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디(애완견 이름)와 산책을 다니다 보면 헌팅(응?)을 자주 당한다.
1.
지난 주 토요일에는 공원에 갔다 돌아오는 골목길에서 어느 아주머니가,
"귀염둥이~ 귀염둥이야~"
하며 내쪽을 보며 소리치고 있었다. 난 내 주변에 누가 또 있나 살폈지만 아무도 없었고, 그 아주머니는 계속해서 귀염둥이를 부르며 내 쪽으로 다가왔다. 얼굴에 함박웃음을 머금은 아주머니는 이산가족 상봉하듯 간디를 와락, 껴안았다. 간디가 놀라서 발버둥을 쳤지만 아주머니는 개의치 않고 쓰나미처럼 간디를 쓰다듬었다.
- 우리 해피가 딱 요만 했거든.
- 아... 네...
- 지금 살아 있으면 열 네살인데...
- 아...
아주머니는 해피라는 이름의 요크셔테리어를 키우셨었고, 아주머니의 말에 의하면 해피는 앉아, 손, 빵, 얼음, 엎드려, 점프, 굴러, 걸어, 넘어, 물어, 터치 등등 모든 명령어를 알아듣는 '천재개'였다고 한다. 하지만 열 살 때 자궁축농증에 걸려서 시름시름 앓다가 세상을 떠났고, 그 이후 아주머니는 작은 개들을 볼 때면 해피 생각이 난다고 했다.
나와 간디는 해피의 명복을 빌어주며 이제 그만 집으로 돌아가려 했지만, 아주머니는 우리를 놔주지 않았다. 아주머니의 아들은 서강대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현대자동차에 들어가 일하고 있으며, 딸은 LG에서 일하고 있고 곧 정규직이 될 거라는 얘기를 해 주셨다. 나와 간디는 다시 한 번 해피의 명복과 아주머니 아들 딸의 안녕을 빌며 집으로 돌아가려고 했지만, 아주머니는 연천 쪽에 사 놓으셨다는 땅 얘기를 하며 나에게 부동산 강의를 해 주셨다.
초반에 해 줬던 리액션이 문제였다는 걸 눈치채곤 고개를 끄덕이는 것도 멈췄지만, 아주머니는 혼자 '응'이나, '어이구' 따위의 추임새를 넣어가며 무아지경에 빠져들고 있었다. 실례를 무릅쓰고 아주머니의 말을 잘라야겠다고 생각한 바로 그 순간, 침몰하는 배로 다가오는 구명보트처럼 내 핸드폰이 "바바 예투 예투 울리에 빙구니 예투 예투 아미나"라며 울었다. 나간지 한참이 되어도 집에 오지 않는 아들을 걱정하는 엄마의 전화가 나와 간디를 구했다.
2.
간디와 산책하는 것이 아직 익숙치 않기에 당황했던 순간도 있었다. 공원 벤치에서 간디는 낮잠을 자고, 난 핸드폰으로 웹에 접속해 놀고 있는데, 이십대 초반으로 보이는 여자 두 분이 내 앞으로 다가왔다. 그리곤 내 눈을 바라보며,
"만져봐도 돼요?"
라고 물었는데, 난 간디와 함께 있다는 것을 잠시 잊고, 순간,
'어..어딜 만진다는 거지?'
라는 생각이 들어 대략 5초 정도 멍하니 있었다. 내 대답이 없자 그 두 여자 분은 머쓱해 하며 "귀엽네."라는 말을 남기고 돌아섰는데, 난 그때서야 만진다는 것이 '간디'임을 깨달았다. 이미 두 여자 분이 돌아선 상황. 만져도 된다는 얘기를 전해주고 싶었지만, 두 여자 분의 뒤통수를 향해 "만지세요."라고 말하면 더 이상할 것 같아서 그냥 가만히 있었다.
- 말을 못하시나봐.
- 응, 그런가봐.
돌아서서 갈 길 가며 소근 거리는 둘의 대화가 들렸다. 난 말을 못 하는 사람으로 오해받은 것 같아 "간디야 일어나, 가자."라고 말하려다가, 더 이상한 사람으로 오해받을 것 같아 그냥 아무 말도 없이 한참을 앉아 있었다.
3.
간디에 대한 주변의 관심이 부담스러울 때도 있냐고 묻는다면, 난 주저 없이 '초등학생들의 관심'은 부담스러운 편이라고 답하고 싶다. 특히 아침산책을 하며 등교중인 초등학생 무리를 만나는 것은 재앙에 가깝다.
"이 강아지 물어요?"
라는 물음에 물지 않는다고 대답하면, 그 순간부터 아이들은 저마다 간디의 앞발, 귀, 머리, 뒷발, 꼬리 등을 잡아 당기며 간디를 예뻐하기 시작한다. 테러 수준의 쓰다듬는 행동에 참여하지 못한 몇몇 아이들은 나에게 목줄을 넘겨줄 것을 요구하기도 한다.
- 제가 끌어 볼래요.
- 안돼.
- 왜 안돼요?
- 강아지는 다른 사람이 끄는 거 싫어해.
- 아저씨가 강아지랑 말해 봤어요?
- 아니. 말을 한 건 아니지만...
- 그럼 끌어 볼래요. 줘 봐요.
- 안돼.
- 왜 안돼요?
- 바..방금 말 해 봤는데, 강아지가 싫데
- 야, 이 아저씨 개랑 말한데~
- ......
위와 같은 대화를 나누다 보면 정신이 혼미해진다. 어서 자리를 피하기 위해 빠른 걸음으로 이동해도 아이들은 소독차를 따라오듯 우르르 달려오며, 저 멀리 있는 친구들에게까지 "야, 여기 강아지 있다."라며 자신들의 세력을 불린다. 그래서 요즘은 "이 강아지 물어요?"라는 질문을 받으면,
"응, 물어. 한 번 물면 안 놔."
이렇게 대답을 해 준다. 그럼 자연히 그 아이는 다른 아이가 접근했을 때 "야, 그 강아지 물어."라고 알아서 경고를 해 주고, 나와 간디의 산책은 편해진다. 종종, "근데 왜 그 강아지가 아저씨는 안 물어요?"라고 묻는 아이도 있다. 그 때는 "내가 더 강하니까."라고 답해준다.
그러니까, 어떤 '계기'만 주어진다면 모두들 말 한 마디씩 나누고 싶은 건 아닐까. 이어폰으로 귀를 틀어 막거나 휴대폰에만 시선을 둔 사람들도 사실 알고보면 누군가와 대화하고 싶은 것이 아닐까. 간디 없이 홀로 나갔다 돌아오는 길에, 그 긴 시간동안 입을 꽉 다물고 있었던 나를 보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 공원에서 강아지 배변봉투와 물티슈 빌려준 것이 계기가 되어 결혼한 커플도 있네요. 추천은 무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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