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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미생활과여행/강아지와고양이

공원을 차지한 일진 애완견들과 아줌마들

by 무한 2010. 12. 12.



북서풍이 불었던 십일월 어느 날의 일이다. 간디(애프리 푸들)를 데리고 근처 공원에 갔는데, 강아지 여러 마리가 잔디밭에서 풀을 뜯고 있었다. 워싱턴에 사는 내 친구 더글라스 윤(한국이름 윤덕구)이 봤다면,

"브라덜, 여기는 양떼목장 입니카?"

라고 물을 정도로 희한한 광경이었다. 녀석들을 자리를 이동할 때에도 일반적인 개처럼 후다다닥, 뛰는 것이 아니라 양처럼 통통, 거리는 느낌으로 움직였다. 그렇게 한가롭게 풀을 뜯고 있던 녀석들 중 한 마리가 우리를 발견하곤 역시 통통, 거리는 느낌으로 다가왔다. 

다른 양, 아니, 다른 개들을 대표해 다가온 그 녀석은 간디의 똥꼬냄새를 맡고 싶어하는 듯 보였다. 개들의 세계에선 똥꼬냄새를 맡는 것이 '통성명'과 같은 일이지만, 난 행여 녀석이 돌변해 간디를 물지 않을까 하는 걱정에 선뜻 똥꼬냄새를 허락하지 못하고 있었다. 바로 그때,

"애기라서 안 물어. 괜찮아."

라는 목소리가 들렸다. 소리가 나는 쪽을 돌아보니 아주머니 네 분이 앉아서 김밥을 먹고 있었다. 난 그 말에 간디를 양처럼 생긴 녀석 앞으로 이끌었고, 둘은 꽤 오랜시간 서로의 똥꼬냄새를 맡았다. 대화가 끝났는지 양처럼 생긴 녀석은 다시 풀을 뜯으로 돌아갔고, 간디는 그 쪽으로 가고 싶다는 듯 나를 잡아 끌었다. 그러나

"공주님이네, 어디 봐봐."

라며 아까 괜찮다는 얘길 했던 아주머니가 다시 말을 건 까닭에, 난 아주머니가 아주머니들이 있는 쪽으로 다가갔다. 간디를 본 아주머니들은 서로 "이리와~" "우쭈쭈쭈"등으로 간디를 불렀고, 간디는 잠깐의 망설임도 없이 순대 간을 쥐고 있는 아주머니에게 꼬리를 치며 달려갔다.

"얘 이름이 뭐야?"

라고 순대 간을 쥐고 있는 아주머니가 묻는 동시에,

"몇 살이야? 아직 한 살 안 됐지?"

라며 아까 괜찮다는 얘길 했던 아주머니가 질문을 던졌다. 그리고 그 두 아주머니는 '여기서의 서열을 잘 파악하고 대답하도록 해라.'라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마치 자대바치 받은 신병에게 김병장이 "담배 피냐?"라는 질문을, 최상병이 "여자친구 있어?"라는 질문을 동시에 던진 것과 같은 상황이었다.

"간디요, 딱 오 개월 됐어요."

위치 선정으로 보아 좀 더 상석에 앉아 있었으며, 순대 간을 공원에 가져와 다른 강아지들에게 먹이고 있다는 사실로 미루어, 순대 간을 쥐고 있는 아주머니의 서열이 위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간디의 이름을 먼저 말하며, 숨 돌릴 틈도 없이 다음 질문에 대한 대답을 꺼내 놓았다. 하지만 서열이 높은 아주머니는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간디 이름에 대한 트집을 잡았다.

"간디? 간디가 뭐야? 잔디로 해 잔디."

눈치를 보던 다른 아줌마들은 "잔디 좋네. 잔디."라거나 "그래. 잔디가 더 예쁘네."라며 최고 서열 아주머니의 말을 거들었고, 심지어 간디를 쓰다듬으며 "잔디야~ 잔디야 손 줘봐. 손."이라는 얘기를 하기도 했다.
 
'이..이름을 마음대로 바꾸고 있어..'

손 쓸 틈도 없이 '간디'는 '잔디'로 바뀌어 불리고 있었다. '잔디'가 원래 이름인 듯 아주머니들은 "잔디 순대 먹을래?"라며 순대 간을 주거나, "잔디 목말라?"라며 물을 주고 있었다. 물론, 간디는 아주머니들에게 폭 안겨서,

"뭐라고 부르던 먹을 것만 주면 되지 말입니다."

