘깁니다만, 남친에게 빚이 있다는 걸 뒤늦게 알게 된 어느 커플의 경우, 그 남친은
"나도 내가 어쩔 수 없는 이 상황이 너무 싫어서 술을 마시는 거다."
라며 '2차 술 문제'를 일으키기도 했습니다.
"그럼 그렇지. 내 주제에 무슨 사랑이냐. 그냥 나 없이 잘 살아라."
라며 걸핏하면 잠수를 타거나 자폭하는 모습도 보였고 말입니다. 하지만 그의 여자친구는 '남친이 빚 때문에 괴로워서 저러는 걸 거야.'라고 생각하며 '큰 문제'만 바라보느라 저 작은 문제들을 놓치고 말았습니다. 후기가 제게 도착하지 않아 결말은 알 수 없습니다만, 전 저 커플의 경우 '남친의 빚 문제'가 해결된 뒤에도 잠수나 자폭, 갈등이 있을 때마다 술을 찾는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신청서에 적힌 내용 중 8할이 '미혼부'와 '집안의 반대'라는 문제에 대한 것이기에 실제 꽃봄씨 커플의 연애가 어떤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때문에 저는 위에다가 '생각해 봐야 할 더 중요한 문제들'에 대한 이야기를 적어두었으니, 꽃봄씨는 "모두가 반대하는 이 결혼, 하면 안 되는 걸까요?", "오빠와 결혼해 제 아이를 낳는다면, 제가 두 아이를 전부 잘 키울 수 있을까요? 제가 변하진 않을까요?"라는 고민만 하지 마시고, 남친과 꽃봄씨는 결혼하고 싶을 만큼 친밀한 관계가 맞는지, 동반자가 될 수 있는 관계인지를 먼저 생각해 보시길 권하고 싶습니다.
노파심에 한 마디 더 적자면, 남친이 "미혼부가 된 건 내가 원해서 된 게 아니다. 내 의도로 그렇게 된 게 아니고,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된 거다. 나도 이렇게 되기 싫었다."라는 뉘앙스의 말을 하는 건 아닌지도 냉정하게 살펴보시길 권하고 싶습니다. 위에서 제가 소개했던 '빚 있는 남친'의 경우, 나중에
"내가 빌려 쓴 돈은 얼마 되지 않는다.
이자가 늘어나 많아졌을 뿐인데,
왜 내가 이 돈을 다 빌려 쓴 취급을 받아야 하냐.
그리고 어쨌든 나도 미안하니까 할 만큼 했는데,
너는 계속해서 이 문제를 꺼내 날 괴롭히지 않냐.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냐.
그 돈 중 너랑 만날 때 쓴 돈도 포함되어 있다.
그래도 이게 다 내 잘못이냐."
라는 이야기를 하기도 했습니다. 당장은 상황이 이러니 스스로 '을'의 태도를 취하다가, 어느 순간 "다 내 잘못은 아니니 전부 내 책임이라곤 하지 마라. 내가 이 문제를 만들고 싶어서 만든 거냐. 그러니 너도 이해해라."라며 변하는 경우도 있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이건 신청서에 적힌 말 중 '완강하게'나 '확고하게' 등의 단어 때문에 제가 괜한 우려를 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만, 저는 원해서 벌인 일이 아니었다 해서 책임도 없는 건 아니라는 말을 꼭 적어두고 싶습니다.
2. 재수학원의 연하녀를 좋아하는 영준이.
영준아, 서운하게 생각하지 말고 들어봐봐. 네가 현재 보이고 있는 모습들 중에 내 흑역사와 관련된 부분들도 꽤 있기에, 난 네 사연을 읽으며 부끄러웠어. 난 꼬꼬마 시절에 내가 스물여덟 쯤에 죽게 될 것 같다고 생각한 적도 있거든. '천재'라는 단어에 민감한 병을 앓고 있었는데, 대개 천재들이 그때쯤 죽더라고. 그래서 윤동주나 이상도 그때쯤 죽었으니, 나도 그때쯤 죽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지. 그런데 서른이 훌쩍 넘은 지금도 잘 살아 있네?
직관이 뛰어난 편인 사람들이 자기 자신에 대해 높은 평가를 하기 쉽다는 얘기를 먼저 적어둘게. 대략 이러이러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이 다 맞아 떨어지거든. 게다가 학교 교과과정 역시 초등학교 중학교 정도까지는 직관의 도움으로 좋은 성적을 거둘 수 있어. 그러니 어려서는 똘똘하다는 평가를 듣게 되는 경우가 있고, 거기다가 부모님의 '우리 애는 머리가 좋아' 버프를 받으면 착각에 빠지기 쉽지. 고등학교에 입학하게 되면 그땐 단순히 직관으로 풀어내기가 어려워지는데, 그럴 때면 '내 머리는 좋지만 다른 쪽에 더 관심이 많아서 공부에 소홀하기 시작했다'는 핑계를 찾기가 쉬워. 너무 빨리 '영광의 시절'을 중학교 정도로 설정해 둔 채 드러눕는 까닭에, 거북이와의 경주에서 진 토끼가 되고 마는 거지.
