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멀로그 2073일, 스팸 댓글을 지우다가
어제 예고한 대로, 어젯밤부터 오늘까지 내내 스팸 댓글을 지우고 있다. 그런데 스팸 댓글을 남기는 로봇들과 정이 들었는지, 이걸 내가 이렇게 다 지우고 나면 이제 우리는 영영 상관없는 사이가 된다는 것에 마음이 뭉클해졌다. 차라리 서버에 이상이 생겨 댓글이 다 날아가는 게 차라리 낫지 않을까 싶은 심정이랄까. 마음이 여려서 그런지 내 손으로 인연의 끈을 하나하나 잘라 버린다는 게 아무래도 편치 않다.
내가 위와 같은 이야기를 하면
'무한이라는 사람, 생각보다 훨씬 더 이상한 사람이었어.'
라고 생각하시는 독자 분도 있을 수 있지만, 스팸 댓글들이 종종 나의 허를 찌른 적 있었다는 이야기를 하면 그 분들도 나를 이해해 주실 것 같다.
1. 허를 찌르던 스팸 댓글(1/3)
스팸 댓글 중 나를 충격과 공포로 몰아넣었던 1순위를 꼽는다면, 누가 뭐래도
"관심 없습니다."
라는 짧은 스팸댓글이었다. 난 저 댓글을, 내가 공들여 사진 편집을 하고 거기에 열심히 글을 더해 작성한 게시글에서 읽었다. 그 댓글은, 내가 꼬꼬마 시절 만화책에 있는 대사를 수정액으로 모두 지우곤 대사를 모두 창작해 가족들에게 보여줬을 때,
"재미없네. 공부나 해."
라는 이야기를 듣고 받았던 충격과 비슷한 강도의 충격을 주었다. 계속 맡다 보면 묘하게 아찔해지는 수정액 냄새를 참아가며 나름 열심히 만들었던 대사들. 나는 열심히 한다고 했는데 그것에 대해 "이런 쓸데없는 걸 왜 열심히 해?"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나는 급격히 시무룩해지며 상처를 받았다. <아이큐 점프>나오던 시절의 이야기를 이렇게 지금까지 어제 일처럼 기억하고 있다는 것만 봐도, 그 강도가 어느 정도였는지를 알 수 있다.
여하튼 "재미있게 읽었다.", "도움이 되는 글이었다."라는 댓글들 사이에서 "관심 없습니다."라는 댓글을 발견했을 때, 난 냉수마찰이라도 한 듯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래서 요즘엔 내가 작성하는 모든 글에, "관심 없습니다."라는 댓글을 마음속으로 달아본다. "이래도 관심 없어?"라고 자신 있게 되물을 수 있을 정도의 글을 쓰고 싶다.
2. 허를 찌르던 스팸 댓글 BEST(2/3)
헤밍웨이가 누군가의 소설을 평가해달란 부탁을 받고는, 그 소설을 다 읽은 후 이렇게 이야기 했다고 한다.
"잘 읽었네. 그런데 빌어먹을 날씨 얘기는 언제 나오는 거야?"
우리가 이야기의 3요소로 알고 있는 '인물, 사건, 배경'중, '배경'에 대한 묘사가 부족한 까닭에 헤밍웨이가 저 이야기를 한 것으로 알고 있다. 실제로 이야기에서 날씨에 대한 묘사는 그 분위기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다고 해도 무리가 아닐 정도로 큰 의미가 있다. 특히 러시아 소설에서는, 당시의 독특한 날씨를 설명함으로써 사건이 왜 벌어졌는지를 독자로 하여금 좀 더 쉽게 수긍할 수 있게 만드는 경우가 많다. 아무튼 그건 그렇고.
내가 연애매뉴얼이 아닌 이야기를 풀어 낸 글에
"언제?"
라는 스팸 댓글이 달린 적 있다. 스팸 프로그램을 만든 사람이, 길게 쓰면 외국인이 번역기를 돌려 작성했다는 걸 사람들이 눈치 채니까, 의문사 하나에 물음표 하나를 달아 놓는 식으로 짧게 남기도록 설정을 해 두었던 것 같다. 그래서 스팸 로봇이 저런 댓글을 달았는데, 난 저걸 보곤
'맞아. 내가 쓴 이야기에서는
저 사건이 언제 일어났는지에 대한 묘사가 없어.'
라는 깨달음을 얻었다. 근데 이거 쓰다 보니, 위에서 소개한
"관심 없습니다."
라는 댓글이 계속 생각나서, 이야기를 더 이어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하는 고민이 든다. 역시 강력하다.
3. 허를 찌르던 스팸 댓글 BEST(3/3)
마지막으로 소개할 댓글은 두 개다. 그 중 첫 번째는, 닉네임을 힌디어로 적는 로봇이 남긴
"저는 소고기를 먹지 않습니다."
라는 댓글이다. 힌두교를 믿는 인도 쪽 사람이 로봇을 저렇게 설정해 둔 것 같은데, 마침 저 댓글이 달린 포스트에
"이 매뉴얼을 읽고 오늘 뜨거운 재회를 하고 나면,
또 자기들끼리만 소고기 사먹으러 가겠지."