라며 이것 저것 받아먹고 있었다. 바로 그 때, 양처럼 풀을 뜯고 있던 개들이 공원 진입로를 향해 일제히 뛰어갔다. 그리고 개들은 모자와 마스크로 무장한 아주머니 한 분과 함께 돌아왔다.

"언니, 늦었네~"

순대 간을 쥐고 있던 아주머니가 '언니'라는 호칭을 쓰는 것으로 보아 모임의 실질적인 리더인 듯 했다. 천천히 이쪽으로 다가온 무장한 아주머니는, 마스크를 벗으며 내 맞은편에 앉았다. 난 별 생각 없이 그 아주머니의 눈을 바라봤는데,

'심연의 눈이다...'

종교에 오랜기간 몸 담고 있거나, 선한 마음으로 오랜기간 살아온 사람들이 가지는 그 눈이었다. 바라보기만 해도 넓은 벌판이 떠오르고, 근처에 강이 흐르며, 적당한 바람이 불고, 강아지풀이 간질이 듯 평화로워지는 눈이다. 무장해제를 한 아주머니는 점퍼를 반쯤 열더니, 그 안에서 작은 푸들 한 마리를 꺼냈다. 간디보다 더 작은 몸집을 가진 그 녀석은 '귀찮게 왜 또?'라는 표정을 한 번 짓곤 다시 품 속으로 들어가려는 듯 아주머니의 점퍼에 머리를 비벼댔다. 난 이때다 싶어 공감대를 형성할 생각으로 말을 꺼냈다.

"걘 몇 개월이에요?"

대답은 심연의 눈을 가진 아주머니 대신, 순대 간을 쥐고 있던 아주머니에게 들을 수 있었다.

"쟤 열 두 살이야. 여기서 제일 이거야. 이거."

아주머니는 엄지손가락을 내 쪽으로 들이밀며 가소롭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곤 묻지도 않았는데 '심연의 눈을 가진 아주머니'에 대한 설명을 늘어놓았다.

"저 언니가, 푸들에 대해서는 다 알아. 계속 푸들만 키우던 언니야. 언니 대화동 살 때 몇 마리 키웠다고 했지? 아무튼 궁금한 거 있으면 저 언니한테 물어봐. 저 언니가 다 아니까."

심연의 눈을 가진 아주머니는 순대 간을 쥐고 있는 아주머니의 찬조연설을 듣곤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다른 아주머니들은 '맞아. 저 언니가 짱이니까 얼른 저 언니한테 물어봐.'라고 질문을 재촉하는 듯한 눈빛을 보내왔다. 뭔가 물어봐야 하는데 별로 물어볼 것이 없었기에 가만히 있자, 심연의 눈을 가진 아주머니가 먼저 '오늘 내가 좀 가르쳐 주마'의 기세로 질문을 던져 왔다.

"쟤 밥을 너무 적게 준 것 같은데. 쟨 밥 얼마나 줘?"

내가 대답을 하기도 전에 이미 다른 아주머니들이 '우와, 아무도 생각 못한 저 부분을 집어내다니, 역시 저 언니가 킹왕짱.'이라는 분위기를 만들며 "맞아. 쟤 굶은 것처럼 먹더라.", "밥을 잘 줘야 잘 크지."따위의 이야기를 해 댔다. 난 순식간에 밥 굶기는 나쁜 견주가 되어 있었다. 어서 정량을 주고 있다고 대답해야 했다.

"한 끼에 25그람씩 주고 있어요. 하루에 세 번 주고요."

내 대답에 아주머니의 눈이 흔들렸다. 다른 아주머니들은 '이십오 그람은 몇 그람인가?'라는 계산을 하는 듯 말이 없었다. 갑자기 찾아온 침묵이 5초를 넘기려 한 순간, 심연의 눈을 가진 아주머니가 주머니에 있던 보온병을 꺼내 뚜껑을 열었다. 그리고 그 뚜껑을 거꾸로 눕히며 말했다.

"이걸로 반."

그 말이 나오기 무섭게, 이십오 그람이 몇 그람인지 계산을 하고 있던 다른 아주머니들이 일제히 입을 열었다.

"맞아. 딱 반만 줘야해."
"더 주면 살쪄."
"수북하게 반 말고, 평평하게 반."


심연의 눈을 가진 아주머니는 보온병을 발명한 듯한 표정으로 그 아우성을 즐기고 있었다. 그리곤 여세를 몰아 다음 질문을 던졌다.

"예방접종은 다 했어?"
"종합하고 코로나는 끝났고, 켄넬코프 한 번 남았어요."

다시 아주머니의 눈이 잠시 흔들렸으나, 당황한 기색을 숨기며 내 대답을 받았다.