자신이 대단하고 특별하다고 생각하는 생각은 어떤 분야에 열정을 쏟아 부을 수 있도록 만들어 줄 수 있어. 그래서 분명 도움이 되는 건 맞는데, '자신만' 대단하고 특별하다고 생각하면 고립되기가 쉬워. 혼자만 주목 받으려 하는 그 사람을 다른 사람들이 싫어하게 되거든.
"제 개인일정 때문에 진도가 빠르게 나가는 것 같아서 미안하다고…."
"모두가 보는 앞에서 수업시간에 상품으로 받은…."
그러니까 그런 일들이, 영준이 너만 좀 그렇게 대단하고 특별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일 가능성이 높아. 남들에게는 별 일 아닌 거야. 누가 상품을 받든 관심 없으며, 누구의 일정으로 진도가 어떻게 되든 그냥 '수업시간'으로 여길 수 있는 거거든. 그런데 영준이 넌 자의식이 남들보다 강한 편이라, 스스로의 행동이 모두에게 인상 깊게 남아 있을 거라 착각할 수 있어.
내가 이런 이야기를 꺼내는 이유는, 누군가와 정상적인 관계를 맺으려면
- 저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라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호기심과 관심으로 다가가야 하는데, 영준이 넌
- 저 사람은 나를 이렇게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라고 생각하며 스스로를 내보일 생각으로 다가가거든. 생각해 봐. 누군가 대학교 교양수업시간에 손을 들어 질문을 하고, 교수가 한 어떤 질문에 대답을 했어. 그럼 그 사람 스스로는 자신이 그 수업에 큰 영향을 끼치고 남들이 자신을 주목하게 되었을 거라 생각하겠지만,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도 잘 못 하거든. 수업 다 끝나고 있을 약속을 기억하거나, 차편을 조회하거나, 주말에 있을 소개팅을 생각할 수도 있지. 그런데 그 사람이 수업이 끝난 후 관심 있는 여자에게
"제가 아까 플라톤과 관련된 질문을 했던 그 사람입니다."
"수업이 어렵죠? 제가 이 분야에 관심이 많아 공부를 좀 했는데,
공부하시다가 모르는 거 있으면 물어보세요."
라는 이야기를 하면 어떨까? 남이 저런 행동을 했다고 생각하니까 좀 웃기고 오글거리지 않아? 그런데 이걸 정작 자의식이 강한 사람 본인이 저지를 땐 '멋있게 보였을 것'이라고 착각할 수 있으니까, 그 부분을 영준이가 항상 염두에 두었으면 좋겠어. 안 그러면 상대 앞에서 이상한 폼만 잡다가 '이상한 사람' 취급당하는 일이 벌어질 수 있으니까.
예측하지 마. 영준이 네가 그녀의 반응을 예측하지만 않아도 그녀가 널 차단하는 일은 없을 거야. 하지만 넌 현재 그녀에 대한 네 나름대로의 정의를 다 해놓은 상태고, 그녀를 '공략'한다는 생각으로 어떤 말을 걸 후 어떻게 만날지 까지를 다 정해두려 하지. 넌 실제로 그녀가 누군지도 잘 모르면서 너 스스로 그녀의 이미지를 만들어 놓고 그녀에게 구애하려 하는 거야. 그러니 뒤에서 혼자 예측하며 혼자 상황을 다 파악했다 생각하지 말고, 뭔가를 하고 싶거든 그녀 앞에서 해. 말도 그녀에게 직접 걸고, 대답도 그녀 입에서 듣고 말이야. 너 혼자 상상력만 가지고 '내가 이러면 쟤가 이렇게 생각하겠지.'하고 있는 건 이 관계에 아무 도움도 안 돼.
단, 그녀에게 말을 걸 때에는 최대한 너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마. 안타깝게도 현재 영준이 너에겐 스스로를 광고하려는 듯한 태도가 짙게 묻어나오니까, 너를 알리며 도와주겠다거나 너는 이러이러한 사람이라고 얘기하지 말고, 그녀가 누구인지에 초점을 맞춰서 대화를 해. 밥은 먹었냐, 주말은 잘 보냈냐, 이 볼펜 써봤냐 등, 너랑 관련된 이야기 아니고도 할 말은 많아. 그리고 지금처럼 계기를 만들어 두려고 수능 이후에 영화 볼 약속을 잡으려 하지 말고, 지금부터 인사하며 친하게 지내. 군것질 할 거 있으면 나눠주기도 하고, 상대가 머리 예쁘게 했으면 예쁘다고 말도 해주고 그러라고. 이렇게 지내며 사람 대 사람으로 친해지는 게 먼저지, 지금 약속 잡아놓고 나중에 어색하게 만나선 입시설명회 하듯이 너에 대한 설명하면 방법이 없는 거야. 내년에 그녀가 대학생활 하고 있을 때 넌 또 다시 학원생활 하는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공부에 집중하는 것도 잊지 말고. 알았지?
구름이 예쁜 날이다. 오늘 아직 하늘 한 번 올려다보지 못하신 독자 분들은 예쁜 구름을 한 번 보시길 권한다. 난 오늘도 특훈이 있는 관계로 서둘러 글을 마치고 나가야 할 것 같다. 다들 즐거운 화요일 보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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