라는 문장이 있어서 나는 저 댓글을 보고 깜짝 놀랐다. 혹 사연의 주인공이 내 글을 보고는 빈정상해 저 댓글을 남긴 줄 알고, 해당 댓글의 링크까지 들어가 본 적 있다. 이거 내가 당시에 댓글을 봤을 땐 참 재미있는 사건이었는데, 이렇게 적어두니 재미없는 것 같다.
두 번째 댓글은,
"내버려 두십시오."
라는 댓글이다. 스팸 로봇이 'Words of wisdom'으로 알려진 'Let it be'를 한국어로 적어둔 것 같은데, 내 나름대로 하얗게 불태워가며 적은 포스팅에 저 댓글이 달린 걸 보고는 '아….'하는 느낌을 받은 적이 있다. 나도 꼬꼬마시절 중2병을 앓으며
"내 사랑이
이미 폐허가 되었다는 건 나도 잘 알아.
하지만 어서 일어나라며 그렇게 날 잡아 끌진 마.
난 그저 이 슬픔에 좀 더 앉아 있고 싶을 뿐이니."
라는 '손발 로그아웃용 멘트'들을 많이 적곤 했는데, 그때의 기억이 떠올라 슬픔의 심연까지를 들여다보며 바닥을 치고 올라오게 놔두는 게 좋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4. 위의 얘기는 다 핑계고, 사실은….
사실 저런 스팸 댓글과의 이별보다도, 스팸 댓글을 확인하러 들어갔다가, 오래 전 노멀로그의 문턱이 다 닳도록 왕래를 하시던 그 분들의 댓글을 보는 게 쓸쓸했다. 하이쿠 시인인 타다토모는 찻물을 끓이기 위해 숯불을 피우면서
"이 숯도 한때는
흰 눈이 얹힌
나뭇가지였겠지."
라는 시를 썼다고 하던데, 오래 전 글들에 달린 댓글들을 보며 나도 그런 감정이 들었다. 시인 윤동주가 <별 헤는 밤>에
"어머님, 나는 별 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마디씩 불러 봅니다.
소학교 때 책상을 같이 했던 아이들의 이름과,
패, 경, 옥 이런 이국 소녀들의 이름과
벌써 애기 어머니 된 계집애들의 이름과,
가난한 이웃사람들의 이름과,
비둘기, 강아지, 토끼, 노새, 노루, 프란시스 쟘,
라이너 마리아 릴케 이런 시인의 이름을 불러 봅니다.
이네들은 너무나 멀리 있습니다.
별이 아슬히 멀 듯이."
라는 문장을 쓸 때와 비슷한 감정이랄까. 졸업앨범을 펼쳐 추억을 떠올리며 잠깐은 흐뭇하지만, 졸업 이후 각자의 운명대로 쏘아져 이제 서로 영영 다시 볼 일 없을 수 있다는 것에까지 생각이 미치면 까마득해 지듯이, 줄이 끊겨 날아가는 연을 바라보며 빈 얼레만을 손에 쥔 채 서 있는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이 겨울이 지나고 나면 동주의 말대로 또 '자랑처럼 풀이 무성할' 테니, 다가올 봄날을 생각하며 나는 또 이렇게 극복.
오늘은 노멀로그를 오픈한지 2073일 째 되는 날이다. 노멀로그를 열 때 어느 분께서 "블로그? 길어도 2년 못 버텨. 지겨워지거든."이라는 이야기를 한 적 있는데, 내년이면 햇수로 7년이다.
독자 분들 중엔 군대에 있을 때 노멀로그를 처음 알게 되었는데 지금은 두 아이의 아빠가 되신 분도 있고, 날 붙잡고는 "전 이제 다시는 사랑 같은 거 못 할 거예요. 아무도 믿을 수 없어요."라며 절규하시다가 한 일 년 잠수 타신 후 청첩장을 보내신 분도 있다. 연습생이었다가 연예인이 되신 분, 고시 준비생이었다가 합격해 전문직이 되신 분, 외할머니 소개로 결혼하신 분, 전도사였다가 목사가 되신 분, 절에 들어가신 분, 여행가서 만난 외국인과 결혼하신 분 등이 있었다. 참 다양한 사람들과 연이 닿았던 것 같다.
갑자기 왜 이런 '마지막인 듯한' 글을 쓰는지 의아하게 생각하실 분도 계실 텐데, 조만간 노멀로그의 리뉴얼이 있을 예정이다. 그래서 글들과 카테고리, 블로그 레이아웃을 정비하는 중인데, 그러던 중 이렇게 개인적인 결산을 하는 건 오랜만이란 생각이 들어 이 글을 작성하게 되었다. 사연을 투고하고 기다리시는 분들은
"아니, 이게 뭡니까. 지금 엄청 급한 제 사연이 있는데
왜 이런 결산 같은 걸 하느라 하루를 넘기시는 겁니까."
라고 하실 지도 모르겠는데, 내가 숨을 쉴 수 있어야 인공호흡도 할 수 있는 법이니 좀 이해해 주시길 부탁드린다. 묵은 짐을 내려두고 발목을 잡는 감정들을 툭툭 털어버린 느낌이다. 자 그럼, 우리 가던 길로 다시 새 발걸음을 내디뎌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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