"광견병 주사까지 다 맞춰야 돼. 다 안 맞추고 나오면 큰일 나."

다른 아주머니들은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주사 다 안 맞춘거야?", "다 맞고 나와야지. 큰일 나." 등의 이야기를 시작했고, 그 말은 '어느 동물병원이 제일 좋은가.'라는 토론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의사선생님이 어느 대학 수의학과를 나왔느냐는 이야기까지 나왔을 쯤, "내 조카가 수의사. 서울에 큰 병원 있음."이라는 심연의 눈을 가진 아주머니의 발언으로 종결되었다.

더이상 심연의 눈을 가진 아주머니는 내게 질문을 하지 않았다. 다른 아주머니들도 시어머니가 아프셔서 큰일 이라든지, 주말에 서오능 쪽으로 쭈꾸미를 먹으러 갔었는데 거기 쭈꾸미가 킹왕짱이라든지 정도의 이야기만 나누고 있었다. 난 별로 할 얘기가 없었기에 간디를 데리고 옆에 있는 작은 공연장으로 내려가 사진을 찍었다.

공연장에는 높은 계단이 있어 간디가 그 밖으로 벗어나지 못하기에 목줄을 풀어줬다. 간디는 신나서 낙엽을 쫓아다니며 놀았고, 난 그 모습을 찍기 위해 바닥에 엎드려가며 열심히 사진을 찍었다. 십여 분 쯤 사진을 찍었을 때, 갑자기 위쪽 잔디밭에서 풀을 뜯던 녀석들이 일제히 짖으며 공원 진입로로 달려갔다. 무슨 일인가 싶어 쳐다보니, 공원 진입로에 한 아주머니가 슈나우저를 데리고 서 있었다.

"안 물어요. 안 물어."
"안 물어. 그냥 와도 돼. 인사 하는 거야."

슈나우저를 데리고 있는 아주머니가 긴장한 듯 보이자 이쪽의 아주머니들이 소리쳤다. 하지만 아주머니들의 말에도 안심이 되지 않았던지 슈나우저를 데리고 있는 아주머니는 슈나우저를 들어 안은 채 공원 바깥쪽으로 다시 나가 버렸다.

"인사 하는 거라니까 그러네."
"얼굴 도장을 찍어 놔야지."
"초코야, 일루와."

아주머니들은 머쓱한 표정으로 한 마디씩 하며 안타까움을 표시했고,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나에게도 한 마디를 꺼냈다.

"얘들하고 친해져야 여기서 놀 수 있어. 얘들이 여기 다 접수했거든."
"아..네.."

그렇게 공원을 차지한 일진 애완견들과 아주머니들은 매일 오후 두 시쯤 공원에 모인다고 했다. 아주머니들은 아주머니들끼리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강아지들은 강아지들끼리 모여 "우리가 진짜 개친구다."라는 슬로건을 앞세워 풀을 뜯는 것이다. 내일 두 시에 공원으로 오면 어울릴 수 있다는 '스카웃 제의'에, 그 시간에 맞춰서 나오겠다는 승낙을 했다. 굳이 애견카페를 찾아가지 않아도 공원에 나와 간디의 '사회화 교육'을 시킬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일이 생겨 며칠 동안 간디의 산책을 시키지 못했고, 며칠 후 공원에 나갔을 땐 날이 너무 추워서인지 아주머니들이 보이지 않았다. 그 이후로 몇 번을 더 공원에 나가봤지만, 역시 공원에는 아주머니들이 없었다. 장소를 옮겨 다른 곳에서 모이기로 하신 것 같았다.

그 일이 잊혀져 갈 때 쯤, 정발산 쪽에서 약속이 있어 나가는 길에 당시 모여 있던 아주머니들 중 한 분을 길거리에서 만났다. 난 학창시절 선생님을 만난 듯 반갑게,

"어? 안녕하세요!"

라고 인사를 했고, 요즘 다들 뭐하고 지내시냐는 물음을 이어서 던지려 했는데, 아주머니는

"네에."

라는 대답만 하곤 대수롭지 않게 나를 지나쳤다. 날 기억하지 못하는 듯 보였다. 그냥 길 가다 인사성 밝은 청년이 동네 아주머니에게 인사를 한 상황이 되어 당황스러웠지만, 아주머니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빠른 걸음으로 갈 길을 갔기에 나도 그냥 내 갈 길을 갔다. 간디와 나는 탈퇴처리 된 걸까. 날이 따뜻해지면 다시 공원에서 아주머니들과 강아지들을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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